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연 씨, 조심해요!”박시훈이 다급히 외치며 심미연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온지유의 눈빛 속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심미연은 대체 왜 항상 누가 대신 막아주는 건데? 지난번엔 박유진, 이번엔 또 다른 남자야?’ ‘좋아. 그렇게 죽고 싶은 거면 그냥 둘이 같이 죽어버려.’ 이성 따윈 사라진 듯 온지유의 눈빛은 날카롭기 짝이 없었고 그녀의 손끝은 망설임 하나 없이 심미연을 향해 뻗어갔다. 교도소에서 3년 넘게 몸으로 부딪치며 단련된 끝에 이제 그녀는 예전처럼 약하지 않았다. 힘도, 멘탈도 돌처럼 단단해져 있었다. “푹...” 날이 살을 찢고 들어가는 소리와 함께 붉은 피가 허공을 가르며 흩날렸다. 심미연은 놀라 고개를 돌렸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온 건 창백하게 질린 박시훈의 얼굴이었다. “미연 씨... 빨리... 도망쳐요...” 박시훈은 마지막 남은 기운을 끌어모으듯 힘겹게 말을 뱉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극심한 고통이 그를 단번에 삼켜버렸다. 심미연의 눈동자에 붉은 빛이 일렁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파악할 틈도 없이 박시훈이 그녀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 덕분에 칼끝은 아슬아슬하게 그녀를 비껴갔다. 온지유는 심미연이 다치지 않은 것을 확인하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왜... 왜 저 여자만 매번 살아남는 건데?’ 분노와 증오가 폭발할 듯 솟구쳤지만 그녀는 자신이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었다. 사람을 찔렀다. 그것도 대낮, 사람들 앞에서. 이대로 있다간 끝장이다. 온지유는 곧장 몸을 돌려 도망쳤다. 박시훈은 그녀를 붙잡기 위해 한 걸음 내디뎠지만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심미연은 재빨리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그때 경호원들이 들이닥쳤다. “대표님!” “이 사람 좀 앉혀줘요.” 박시훈은 간신히 의자에 몸을 기대었다. 심미연은 바닥에 흥건히 번진 핏자국을 보며 눈빛을 차갑게 굳혔다. ‘온지유... 네가 은성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그래서 박시훈은 죽는 게 무서웠다. 아픈 것도 두려웠다.사실 이런 말이 남자 입에서 나온다는 게 창피한 일이란 건 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 밖으로 새어 나오려는 걸 막을 수 없었다.“제가 있으니까 박시훈 씨는 죽지 않을 거예요!”심미연은 그렇게 말하며 은침을 꺼내 소독하더니 곧바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그러자 금세 출혈이 멈췄고 심미연은 재빨리 박시훈의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감았다.박시훈은 그런 그녀의 분주하고도 진지한 모습을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았다.어쩐지 넋을 놓고 보고 되는데 역시 여자가 진지할 때는 아름답다.‘저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상처는 일단 처리했지만 병원에 가서 꿰매야 해요. 가요, 제가 데려다줄게요.”심미연은 약상자를 막 달려온 비서에게 넘기며 말했다.“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해.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비서는 의자에 기대어 앉은 박시훈을 힐끗 바라보았다.‘이 남자는 누구지? 심하게 다쳤는데도 전혀 초라해 보이지 않고 여전히 잘생겼잖아...’박시훈은 그녀의 시선을 느꼈고 본능적으로 입술을 굳게 다물며 차가운 눈빛을 던졌다.심미연을 제외한 다른 여자들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본인도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그의 불쾌한 기운을 감지한 비서는 얼른 눈길을 거두었다.‘어우, 무섭게 생겼네...’“그리고 혹시 누가 날 찾으면 바로 전화해.”심미연이 덧붙이자 비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심미연은 몸을 조금 굽혀 박시훈의 눈을 마주 보며 부드럽게 물었다.“걸을 수 있겠어요? 아니면 경비를 불러 차까지 모셔드릴까요?”박시훈의 얼굴은 금세 먹구름이 낀 듯 어두워졌다. 세상이 그에게 따뜻함을 한 줌도 허락하지 않은 듯 억울한 표정이었다.‘이 정도로 다쳤는데 미연 씨가 날 부축해 주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데 경비원을 부르겠다니...’박시훈은 심미연의 말을 듣고 실망했다.“왜 그래요?”심미연은 그의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다.“그.
박시훈은 주먹을 한 대 얻어맞고 간신히 일어선 몸이 다시 의자에 내동댕이쳐졌다. 금방 봉합한 가슴팍 상처에서 찢어질 듯한 통증이 몰려왔고 이마에는 어느새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그는 고통을 꾹 참으며 힘겹게 고개를 들었고 눈앞에 강지한의 팽팽히 당겨진 얼굴이 보였다. 평소엔 언제나 차분하고 깊은 눈빛을 지녔던 강지한이 지금은 분노를 안고 있는 듯 그를 삼킬 것만 같은 불타오르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박시훈의 표정도 순간 복잡하게 일그러졌다. 놀람과 분노,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당혹감이 뒤엉켰다.결국 그는 거의 고함을 치듯 외쳤다.“강지한, 미친 거 아냐? 말도 없이 갑자기 왜 때려! 지금 뭐 하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듯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시선을 심미연의 희고 가는 손에 꽂은 채 끝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눈빛엔 설명할 수 없는 집착과 병적인 소유욕, 그리고 일종의 결벽증에 가까운 갈망이 서려 있었다.마치 그 손에 아직도 박시훈의 체온이 남아 있을 것만 같다는 착각에 사로잡힌 듯 강지한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그 손을 잡고 데려가 찬물에 박박 씻어내고 싶었다. 손끝 하나 남김없이 처음처럼 깨끗하고 순결했던 상태로 되돌리려고.“누가 널 보고 심미연을 건드리랬어?”강지한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위협적이었다. 말끝마다 이가 부딪히는 듯한 날카로움이 묻어 있었고 타협 없는 위협을 의미하는 듯했다.강지한의 세계 속에서 심미연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만의 ‘소유물’이었다. 그녀는 그의 여자였고 마음 깊은 곳에서 가장 연약하면서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였다.그 누구도, 설령 오랜 친구라 할지라도 그 경계를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귓가에 아직도 강지한의 그 집착 어린 말투가 아른거렸다.그녀는 한숨을 쉬면서 복잡한 감정을 삼켰다. 강지한은 한때 항상 온화하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지금 이 낯선 표정과 말투,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생
강지한은 두려웠다. 자신의 고집과 독단이 심미연과 아이를 더 멀어지게 만들고 심지어는 과거의 비극을 되풀이하게 될까 봐.그래서 그는 인내를 배웠고 절제를 익혔다. 비록 그 절제가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괴롭고 아팠을지라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심지어 박시훈일지라도 그와 심미연 사이에 존재하는 미묘하고도 위태로운 경계를 함부로 넘는 일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심미연은 강지한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를 관통해 아무 상관 없는 이방인을 보는 것처럼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그 무심하고 차가운 시선 속에는 짙은 조소가 스며 있었고 그건 어떤 말보다도 상처로 깊이 박혔다.“강지한, 잊었나 본데...”그녀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그 말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정교하게 세공된 날카로운 칼끝처럼 정확히 그의 가슴을 찔러왔다.“우리 사이는 4년 전에 끝났어. 네 입에서 ‘내 여자’라는 말이 나오는 건 너의 비정상적인 소유욕일 뿐이야.”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단호했고 그 말은 마치 갑작스레 몰아친 폭풍처럼 강지한이 오랫동안 쌓아 올린 모든 신념과 자존심을 산산이 무너뜨렸다.강지한은 당황했고 분노했으며 그보다 더 큰 좌절과 무력감이 가슴을 짓눌렀다.바로 그 순간 그는 비로소 깨달았다. 지금까지 자신이 보여온 사랑은 빼앗고 움켜쥐는 방식에 불과했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결국 아무것도 가질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이때 박시훈의 시선은 심미연의 작고 예쁜 얼굴에 꽂혀 있었다. 그녀의 눈빛은 맑고도 냉정했으며 세상의 모든 거짓을 꿰뚫어 보는 듯했지만 동시에 사람들과의 거리감이 너무나도 분명해서 넘을 수 없었다.그 순간 박시훈은 가슴 깊은 곳에서 설명할 수 없는 짜릿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건 어쩌면 ‘권력’이라 불리는 존재에 도전하는 듯한 일종의 쾌감이었다.‘강지한’, 그 이름은 오랫동안 그의 세계를 짓누르는 거대한 그림자였다. 모든 것을 손에 쥐고 흔들던 절대자, 사람들조차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못
박시훈은 심미연의 부축에 힘을 빌려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돌리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걸치고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좋아요.”그러면서도 시선의 끝자락으로는 살짝 떨어진 거리에서 강지한이 보이는 반응을 조심스레 훔쳐보았다.강지한의 얼굴은 마치 폭풍 전야의 하늘처럼 어두컴컴했다. 그의 날카롭기로 유명한 눈빛은 이 순간 불길처럼 타오르고 있었고 깊고 검은 눈동자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박시훈의 마음은 복잡한 감정으로 뒤섞였다. 사업가로서 냉정하고 치밀하게 ‘전장’을 지휘하던 강지한은 언제나 표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냉철한 인물이었고 사람들에게 감정이라곤 없는 기계처럼 여겨졌었다.하지만 지금 심미연은 그런 강지한을 화나게 만들었고 심지어는 질투하게 만들었다.‘그러네, 질투하는 거였어!’박시훈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이번 무언의 대결에서 자신이 우세를 점한 듯 보였지만 정작 마음속 깊은 곳엔 조금의 기쁨도 없었다. 오히려 뭔가 답답하고 찝찝했다.“박시훈 씨, 가요.”그 순간 부드럽고 따뜻한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이며 그의 흩어진 생각을 다시 현실로 끌어당겼다. 고개를 돌려 심미연을 바라보니 그녀는 여느 때처럼 침착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강지한을 앞에 두고도 저토록 태연한 모습이라니, 아무래도 강지한을 마음에 두고 있지는 않은 모양이었다.‘미연 씨는... 지한이를 사랑하지 않는구나.’그 사실을 깨달은 순간 박시훈의 기분은 조금 가벼워졌다.그러나 바로 그때 날카롭고 매서운 목소리가 정적을 찢고 들어왔는데 그 말 한마디가 박시훈의 가슴팍을 정통으로 찔렀다.“박시훈, 너 다리가 부러졌어, 아니면 팔이 나갔어? 왜 여자한테 부축까지 받는 거야?”그 말투엔 감춰지지 않는 조롱과 위압이 섞여 있었고 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지한과 눈을 마주치자 그 검고 깊은 눈동자 속에 얼음장 같은 서늘함이 서려 있는 것이 보였다.박시훈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폈다.심미연은 짜증 섞인 눈빛으로 강지한을 노려보았다.
강지한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나랑 지유는...”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시훈이 불쑥 끼어들었다.“미연 씨... 가슴이... 마치 수천 개의 바늘이 박힌 것처럼 아파요.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예요. 혹시...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그의 목소리에 진한 고통이 묻어났고 얼굴은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져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이었다.강지한은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박시훈, 너... 정말로 내 사람을 가로채려는 거야?”하지만 강지한의 여인이 그렇게 쉽게 빼앗길 리가 있는가?박시훈은 더 이상 그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직 심미연만 쳐다보았다.“이제 가도 될까요?”그가 보기엔 심미연과 강지한의 언쟁은 겉으로는 날이 서 있는 듯 보였지만 실상은 오래도록 꺼지지 않은 감정의 불씨가 바람에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그만큼 지극히 위험하고 치명적이었다.반면 자신과 심미연 사이에는 언제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얇은 장막 하나가 가로놓여 있었고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에서 가까워질 기회를 잡기도 전에 늘 놓쳐버리고 만다. 심지어 다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만큼의 간극이었다.그래서 박시훈은 절대 저 둘이 더 오래 함께 있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심미연은 잠시 강지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눈길을 거두었다.그리고 단호한 눈빛으로 입을 열었다.“그래요. 지금 바로 같이 병원으로 가요.”그 말에 박시훈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같이’라는 단어가 마치 봄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가 싸늘하던 마음에 조그마한 온기를 남겼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와 그는 ‘심미연과 박시훈’이 아니라 ‘우리’였다.심미연은 더 이상 강지한을 돌아보지 않았고 박시훈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겼다.잠시 뒤 강지한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빠르게 그들을 뒤쫓아왔다. 그러고는 박시훈의 팔을 붙잡으며 낮고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부축할게. 그래야 더 빨리 갈 수 있지.”그러자 박시훈은 속으로 욕이 목구멍까지 치밀었다.‘이 자식, 진짜 사람 속 뒤
심미연은 고개를 홱 돌렸다. 시선이 옆에 서 있는 박시훈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피 한 방울 남지 않은 듯 창백한 얼굴과 이마를 뒤덮은 땀방울이었다. 지금 박시훈은 극심한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이때 심미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즉시 깨달았다. 박시훈의 상처가 다시 벌어진 것임을.그녀가 가늘고 가지런한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강지한 쪽을 돌아보니 그는 마치 온 세상이 자기에게 빚이라도 진 듯 분노로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그 순간 심미연의 얼굴은 단숨에 서릿발처럼 차가워졌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그 맑은 눈동자 속엔 두 줄의 칼날이 담겨 있는 듯 단숨에 사람의 심장을 찌를 것 같은 날카롭고 매서운 눈빛이 드러났다.그녀는 단단한 결심을 품고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한에게로 다가갔다.그리곤 망설임 없이 그를 밀쳐냈다.“박시훈 씨 다쳤는데 왜 그렇게 세게 잡아당겨!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쩌려고!”심미연의 목소리는 날이 서 있었고 눈빛은 칼끝처럼 예리했다. 그녀는 강지한을 똑바로 응시하며 외쳤다.“이 정도 상식도 없어, 강지한?”심미연이 밀치자 강지한은 몇 걸음 뒤로 물러났고 얼굴에 더 짙은 분노가 어렸다.차가운 얼굴로 자신을 밀어낸 심미연을 바라보며 강지한은 그제야 뼈아프게 깨달았다. 그녀와 자신 사이에 더 이상 되돌릴 수 없는 강이 생겼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 한편이 텅 비는 듯한 좌절감이 밀려왔다.‘안 돼. 심미연을 이렇게 그냥 보낼 순 없어!’“박시훈 씨, 가요.”심미연은 금세 감정을 가라앉히고 평온한 얼굴로 박시훈을 바라보았다.박시훈은 여전히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지만 그녀가 미소를 머금고 자신을 바라보는 순간 이상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는 듯했다.‘미연 씨의 미소가 설마 치유하는 힘이라도 있는 걸까?’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그를 끌고 자신의 차로 향했다.“타요.”박시훈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차 문을 열고 올라탔다.심미연은 운전석에 앉자마자 곧바로 시동을 걸었다.강지한이 다급히 달려와 차 문을 잡
박시훈의 상처가 너무 깊어 봉합이 필요해서 심미연은 곧장 그를 수술실로 데려갔다.수납 창구로 가 요금을 지불하려던 찰나 갑자기 어디선가 한 사람이 휙 튀어나오더니 그녀의 손에서 휴대폰을 낚아채 도망쳤다.요금을 받던 직원조차 그런 장면은 처음이었는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대낮에 병원에서 휴대폰을 털다니!’그런데 정작 휴대폰을 빼앗긴 심미연은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고 오히려 침착하게 가방을 열어 그 안에서 또 다른 휴대폰을 꺼냈다.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번호를 눌렀다.“내 휴대폰 위치 추적해. 그리고 혹시 상황이 심상치 않으면 바로 폭파해 버려!”그녀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폭파’라는 단어는 등골이 오싹해질 말이었다.그런데도 그녀는 마치 친구랑 날씨 이야기나 하는 듯 가볍게 내뱉었고 일말의 살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심미연 주위에 서 있던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이 여자... 보통이 아니네.’‘멀리 있어야 괜히 엮이지 않겠지...’한편 병원 밖에서 한 남자가 외투를 벗어 근처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후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도련님, 심미연 씨의 휴대폰을 확보했습니다.”“지정한 장소에 놔둬. 내가 사람 보낼게.”“예, 알겠습니다.”전화를 끊은 남자는 재빨리 택시 한 대를 세우고 주소를 불러주었다.그 시각 요금을 다 내고 수술실 쪽으로 돌아가던 심미연의 휴대폰이 울렸다.“방금 위치 전송해 드렸습니다. 그런데요... 무슨 묘지 근처 같습니다.”심미연은 눈썹을 치켜올렸다.“바로 사람 몇 명 보내. 나도 직접 갈 거야.”전화를 끊고 나니 그녀는 어느새 수술실 문 앞에 도착해 있었고 막 자리에 앉으려던 순간 수술실 안의 불이 꺼졌다.그리고 곧 문이 열렸고 박시훈이 스스로 걸어 나왔다.심미연을 발견한 그는 두 눈이 환히 빛나며 달려왔다.“아직 안 갔네요!”그는 수술대 위에 누워 있는 동안 심미연이 자신을 두고 떠났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다리고 있을 줄
심미연은 미간을 찌푸리며 의아한 기색을 담아 물었다.“무슨 일이길래 그래요?”이지연은 숨을 깊이 들이쉬고 일부러 속도를 늦추며 차분하게 말했다.“온지유 씨가 도망쳤어요.”“언제요?”심미연의 눈빛이 반짝이며 날카로워졌다. 누가 이 일을 배후에서 조종하고 있는 건지 의심이 스쳤다.“어젯밤에요.”이지연의 목소리는 한껏 가라앉아 있었고 자책감이 가득 배어 있었다.“죄송해요. 제가 방심했어요.”심미연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미안해하지 마요. 이건 지연 씨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이지연은 입술을 꼭 깨문 채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그럼 이제 어떻게 하죠? 제가 당장 찾아올까요?”심미연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녀는 손끝으로 휴대폰을 천천히 만지며 생각했다.“잠깐만 생각 좀 해볼게요.”어젯밤 강지한이 교통사고를 당한 장면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맴돌았다. 혹시 온지유의 실종과 강지한이 관련 있는 걸까? 만약 강지한이 온지유를 구한 거라면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얻은 거지? 끝도 없이 밀려드는 의문들이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참, 보스. 어젯밤에 스승님 못 보셨어요?”이지연이 물었다.심미연은 고개를 저었다.“아니요.”사실은 봤었다. 그녀는 진운혁이 차를 몰고 떠나는 걸 보고 따라붙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는 걸 말하지 않았다.“그럴 리가요? 제가 분명히 확인했는데... 스승님께서 이진영 씨랑 같이 식사하고 계셨어요!”이지연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심미연은 다시 한번 미간을 찌푸렸다.문득 이전에 마주쳤던 진운혁의 모습들이 떠올랐고 그 순간 한 가지 의심이 그녀의 마음속을 훑고 지나갔다.‘그때 내가 본 스승님은... 정말 스승님이 맞았을까? 만약 누군가가 스승님을 사칭하고 있었다면 그 목적은 대체 뭘까?’그때 이지연의 흥분한 목소리가 심미연의 생각을 끊어냈다.“보스! 새로운 정보를 발견했어요!”“무슨 정보예요?”심미연은 본능적으로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이자 이지연의 들뜬 목소
백선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진은숙의 팔을 살짝 끌어당기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우리 이제 가요.”진은숙은 손바닥 위에 놓인 봉투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다가 망설이면서 입을 열었다.“이건... 어쩌죠?”백선영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 난처한 상황을 심미연에게 넘기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봉투를 조심스럽게 심미연 앞에 내려놓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사모님, 마음은 충분히 받았지만... 이 돈은 받을 수가 없어요.”심미연은 미소를 지으며 눈길을 봉투 위로 흘렸다.“오빠가 직접 드린 건데 마음 편히 받으세요. 저한테 돌려주실 필요는 없어요. 자, 얼른 가서 일 보세요. 저 벌써 배가 고파졌는걸요.”그러나 말하다가 알 수 없는 서운함이 스르르 마음 한쪽에 올라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박유진은 예전에 밤하늘을 보며 수없이 약속했었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그녀와 아이를 평생 지키겠다고. 그런데 지금 그 약속들은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금세 꺼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오빠, 나랑 약속한 거 잊은 거야?’“정말 감사합니다, 사모님! 사모님과 사장님 두 분 다 참 요즘 보기 드물게 좋은 분들이세요. 두 분, 좋은 일만 가득하시고 영원히 행복하시길 빌게요!”진은숙은 기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고 백선영의 팔을 붙잡고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오늘 정말 행운이 따랐다 싶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다니.심미연도 가볍게 한숨을 쉬고 나서 주방으로 들어가 컵에 따뜻한 물을 따라 목을 축였다. 어쩐지 목이 바싹 마른 게, 감정이 몰려서 그런 걸까.막 물을 다 마셨을 무렵 문밖에서 귀엽고 여린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어디 있어요?”그 소리는 마치 봄날에 막 피어난 꽃처럼 듣는 사람 마음을 몽글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심미연은 표정이 풀렸고 얼른 얼굴을 내밀며 따뜻하게 웃었다.“우리 태하, 엄마 여기 있어!”심태하는 쏜살같이 달려와 그녀 품에 안겼다.“엄마, 아빠가 나 버렸어요!”심미연은 깜짝
백선영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모깃소리만큼이나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말했다.“사장님께서 떠나시기 전에... 집에 안 계시는 동안 꼭 사모님과 도련님을 잘 챙기라고 당부하셨습니다.”진은숙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맞아요, 맞아요! 사장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고는 바로 캐리어 들고 곧장 나가셨거든요.”심미연은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마음속으로 박유진의 말뜻을 곱씹어 보았지만 마치 안개 속을 걷는 듯 선명하게 와닿지 않았다.“그런데요, 사모님...”진은숙이 심미연을 흘끗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눈빛에는 망설임과 불안이 뒤섞여 있었다.“왜 그러세요?”심미연은 눈썹을 살짝 찌푸렸지만 말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 언제나 그래왔듯 도우미 아주머니들에게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태도가 마치 봄바람처럼 따뜻하고 너그러웠다.진은숙은 잠시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더니 마음을 굳힌 듯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어젯밤에 제가 목이 말라서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계단 모퉁이에서 사장님을 마주쳤었어요. 사장님도 물 마시러 나오신 것 같았어요.”곁에 서 있던 백선영도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저도요!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길래 문 열고 나왔더니 사장님이 아래층으로 내려가고 계셨습니다.”심미연은 입을 다문 채 생각에 잠겼다.‘어젯밤에 오빠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진은숙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어서 말했다.“불빛이 비쳐서 얼핏 봤는데 사장님 눈가가 벌겋게 부어 있더라고요. 꼭 방금 울기라도 한 사람처럼요. 아마 제가 눈치챌까 봐 인사만 툭 하고는 곧장 자리를 피하셨어요. 전 그냥 물만 마시고 방으로 돌아갔는데 보니까 사장님은 그 자리에 그대로 멍하니 서 계셨어요. 제가 방에 들어간 뒤에도 안 들어오시더라고요.”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조심스럽게 덧붙였다.“오늘 아침에 사장님께서 나가신 뒤에 서재를 청소하러 들어갔는데 휴지통에 담배꽁초가 가득 쌓여 있었어요. 어젯밤 내내 잠도 못 주무시고 담배만 피우셨던 것 같아요..
휴대폰 화면이 켜지고 그 익숙하면서도 가슴을 죄는 번호가 뜨는 순간, 박유진의 심장은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움켜잡힌 듯 조여들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가슴속에서 일렁이며 축축한 솜처럼 뭉쳐져 목덜미를 틀어막았고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말은 더더욱 나올 리 없었다.그 번호는 마치 꿈결 속 가장 마주하고 싶지 않은 유령처럼 소리 없이 다가와 그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의 고통과 갈등을 다시 불러냈다.박유진은 손을 떨며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다가 한참을 망설인 끝에 결국 전화를 받지 않기로 했다.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공기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과 묘한 압박이 가득했다. 박유진은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고 손끝으로 천천히 휴대폰 키보드를 두드려 문장을 써 내려갔다.[진성에 가서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돌아가면 다시 이야기하자. 그래도 되지?]그 메시지엔 그의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현실을 피하고 싶은 마음도, 언젠가 다시 마주하길 바라는 희미한 기대도 모두 그 짧은 문장 안에 섞여 있었다.메시지 전송을 마친 박유진은 망설임 없이 전원을 꺼버렸고 휴대폰을 한쪽으로 툭 던졌다. 마치 그렇게 하면 마음속 어지러운 생각들까지 함께 던져버릴 수 있을 것처럼.주변은 순식간에 조용해졌고 텅 빈 공간엔 그의 심장 뛰는 소리만 또렷하게 울려 퍼졌다. 규칙적이고도 묵직한 박동이 마치 그 존재를 스스로 확인하려는 듯했다.박유진은 눈을 감았다. 피로한 몸은 본능적으로 가장 편한 자세를 찾아갔고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로를 찾고자 했다.비록 밤새 한숨도 못 잤고 눈은 충혈되어 있었지만 정신만큼은 유난히 또렷했다. 보이지 않는 힘이 그를 지탱해 주듯 그는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하지만 피하고 싶을수록 심미연의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서 더욱 선명해졌다. 그녀의 미소는 때론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처럼 순수하고 따스했으며 때로는 눈빛 하나로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또 부끄러워하던 그 순간순간들
박유진은 자신의 앞날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갈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했다. 심미연이 어떤 결정을 내리든 그는 언제나 그녀의 편이 될 것이란 사실.만약 그녀가 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는 가진 것을 다 내어주어서라도 그녀를 돕고 그 아이를 보살필 것이다. 마치 자신의 친딸인 양 지극정성으로.박유진은 자신의 행동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자신은 심미연을 사랑하고 그녀의 아이와 그녀가 지닌 모든 것을 함께 안아줄 준비가 되어 있음을.심미연의 눈가는 어느새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녀의 두 손은 마치 물에 빠진 이가 살고 싶어서 지푸라기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박유진의 옷깃을 꼭 움켜쥐었다. 수많은 감정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그녀가 박유진에게 진 빚은 너무나도 많고 무거웠다. 그 빚을 다 갚기 위해서는 평생이라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몰랐다.“시간이 늦었으니까 이젠 좀 쉬어. 나도 방으로 돌아갈래.”박유진의 목소리엔 알아채기 어려울 정도로 미세한 떨림이 묻어났다. 그는 본능적으로 심미연을 더욱 꼭 안았다. 마치 그녀를 자신 뼛속 깊이까지 끌어안고 다시는 떨어지지 않겠다는 듯이.어쩌면 이 다정함이 그들 사이 마지막 남은 따뜻함이 될지도 모른다...박유진의 마음속은 쓸쓸함으로 가득했다. 머릿속 이성은 매서운 바람처럼 그를 휘감으며 이제는 놓아줄 때라며 끊임없이 속삭였다.하지만 감정은 뿌리 깊은 덩굴처럼 박유진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는 얼마나 바랐던가. 단 한 순간이라도 더 심미연의 곁에 머물 수 있기를. 이 찰나의 시간이 남은 생을 따뜻하게 데워줄 수만 있다면...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박유진의 얼굴을 어루만졌고 그녀의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박유진의 마음속 한기를 모두 녹이는 듯했다.심미연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고 부드럽게 말했다.“이생에 오빠를 만나 알아가고 수많은 인파를 뚫고 함께 걸을 수 있었던 건... 정말 큰 복이었어. 앞으로 어떤 길을 가더라도 우리 손 놓지 말고
박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눈빛이 그녀를 감쌌고 낮지만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응. 말해 봐.” 심미연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과 마주친 순간, 마음 한켠에서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이 피어올랐다. 마치 오래도록 감춰온 비밀이 이제야 드러날 것만 같은 예감처럼. “왜 그래, 미연아?” 박유진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우면서도 따뜻했다. 그녀의 불안을 감싸 안으려는 듯 아주 섬세하게 묻는 말이었다. 심미연은 입을 열 듯 말 듯 망설였다. 떨리는 입술이 달싹이기만 할 뿐 말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리고 있는 건 누구에게도 쉽게 털어놓을 수 없던 진실이었다. 그러다 마침내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강지한의 딸, 강상미. 들어본 적 있지?” 박유진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아이가 왜?” 툭 튀어나온 말이었지만 그의 마음속에 조용한 파문이 일었다. ‘미연이랑 강지한의 딸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왜 지금에서야 그 아이를 말하는 걸까.’ 심미연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다짐하듯 눈을 감았다가 뜨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사실 예전에 내가 잃어버린 내 딸... 그 애는 세상을 떠난 게 아니었어.” 그 말 한마디를 꺼내기 위해 그녀는 거의 모든 용기를 다 쏟아부었다. “정말이야?” 박유진의 목소리는 놀라움에 젖어 있었다. 그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때 너 분명히 말했잖아. 아이 숨 안 쉬고 있었다고. 직접 확인했었잖아... 확신했었어.” 그 순간, 박유진의 머릿속을 스친 단 하나의 가능성. ‘설마... 지금 미연이가 말하려는 게... 그 아이가 강상미라는 말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껏 맞춰지지 않던 조각들이 하나로 이어지고 복잡하게 얽혔던 퍼즐이 비로소 그 실체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박유진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손끝이 얼어붙고
박시훈은 눈을 깜빡이며 바로 앞에 있는 얼굴을 바라봤다.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예쁜 여자가 있을 수가 있지?’ 심장이 터질 듯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심장 박동이 너무 빠른데요? 정상은 아닌 것 같네요.” 심미연은 이마를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박시훈은 민망해서 땅속으로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였다. ‘내가 왜 비정상이야... 완전 정상이거든...’ 심미연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상처를 확인했다. 상처는 붉게 부어 있었고 피도 조금 배어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약을 꺼내 상처 위에 다시 발라주었다. 상처는 쓰라렸지만 박시훈은 이 순간이 영원히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곁에 있는 지금이 너무도 소중했다. 심미연은 조심스럽게 상처를 감싸고 도구들을 하나씩 정리했다. 마무리를 한 뒤 장갑을 벗으며 병실을 나갈 준비를 했다. “저... 방금 야식 시켜놨는데... 같이 먹고 가주면 안 돼요?” 박시훈은 괜히 목이 메여 말끝이 흐려졌다. 자신이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다니, 스스로도 놀라웠다. ‘내가 왜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거야...’ “저는 밤에 야식 먹는 습관 없어요.” 심미연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야식 너무 자주 먹지 마요. 건강에 안 좋아요. 전 이만 갈게요. 야식 먹고 푹 쉬세요.” 그녀의 말에 박시훈은 마치 한겨울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얼어붙었다. 심지어 발끝까지 저릿했다. 그녀가 간다. 그를 남겨두고 그냥 떠나버린다. 속이 텅 빈 것처럼 허전했다. 심미연은 이미 등을 돌린 채 병실을 나서고 있었고 박시훈의 낙담한 얼굴은 그녀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병실을 벗어난 심미연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몇 시간째 이어진 수술에, 온몸이 녹초가 된 상태였다. 하지만 강지한을 살릴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로비로 걸어 나왔을 때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심미연의 시선이 하얗게 눈처럼 샌 강준형의 머리카락에 머물렀다. 가슴 어딘가가 저릿하게 아려왔다. 만약 시간이 되돌릴 수 있다면. 그저 아무 걱정 없이 웃던 그 시절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땐 주저 없이 말했을 것이다. ‘네. 할게요.’그때 그녀는 강지한을 사랑했고 그의 가족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더 이상 강지한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리고 강준형이 걱정된다고 해서 그 바람을 무조건 들어줘야 할 이유도 없었다. 곁에서 조용히 그녀를 훔쳐보던 가정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사모님은 역시 마음이 떠나신 거구나...’ ‘이러다 어르신 또 며칠을 우울하게 보내시겠네...’강준형도 그녀의 침묵에서 모든 걸 느낄 수 있었다. 인연이란 게 억지로 붙잡는다고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비록 아쉬움은 남지만 그 역시 그녀의 선택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할아버지, 사실 저랑...”“딩.” 심미연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려는 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고개를 든 그녀는 곧장 부드러운 눈빛을 머금은 박유진과 눈이 마주쳤고 그 말은 다시 목구멍 깊숙이 삼켜졌다.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박유진은 따뜻한 미소로 대답했다. “너 데리러 왔어.” 그리고 곧 예의를 갖춰 강준형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강준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유진아, 너랑 미연이...?” 어딘가 모르게 다정해 보이는 둘의 분위기. 설마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의심이 스쳤다.“할아버지, 제가 차까지 모셔다드릴게요.” 심미연은 사실 내일 박유진과 혼인신고를 하러 갈 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조금 전, 강준형이 ‘강지한과 다시 잘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말이 떠오르자 그 말을 도저히 꺼낼 수 없었다.‘말하지 말자. 괜히 말했다가 할아버지 마음만 상할 수도 있어.”그 순간, 박유진의 손이 저절로 움켜쥐어졌다. ‘할아버지한테
하지만 정작 온지유의 칼끝을 막나낸 사람은 그다지 친하다고 할 수 없었던 박시훈이었다. 심미연의 진지한 얼굴을 본 강준형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고 있지 않다는 걸 단박에 알아챘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녀는 조심스레 그를 의자에 앉히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 앉아 계세요. 옷만 갈아입고 금방 나올게요.” “그래. 다녀오너라.” 강준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가볍게 흔들어 보냈다. 심미연이 등을 돌려 복도로 사라지자 그는 그녀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곁에 서 있던 가정부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요즘 사모님이 예전보다 훨씬 더 예뻐지신 것 같아요. 성격도 훨씬 부드러워지셨고요. 만약 사모님이 도련님과 다시 재결합하신다면 어르신께서도 도련님 혼자 남을까 봐 걱정 안 하셔도 될 텐데요.” 강준형은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미연이가 돌아온다면 지한이도 지금처럼 외롭진 않겠지. 상미도 엄마 손길이 필요하고... 지한이가 아무리 잘 챙긴다 해도 아빠는 아빠일 뿐이지. 엄마처럼 섬세하긴 어렵잖니. 게다가 지한이는 이노하이브를 이끄는 입장이라 상미를 온전히 돌보기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고 말이다.” “나중에 사모님께 슬쩍 한번 말씀드려보시는 건 어떠세요?” 가정부는 늘 심미연을 좋게 봐왔다. 도련님과 이혼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요즘 세상에 외모, 인품, 성격, 효심까지 갖춘 여자를 다시 만나긴 정말 쉽지 않으니까. 강준형은 또다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분위기 봐서 말해보지. 미연이가 듣기 싫어하면 더는 꺼내지 않을 거다.”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가정부도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심미연이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다가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시죠. 할아버지. 제가 집까지 모셔다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