여자의 이를 악물며 그를 노려보는 모습이 강지한을 자극했다. 입술 끝에서 은은하게 미소가 번지며 그 곡선이 매혹적으로 빛났다. 그의 손끝이 여자의 다리 위에서 원을 그리듯 스쳤고 목소리는 낮고 거칠게 흘러나왔다. “심미연 씨, 왜 이렇게 나 쳐다봐? 내가 그렇게 멋있어?”‘말 진짜 뻔뻔하게 하네.’ 심미연을 이를 갈며 남자의 장난치고 있던 손을 잡아 확 꼬집었다. ‘이미 전남편 전처인데 왜 자꾸 이렇게 은근슬쩍 다가오는 거지? 예전엔 강지한이 이렇게 뻔뻔한 사람인 줄 몰랐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생각했다.‘이 여자 진짜 손끝이 세네.’ ‘너무 아프잖아!’ 하지만 손이 아파도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강준형은 그릇에 국을 담아 심미연 앞에 놓으며 그녀가 화가 나 얼굴이 빨개진 모습을 보고는 강지한을 만나고 싶지 않아 하는 줄 알았다. 그는 강지한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며 다그쳤다. “빨리 먹고 가! 여기서 방해하지 말고.”그는 그저 심미연이랑 조용히 식사하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는 강지한이 왜 갑자기 나타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강지한이 지금까지 심미연에게 상처를 준 모든 일을 기억했다. 그런 사람을 절대로 도와줄 리가 없었다. “할아버지, 저야말로 당신 친손자잖아요! 쟤는 남인데 왜 저 대신 쟤를 도와주는 거예요?” 강지한은 말하면서도 손과 발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심미연을 괴롭히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예전에 심미연이 눈앞에 있을 때는 그녀가 따분하고 거슬린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오후 집에서 혼자 한나절을 보내니 집안이 텅 빈 것처럼 공허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강준형을 찾아가 심미연을 설득해 다시 돌아오게 하는 방법을 고민해 보려 했는데 여기서 그녀를 뜻밖에 마주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근데 할아버지도 참. 심미연만 불러서 밥을 먹자고 하고 정작 친손자인 나한텐 말 한마디도 없으시네.’‘편애도 정도가 있지. 이건 뭐 너무 티 나는 거 아니야?’ 강지한이 그렇게 웃는
“할아버지, 이노하이브 주식 1%를 심미연에게 다 주셨잖아요. 심미연이 할아버지를 돌보는 게 뭐가 문제에요.” 강지한이 당당하게 말했다. ‘돈이면 뭐든지 해결된다고 하지 않았나?’ ‘심미연은 돈을 받았으니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해야지.’“난 미연이에게 주식을 줬을 뿐 거기서 아무런 보상도 바란 적 없어!”강준형은 화가 나서 강지한을 한 대 쥐어박고 싶을 정도였다. 지난번에 때린 게 너무 약했던 것 같다. ‘그때 좀 더 세게 때려야 했는데!’ 심미연은 강지한을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이미 이혼했잖아. 이제 지한 씨가 좋아하는 사람 데려와서 할아버지 돌보면 되겠네.” 예전에는 강지한과 이혼한다고 생각하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었다. 하지만 이제 정말 이혼하고 나니 슬픔은커녕 오히려 그를 조롱하며 웃을 수 있었다. ‘사랑하지 않으니 이렇게 평온하고 차분해지는구나.’ 강지한의 얼굴이 바로 굳어졌다. “이혼하자고 고집한 사람은 너잖아! 다른 남자랑 애매한 관계를 이어갔던 것도 너고. 지금 와서 나한테 뒤집어씌우겠다는 거야? 심미연, 진짜 대단하다.” “그만 먹고 빨리 나가! 계속 말하면 누가 밥 먹을 기분이 나겠어.”강준형이 화가 나서 얼굴이 새파랗게 변하며 강지한에게 소리쳤다. ‘자기 잘못으로 이 가정을 깨놓고 이제 와서 모든 잘못을 미연이에게 돌리다니.’‘한심한 놈.’심미연은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왜 온지유가 몇 개월째 임신한 일은 말 안 해?”‘이 결혼이 끝난 게 그의 외도 때문 아니었나?’‘왜 이제 와서 모든 걸 내 탓으로 돌리냐고.’“우리 사이의 일을 왜 온지유를 거론하는 거야?” 강지한은 기분이 나빴고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여자는 왜 자꾸 온지유 얘기만 하는 거야.’ 강준형은 냉소를 흘리며 말했다. “미연이에게 얘기하지 말라고 할 거면 너도 미연이가 다른 남자랑 뭔가 있었다고 떠드는 거 그만둬. 강지한, 오늘 여기서 말하는데
강준형의 목소리를 듣고 심미연은 잠시 멈칫했다가 바로 그 말속의 뜻을 알아차리고 급히 고개를 떨구며 테이블 아래로 시선을 내렸다. 강준형의 발이 그대로 그녀의 발밑에 있었다. 조금 전 너무 화가 나서 어느 방향인지 신경 쓸 여유도 없이 그냥 밟아버린 것이다. “할아버지, 죄송해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심미연은 계속해서 사과의 말을 했다. “다 네 탓이야. 흥!”강준형은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이미 다 이해하고 있었다. 그도 젊었을 때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두 사람을 다시 엮는 건 원치 않았기에 강지한에게 화를 내며 말했다. “할아버지, 너무 편파적이세요.”강지한은 내내 기분이 불쾌했다. ‘예전엔 나랑 심미연을 이어주려고 애쓰지 않았나?’‘왜 오늘은 입도 떼지 않으시지?’ “밥 먹자.”강준형은 두 사람을 한 번 훑어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강지한도 지지 않으려는 듯 심미연을 단단히 쏘아보고 있었다. 심미연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숙여 밥에 집중했다. 강준형은 다시 강지한을 쳐다보며 말했다. “밥 먹어!”강지한은 할 수 없이 고개를 숙여 먹기 시작했다. 한 끼 식사가 끝날 무렵. 정교한 식기들이 살며시 부딪쳐 미세하고 맑은 소리를 냈다. 강준형은 잠시 심미연에게 시선을 두었고 그 눈빛에는 깊은 응시와 기대가 섞여 있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선 후 심미연의 어깨를 가볍게 톡 치며 말했다. “미연아, 나랑 서재에 가자. 얘기할 게 있어.”그리곤 두 사람은 계단을 올라갔다. 강지한이 일어나려던 찰나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폰을 꺼냈고 화면에 떠오른 온지유의 이름을 보고 잠시 고민하다가 결국 전화를 받았다. 즉시 온지유의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에는 후회와 무력감이 가득했다. “지한 씨, 미안해... 내가 그런 말을 라이브 방송 중 인터뷰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게 아니었어. 그 후에 생길 일들은 전혀 생각 못 했어. 제발 용서해줘...” 그녀는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
옷을 하나씩 입어보고 다시 벗으면서 시간은 서서히 흘러갔지만 온지유의 마음은 전례 없는 채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그녀는 강지한을 만나야 했다! 그 어떤 때보다 간절하게! 서재 안은 어둡고 조용했다. 조명이 흐릿하게 비추는 고풍스러운 가구들 위로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공기 속에는 짙고 무거운 역사의 향기가 배어 있었다. 심미연은 넓은 책상 앞에 서서 두 손을 자연스레 교차시킨 채 눈빛은 혼란과 긴장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강준형은 천천히 일어나 뒤에 있는 오래된 나무 장롱에서 정교한 작은 상자를 꺼내었다. 상자의 표면은 살짝 청동빛을 띠고 있었고 가장자리에 섬세한 연꽃 문양으로 새겨져 있었다. 마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를 속삭이는 듯했다. 그는 상자를 조심스럽게 심미연의 떨리는 손에 놓았다.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는 그의 손은 오히려 더욱 강하고 엄숙하게 느껴졌다. 잠시 목을 가다듬은 뒤 강준형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건 강지한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물건이야. 이 집에 그리고 강지한에게 남긴 유일한 물건이지. 이걸 네게 전하는 이유는 강지한 대신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동시에 그녀의 죽음의 진실도 밝혀 주길 바란다.” 강준형의 목소리는 낮고 무게가 실려 있었으며 묵직한 울림을 주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마치 거대한 망치처럼 심미연의 마음을 강하게 치는 듯했다. 심미연은 손에 쥔 상자를 내려다보며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일렁였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강준형을 바라보며 눈빛 속에 의문과 불안이 가득 차올랐다. “왜... 왜 저한테 주세요?” 그녀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렸고 마치 자신이 이 막중한 책임을 맡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아연하기까지 했다. 이건 다름 아닌 강지한 어머니와 관련된 일이었으니까! 강준형은 긴 한숨을 내쉬며 눈빛이 점점 더 깊고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그는 오랜 시간 감춰왔던 이야기를 천천히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강지한의 어머니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녀는
“미연아, 이렇게 부탁하는 게 너한테 참으로 미안한 일이란 건 알아. 하지만 말이다. 나도 나이가 많고 몸도 예전 같지가 않아. 언제 잠들어서 다시는 못 깨어날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강준형은 말하며 눈가가 붉어졌다. 심미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손에 든 상자를 무의식적으로 더 꼭 쥐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할아버지께서는 꼭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장수하실 거예요!” 강준형은 잔잔히 웃었다. “이 나이 먹도록 살아보니 이제는 생사에 연연하지 않게 됐단다. 내가 떠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고 네 인생을 잘 살아.” 그는 심미연에게 너무 많은 빚을 졌다. 그 빚을 갚고 싶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남은 시간 동안 그녀가 아끼고 사랑받으며 살길 바랐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바람이었다. 심미연은 강준형의 미소 띤 얼굴을 바라보다가 불안함이 스쳐 지나갔다. 어쩐지 그의 모습에서 마지막 유언을 남기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할아버지...”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려는 순간 핸드폰 벨 소리가 울렸다. 심미연은 하던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미연아, 어디야? 내가 데리러 갈까?” 박유진의 목소리가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들려왔다. “나 차 갖고 나왔어. 데리러 안 와도 돼. 고마워.” 말하는 내내 심미연의 미간은 부드럽게 풀어져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준형은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보아하니 강지한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였다.하지만 이건 다른 사람 탓할 것도 없고 전부 강지한이 자초한 일이다. “나한테 굳이 예의 차릴 거 없어.” 박유진은 가벼운 웃음과 함께 말했다. “그래. 그럼 일 봐. 내일 다시 연락할게!” 사실 그는 하루 24시간을 다 써서라도 심미연을 보고 싶었고 그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이전에는 심미연이 이혼하지 않았기에 마음속으로만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심미연이 이혼했으니 그
‘그냥 묻지 않는 게 나을지도.’ 나중에 아이가 태어나면 그는 분명히 알게 될 테니까. 강준형의 말에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손끝을 꽉 움켜쥐었고 손에 쥔 상자가 손바닥을 아프게 찔렀다. ‘혹시 할아버지가 임신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걸까?’ “괜찮아. 내가 묻지 않은 걸로 하자.” 강준형은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더 이상 강요할 수 없었다. 강준형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실망감에 심미연은 마음이 무거웠다. 입을 열려 했지만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녀는 하려던 말을 삼켜버리고 말했다. 강준형은 얼굴을 굳히며 차갑게 물었다. “누구냐?”“저예요.”문밖에서 강지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심미연은 강준형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아버지, 그러면 저는 먼저 갈게요.” 그녀는 몸을 돌려 밖으로 걸어갔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집에 도착하면 꼭 연락해. 아니면 걱정되니까.” 강준형은 그녀를 붙잡을 수 없어 그냥 보내주기로 했다. 심미연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나갔다. 문이 열렸다.심미연은 고개를 숙인 채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에 쥔 상자를 더욱 단단히 움켜쥐고 급하게 앞으로 걸었다. “심미연, 나 못 봤어?”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꽉 잡아당기며 말투가 썩 좋지 않았다. 심미연은 발걸음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불쾌한 감정이 역력했다. “왜 이렇게 아프게 잡아!” 강지한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손을 풀어주었다.“심미연, 우리 얘기 좀 하자.” 남자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함이 묻어 있었다. “나 피곤해. 내일 얘기할 수 있을까?” 강준형이 말한 강지한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며 지금 강지한을 마주하니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일이면 괜찮을 것이다. “너 아픈 거야?” 강지한은 그녀의 얼굴이 좋지 않은 걸 보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주 건강해. 아프지
잠시 후 그녀는 메시지를 열었다. 그 안에는 온지유의 셀카 한 장이 담겨 있었다. 셀카 뒤로 보이는 뒤편 벽에는 예전에 그녀가 사람을 시켜서 합성한 강지한과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결혼사진을 걸었을 당시 강지한은 비웃으며 조롱했었다. 그녀는 그저 그와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고 그의 조롱 따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의 고집으로 그 사진은 3년 동안 그대로 벽에 걸려 있었다. 이사를 할 때 서두르다 보니 사진을 내려서 없애는 걸 깜빡했다. 이혼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온지유가 벌써 그 집에 들어갈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정말 성급하기도 하네.’그런데 아까 본가에서 밥 먹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무례한 장난을 쳤었다. ‘재밌네.’그녀는 이제 강지한에 대한 감정은 모두 놓아버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 사진을 봤을 때 아마 속이 뒤집혔을 것이다. 사진을 지우려던 찰나 온지유의 전화가 걸려 왔다. 심미연은 온지유가 단지 자신에게 자랑하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강지한에게 더 이상 마음이 없는 그녀는 그와 온지유의 일에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온지유 같은 아무런 자존심도 없이 끝까지 낮아지는 사람은 정말로 그녀의 세계관을 새롭게 만들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온지유의 메시지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섹시한 속옷 차림의 사진이었다. 심미연은 전에 한 번 그런 걸 샀던 기억이 났지만 그걸 어디다 버렸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떠오르자 심미연은 강지한에게 선물했던 그 넥타이를 떠올렸다. 아마 아직도 옷장에 있을 거다. 온지유가 전화를 받지 않자 그녀는 한 장 한 장 점점 더 노골적인 셀카를 계속 보내왔다. 심미연은 속으로 잠깐 욕을 뱉고 그 사진들을 바로 강지한의 이메일로 보내버렸다. ‘둘이 진짜 끼리끼리네.’ ‘앞으로 둘이 평생가라! 서로 다른 사람 건드리지 말고!’사진을 보내고 난 후 심미연의 기분이 한층 나아졌다. 심미연은 잠도
신하린은 심미연이 걱정되어 이진영이 소개팅 간 일은 잠시 잊어버렸다. 심미연은 전화를 끊자마자 급히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신하린을 기다렸다. 신하린은 전화를 끊고 서둘러 옷을 갈아입은 뒤 급하게 집을 나섰다.문을 열자마자 그녀는 익숙한 남자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어디 가려고?” 남자는 얼굴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물었다. 신하린은 고개를 푹 숙이며 그를 보지 않았다. “지금은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 돌아가요.” 어떤 일들은 시간을 두고 혼자 차분히 생각할 필요가 있었다. “신하린, 지금 나한테 성질부리는 거야?” 이진영의 말투는 썩 좋지 않았다. “네가 날 떠나라고 말해준 게 아니야!” 신하린은 고개를 들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럼 당신 말은 그 여자랑 함께한 후에도 날 놔주지 않을 거라는 거예요?” 이진영은 그녀에게 내연녀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고 부끄럽지 않냐고 비난받게 만들고 싶어 했다. ‘이 남자한테는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였던 걸까?’“네 존재는 나와 그 여자 사이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았어. 우린 예전처럼 살 거야.” 이진영의 말은 정말 역겨울 정도였다. 신하린은 그의 눈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심장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난 당신들의 관계를 망치는 게 아니라 그 사이에 끼어드는 거라는 말이죠?”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얼굴에는 비웃음이 섞인 냉소가 떠올랐다. “내가 그렇게 하찮고 비열하게 보여요?” 신하린은 이진영을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자신을 무시하고 천하게 생각하는 말을 들으니 가슴 깊이 상처를 받았다.“나랑 그 여자는 단지 상업적인 결혼일 뿐이고 감정 같은 건 없어. 왜 그렇게 질투를 해?” 이진영은 도대체 왜 신하린이 그들 사이의 관계에 집착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그들은 이렇게 몇 년 동안 잘 지내지 않았나? 신하린은 더 이상 그와 대화하고 싶지 않아서 단호하게 말했다.“지금 미연이 찾으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