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한은 그녀를 정말 마음대로 쥐고 흔들 수 있는 장난감이라도 된는 것처럼 생각하는는 것 같았다. 원하면 가지겠고 필요 없으면 버리고. “네가 동의하지 않아도 상관없어. 난 최고의 변호사를 써서 아들을 빼앗아 올 거니까. 심미연, 그때 와서 나한테 구걸하지 마.” 강지한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심미연은 이미 임현에게서 강지한이 자신을 상대로 소송을 걸어 아들 심태하의 양육권을 빼앗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듣게 되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강지한은 어떻게 이렇게 무자비할 수 있지?’ ‘정말 한 점의 인간미도 없네.’“강지한, 너랑 이혼하고 나서 낳은 아이야. 너랑은 아무런 상관도 없어.” 심미연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며 분노 어린 시선을 꽂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는 강지한이 온지유때문에 자신을 얼마나 괴롭혀왔는지 수많은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는데도 이 남자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나랑 상관있는지 없는지는 친자 검사를 하면 바로 나오겠지. 심미연, 못 하겠어?” 강지한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이미 그는 심태하가 자신의 아들이라는 걸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건 어떻게든 아들을 자기 품에 데려오는 것뿐이었다. 아들만 손에 넣으면 심미연도 결국 그의 뜻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내 아들이야. 네가 무슨 자격으로 친자 검사를 하겠다는 거야?” 심미연은 싸늘하게 웃으며 쏘아붙였다. “그렇게 친자 검사가 하고 싶으면 차라리 집에 가서 네 딸 샘플이나 가져와서 해보는 게 어때?” 이제야 그의 역겨운 속내를 똑똑히 알게 되었다. 그걸 알고도 가만히 있을 이유는 없었다. 이런 문제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했다. 강지한의 표정이 굳었다. 그가 3년 동안 키운 딸이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아이의 친부모를 찾으려 하거나 친자 검사를 해본 적이 없었다. 그 아이는 애초부터 그가 주운 아이였고 자신의 친딸이 아니라는
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움켜잡고 들어올렸다. 그 순간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끔찍한 흉터가 눈에 들어왔다. 마치 벌레처럼 비틀어진 그 흉터 자국이 손목에 깊숙이 새겨져 있었다. 강지한의 동공이 급격히 수축했다. “이게 무슨 일이야?” 그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머릿속에 억지로 떠오른 장면이 하나 있었다. 강지한은 온몸에 식은땀이 흐르며 심장이 터질 듯 뛰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심미연은 재빨리 손을 빼고 소매를 잡아당겨 흉터를 가린 뒤 다시 한 번 차갑게 얼굴을 굳혔다. “너랑은 상관없어.” 그 흉터는 그녀가 깊은 우울증에 시달리던 시절 자해의 흔적이었다. 당시 너무 많은 피가 흘렀고 만약 제때 구출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이미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 해 그녀는 여러 번 자살을 시도했다. 그리고 매번 그녀를 구해준 사람은 박유진이었다. 그녀는 박유진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박유진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다시 살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오직 박유진과 함께 평온한 삶을 살아가고 싶었다. “심미연, 넌 내 여자라는 걸 잊지 마. 당연히 내가 너를 신경 써야지.” 강지한은 그저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의 논리 속에서 심미연은 그와 결혼하고 함께 잠자리를 가졌으니 평생 그의 것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다른 남자가 꿈꿀 자리는 없었다. 방금 전의 감정이 격하게 흔들린 탓에 심미연은 점차 기운이 빠지고 있었다. 더 이상 강지한과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았다. “가서 꿈이라도 꾸던가.” 그 말을 남기고 심미연은 사무실을 박차고 나갔다.“성 비서가 레스토랑 예약했어. 같이 가자.” 강지한이 뒤에서 큰 소리로 말했다. “심미연, 넌 도망칠 수 없어. 돌아왔으면 내 곁으로 돌아와서 다시 함께 살아야지.” ‘박유진과 함께 있겠다고? 그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을 거야.’ 심미연은 발걸음을 더욱 재촉했다. 그녀는 이곳을 떠나고
심미연이 방금 한 말이 갑자기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 딸이 점점 자신을 닮아가는데 이건 아마도 그 아이를 자신이 키우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 사이에 혈연 관계가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예전엔 왜 이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네. 알겠습니다.” 성무진은 무슨 말인지 잘 몰랐지만 그저 더 이상 묻지 않고 강지한이 시키는 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강지한은 전화를 끊은 뒤 차를 몰고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박시훈은 조금 늦게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강지한은 이미 두 잔의 술을 홀로 마신 상태였다. 박시훈을 보자 강지한은 옆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앉아. 할 말이 있어.” 박시훈은 가슴에 손을 얹고 저항하며 말했다. “지한아, 우리 이렇게 친한데 그건 좀 아니지 않아?” 그는 자신의 성향이 바뀔까 봐 두려웠다. “앉아!” 강지한은 짜증이 난 듯 목소리에서 압박감을 느낄 수 있었다.박시훈은 몸을 살짝 떨며 조심스럽게 강지한 옆에 앉았다. 그의 엉덩이를 살짝살짝 의자 가장자리로 밀어냈다. 강지한은 그런 박시훈의 모습을 보고 짜증이 더욱 커졌다. “박시훈, 제발 좀 정상적으로 행동해.” “난 정상인데 너가 이상한 거지.” 박시훈은 속으로 생각했다. ‘너야말로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어 보여.’ “그만해. 이제 입 닫아!” 강지한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쳤다. 박시훈은 손으로 입가에 지퍼를 닫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말해 봐.”그 목소리는 코로 나는 듯 매우 이상하게 들렸다. “당시 상미가 어디서 태어났는지 확인해봐. 정확한 출생일도 알려줘.” 그는 그때 문소영과 심서연이 말한 것만 믿고 너무 쉽게 넘어갔다. 사실 처음부터 조사를 했어야 했다. “상미의 출생에 의문이 드는 거야?” 박시훈은 강지한이 자신에게 손대지 않을 거란 확신이 들자 조금 더 용기가 생겼다. 강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이제서야 깨달았냐? 벌써 3년이나 지났는데 반응이 너무 느린
강지한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왜 그 여자한테 물어봐야 해? 이런 건 내가 결정하면 되는 거지.” 그는 자신이 내린 결정을 누구도 반박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심미연이 낳은 아들은 결국 그의 아들이고 자신은 아이의 친아빠니까 심미연은 당연히 그와 함께 있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뭐?” 박시훈은 입을 크게 벌리며 충격을 받았다. 그 입이 너무 커서 닭알 하나 정도는 거뜬히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강지한이 이런 말을 하다니...’ 외부인인 그가 듣기에도 분노가 치밀어 오를 정도였는데 심미연이 들으면 얼마나 화가 날지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입 그렇게 크게 벌리고 뭐 하는 거야. 닫아!” 강지한은 박시훈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그 후 젓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들며 무심히 덧붙였다. “상미의 친부모는 빨리 찾아야 해. 찾으면 그들에게 돈이라도 줄 생각이야.” 강상미는 그가 정성껏 키운 아이였다. 비록 강상미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더라도 그는 그 아이를 절대 떠나보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의 친부모가 그때 상미를 버렸다면 이제 와서 그 아이를 찾을 리가 없을 거다.“알겠어. 내가 알아봐 줄게. 하지만 충고 하나 하자.” “네 전처, 이제 예전처럼 너한테 목매는 여자가 아니야. 지금 그 여자에겐 회사도 있고 로펌도 있어. 물론 자산 규모로만 보면 너와 비교가 안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제 그녀는 충분히 강한 사람이 됐어.” 그는 말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니 네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박시훈은 오랫동안 강지한과 협력하며 지냈고 둘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만약 그들 사이에 심미연이 없었다면 그 관계는 앞으로도 계속 유지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 강지한이 심미연을 되찾으려 한다면 그는 주저 없이 심미연의 편에 설 것이다. “그 여자가 아무리 강해졌다 한들 나만 하겠어?” 강지한은
그는 심미연에게 강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곤란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태하가 시끄럽게 굴면 아버님, 어머님이 제대로 쉴 수 있을까?” 심미연은 아들의 성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 그를 귀여워해 주면 태하는 아무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방방 뛰어다닌다. “걱정 마. 아무 일 없을 거야.” 박유진은 부드럽게 심미연을 안심시켰다. 박유진의 말을 듣고 심미연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위치 보내줘. 내가 차로 갈게. 도착해서 만나자.” 박유진은 잠시 침묵한 뒤 알겠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박유진은 곧바로 위치를 보냈다. 심미연은 곧장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가벼운 메이크업을 마쳤다. 능숙하게 준비를 끝내며 외출 준비를 마쳤다. 박유진이 보낸 위치를 따라 심미연은 차를 몰고 산장에 도착했다. 차가 입구에 다다르자 입구에서 차량을 멈춰 세웠다. “안녕하세요. 손님, 회원 카드 부탁드립니다.” 심미연은 이 산장이 회원 전용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창문을 내리고 물었다. “지금 회원 가입을 할 수 있을까요?” 경성에 살고 있고 앞으로 자주 올 것 같아서 회원 가입을 하면 편리할 것 같았다.그때 귀에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풍림산장의 회원 연회비가 1억 원이 넘는데 심미연 씨는 그 정도 돈이 있나?” 심미연은 고급 브랜드로 치장한 여자를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쳐다봤다. 온지유의 가장 친한 친구 한서윤이었다. 예전에 온지유에게 무슨 일이 있으면 항상 제일 먼저 등장하던 사람이었지만 심미연은 그녀를 한 번도 신경 쓴 적이 없었다. 마주쳐도 아예 모른 척하며 항상 그녀를 무시했다.“너 강지한 씨 찾으러 온 거지? 몇 년이나 죽었는데 아직도 미련 못 버리다니. 진짜 역겨워.” 한서윤은 심미연을 쓰레기라도 보는 듯한 눈초리로 쏘아봤다. 심미연은 그 여자의 악의적인 기운을 똑똑히 느꼈고 아름다운 도화 같은 눈으로 그녀의 얼굴을 차분히 응시했다. 그 순간 머릿속에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정말 이렇게 기가 막히게 잘 맞아떨어질 수가 있나.’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두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한서윤은 남자를 보고 눈물을 주르르 흘리기 시작했다. “현성 오빠, 심미연 씨가...” 조명이 그녀의 얼굴을 비추자 한서윤은 마치 가련한 여인처럼 보였고 보는 이로 하여금 마음이 약해지게 했다. “일어나서 말해.” 육현성이 살짝 몸을 굽히며 손을 내밀었다. 한서윤은 망설임 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육현성이 온지유에 대한 깊은 감정은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예전에는 온지유가 부러웠다. 강지한은 온지유의 말이라면 다 들어줬고 육현성 역시 그녀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오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렇게 뛰어난 남자들이 모두 그녀 주위를 맴돌며 정말 행복해 보였다. 육현성은 한서윤의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켰다. “먼저 들어가.” 그 말은 한서윤에게 한 것이었다. 한서윤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고 입술을 깨물며 그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마치 무엇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했다. “유성 오빠, 오빠랑 같이 들어가고 싶어요.” 심미연은 두 사람의 쿵짝에 관심이 없었고 회원 가입을 하러 갈 준비를 했다. 그때 육현성의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심미연 씨, 잠깐만요.” 심미연은 입술을 살짝 깨물며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봤다. “뭐죠?” “일이 있어요.” “미안해요. 지금 바빠요.” 심미연은 육현성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온지유를 향한 무조건적인 헌신. 온지유가 저지른 큰 죄를 알고도 그녀를 해외로 보내기 위해 발버둥치는 그 모습. 그런 사람은 확실히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만약 이런 사람이 심미연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그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현성 오빠, 심미연이랑 무슨 얘기 하려고요?” 한서윤은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혹시 육현성도 심미연을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아니야?’ 육현성은 얼
그때 온지유에 대한 범죄 증거를 수집했을 때 그녀의 충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평소 강지한 옆에서 부드럽고 약한 모습을 보였던 온지유가 뒤에서는 그렇게 많은 나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심미연 씨, 온지유를 안에 집어넣고 평생 고통을 받게 만든다고 해서 강지한의 마음에서 지유가 사라질 거라 생각하세요? 심미연 씨는 평생 강지한과 함께할 생각은 하지 마세요.” 강지한은 눈에 살기를 띄우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심미연은 그의 얼굴에 시선을 두며 조용히 말했다. “육현성 씨, 굳이 그런 말 하지 않아도 알아요. 월래부터 강지한과 다시 시작할 마음은 없었어요.” 그녀는 말을 끝내고 바로 주제를 돌렸다. “오히려 육현성 씨는 이번 생엔 온지유와 함께하고 싶어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겠네요. 정말 안타깝네요.”육현성의 얼굴은 불편하게 일그러졌고 눈빛은 흐릿했다. 오랜 방탕한 생활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며 그의 몸은 심각하게 지쳐 있었다. 그는 온지유 같은 여자를 위해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몸을 망가뜨려왔고 나중에 후회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미연의 말은 육현성의 가슴을 깊이 찌른 듯했다. 그의 얼굴은 순간적으로 찢어지듯 일그러졌고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이 년이 죽고 싶냐?” 그는 손을 뻗어 심미연의 목을 조르려 했다. 이번 생에서 온지유와 함께할 수 없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큰 아픔이었다. 몇 년간 그는 그 고통 속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심미연은 그 아픈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려 했다. 심미연이 몸을 피하려던 순간 갑자기 옆에서 한 다리가 튀어나와 육현성의 몸에 정확히 차올랐다. 육현성은 뒤로 몇 걸음 밀려났고 몸을 간신히 가다듬은 뒤에야 강지한이 눈앞에 서 있는 것을 봤다. 강지한은 심미연을 뒤로 숨기듯 서서 위압적인 기운을 내뿜으며 육현성을 내려다보았다. “육현성, 내 여자를 때리는 장면 보라고 밥 먹자 했냐?”강지한의 얼굴에는 아무 감정이 없었고 목소리는 차
박유진의 목소리가 들리자 심미연은 급히 고개를 돌려 그의 눈과 마주쳤다. 그의 눈은 여전히 변함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그 눈빛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유진 오빠, 왔어?” 그녀는 몸을 돌려 그에게 달려가며 목소리는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그녀의 그림자가 불빛에 길게 늘어지며 부드럽고 아련하게 흔들렸다. 강지한은 얼굴에 분노를 가득 담아 박유진을 노려보았다. 박유진은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여 품에 안은 여자를 바라보았다. 그 눈속에 숨길 수 없는 사랑이 가득했다. 강지한은 갑자기 가슴 한구석에서 뜨거운 통증이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괴로움이 그의 가슴을 조여왔다. 그는 저도 모르게 깊은 숨을 들이켰다.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고 괴로움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미안, 방금 전화받느라 늦었어. 이제 가자. 우리 먼저 들어가자.” 박유진은 심미연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며 목소리는 따스했다. “응. 가자.”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자연스럽게 그에게 맡겼다. 그녀와 강지한은 이미 이혼했고 이제 박유진과 당당히 함께할 수 있었다. “안 돼. 가지 마!” 강지한이 목소리를 높였다. 박유진은 그를 흘낏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이미 약속이 있습니다. 강 대표님께서 급한 일이 있으시면 저희가 식사 후에 얘기하죠.” 그의 목소리는 언제나처럼 차분하고 얼굴에는 변함없이 온화한 미소가 있었다. 심미연은 그를 올려다보며 그의 배려와 사랑이 떠오르며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은은한 따뜻함이 밀려왔다. 그를 만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강지한의 시선 끝에서 심미연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마치 사랑하는 남자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 순간 강지한의 이성이 뚝 끊어졌다. ‘심미연이 다른 남자를 사랑한다고?’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았다. 아무 생각도 없이 앞으로 나아가 그녀의 팔을 거칠게 붙잡았다. “아파!” 심미연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