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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 아래 묻은 마음
달빛 아래 묻은 마음
Author: 청산

제1화

Author: 청산
대전 아래에서는 신하들의 수군거럼이 끊이지 않았다.

“황후 자리에 오른들 무슨 소용인가. 폐하께서 애지중지하시는 이는 한 귀비라는 걸 모르는 이가 있는가? 입궁한 지 불과 이 년 만에 귀비가 되고 황자까지 낳았지 않소. 봉인(鳳印)마저 손에 쥐었으니, 후궁에서 누가 감히 그 자리를 넘보겠는가.”

“내 말이 그 말일세. 폐하께서 황후 마마를 구할 마음이 있으셨다면 진작에 군사를 보내셨겠지. 즉위하신 지 두 해가 지나도록 모른 척하시다가 이제 와 황후로 책봉하신 걸 보면, 결국 세간의 입을 막으려고 명분만 챙겨 준 셈이지.”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쨍그랑 소리와 함께 한소희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전각 안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한소희가 끝내 분을 참지 못하고 화를 터뜨렸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예전의 한소희는 세상에 무서울 것이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한 번은 가을 사냥 때, 영국공(榮國公)의 세자가 한소희를 두고 이건에게 목매는 꼴이 우습다고 비웃었다가, 그녀가 휘두른 채찍에 관끈이 단번에 잘려 나간 적이 있었다.

또 한 번은 연회 때, 태부(太傅)의 여식이 이건의 주변을 맴돌았다는 이유로 술 한 병을 그대로 그녀의 머리 위에 들이붓기도 했다.

그런 한소희였으니, 사람들은 이번에도 한바탕 소동이 벌어질 거라 여겼다.

그런데 뜻밖에도 다음 순간, 한소희는 황급히 고개부터 들었다.

“송구하옵니다... 제가 여러분의 흥을 깨뜨린 것은 아닌지요. 일부러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자 이건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아무도 너를 탓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한소희의 목소리는 한층 더 작아졌다.

“허면 신첩, 잠시 물러가 의복을 갈아입고 와도 되겠습니까? 치맛자락이 더러워져서... 폐하의 체면에 누가 될까 염려되옵니다.”

이건은 한동안 말없이 한소희를 바라보다가, 미간의 골이 더욱 깊어졌다.

이내 그는 곁을 지키던 태감을 향해 명했다.

“황후께서 의복을 갈아입도록 편전으로 모시거라.”

곧바로 한소희는 태감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한소희가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이건의 가슴속에서 문득 이유 모를 화가 치밀어 올랐다.

북삭에서 돌아온 뒤로 한소희는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의 한소희는 오로지 자신만 바라봤다.

그가 상소문을 처리할 때면 곁에서 먹을 갈아 주다가도, 어느새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어 옷깃을 움켜쥐곤 했다. 그러고는 평생 자신만 바라봐야 한다며 몇 번이고 다짐을 받아 냈다.

그리고 다른 여인이 그의 곁은 맴도는 것도 참지 못했다.

한 번은 시회 자리에서 태부댁의 여식이 그에게 손수건을 건넨 적이 있었다. 그러자 한소희는 그 자리에서 손수건을 낚아채 연못에 던져 버리고는 제 손수건을 내밀며 이것으로는 부족하냐고 따져 물었다.

그토록 그녀는 자신에게 한결같았다.

그래서 그가 황위에 오르기 전 적군에게 포위되었을 때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때 한소희는 후부의 호위무사 서른을 이끌고 직접 적진으로 뛰어들어 포위망을 뚫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그를 말에 태워 탈출시켰다.

하지만 정작 자신은 빠져나오지 못하고 북삭에 붙잡혀 갔다.

그런데 살아 돌아온 뒤로, 한소희는 단 한 번도 먼저 자신을 찾은 적이 없었다.

반면 자신은 밤마다 한소희의 처소를 찾아 곁을 지켰다.

하지만 손끝만 닿아도 한소희는 온몸을 걷잡을 수 없이 떨었다.

그럴 때마다 그도 더는 마음이 동하지 않아 서둘러 옷을 걸치고 자리를 떠나곤 했다.

생각할수록 답답한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결국 이건은 편전으로 향했다.

편전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소희는 막 옷을 갈아입은 참이었다.

이건은 성큼 다가가 한소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한소희. 아직도 짐을 원망하고 있는 것이냐?”

“네 마음에 응어리가 있다는 것도 안다. 짐이 네 서출 동생을 맞아들였으니 원망스러울 테지. 허나 짐과 홍난이의 일은... 정녕 달리 방도가 없었다.”

이건은 잠시 말을 멈췄다. 다시 입을 열었을 때, 그의 목소리는 한결 누그러져 있었다.

“네가 북삭에 끌려간 뒤, 네 아버지는 네가 살아 돌아오기 어렵다 여겼다. 해서 홍난이를 궁으로 들인 것이다. 그때 짐은 막 황위에 오른 참이었고, 네 아버지가 거느린 군사가 절실했다. 하여 그 뜻을 거스를 수가 없었다.”

“그 뒤에도 네 아버지가 거듭 압박해 왔다. 후부의 피를 이은 황자가 있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하기에, 짐은 어쩔 수 없이...”

그토록 사정을 설명했지만, 한소희는 조용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폐하께서 어찌 그런 생각을 하고 계시옵니까? 신첩은 황후입니다. 폐하께서 처하셨던 사정을 헤아리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한소희가 이처럼 매사에 이해해 줄수록, 이건은 오히려 더욱 짜증이 치밀었다.

결국 그는 소매를 떨치며 돌아섰다.

“네 뜻대로 하거라.”

그 말을 남기고 이건은 성큼성큼 전각을 나섰다.

한소희는 다시 연회장으로 돌아와 이건의 곁에 얌전히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는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손끝의 움직임부터 시선 하나까지, 어느 것 하나 예법에 어긋남이 없었다.

마치 예전의 단정하면서도 도도했던 후부의 적녀로 돌아간 듯했다.

봉의궁(鳳儀宮)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밤이 깊어 있었다.

그때 태감 하나가 종종걸음으로 들어와 아뢰었다.

“황후마마, 폐하께서 오늘 밤 봉의궁에 드시겠다 하셨사옵니다.”

동경 앞에 앉은 한소희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짧게 응했다.

“알았네.”

그로부터 향 한 자루가 타고 난 뒤, 태감이 다시 급히 들어와 아뢰었다.

“마마... 귀비마마께 태기가 동해 몸이 편찮으시답니다. 폐하께서는 이미 귀비마마의 처소로 향하셨사옵니다.”

태감은 품에서 서찰 한 통을 꺼내 공손히 두 손으로 받쳐 올렸다.

“폐하께서 소인더러 이 서찰을 마마께 전하라 하셨사옵니다.”

한소희는 서찰을 받아 들었다.

“알았다. 이만 물러가거라.”

“예, 마마.”

태감이 물러간 뒤, 한소희는 서찰을 펼쳤다.

익숙한 이건의 필체가 눈에 들어왔다.

[소희야.

짐이 네게 한 약조는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짐과 이 강산을 함께 누릴 사람은 오직 너 하나뿐이다.

태의원에는 이미 탕약을 마련해 두었다. 홍난이가 뱃속의 아이를 낳는 대로, 다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게 할 것이다.

이후 짐의 자식을 낳을 사람은 오직 너뿐이니, 부디 마음 놓거라.]

지난 삼 년 동안 한소희가 간절히 바라 온 것은 오직 하나였다.

이건이 천하를 평정하고 황좌를 굳힌 뒤, 만천하에 자신이야말로 그가 처음부터 정실부인으로 맞고자 했던 여인임을 밝혀 주기를.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달랐다.

그녀는 서찰의 내용을 다 읽고 난 뒤, 아무렇지 않게 그것을 옆에 놓인 향로에 던져 버렸다.

처음 돌아왔을 때만 해도 한소희 역시 마음 가득 희망을 품고, 모든 일이 차츰 나아지리라 여겼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그날 밤, 그녀는 이건이 어서방(御書房)에서 국사를 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연자죽 한 그릇을 들고 그를 찾아갔다.

창밖에 다다라 막 문을 열려던 순간, 안에서 이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때 일을 돌이켜 보면... 결국 짐이 그 아이를 저버린 셈이네.”

문을 열려던 한소희의 손이 그대로 멎었다.

곧이어 아버지인 영원후 한석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폐하께서 자책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그날의 포위전은 애초부터 소희를 폐하의 곁에서 떼어 놓으려고 꾸민 일이었지 않사옵니까. 소희를 삼 년 동안 궁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였지요.”

“그 아이가 폐하의 곁에 있는 한, 홍난이를 궁에 들이는 일만큼은 결코 용납하지 않았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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