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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or: 청산
한소희는 문을 열려던 손을 그대로 멈췄다.

이건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잠시 뒤, 그가 말을 이었다.

“예전에 짐이 위기에 빠졌을 때, 어린 소녀 하나가 목숨을 구해 준 적이 있었다. 뒤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후부의 여식이라 하기에 짐은 그 아이가 소희인 줄 알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건의 목소리가 한층 무겁게 가라앉았다.

“허나 뒤늦게 알고 보니, 그때 짐을 구한 아이는 홍난이었다.”

한소희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이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한때 그녀는 온 도성을 제 집 안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다.

어느 집 공자를 채찍질하고, 또 어느 집 도련님을 두들겨 패어 온 도성을 발칵 뒤집어 놓아도 상관없었다.

마지막에는 늘 이건이 나서서 뒷수습을 해 주었으니까.

그런데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토록 자신에게 쏟아졌던 총애도, 무슨 짓을 해도 눈감아 주던 너그러움도, 애초부터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그저 사람을 잘못 알고 베푼 마음이었을 뿐이었다.

“허나 홍난이는 서출이다.”

이때 문틈 너머로 이건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짐이 하루아침에 혼약을 파하고 홍난이을 맞아들인다면, 조정 안팎에서 비난이 끊이지 않을 것이네. 그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찬 일이오. 더구나 소희의 성정을 생각하면...”

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소 난처한 기색을 담아 말을 이었다.

“소희가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는 금란전(金鑾殿)까지 쳐들어와 난리를 피울 게 뻔하네. 온 도성이 들썩일 만큼 일을 키우고도 성이 차지 않겠지. 그리되면 홍난이가 온갖 구설을 떠안게 될 터인데, 짐은 그 아이를 그런 처지에 놓이게 할 수 없네.”

이때 한석주가 곧장 말을 받았다.

“폐하께서 깊이 헤아려 내리신 결정이옵니다. 소희도 북삭에서 몇 해 지내다 보면 그 드센 성정 또한 한결 누그러지겠지요. 소희에게도, 홍난이에게도 그편이 가장 나을 것입니다.”

이건은 그 말을 듣고 짧게 답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북삭이 비록 거칠고 척박한 곳이기는 하나, 짐이 이미 남몰래 일러 두었다. 소희가 그곳에서 박대받는 일은 없을 것이네.”

“또한 며칠 뒤 한가해지면 짐이 직접 그 아이를 데리고 사냥터에나 다녀올 생각이다. 소희는 예전부터 말 타는 것을 좋아했으니... 달래 주면 곧 괜찮아지겠지.”

그 말을 듣고 한소희는 연신 뒷걸음질 쳤다.

등골을 타고 한기가 번지더니 온몸이 싸늘하게 굳었다.

그 뒤로는 정신없이 발을 옮겼다. 어느새 침궁에 돌아와 있었지만, 어찌 여기까지 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내가 아니었어. 그저 다른 사람을 나로 잘못 안 덕에, 잠시 그 사람의 자리를 대신했을 뿐이라니.’

‘이건은 내 불같은 성정을 못마땅해했고, 내가 한홍난의 앞길을 막는다고 여겼어. 그래서 아버지와 손을 잡고 나를 북삭으로 내칠 계략까지 꾸민 거야.’

‘허나 그가 어찌 알겠는가? 내가 지난 삼 년을 어떤 지옥 속에서 살아왔는지를.’

북삭에 끌려간 첫날부터 그녀는 그들의 놀잇감이 되었다.

북삭의 귀한 집 자제들은 그녀를 백 보 밖에 세워 놓고 머리 위에 사과 하나를 올리게 했다.

곧바로 화살 하나가 머리칼을 스치며 날아갔다.

퍽!

화살은 뒤편의 나무 기둥에 깊숙이 박혔고, 산산이 터진 과육이 얼굴에 튀었다.

미처 몸을 피할 새도 없이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왔다.

날카로운 화살촉이 목덜미를 스쳤다.

베인 자리에서 흘러내린 피가 옷깃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제야 그녀는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축축하게 젖은 옷자락이 다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주변에서 폭소가 터졌다.

“대주(大周) 황제의 여인이 겁에 질려 오줌을 지렸구나!”

그날 이후로도 끝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시뻘겋게 달아오른 숯불 위를 맨발로 걷게 했다.

발바닥에는 화상으로 인한 물집이 줄줄이 잡혔고, 터진 자리마다 피가 배어 나왔다.

또한 말꼬리에 몸을 묶어 자갈밭을 내달리게 한 적도 있었다.

무릎과 팔꿈치가 갈려 나가 살점이 드러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한겨울 가장 추운 날에는 천막 밖에 내던져 밤을 지새우게 했다.

그녀는 얼어 죽지 않으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밤을 버텼다.

이튿날 끌려 들어왔을 때는 입술마저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그래도 버텼다.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 살아남았다.

이건이 반드시 자신을 구하러 올 것이라 믿었으니까.

지금은 그저 조정 일에 발이 묶여 자신을 구하러 오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황위를 굳힌 뒤에는 반드시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 하나로 그녀는 삼 년을 버텼다.

그런데 모두 거짓이었다...

그때, 밖에서 태감과 궁녀들의 낮은 수군거림이 새어 들어왔다.

“귀비마마께서 편찮으시다 하니 폐하께서 곧바로 달려가셨잖아. 황후마마께서 돌아오신 지도 한참인데, 폐하께서 언제 저리 마음을 쓰신 적이 있었나?”

“두고 보게. 황후 자리도 결국 귀비마마께 돌아갈 테니.”

한소희는 아무 말 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참 뒤 바깥에서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지자, 그녀는 창을 열어 청명한 휘파람 소리를 흘려보냈다.

잠시 후, 잿빛 매 한 마리가 어둠을 가르며 내려와 한소희의 손목 위에 내려앉았다.

한소희는 곧바로 목에 걸고 있던 옥패를 뜯어냈다.

그것은 그녀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었다.

강호 출신이었던 어머니는 숨을 거두기 전, 오랫동안 자신을 따르던 수하들을 그녀에게 맡겼다.

그리고 이 옥패가 그들을 부르는 증표였다.

북삭에서 삼 년을 견디는 동안에도 한소희는 단 한 번도 옥패를 쓰지 않았다.

이건때문이었다.

자신을 구하려고 그들을 움직였다가 자칫 대주와 북삭 사이에 분란이라도 일어날까 두려웠다.

그래서 죽을 고비를 수없이 넘기면서도 끝내 참았다.

하지만 이제는 더는 이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한소희는 옥패를 잿빛 매의 다리에 단단히 매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밤하늘로 날려 보냈다.

매는 힘차게 날개를 펼치더니 이내 짙은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곧 어머니가 남겨 주신 이들이 그녀를 데리러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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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9화

    창령산에는 유난히 일찍 봄이 찾아왔다.쌓였던 눈이 채 녹기도 전에 산허리의 늙은 복숭아나무에는 연분홍빛 꽃이 가지마다 앞다투어 피어났다.약초밭 가에 쪼그려 앉은 한소희는 고승훈을 따라 새로 돋은 약초 싹을 한 포기씩 옮겨 심느라 손톱 밑까지 온통 흙투성이였다.곁에 쪼그려 앉은 고승훈은 능숙한 손길로 모종을 옮기면서도 잔소리를 잊지 않았다.“그 줄은 모종 사이가 너무 좁소. 더 자라면 뿌리끼리 엉킬 것이오.”한소희는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잘못되면 고 의원님 책임입니다.”“내 책임이라니?”고승훈은 코웃음을 쳤다.“여기에 있는 약초들은 하나같이 귀한 것들이라네.”말은 그렇게 하나, 손으로는 이미 한소희가 삐뚤빼뚤 심어 놓은 모종의 자리를 하나씩 바로잡고 있었다.그렇게 지낸 지도 어느덧 이 년이 가까워졌다.한소희의 몸에 남아 있던 옛 상처는 모두 나았고, 칼솜씨도 금란이 이제야 봐 줄 만하다고 할 정도로 늘었다.이듬해 춘분(春分), 산 아래 장터에 다녀온 금란이 도성에서 온 서신 한 통을 가져왔다도성에 남아 있던 옛 부하들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보낸 서신에는 짤막한 글 몇 줄만 적혀 있었다.서신을 다 읽은 한소희는 종이를 반듯하게 접어 뜰 한쪽의 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마침 부엌에서 약재를 넣은 국을 끓이던 고승훈이 고개를 내밀어 한소희의 안색을 살폈다.“무슨 일이오?”“이건이 황실 종친 가운데 다섯 살짜리 아이를 양자로 들여 태자로 세웠습니다. 며칠 전에는 황위를 물려주고 출가하겠다고 천하에 알렸고요.”국자를 든 고승훈의 손이 잠시 멈췄다가 이내 다시 솥 안의 국물을 저었다.“그렇구려.”무심히 대꾸했던 그는 잠시 뒤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러다 속세로 돌아오거든 나를 찾아오라 하시오. 대머리에 쓰는 약이 있으니.”한소희는 잠시 멍하니 있다가 허리를 숙일 만큼 소리 내어 웃었다.고승훈은 웃음을 터뜨린 한소희를 말없이 바라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고는, 몸을 돌려 약재를 넣고 끓이던 냄비를 화덕에서 들어 내렸다.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8화

    이건은 떠났다.빗속으로 멀어지는 말발굽 소리가 이내 거센 빗소리에 삼켜졌고, 산문 밖에 선 한소희는 일행이 어두운 빗속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마당으로 돌아오자 금란이 생강차 한 사발을 들고 처마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갔습니까?”“갔다.”생강차를 모두 마신 한소희는 빈 사발을 처마 아래 돌 탁자에 내려놓았다.“금란아, 도성에 남아 있는 사람들과 아직 연락이 닿느냐?”금란의 표정이 단번에 굳어졌다.“연락할 수 있습니다.”“그쪽 움직임을 철저히 살피라고 해라. 한홍난은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다. 감히 역모를 일으켰다면, 아버지가 쥔 병권만 믿고 나선 것은 아닐 테니, 배후에 반드시 누군가 더 있을 것이다.”금란은 망설이다 결국 입을 열었다.“아씨, 혹시... 폐하가 걱정되시는 겁니까?”“나는 누구도 걱정하지 않는다.”한소희는 흐트러진 겉옷을 여몄다.“그저 그 부녀가 뜻을 이루게 두고 싶지 않을 뿐이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았으나 더는 묻지 않고, 곧장 몸을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홀로 돌아가던 한소희는 비가 그친 뒤의 맑고 서늘한 산 공기를 들이마시며 몇 걸음 옮기다가, 갑자기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에 길가의 나무를 짚고 허리를 숙여 두어 번 기침했다.“비를 맞지 말라 했건만, 말은 도통 듣지 않는군.”산길 모퉁이에는 바람막이 등불을 든 고승훈이 서 있었다.그는 곧장 다가와 다짜고짜 두 손가락으로 한소희의 손목을 짚더니, 이내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냉기가 또 한 겹 깊이 스며들었소.”고승훈은 맥을 짚던 손을 거두며 못마땅한 어조로 말했다.“지난 석 달 동안 치료한 보람이 하나도 없구려.”한소희가 허리를 곧게 폈다.“그렇게 심하지는 않습니다.”“심한지 아닌지는 그대가 정할 일이 아니오.”고승훈은 잠시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함께 내 처소로 가시게. 오늘 밤은 약을 한 첩 더 써야겠소.”“고 의원님.”한소희가 부르자 그는 걸음을 멈췄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감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7화

    한소희는 목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쥐었다.식혀 둔 차를 주전자에 담아 오던 금란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찌푸리며 한소희를 돌아보았다.“아씨, 제가 가서 돌려보내겠습니다.”“그럴 필요 없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내려놓으며 담담히 말했다.“무릎을 꿇고 싶다면 그대로 두어라.”한소희는 금란이 건넨 질그릇 사발을 받아, 식혀 둔 차를 천천히 한 모금씩 마셨다.“계속한다.”곧 목검이 나무 말뚝을 내리치는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고, 아까보다 묵직해진 타격음이 끊임없이 이어졌다.두 차례의 베기 수련을 마칠 무렵,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다.동쪽에서 밀려온 먹구름이 하늘을 뒤덮고 낮은 천둥이 산등성이를 울리는 가운데, 흙냄새를 머금은 바람이 수련장으로 거세게 들이쳤다.콩알만 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을 때, 한소희는 마침 마지막 일격을 끝낸 참이었다.한소희는 방으로 들어가지 않고 처마 아래에 선 채, 수건으로 목검에 맺힌 빗물을 닦았다.그때 오늘 밤 보초를 맡은 젊은이가 산 입구 쪽에서 다급히 달려오더니, 얼굴을 타고 흐르는 빗물을 훔치며 입을 열었다.“아씨, 그자가 아직도 무릎을 꿇고 있습니다.”빗줄기는 갈수록 굵어졌고, 기왓장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금란은 한소희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췄다.“아씨, 비가 너무 많이 내립니다. 산길에 고인 물이 벌써 발목을 넘었으니, 반 시진만 더 내리면 계곡물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날 겁니다.”한소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고승훈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대로 폭우가 쏟아지면 언제 계곡물이 들이닥칠지 모르오. 하필 그자가 무릎을 꿇은 곳이 물길이 지나는 자리요.”금란의 안색이 달라졌다.“아씨, 제가 가서 당장 떠나라고 하겠습니다.”“네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한소희는 목검을 칼걸이에 돌려놓았다.“한번 마음먹은 일은 누가 말려도 듣지 않는 자다.”빗줄기는 더욱 거세졌고, 그 순간 하늘을 가른 번개가 수련장 전체를 섬뜩하리만큼 하얗게 밝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6화

    “아씨.”한소희가 좀처럼 입을 열지 않자 금란이 다시 불렀다.“떠나지 않겠다.”한소희가 말을 끊자 금란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아씨...”“금란아.”한소희는 산비탈 아래에 자리한 푸른 기와와 흰 담의 집들을 바라보았다.“이 사람들은 창령산에서 얼마나 오래 살았지?”금란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마님 때부터 함께해 온 이들도 있고, 가장 늦게 들어온 이들조차 이곳에 터를 잡은 지 십여 년은 되었습니다.” “십수 년을 살아온 터전인데, 어찌 나 하나 때문에 하루아침에 떠나라고 할 수 있겠느냐?”가벼운 목소리로 물었지만 금란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산 남쪽의 약초밭은 고 의원의 스승님이 일구신 곳이다. 거의 이십 년 동안 약초를 심고 가꾸어 이제야 제대로 된 밭이 되었지.”“네 수련장도 삼 년 동안 흙을 거듭 다진 끝에야 이토록 단단해졌다. 오복이를 비롯한 몇몇에게는 이 산이 조상 대대로 묘를 써 온 곳이기도 하고.”한소희는 한 곳씩 손으로 가리키다가 마지막으로 산허리의 울창한 숲을 가리켰다.“내 어머니의 의관총(衣冠塚)도 이곳에 있다.”금란은 한동안 한소희를 바라보다 나직이 웃었다.“방금 하신 말씀은 마님께서 예전에 하셨던 말씀과 꼭 같으십니다.”금란은 고개를 젓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떠나지 않으시려면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수련장 주변의 초소를 삼 리 밖까지 넓히고, 밤에는 보초를 두 배로 세우겠습니다. 앞으로 다시 그자를 마주치시더라도 절대 혼자 만나셔서는 안 됩니다.”한소희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다.”금란이 무언가 더 말하려던 찰나, 등 뒤에서 느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야기는 다 끝났소?”돌아보니 고승훈이 약초 광주리 곁에 서서, 그 안에서 골라낸 약재 몇 가지를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몇 번 뒤집어 보던 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팼다.“지어 둔 약을 팔아 오라고 했더니 약은 그대로 가져오고, 골칫거리만 한 무더기 달고 왔구려. 읍내 약방에서는 이 약들을 한 할이나 더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5화

    “아셨다 해도 저를 조금 일찍 궁 밖으로 내보내셨을 뿐이겠지요. 폐하와 한홍난의 혼사에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말입니다.”“짐은 단 한 번도 너를 걸림돌이라 여긴 적이 없다.”이건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목울대가 한 차례 크게 움직였다.“예, 그러셨지요.”한소희는 그의 손아귀에서 제 손목을 천천히 빼냈다.“폐하께서는 제 불같은 성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폐하의 짝이 될 자격이 없다고 여기셨을 뿐입니다. 그래서 계략을 꾸미고 거짓 연극까지 벌여 저를 북삭으로 보내 삼 년을 살게 하셨지요. 돌아온 뒤에는 제 이복동생의 시녀가 되어 전각 문 앞에 무릎 꿇고 그 아이가 해산하는 소리까지 듣게 하셨고요.”“처음부터 끝까지 폐하께서는 저를 걸림돌이라 여기신 적이 없으셨겠지요. 애초에 폐하의 마음속에서 저는 그만한 의미조차 없는 사람이었으니까요.”이건의 눈동자가 순간 가늘어졌다.“아니다.”그는 이를 악물고 힘겹게 말을 이었다.“짐이 너를 찾아온 것은...”“무엇 때문입니까?”한소희는 이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한홍난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나서야 폐하만 바라보던 한소희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이 떠오르셨습니까?”“그런 것이 아니다.”이건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릴 만큼 주먹을 움켜쥐었다.“소희야, 지난날에는 짐이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다. 짐이 눈이 멀어 사람을 잘못 보았고, 해서는 안 될 짓을 저질렀다. 허니 짐에게 한 번만 더 기회를 다오.”“필요 없습니다.”한소희는 약초 광주리를 어깨 위로 추켜메고 몸을 비껴 이건의 곁을 지나쳤다.“폐하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니, 누구에게도 사과하실 필요가 없으십니다.”두어 걸음 옮기자 암위 하나가 앞으로 나서서 길을 막았지만, 한소희는 돌아보지 않았다.“폐하께서는 오랫동안 사람을 풀어 저를 찾으셨고, 도성에서부터 이 장터까지 쫓아오셨지요. 허나 폐하께서는 제가 북삭에 있는 삼 년 동안, 어떤 곳에서 살았는지, 무슨 고초를 겪었는지, 몸에 얼마나 많은 상처를 안고 돌아왔는지를 아십니까?”등 뒤에서는

  • 달빛 아래 묻은 마음   제14화

    그날 밤 이후, 한소희는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다. 동이 트기도 전부터 달이 중천에 걸릴 때까지 칼을 휘둘렀고, 그러는 동안 부러뜨린 목검만 세 자루였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는 딱지가 앉았다가 다시 터지기를 거듭한 끝에 거칠고 단단한 굳은살이 박혔다. 한밤중에 금란이 약을 갈아 주려고 붕대를 풀자 땀에 불어 하얗게 변한 상처 가장자리로 여린 붉은 살이 벌어져 있었다. 약을 바르던 금란의 손길이 잠시 멎더니,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씨, 고 의원님께서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이대로 계속 무리하시면 묵은 상처가 낫기도 전에 새 상처부터 덧나서, 머지않아 몸을 상하게 될 거라 하셨습니다.”한소희는 아무 대꾸 없이 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도록 내버려 둔 채, 창밖에 드리운 캄캄한 밤하늘만 바라보았다. 사흘째 해 질 무렵, 마지막 베기 동작을 끝낸 한소희는 두 손으로 무릎을 짚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새로 깎은 목검을 품에 안고 곁에 서 있던 금란은 한소희가 몸을 일으켜 다시 칼을 받으려 하자 끝내 입을 열었다. “아씨,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으시지요.” 목검을 향해 뻗던 한소희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금란은 더 캐묻지 않고 그저 목검을 건네며 말했다. “칼로 적은 벨 수 있어도 마음속 응어리까지 벨 수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털어놓으십시오. 혹 말씀하고 싶지 않으시면, 소인이 곁에서 함께 수련하겠습니다.”한소희는 목검을 받아 들고 손가락에 힘을 주더니, 한참 뒤에야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금란아, 나는 참 쓸모없는 사람이지?” 금란은 오랫동안 말이 없다가 한소희의 어깨를 힘주어 두드렸다. “아씨, 목숨이 위태로운 순간에도 침착하게 살길을 찾아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가장 어려운 고비는 이미 넘으셨으니, 남은 것은 서두르지 말고 하나씩 해 나가시면 됩니다.” 한소희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목검을 움켜쥐고 다시 나무 말뚝 앞으로 다가갔다. 고승훈이 수련장을 지나갈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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