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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웠다.
아스팔트가 왼쪽 뺨에 닿아 있었다. 눈앞은 흐릿했다. 번진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강도 그제야 상황이 떠올랐다. 배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전화해야 하는데 죽어가면서도 남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면 밥이 식을 텐데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었다. 그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한 것이 마지막 미련이었다. 참 한심했다. 시야가 점점 좁아졌다. 서울의 3월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가로등 불빛마저 천천히 사라졌다. 그리고 완전한 어둠 --- 눈을 떴다. 하얀 천장이 보였다. 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곰팡이가 핀 익숙한 천장 몸을 일으켰다. 좁은 원룸 책상 위에 쌓인 전공서적,벽에 붙어 있는 강의 시간표,침대 옆 협탁 위의 낡은 휴대폰 모든것이 이상했다.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2018년 3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 12분 숨이 턱 막혔다. 거울 앞으로 다가갔다. 스물두 살의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 통통한 뺨,다크서클 하나 없는 피부,염색하기 전의 검은 머리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방금 전까지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8년 전 대학생 시절의 원룸에 앉아 있다.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 칼이 몸을 파고들던 감각도, 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도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죽음은 분명했다. --- 기억이 밀려왔다. 잊고 싶었던 과거까지 전부 처음 만난 건 회사 선배였다. "넌 회장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아."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그 말에 모든 걸 걸었다. 결혼식 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 새어머니는 축복 대신 비웃음을 보냈고, 남자는 괜찮다고 말했다. 둘만 행복하면 된다고,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결혼 후 반년쯤 지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 귀가는 늦어졌고, 휴대폰은 늘 뒤집혀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등장하는 이름 하나 '오수빈' 처음에는 믿었다. 자신이 예민한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를 바라보는 눈빛과 나를 대하는 태도는 너무도 달랐다. "밥이 왜 이래?" "또 울어?" "수빈이좀봐봐 넌 좀 꾸미고 다녀 거울은 보고다니냐?" 비교는 습관처럼 이어졌다. 그때 떠났어야 했다. 이혼을 요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화장실에서 울고 나와 다시 밥을 차렸다. 술 냄새 사이에 다른 향수가 섞여 있어도 모른 척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 사람이 유일하게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준 사람이었으니까 아버지도, 새어머니도, 그 누구도 아니었으니까 ---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대학교 선배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니던 성실한 남자. 그는 처음으로 이름을 불러준 사람이었다. 짧은 연애였다. 반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시간만큼은 따뜻했다. 헤어진 이유는 지금 생각하면 우스웠다. 보여준 사진 한 장,몇 마디 악의적인 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원래부터 사랑받을 자격이 없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사실을 확인할 용기조차 없었다. 그래서 먼저 도망쳤다. 그는 계속 연락했다. 전화도, 문자도 하지만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연락이 끊겼다.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 휴대폰 화면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2018년 3월 2일 연락처를 열었다.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손끝이 떨렸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점 배신도,결혼도,후회도 없던 시간 그 이름을 한참 바라보다가 결국 화면을 꺼버렸다. 지금 당장 연락할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 --- 샤워를 마치고 나와 거울 앞에 선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어깨가 축 처져 있었다. 고개도 습관처럼 숙여져 있었다. 천천히 어깨를 피고 고개를 들었다. '한성그룹 회장의 딸' 언제나 부담스럽고 불편했던 그 사실이 처음으로 부끄럽지 않았다. 그때 카카오톡 알림이 울렸다. 새어머니였다. 이번 주말 가족 식사에 오라는 메시지 예전이라면 수십 번 고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시험 기간이라 어려울 것 같아요.' 짧은 답장을 보냈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아버지께 직접 말씀드릴까?' 망설이지 않았다. '네. 그러세요.' 전송 버튼을 누른 순간 심장이 크게 뛰었다. 처음으로 거절했다. 고작 한 줄이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속이 후련했다. 이제 시작이었다. --- 며칠 뒤 3월의 캠퍼스에는 아직 차가운 바람이 남아 있었다. 벚꽃나무 가지마다 작은 봉오리들이 맺혀 있었다. 강의실 건물 앞을 지나던 순간,익숙한 뒷모습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고,가방을 한쪽으로만 메는 버릇 숨이 멎는 것 같았다.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 굳었던 표정이 금세 풀리고,평범한 인사가 이어졌다. "어, 왔어?" 친구에게 건네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목소리 그런데 이상했다. 가방끈을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 반가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마치 잃어버린 사람을 다시 찾은 것처럼 그 의미를 아직 몰랐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확실했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기로 했으니까강한결의 전 재산은 87만 원이었다.장학금에서 생활비를 빼고 남은 돈에 고시원 방을 구하면서 맡긴 보증금 50만 원까지 제외하고 나니, 지금 당장 손에 쥐고 움직일 수 있는 돈은 고작 87만 원뿐이었다.전생에서 중견기업 CEO의 자리까지 올라갔던 남자가 다시 시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지만, 한결은 그 돈을 바라보면서도 조급해하지 않았다.오히려 고시원 책상 위에 노트를 펼쳐놓고 날짜부터 적어 내려갔다.2018년 3월펜끝을 잠시 멈춘 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숫자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비트코인은 지금 바닥에 가깝다.»전생의 자신은 비트코인을 너무 늦게 알았다.주변에서 투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가격이 상당히 오른 뒤였고, 뒤늦게 조금 사들이기는 했지만 제대로 된 기회를 잡지는 못했다.하지만 지금은 달랐다.2018년 3월, 비트코인은 800만 원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앞으로 더 떨어질 예정이었고,연말에는 400만 원대까지 내려가고, 그 뒤로 긴 침체기를 보내다가 2020년 말부터 다시 무섭게 치솟기 시작한다.그리고 2021년수천만 원을 넘어 8천만 원대까지 올라간다.머릿속에서 숫자가 빠르게 움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계산이 이어졌다.87만 원으로 지금 당장 비트코인을 사 봐야 큰 의미는 없었다. 가진 돈을 전부 넣어도 0.1개가 채 되지 않으니, 지금 필요한 건 비트코인을 사는 일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살 수 있는 돈을 만드는 것이었다.한결은 노트의 다음 줄에 천천히 적었다.«첫 번째 수는 주식.안전하게 종잣돈을 만든다.»전생에서 사업을 하며 쌓은 경험은 지금 그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되어 있었다.어떤 바이오 기업이 임상 3상 결과를 발표하는지, 어느 게임사가 해외 시장에서 성공을 거두는지, 어떤 플랫폼이 예상보다 빠르게 성장하는지 알고 있었고, 무엇보다 그 일이 언제쯤 주가에 반영될지도 기억하고 있었다.물론 모든 일이 전생과 똑같이 흘러간다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사소한 변수 하나가 시장의 흐름
그는 죽는 순간을 정확히 기억했다.빗길이었다.한강대교 위 핸들을 잡은 손끝에 감각이 없었다.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몸은 이미 한계에 가까웠고, 눈앞에는 빗줄기가 벽처럼 쏟아지고 있었다.하지만 핸들을 놓친 건 졸음 때문이 아니었다.'서하가 죽었어.'그 이름이 머릿속에서 계속 울리고 있었다.사흘 전이었다.업무차 한성그룹 본사를 방문했다가 우연히 복도에서 떠도는 이야기를 들었다."윤 회장님 딸 강도 사건 당하셨대""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됐다던데""남편분이 장례 치르셨다더라"순간 발이 멈췄다.윤 회장의 딸대학교 시절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아무런 설명도 없이 떠나버린 여자오랫동안 잊었다고 생각했던 여자윤서하그 이름을 입 밖에 꺼내지 않은 지 벌써 7년이었다.한성그룹과 계약을 맺으며 회장의 이름을 봤을 때도 일부러 연결 짓지 않았다.아니,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결국 확인했다.부고 기사를 찾아봤고, 사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서하였다.장례식장에도 갔다.누구에게도 아는 척하지 않았다.그저 맨 뒤에 서서 영정 사진만 바라봤다.사진 속 그녀는 웃고 있었다.하지만 그가 알던 웃음은 아니었다.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그때 상주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남편눈은 부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슬퍼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무언가를 계산하는 사람 같았다.문상객이 두고 간 봉투를 흘끗 바라보는 시선그 순간 설명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밀려왔다.근거는 없었다.그저 직감이었다.하지만 며칠 뒤 그 직감은 사실이 되었다.사업을 하며 사람의 뒷면을 읽는 법을 배웠다.그래서 그 남자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결과가 나오기까지 일주일보고서를 읽는 동안 손끝이 차갑게 식어갔다.결혼 전부터 이어진 외도결혼 후에도 계속된 관계공동명의로 변경된 재산사망 직후 진행된 보험금 수령 절차그리고 마지막 기록 사망 추정 시각 직전의 통화 내역상대는 내연녀였다.강도 사건이라면 설명되지 않는 것
차가웠다.아스팔트가 왼쪽 뺨에 닿아 있었다.눈앞은 흐릿했다. 번진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누군가의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강도그제야 상황이 떠올랐다.배에서 뜨거운 것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막아보려 했지만 손가락조차 움직이지 않았다.아...이대로 정말 죽는 건가?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전화해야 하는데죽어가면서도 남편 걱정을 하고 있었다. 늦게 들어오면 밥이 식을 텐데 문자를 보내려던 참이었다.그 문자 하나 보내지 못한 것이 마지막 미련이었다.참 한심했다.시야가 점점 좁아졌다.서울의 3월 밤하늘엔 별 하나 보이지 않았다.가로등 불빛마저 천천히 사라졌다.그리고 완전한 어둠---눈을 떴다.하얀 천장이 보였다.군데군데 페인트가 벗겨지고 곰팡이가 핀 익숙한 천장몸을 일으켰다.좁은 원룸 책상 위에 쌓인 전공서적,벽에 붙어 있는 강의 시간표,침대 옆 협탁 위의 낡은 휴대폰모든것이 이상했다.휴대폰을 집어 들었다.2018년 3월 2일 금요일 오전 7시 12분숨이 턱 막혔다.거울 앞으로 다가갔다.스물두 살의 얼굴이 거울 속에 있었다.통통한 뺨,다크서클 하나 없는 피부,염색하기 전의 검은 머리 한동안 거울을 바라보던 그녀는 다리에 힘이 풀려 침대에 주저앉았다.방금 전까지 죽어가고 있었다.그런데 지금은 8년 전 대학생 시절의 원룸에 앉아 있다.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선명했다.칼이 몸을 파고들던 감각도, 차가운 아스팔트의 냉기도 아직 남아 있는 것 같았다.죽음은 분명했다.---기억이 밀려왔다.잊고 싶었던 과거까지 전부 처음 만난 건 회사 선배였다."넌 회장 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너라서 좋아."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누군가에게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었던 그녀는 그 말에 모든 걸 걸었다.결혼식 날 아버지는 오지 않았다.새어머니는 축복 대신 비웃음을 보냈고, 남자는 괜찮다고 말했다.둘만 행복하면 된다고,하지만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결혼 후 반년쯤 지나자 모든 것이 달라졌다.귀가는 늦어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