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차갑게 말했다. “이게 뭐죠?” “지유가 당신이 보면 알 거라고 했어요.” 육현성은 앞에 있는 마스크를 쓴 남자를 바라보며 목소리가 약간 갈라졌다. 결국 그는 온지유를 구할 힘이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 생각에 자신이 얼마나 쓸모없는 존재인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물건은 남기고 이만 돌아가세요.” 남자는 손에 든 물건을 옆에 있던 사람에게 넘기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육현성은 그와 눈이 마주쳤고 본능적으로 한기를 느꼈다. 그 눈빛은 너무나도 무서웠다. 마치 숲속의 맹렬한 늑대처럼 그 눈빛만으로도 그의 몸이 찢어질 것 같았다. 정말 무서운 사람이었다. ‘지유가 이런 사람을 어떻게 알지?’ “왜 안 갑니까?” 남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갑고 날카로웠다. “네. 바로 가겠습니다.” 육현성은 급히 정신을 차리고 발걸음을 재촉해 자리를 떠났다. 그는 늦게 가면 남자에게 죽을까 봐 두려웠다. 지금은 죽고 싶지 않았다. 육현성이 멀어지자 남자는 옆에 서 있던 사람에게 명령했다. “열어봐.” 온지유가 그곳에 갇힌 지 몇 년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누군가를 통해 그에게 물건을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그 남자는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말라버린 손가락 하나가 들어 있었다. “강 도련님, 손가락 하나입니다. 위에는 반지 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그 사람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남자의 눈에는 어두운 먹물이 흘러 들어간 듯 깊고 차가운 색이 감돌았다. “조사를 해볼까요?” “온지유의 지금 상황을 조사해 봐.” 남자는 옷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감싸며 자세히 살펴봤다. 그것은 여성의 손가락이었다. 그가 틀리지 않았다면 아마 온지유의 손가락일 것이다. 감옥 안에서 누군가 그녀에게 해를 끼쳤다는 것은 분명히 누군가 그녀를 겨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녀가 이 손가락을 보내게 된 것은 그
그녀는 가정부에게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을 도와달라고 요청한 것이지, 일꾼처럼 부려먹으려는 것이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백선영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신미연의 말을 이해하고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이 따뜻해졌다. “먼저 갈게요. 집에 일이 있으면 연락하세요.” 심미연은 말을 마친 후 집을 나섰다. 백선영은 눈물을 훔치며 바로 진은숙에게 다가가 심미연의 말을 전했다. 두 사람은 자리에 앉아 서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들은 부유한 집에서 반 평생을 하인으로 일했지만 어떤 주인은 하루 종일 20시간 일해도 모자란 듯 요구하며 집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정리하도록 강요했다. 심미연처럼 이렇게 좋은 고용주를 만난 건 처음이었다. 어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심미연은 아래층으로 내려가면서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끝내고 문 앞에 도착했다. 경비원은 그녀를 보고 바로 경례를 하며 정중히 말했다. “박 부인, 밖에 당신을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심미연은 경비원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네. 감사합니다.” ‘원래도 절세미인인데 웃을 때는 나라를 흔들 정도네.’ 경비원은 속으로 감탄했다. ‘정말 너무 아름다워.’심미연이 대문을 나서자 입구에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멋지게 세워져 있었다. 굉장히 눈에 띄는 차였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게 누구지?’ 그 순간, 차문이 열리더니 큰 뒤통수를 하고 요염한 얼굴을 한 남자가 차에서 내렸다. 그의 정장과 넥타이는 그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신미연은 눈썹을 한 번 치켜올리며 그를 바라봤다. ‘이 얼굴,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심미연이 그를 누구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남자가 그녀 앞에 다가와 공작새처럼 자신을 드러내며 말했다. “심미연 씨, 안녕.” 비싼 정장을 입었는데 그 말은 그 옷이 너무 아깝게 보였다. “누구시죠?” 심미연은 그의 정체를 떠올리지 못하고 멍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박시훈은 살
박시훈은 심리학을 공부했기에 심미연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자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았다. 그녀에게 정말 일이 있다면 그는 억지로 강요할 수 없었다.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면 이후에 다시 만날 기회가 없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참자.’ “알았어요. 연락처는 남겨주실 수 있나요? 오후에 약속을 좀 더 편하게 잡을 수 있잖아요.” 박시훈은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심미연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저한테 당신 연락처를 주시면 됩니다.” 그녀는 연락처를 남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박시훈은 그 말을 듣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렇게 잘생겼는데 심미연은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연락처도 안 남겨준다고?’ 심미연은 그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고 그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강요하지 않고는 그대로 돌아섰다. 박시훈은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급히 그녀를 쫓아갔다. “심미연 씨, 잠깐만요. 연락처 남겨줄게요.” 그는 뒤에서 뛰어가며 외쳤다. 심미연은 그의 목소리를 듣고 발걸음을 멈췄다. 박시훈은 그녀에게 다가가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제 명함이에요. 일 끝나고 연락 주세요.” 심미연은 명함을 받으며 빠르게 주차장으로 향했다. 박시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속이 텅 비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정말로 그녀에게 달려가서 사실은 그녀를 좋아한 지 오래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심미연은 차에 앉아 명함을 한 번 보고는 그대로 옆에 놓고 시동을 걸었다. 그 시각, 심태하는 잠에서 깨어 보니 여전히 원래의 방에 누워 있었다. 눈앞의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엄마는 나를 버린 걸까?’ ‘하지만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생각을 하던 중 심태하의 눈가가 빨갛게 변했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심태하는 얼굴에 기쁨이 번지며 침대에서 벌떡 일
집사는 사진을 보며 참지 못하고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아가씨랑 작은 도련님이 쌍둥이 같지 않나요?” 두 얼굴이 나란히 있는 모습은 정말 똑같았다. 혈연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 강준형은 집사의 말을 듣고 옆에 있던 확대경을 집어 들고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정말 이 두 얼굴은 기한이의 축소판 같네. 완전 똑같아.” 강준형이 혼자 중얼거리며 말했다. “그런데 상미는 소영이가 데려왔잖아. 소영이가 말하길 상미는 심서연이 길가의 쓰레기통에서 주워왔다고 했지. 뭔가 이상한 거 아닌가?” 만약 이 아이가 강지한과 관련이 있다면 강지한은 벌써 알았을 것이다. DNA 검사만큼 간단하고 직접적인 방법은 없으니까. ‘지한이가 이 아이랑 자신이 이렇게 닮은 걸 보고 의심했을 테고 아마 검사를 해봤겠지?’ “혹시 두 아이 모두 사모님이 낳은 게 아닐까요? 아가씨가 누군가에게 빼앗겨서 도련님에게 주어진 건 아닐까요?” 집사가 대담하게 추측했다. 그렇지 않다면 이 두 아이가 나이도 같고 이렇게 닮을 수는 없었다. 강준형의 얼굴이 갑자기 심각해졌다. “지한이에게 말해야겠어.” 집사의 말에 강준형은 그런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문소영이 아이를 데리고 심서연과 함께 돌아왔을 때 심서연이 요구한 것이 바로 아이의 엄마가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그 후 몇 년 동안 강씨 가문에서 살았고 강 부인이 아니었지만 강 부인의 모든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이 일은 거의 문소영과 심서연이 짜고 한 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당시 심미연은 죽음을 가장했고 모두가 그녀가 진짜 죽었다고 믿었다. ‘문소영은 미연이가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그리고 미연이가 아이를 언제 낳았는지는 어떻게 알았지?’ 강준형은 오랫동안 집안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어차피 나이가 많아져서 어떤 일들은 그냥 눈 감고 넘어가도 괜찮았다. 겉보기에 괜찮으면 된다고
그 순간, 심미연의 심장이 서늘하게 조여왔다. 눈앞의 이 어린 소녀와 자신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사이인데 그 작은 얼굴 위로 흐르는 눈물에 이상하게도 가슴이 저며왔다.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임혜자는 강상미가 눈물을 글썽이는 모습을 보고 마음이 짠해졌다. 잠시 망설이다가 그녀는 조심스럽게 심미연에게 말을 건넸다. “사모님, 잠깐이라도 더 머물러 주시면 안 될까요? 아가씨가 얼마 전까지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어제 막 돌아온 거라... 도련님 말씀으로는 몸이 좀 회복되면 수술을 받을 거라고 하던데...” 임혜자는 말끝을 흐리더니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술이 잘될지 모르겠어요.” 그녀가 들은 바로는 만약 상황이 나빠지면 강상미는 수술대에서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겨우 세 살짜리 아이가 그런 위험을 감당해야 한다니, 생각만 해도 가슴이 미어졌다. 하지만 강상미의 수술을 직접 집도할 사람은 바로 심미연이었다. 그녀는 누구보다도 이 수술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절대 강상미를 잃게 두지는 않겠다고. “엄마, 여기서 상미랑 조금만 더 같이 있어 주면 안 돼?” 심태하는 몇 시간 동안 강상미와 함께 지내면서 몇 가지를 깨달았다. 강지한이 자신에게 화내는 모습을 본 이후로 강상미에게는 화를 내지 않는다 해도 다정하게 대해 줄 것 같진 않았다. 그런데 강상미는 엄마도 없었다. 진짜 너무 불쌍했다. 엄마를 좋아하는 강상미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심미연은 조용히 무릎을 굽히고 아이들의 손을 하나씩 잡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태하야, 엄마가 상미랑 있고 싶지 않은 게 아니야. 엄마도 해야 할 일이 많고 무엇보다 지금 시간이 너무 늦었어. 너도 이제 유치원에 가야 하잖아.” 그녀는 이내 강상미를 바라보며 따뜻하게 미소 지었다. “상미야, 나는 네 엄마가 아니라 아줌마야. 그리고 아줌마는 지금 일이 있어서 상미랑
‘아줌마랑 함께 갈 수 없구나... 그럼 집에만 있어야 해.’ ‘매일 혼자 놀다니, 정말 지루해.’ “그럼 아줌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심미연은 강상미의 텅 빈 눈빛을 보며 가슴이 아려오는 고통을 느꼈다. 마치 누군가 칼로 자신의 살을 조각내는 것처럼 아프고 그 고통은 쓰라리게 퍼져 나갔다.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품에 안고 있던 강상미를 조심스럽게 밀어내고 일어섰다. 옷자락을 정리한 뒤 심태하의 손을 살짝 잡았다. “태하야, 가자.” 그녀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강상미의 애처로운 표정이 그녀의 마음을 아프게 짓눌렀다. “상미야, 엄마랑 오빠는 먼저 갈게. 내가 학교 끝나면 다시 와서 놀자. 알겠지?” 심태하는 강상미에게 손을 흔들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네. 아줌마 안녕, 오빠 안녕.” 강상미는 웃으려 애썼지만 결국 웃음을 짓지 못하고 눈물이 터질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심미연은 마음이 찢어지듯 아팠다. 그녀는 강상미를 안아주고 싶었다. 데려가고 싶었다. 그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귓가에 퍼지며 들려왔다. “왜 내 아들을 허락도 없이 데려가는 거야?” 심미연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급히 심태하를 몸 뒤로 숨기고 돌아서서 강지한을 마주했다. “강지한, 우리 사이에 어떤 원한이 있든 아이들은 건드리지 말아야 해. 아이들 좀 놔줘.” 강지한은 그녀의 경계 가득한 눈빛을 보고 짜증이 밀려왔다.‘이 여자가 꼭...’ ‘우리 사이에 무슨 원한이 있다고 그래?’ ‘분명 일방적으로 나를 싫어하면서...’ 그가 심태하를 곁에 두기로 한 것도 그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아들이 다른 사람을 아빠라고 부르는 건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이는 데리고 못 가.”강지한은 심미연을 강제로 남기지 않은 것만으로도 큰 양보를 한 거였다. 만약 심미연이 더 이상 그와 흥정하려 한다면 그는 그녀까지 같이 못 가게 할 수도 있었다. 공기
강상미는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 가득한 눈으로 아빠를 올려다봤다. “아줌마가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으면 좋겠는데... 아빠가 너무 무서워서 아줌마가 싫다고 할 것 같아요.” 세 살짜리 아이가 조리 있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감싸는 걸 깨닫고 속으로는 ‘이 배은망덕한 녀석!’이라며 혀를 찼지만 겉으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가 상미한테는 하나도 무섭지 않은데? 상미야, 네가 아줌마를 엄마라고 부르고 싶으면 직접 아줌마한테 말해 봐. 응?” 딸이 이렇게까지 심미연을 좋아할 줄은 몰랐다. 예전에는 늘 심서연과 함께 있었는데도 단 한 번도 애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심서연을 꺼리는 듯한 모습이 자주 보였을 정도였다. 그때까지는 단순히 강상미가 낯을 가리는 성격이라 쉽게 친해지지 않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심미연과는 몇 번 만나지도 않았으면서 왜 이렇게 따르는 걸까?’ 너무 이상했다. 하지만 강지한은 딸이 심미연을 좋아하는 게 나쁘진 않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나중에 심미연을 집으로 데려올 때 강상미가 거부감을 가지진 않을 테니까.“아줌마가 아까 그러셨어요. 바빠서 일하러 가야 하니까 저녁에 퇴근하고 다시 와서 나랑 놀아준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아빠... 아줌마 보내주세요. 네?” 강상미는 아빠가 또 아줌마를 붙잡고 못 가게 할까 봐 걱정됐다. 아줌마가 이 집에서서 더 오래 머물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냥 빨리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고 저녁에 아줌마가 진짜 다시 올지, 그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심미연은 강상미가 자신을 위해 나서는 걸 보고 잠시 놀랐지만 이내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강지한은 미간을 좁히며 눈썹을 살짝 올렸다. “정말 그렇게 말했어?” ‘심미연이 저녁에 다시 오겠다고 했다고?’ ‘그럼 집으로 돌아오겠다는 뜻인가?’ “네!” 강상미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이렇게 많은 질문을 한 번에 쏟아낼 줄은 몰랐다. 강지한이 강상미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도 딸이 평범한 삶을 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오는 복잡한 감정이 느껴졌다. “오빠가 있으니까 괜찮아요. 금방 적응할 거예요.” 강상미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 모습은 마치 심태하를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강지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럼 나는? 아빠인 나는? 남보다 못한 거야?’ 순간 속상함이 치밀어 올랐다. 괜히 마음이 씁쓸해졌다. “엄마, 그럼 동생도 저랑 같이 유치원에 가게 해주세요. 무슨 일이 생기면 제가 제일 먼저 엄마한테 전화할게요.” 심태하는 심미연의 눈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어른스러울 수 있나?’ “그건 엄마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야. 상미 아빠한테 물어봐야 해.” 심미연은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사실 강지한을 설득해 강상미를 유치원에 보내려는 생각은 없었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강지한이 그녀를 원망할 게 뻔했으니까. 괜히 나설 필요가 없었다. “아... 알겠어요.” 심태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다. 엄마에게 물어볼 일이 아니라는 걸 스스로 깨달은 듯했다. 강지한은 잠시 생각에 잠긴 후 입을 열었다.“알겠어. 그럼 아줌마랑 오빠랑 같이 가.” 그의 차가운 시선이 심태하를 향했다. “심태하, 동생 잘 지켜야 해. 알겠지?” 강상미를 대할 때와는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강상미에게는 부드럽고 조심스러웠던 말투가 심태하에게는 갑자기 단호하고 엄격한 톤으로 바뀌었다. 심태하는 그의 눈길을 피하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상미는 제가 잘 돌볼게요.” 겨우 세 살짜리 아이가 이렇게 어른스럽게 말하고 행동하니 왠지 모르게 믿음이 가는 기분이 들었다. “가자. 내가 데려다줄게.” 강지한이 나서자 심태하는 본능적으로 거부했다. “싫어요. 엄마
심미연은 흩날리던 생각을 차분히 거두고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궁금한 듯 물었다.“우리 태하 진짜 똑똑하네. 어떻게 그런 질문을 할 수 있는 거야?”아직 겨우 세 살이지만 심태하의 마음은 놀랄 만큼 세심하고 예민했다. 또렷한 눈망울은 마치 세상의 감정 흐름을 꿰뚫어 보는 듯했고 그렇게 꼼꼼히 살피는 모습에 심미연은 종종 놀라곤 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박유진이 심태하를 정성스럽게 길러온 시간이 아이를 이토록 똑똑하고 배려 깊게 자라게 만든 것이다.“아까 아빠랑 통화할 때 엄마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어요. 뭔가 걱정하는 게 있는 것 같았어요. 그리고 저한테 말 걸었을 때도 평소처럼 웃고 있지 않았어요. 그래서 엄마가 혹시 슬픈 건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어요.”심태하의 말은 또렷하면서도 조심스럽게 흘러나왔다. 단어 하나하나에 엄마를 향한 깊은 애정과 이해가 담겨 있었다.심태하가 보기에 박유진이 집에 있을 땐 심미연은 늘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환하게 웃는 얼굴이 참 예뻤다.“엄마가 안 웃었어?”심미연은 웃음을 터뜨렸다.‘녀석, 정말 못 말려.’겨우 세 살에 이 정도인데 나중에 더 크면 얼마나 영리해질지.“네, 안 웃었어요.”심태하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엄마,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런 거예요?”심태하의 목소리는 여전히 앳됐지만 말투는 왠지 어른스러웠다. 꼭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기라도 한 듯했다.심미연의 마음은 그 말 한마디에 확 풀렸다. 그녀는 아들의 코끝을 살짝 잡아당기며 말했다.“자, 얼른 아침 먹자.”그녀의 말투엔 아낌없는 사랑이 담겨 있었다.이 아이는 정말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다.“아빠가 보고 싶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면 되죠!”심태하가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윙크했다.‘나도 아빠가 보고 싶은데 엄마가 안 보고 싶을 리가 없지. 맞아, 분명 그럴 거야!’심미연은 그 말에 또 한 번 웃음을 터뜨렸다.“그래, 네 말대로 할게.”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물론 박유진이 보고 싶지만 그에게 전화하진
하지만 그 깊은 애정과 놓기 싫은 마음은 오히려 박유진을 현실이라는 갈림길 앞에서 망설이게 만들었다.그는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결정을 내리지 않으면 심미연만 괴로운 상황에 빠질 것이라는 걸. 그 맑고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의 망설임으로 인해 흐려지는 건, 그녀의 세상이 자신 때문에 흔들리는 건 차마 보고 있을 수 없었다.그렇다고 그녀를 놓아버리면 영원히 잃게 될 텐데... 그 아픔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 박유진 본인조차 알 수 없었다.“아빠, 왜 말이 없으세요? 허락한 거죠?”심태하의 목소리는 천진난만하게 들떴다. 마치 머릿속에 따뜻한 한 가족의 그림이 그려지기라도 한 듯.‘아빠가 돌아오면 엄마랑 나랑 셋이 모여 저녁 먹고 같이 웃고 얘기하고...’심태하의 마음속에서 그려낸 가장 순수한 행복의 모습이었다.그러나 그 순수한 소망 앞에서 박유진의 마음은 송곳에 찔린 것처럼 아팠다.그는 알고 있다. 이번 결정을 가볍게 내려서는 안 된다. 누구도 상처받지 않게 하려면 정말 신중해야 했다.하지만 사랑과 책임 사이에서 그가 걸어갈 수 있는 길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그는 지금 사랑을 저버리지 않으면서 심미연과 아이를 지킬 방법을 찾고 있다.하지만 그런 길이 과연 있을까? 이 선택은 너무나도 어려웠다.“아빠, 나 이렇게 열심히 얘기하고 있는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심태하는 고개를 갸웃하며 미간을 찌푸렸다.평소 같았으면 박유진은 재밌는 얘기도 해주고 자기 말에 웃어주었을 텐데, 오늘따라 너무 이상했다.‘혹시... 내가 말실수했나?’그때 박유진의 다급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심태하의 귀에 들려왔다.“태하야, 곧 비행기가 이륙해서 아빠가 휴대폰을 꺼야 돼. 오늘 밤에 다시 이야기하자. 꼭이야.”박유진은 심미연을 당장이라도 보러 가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고 말하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네! 알겠어요, 아빠! 그럼 오늘 밤에 꼭 통화해요. 약속했으니까 안 하면 안 돼요!”심태하의 목소리에 눈치채기 힘든 외로움이 살짝 섞여 있었다.
심미연은 멍해졌고 아까 자신이 박유진에게 연락을 시도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대신 날아온 건 단 한 줄의 차갑고 무미건조한 메시지. 기대했던 목소리는 끝내 들을 수 없었다.그런데 지금 아들 심태하가 전화를 걸자 박유진은 놀랍게도 전화를 받았다.“아빠, 지금 어디예요? 이틀 뒤면 제 생일이에요! 아빠가 놀이공원 같이 가자고 했던 거 잊으시면 안 돼요!”심태하의 말투엔 아이 특유의 해맑은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고 단어 하나하나가 살아서 튀어나오는 듯했다.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박유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도 녹일 만큼 다정했다.“아빠 지금 진성으로 가는 비행기 타러 가는 중이야. 곧 이륙이라 휴대폰 꺼야 해. 진성에 도착하면 바로 전화할게. 약속!”그 말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실려 있었다.사실 박유진은 심태하가 생일 이야기를 할 줄은 전혀 예상 못 했다. 어젯밤에 워낙 정신이 없어 그런 중요한 약속마저 깡그리 잊고 있었던 것이다.“아빠가 보내준 선물 잘 받았어요! 너무너무 마음에 들어요, 고마워요!”심태하는 아직 다 하지 못한 말이 많은 듯 아빠에게 털어놓고 싶은 게 가득한 눈치였다.박유진은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는데 햇살이 쏟아져 내려 유난히 눈부셨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가늘게 떴고 그 강렬한 빛이 속눈썹 아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그 순간 그의 마음속엔 오로지 한 사람, 심미연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그녀와 떨어져 있는 모든 시간이 하나같이 그리움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그리움이 너무 커서 박유진은 당장이라도 비행기에서 뛰어내려 달려가고 싶을 만큼 벅찼다.“아빠... 지금 너무 힘들죠? 그럼 회사 팔고 그냥 집으로 돌아와요. 제가 돈 많이 벌어서 아빠랑 엄마 다 먹여 살릴게요!”심태하의 순수한 눈빛에 진심 어린 다짐이 담겨 있었다. 그에겐 돈을 많이 벌어서 가족을 지킬 거라는 꿈이 있었다.심미연은 그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통통한 볼살에 아직 아기 티가 남았지만 심태하의 마음속
심미연 역시 조금 당황했다. 하지만 이지연이 잘못 알아본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지연 씨, 다시 한번 제대로 확인해 봐요. 결과가 똑같은지 꼭 잘 봐요.”혹시라도 착오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그럼 제가 다시 확인해 볼게요! 뭐든 나오면 바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스, 그럼 끊을게요!”이지연은 말 끝나기가 무섭게 전화를 뚝 끊었다.심미연은 휴대폰을 쥔 채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다. 아까 이지연이 했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이건명과 문소영이 예전에 그런 사이였다고?’그런데 왜 아무도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걸까? 아무도 깊게 파고들지 않았기에 묻혀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결혼 전에 누굴 만나든 그건 사생활인데 그걸 굳이 숨긴 이유가 뭘까?심미연이 이 모든 게 어딘가 석연치 않다고 느끼고 있을 즈음, 밖에서 누군가 소리쳤다.“엄마!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아침 먹으러 가요!”심미연은 생각을 접고 고개를 들어 활짝 웃는 아들을 바라봤다.“그래, 가자.”심태하가 달려와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엄마, 며칠 뒤면 제 생일이잖아요. 생일 파티에 상미도 초대하고 싶은데, 그래도 돼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어젯밤의 친자 확인 결과가 떠올랐다. 강상미는 그녀의 딸, 즉 심태하와 쌍둥이였다. 그래서 둘의 생일도 당연히 같았다.심태하의 생일 파티에 강상미가 온다면 그건 곧 둘이 같이 생일을 보내게 되는 셈이다.“엄마, 안 돼요?”심미연이 대답하지 않자 심태하가 다급히 물었다.그녀는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켰다.“그럼, 당연히 초대해야지. 너희 둘이 같이 생일 파티하면 되겠네.”“정말요? 엄마 최고! 사랑해요!”심미연은 아들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태하야, 너 엄마가 어제 말한 거 잊은 거 아니지? 상미가 바로 태영이야. 너랑 똑같이 엄마 배에서 나왔고 너희 둘은 쌍둥이야. 그래서 생일도 똑같아.”강상미에 관한 일은 이미 방원호에게 조사를 맡긴 상태였다. 꼭 알아내야 한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