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 변호사님, 먼저 사무실로 돌아가세요.” 심미연이 임현에게 말했다. “경찰에 신고할까요?” 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니요. 괜찮아요. 어서 가세요.” 그녀는 강지한이 지금 자신에게 함부로 할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임현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그럼 조심하세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제가 바로 달려갈게요.” “알겠어요.” 심미연은 임현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녀는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었고 자신이 다칠까 봐 지켜주고 싶어서 그런 거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수많은 일을 겪으며 단단해질 대로 단단해진 사람이었다. 임현이 자리를 떠나자 심미연은 주저 없이 강지한 쪽으로 걸어갔다.“강 대표님,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오셨나요?” 심미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혹시 육현성 그 쓰레기 때문에 온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나도 절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강지한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들을 못 보게 한 이유가 뭐야? 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그의 말투는 거칠고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사실 그는 아들을 데리러 유치원에 갔지만 심미연이 미리 연락을 해둬서 선생님이 아예 데려가지 못하게 막았던 상황이었다. ‘내가 애 친아빠인데 얼굴 한 번 못 본다고?’‘이걸 밖에 말하면 누가 믿겠어?’심미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인상을 찌푸린 채로 말했다. “그게 네가 여기 온 이유라면 이제 그만 가.”“너한텐 절대 아이 안 보여줄 거니까.”당시 온지유가 임신했을 때 강지한은 그녀에게 임신하면 반드시 낙태하라고 했었다. 만약 그녀가 가짜 죽음을 가장해 경성을 떠나지 않았다면 아이는 살지 못했을 것이다. “심미연! 너는 대체 왜 나랑 태하가 만나는 걸 막는 거야?” 강지한은 차가운 기운을 뿜어내며 말했다. ‘이 여자가 정말 건방지네.’ “난 분명히 말했어. 태하는 네 아들
“오후에 시간 없어. 다른 사람이랑 얘기할 수 있도록 할게.” 결국 그녀는 강지한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것조차 불쾌했다. 강지한은 화가 나서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로펌 안으로 끌어당겼다.심미연은 그의 손을 힘껏 뿌리쳤지만 그 힘을 벗어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얼굴에는 짙은 불쾌감이 드러나 목소리도 차가워졌다. “강지한, 여기는 로펌이야. 손 대지 마.”강지한은 그녀가 자신과의 관계를 단번에 끊으려는 태도를 보며 속이 상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기도 전에 심미연은 이미 거리를 두며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심미연이 지나가는 길을 강지한이 그대로 뒤따르자 두 사람이 지나간 자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둘의 조합이 너무나 눈에 띄어서 멀리서도 사람들의 관심을 피할 수 없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심미연은 책상에 앉아 강지한을 쏘아보며 물었다. “무슨 합작을 얘기하려는 거야?” 강지한의 법무 대리인은 리우 로펌이기 때문에 그녀와 법률 대리 계약을 할 이유가 없었다. ‘혹시 입찰 건에 관한 얘기일까?’ “이번 입찰, 너한테 양보할게. 그리고 이노하이브에는 너희 회사와 합작할 수 있는 프로젝트도 몇 개 있어.” 강지한은 여기서 더 이상 말을 이으려 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그의 의도를 파악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입찰 문제라면 양보할 필요 없어. 누구나 공정하게 경쟁해야지. 그리고 네가 말한 합작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관심 없어.” “너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바렐 그룹과의 모든 합작을 끝냈잖아. 나중에 똑같은 방법으로 나를 겨냥할 게 뻔해. 그래서 지금 확실히 말할게. 앞으로 은성은 절대 이노하이브와 합작하지 않을 거야.” 그녀의 마지막 말은 단호하고 강력하게 울려 퍼졌다.최근 며칠간 인터넷은 이노하이브와 바렐 그룹의 합작 종료 소식으로 가득 찼다. 그녀는 원래 다른 회사 소식에 별로 관심이 없었지만 박유진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특별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미연은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남자의 얼굴에 거칠게 한 대 날렸다. “강지한, 나는 네가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꺼져.”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낮았으며 분노로 가득 찬 얼굴에는 그 어떤 온기도 없었다. 그 날카로운 도화 같은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고 빛났다. 강지한은 그녀의 차가운 시선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얼굴을 감싸며 깊게 숨을 들이켰다. 그렇게 겨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난 정말 네가 아들과 함께 내 곁으로 돌아오길 바란다고. 왜 이렇게까지 격하게 반응하는 거야?” ‘심미연이 내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아직 나에게 감정이 남아있는 거 아닐까?’ 그가 그녀를 찾아 온 이유는 단 하나,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차갑게 밀어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생각이 점점 더 그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심미연은 그를 멍청한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네가 원한다고 우리가 돌아가야 해? 왜 우리가 네 말대로 해야 하지?” 그녀가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굳이 불편함을 찾으러 돌아갈 이유가 전혀 없었다.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있어야 제대로 자란다고. 그 정도도 모르겠어?” 강지한은 여전히 마음을 진정시키며 최대한 부드럽게 말하려 했지만 그의 말투 속에 숨겨진 분노는 감추기 어려웠다. 심미연은 그런 말에 전혀 관심 없이 그를 밀어내고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어갔다. “강지한, 내가 이미 결혼했다고 말했잖아. 아이 데리고 돌아갈 일 없다고. 이제 그만 가. 할 말 다 했어. 오후에 해야 할 일이 많아서 이제는 좀 쉬어야 해.”“다음에 또 내 시간을 이렇게 낭비하면 그때는 너한테 상담비 청구할 거야.” 신하린이 병원에 누워 있기 때문에 그녀는 회사와 로펌을 오가며 바삐 돌아쳤다. 하루에 48시간이 필요할 정도로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런 의미 없는 사람과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강지한은 주머니에서 블
1층으로 내려온 임현은 강지한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그러다 강지한이 갑자기 멈춰서서 뒤를 돌아보자 임현은 깜짝 놀라며 더듬거렸다. “강, 강 대표님...” 강지한은 냉정하게 말했다. “심미연에게 전하세요. 일주일이 다 돼간다고. 빨리 결정하라고 하세요.” 그는 말을 마치자마자 차에 올라탔다. 강지한은 심미연에게 충분한 시간을 줬다고 생각했다. 기한이 끝나면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그녀와 아들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심미연이 자신을 미워하든 말든 상관없었다. 어차피 아내와 아들은 그의 곁에 있어야 하니까. 임현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강지한의 말을 곱씹었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거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 결국 심미연을 찾아갔다. 그러나 문을 열자 심미연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임현은 그녀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문을 닫았다. ‘변호사님이 깨면 다시 얘기해야겠다.’심미연 로펌 사무실.심미연은 상쾌한 기분으로 잠에서 깨어나 노트북을 열고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현이 조심스레 방에 들어왔다. 심미연은 그녀의 머뭇거리는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요?” 임현은 강지한이 전하라고 했던 말을 그대로 전달하고 어색하게 핑계를 대며 서둘러 방을 나갔다. 심미연은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처음엔 강지한이 장난으로 하는 소리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심이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병원.강지한이 병원에 도착해 자리에 앉자마자 성무진이 들어왔다. “대표님, 아가씨의 친부모님과 연락이 닿았습니다. 바로 데려올까요?” 그제야 강지한은 성무진에게 강상미의 친부모를 찾으라고 지시했던 일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는 강상미가 자신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하지만 심미연이 떠난 이후로 그는 단 한 번도 다른 여자를 건드린 적이 없었다. 그러니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언제?] ‘이진영과 심미연이 합작을 논의한다고?’ ‘최근에 이진영이 프로젝트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는데.’ ‘두 사람이 만난 이유가 다른 게 있나?’ [오늘 오전이야.] 육현성은 일부러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심미연 씨랑 법률 대리인 문제로 얘기하려고 했는데 바쁘다고 못 온다고 하더라고. 그런데 그 후 바로 이진영과 함께 있는 걸 봤어. 두 사람은 웃으면서 얘기하고 아주 친밀해 보였어. 아마 합작 얘기를 하는 거겠지.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던 걸 수도 있어.] 강지한의 얼굴이 즉시 어두워졌다. [알았어.] ‘심미연, 점점 대단해지네. 모든 남자랑 다 엮으려는 거야?’[지한아, 너 그만큼은 심미연 씨한테 꼭 말해. 이진영이랑 너무 가까워지지 말라고. 내 처남이지만 결코 좋은 사람 아니야.]육현성은 이진영의 냉혹함과 잔인함을 잘 알고 있었다. 이다은과 결혼한 3년 동안 이진영은 자주 육영 그룹을 도와줬고 그 사람의 수단이 얼마나 잔인한지 육현성은 뼛속까지 알고 있었다. 강지한의 얼굴이 검게 변하며 목소리가 거칠게 나왔다. [용건 끝났어?] [응. 다 끝났어. 방해 안 할게.] 강지한의 목소리에서 불쾌함이 묻어나자 육현성은 그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직감했고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전화를 끊었다.강지한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담배를 하나 꺼내 불을 붙였다. 연기 속에서 심미연의 섬세한 얼굴이 어렴풋이 비쳤다. 지금의 심미연은 예전 그와 함께했던 심미연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는 종종 ‘이 여자가 진짜 예전의 심미연이 맞나?’하는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담배를 다 피운 후 시간이 꽤 지난 걸 느낀 그는 간단히 정리하고 퇴근했다. 문을 나서자 급히 달려오는 성무진과 마주쳤다.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눈썹을 찡그리며 물었다. “무슨 일 있어?” “사모님이 오셨습니다.” 강지한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왜 온 거지?” “모
“태하야, 엄마 여기 있어.” 그녀의 목소리는 사람들로 가득한 하원 인파 속에서 사라졌다. 심태하는 엄마를 발견하자 눈이 반짝이며 작은 발걸음으로 달려와 심미연의 품에 안겼다. 마치 세상 모든 것이 이 포옹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했다. “엄마, 너무 보고 싶었어요.” 심미연은 허리를 굽혀 그를 안으며 따뜻하게 웃었다. “엄마도 우리 태하 너무 보고 싶었어.” “태하 어머니, 오늘 태하가 유치원에서 정말 잘했어요. 친구들도 도와주고 생활 선생님께 작은 책상도 정리해드렸답니다.” 선생님은 심미연 품에 안겨 있는 아이를 보며 칭찬의 눈빛을 보냈다. 이렇게 어린 아이가 지능도 뛰어나고 감정 조절도 잘하다니. 정말 3살 어린이답지 않다고 생각했다. 선생님이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반의 다른 아이들이 아직 분유를 먹고 작은 울음에도 쉽게 따라 우는 경우가 많아 자주 힘겨운 상황을 겪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태하는 달랐다. 울지 않고 떼쓰지도 않았으며 작은 일도 차분하게 처리했다.평범한 장난감으로도 상상력을 발휘해 다양한 놀이를 해내는 모습을 보며 선생님들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10년 넘게 유치원에서 일한 선생님은 이런 기특한 3살 아이는 처음 봤다. 그동안 수많은 아이들을 봤지만 심태하처럼 차분하고 똑똑한 아이는 없었다. 심미연은 선생님의 칭찬을 듣고 잠시 놀랐다가 이내 아들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우리 태하는 정말 최고야.” 그녀는 심태하가 지능이 뛰어나 친구들 사이에서 잘 적응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오히려 예상보다 더 착하고 말 잘 듣는 아이라는 사실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죠. 내가 누구 아들인데.” 심태하는 심미연의 목을 끌어안으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옆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선생님은 은근히 부러워하며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보기 좋은 따뜻한 장면이었다. 어쩐지 아이가 이렇게 잘 자란 이유가 모두 엄마 덕분인 것 같았다. 심미연은 웃으며 자신의 코로 아들
“먼저 약속해 주세요. 화내지 않겠다고요.” 심태하는 심미연에게 미리 주의를 주었다. 심미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았어. 화 안 낼게.” 그렇지만 마음속에서 ‘이 녀석이 무슨 엉뚱한 짓이라도 했다면 내가 이 말로 태하에게 면죄부를 준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심태하는 그녀의 대답을 듣고 마치 자신이 괜찮다는 것을 확인하려는 듯 잠시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마법처럼 책가방 깊은 곳에서 반짝이는 공주 드레스를 꺼냈다. 드레스의 치맛자락은 가볍게 휘날리며 햇빛을 받아 다양한 색깔로 반짝였다. 심미연은 그 드레스를 보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거 엄마한테 주는 거야?” ‘이건 분명 여자아이에게 줄 선물 아닌가?’ 심태하는 급히 해명했다. “엄마, 이건 상미한테 줄 선물이야.” 그의 목소리에는 확고한 의지와 기대가 담겨 있었고 눈빛은 순수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심미연은 그제야 예전에 심태하가 자신에게 말했던 일을 떠올리며 살며시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부드럽게 대답했다. “알았어. 바로 병원에 가자.”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고 심미연은 핸들을 꽉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음속에서는 수많은 생각들이 휘몰아쳤다. 심태하는 누구에게나 이렇게 신경 쓰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는 다소 차갑고 냉담한 성격을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유독 강상미한테만 특별한 감정을 보였다. 그 이유도 없이 단순히 좋아한다는 감정이었다. 심태하는 엄마가 거절하지 않자 안도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제 곧 강상미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다. 병원에 도착한 심미연은 서둘러 심태하를 품에 안고 병원으로 들어갔다. 길게 뻗은 복도는 심하게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때때로 들려오는 응급실 벨 소리로 더 짙어지며 숨이 막히는 듯했다. 의사로서 이곳에서 일한 지 2년, 심미연은 너무 많은 생과 사를 목격했다. 그래서 병원은 항상 불편했다.그때 문소영과 강지한의 모습이 정확히 그 지점에서 빛에
‘아니야. 그럴 리 없어.’ ‘혼자서 겁먹으면 안 돼.’ 문소영은 마음속의 혼란을 가라앉히고 심태하의 얼굴을 노려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강지한에게 말을 꺼냈다. “지한아, 상미가 몸 상태도 좋지 않은데 아무한테나 방해받을 순 없잖아.” 심미연은 그녀의 말 속에 숨겨진 의도를 금세 파악하고 강지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너도 이렇게 생각하는 거야?” 심미연은 자신이 선의로 행동한 것이 잘못된 것처럼 비난받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그렇지.” 문소영은 자랑스러운 듯이 말을 내뱉었다. 심미연은 더 이상 그녀와 싸울 생각이 없었고 그저 비웃듯 문소영의 창백한 얼굴을 한참 응시했다. “당신, 도대체 뭘 그렇게 걱정하는 거예요? 내가 아들과 함께 그 가짜의 모든 걸 빼앗을까 봐 두려운 거예요?” ‘상미가 억울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 ‘어쨌든 그 아이는 강지한의 딸이니까.’ “너 진짜 뻔뻔하다.” 문소영이 분노에 찬 목소리로 소치쳤다. ‘예전의 심미연은 그냥 당하기만 했던 사람 아닌가?’‘어떻게 이렇게 강해졌지?’강지한은 차가운 표정으로 얼굴을 굳히며 날카롭게 경고했다. “다시 한 마디 더 하시면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내가 그렇게 간절히 원해도 가질 수 없는 심미연을 이렇게 욕하다니.’‘어머니라고 해서 함부로 심미연을 욕할 수는 없어.’ 문소영은 강지한의 무자비한 경고에 순간 얼어붙어 입을 꾹 다물었다. 하나는 강지한의 성격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를 진심으로 화나게 했다간 결코 가벼운 대가를 치르지 않을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른 하나는 지금의 심미연에게서 느껴지는 그 강력한 기세에 두려움을 느꼈기 때문이다.문소영이 물러서자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끝이 심태하의 작은 얼굴에 닿을 듯했지만 그 순간 심미연은 민첩하고 단호하게 몸을 틀며 손을 피했다. 심미연의 눈빛 속에는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직 차가운 결단력만이 가득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