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맺혔다. 은성은 빛에 예민했다. 해가 점점 일찍 뜨기 시작하면서 기상 시간이 빨라졌다.
늦게 자도 잠은 일찍 깨서 피곤해하는 게 보였다. 그런 그녀가 조금 더 푹 잤으면 해서 암막커튼을 쳤다.
암막 커튼을 치면서 5분이라도 더 자는 모습을 보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잠든 은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평온한 그 모습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그것이 자신만 볼 수 있는 모습이라서 더 좋았다.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갔다.
하지만 그 미소는 무심코 눈을 뜨면서 단박에 사라졌다. 눈을 뜨고 다니 더 이상 은성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버려졌다. 쓰레기를 버리듯 그녀는 자신을 버렸다. 그것으로 모자라 인생에서 아예 사라지길 바란다.
<때리는 손이 더 아픈 거 같아 은성은 그만두었다.집에 들어서고 나서야 소파에 그녀를 내려놓았다. 얼음 주머니를 가져와서 발목에 대어주었다. 차가운 얼음과 따듯한 선우의 체온이 동시에 느껴졌다.그것이 꼭 자신의 마음 같았다. 대부분 차갑지만 가끔씩 휘둘려서 따뜻해졌다. 부은 뺨이 마음에 걸려 그를 따라 아파트에 온 지금처럼 말이다. 아파트를 돌아봤다.한때 거의 살다시피 했던 공간이지만 3년전에 이별을 통보한 이후로는 올 일이 없었다. 그러니 낯설게 느껴질 만도 한데 익숙했다. 인테리어는 물론 소품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집이 그때랑 그대로네.”“응. 그게 편해.”편하다는 말에는 조금의 껄끄러움도 없었다. 그럼에도 은성은 그 말이 걸렸다. 자신과 사귀던 그때에서 그는 계속 머무르길 원하는 것 같았다.“집이 같다고 관계가 유지되진 않아.”“같아질 때까지 기다리면 돼. 나는 계속 여기 있어. 은성아.”그러니까 너만 돌아오면 돼. 뒷말을 하지 않는데도 들리는 것 같았다. 신을 우러러보는 신도처럼 선우가 올려다봤다.그의 눈에는 오직 은성만이 담겨 있었다. 그것이 기꺼웠다. 항상 바랐다. 그의 눈에 마음에 자신만 담겨 있기를.‘지금 이렇게 보여도 아니라는 거 알아. 아는데…’아는데 마음이 자신도 모르게 흔들렸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선우가 입을 맞췄다. 은성이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밀려나지 않았다.
짝! 선우의 얼굴이 돌아갔다. 그녀는 자신이 때리고서도 놀라서 몸을 움츠렸다.‘내가 무슨 짓을 한거지?’수많은 말들로 그를 할퀴고 상처주었다.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그가 멋대로 관계를 이어가려고 해서 그랬던 것이다.이렇게 대화를 나누다가 뺨을 때린 적은 한번도 없었다. 덜덜 손이 떨렸다. 놀란 그녀와 다르게 선우는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집에 가자.”조수석 문을 닫아주고 그는 운전석에 올랐다. 그렇게 차가 출발했다. 은성은 창밖을 응시했다.풍경들이 빠르게 스쳐갔지만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민재가 떠났을 때가 생각났다. 호감은 무언가 시작해버리기도 전에 끝나버렸다.선우가 자신을 마음대로 쥐고 흔들려는 거 같아 미웠다. 그렇게 화가 난채로 하루하루를 살았다.그 미움에 갇혀서 누구를 만나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가 전역할 때가 가까워서야 누군가를 만나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하지만 누구를 만나?”좋아하는 거까지는 아니어도 은성에게 호감을 가진 사람은 꽤 있었다. 하지만 또 민재처럼 선우가 그 인생을 흔들게 만들고 싶진 않았다.그러던 차에 바람둥이로 유명한 남자 선배가 은성에게 호감을 보였다.“은성아. 우리 만나지 않을래?”사귀다가 아니라 만나다라는 표현을 쓴 것은, 그 선배가 그런식으로 여러 사람을 만나기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더 빨리 올줄 알았는데.’선우는 은성에게 사람을 붙여놓았다. 그래서 그녀가 어디를 가든 그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가 앞에 서자 몸을 비비적거리던 태용도 멈칫했다.그가 거슬린다는 듯 날카로운 시선으로 압박하자 꼬리를 내리고 은성에게서 한발자국 떨어졌다. 태용의 존재를 지워버린 것처럼 은성에게 말했다.“시간 늦었어. 그만 가자.”“싫어. 지금 나 재밌어.”하나도 재미없었다. 선우는 이를 알아차릴 것이다. 그럼에도 은성은 뻔뻔하게 우겨야 했다. 그것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그걸 뻔히 알고 있음에도 그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웃었다. 그리고는 자신의 코트를 벗어서 은성의 어깨가 걸쳐주었다.“알았어. 그러면 여기있지 뭐.”둥둥둥, 시끄러운 음악은 여전히 나오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춤에 집중하지 못했다. 몸을 흔들면서도 시선은 은성과 선우를 번갈아 보았다.마치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보려는 사람들 같았다. 음악 소리 때문에 두 사람의 대화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말이다.은성은 그 사람들의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키즈 카페 이후로 그는 이런 식으로 은성을 압박했다.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을 싫어한다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이런식으로 그녀를 압박했다. 그것이 은성의 오기를 불러일으켰다.“그래. 그럼 마음대로 해. 나는 놀 테니까.”
‘기회’ 그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은성이 약속했다. 군대에 다녀왔을 때도 곁에 누군가가 없다면 그에게 ‘기회’를 주겠노라고.하지만 그건 곁에 누가 없을 때였다. 이번에 민재를 쫓아냈다지만 제2의 민재가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불안한 것도 잠시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복귀할게요. 그대신 한가지 부탁 좀 들어주세요.”이어진 선우의 말을 듣고 유 실장은 고개를 끄덕거렸다.“네. 그렇게 하겠습니다.”“잠깐만 기다려요.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간단하게 씻고 군복으로 갈아입었다. 유 실장을 따라 차에 올랐다. 복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차가 빠르게 달렸다.유 실장에게 부탁을 했지만 불안감이 가시지 않았다. 은성에 대해서는 다 그랬다. 이런 상황에서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이 무력하게 느껴졌다. 문득 그날이 떠올랐다.쓰러진 할머니, 뒤집어진 아빠의 차, 그리고 그 남자와 함께 있었던 엄마.선희가 남자와 키스를 나누던 모습 위로 은성과 민재가 함께 있는 모습이 겹쳐졌다.그리고 어제 화내던 모습으로 이어졌다. 은성이 민재를 신경 쓰고 있었다. 그가 아닌 다른 남자를 마음에 담았다. 그것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그 남자를 사랑해?’그럴리 없다고 자답할 때마다 은성이 화내던 모습이 떠올랐다.“네가 선택하게 만들었겠지!!”
마원은 마케팅 원론을 학생들끼리 줄여부르는 별칭이다. 전공필수 과목으로 경영학의 꽃이라고 불렸다.민재는 복학생이었고 은성은 신입생이기에 같이 드는 강의가 이거 하나였다. 오늘 그 수업이 있었는데 그가 들어오지 않았다.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문자는 바빠서 확인을 못할 수도 있지만 수업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됐다.그때 편의점 점장한테 전화가 왔다. 전화 올 이유가 없었기에 은성은 고개를 갸웃대면서 전화를 받았다.“네. 사장님.”“은성 씨, 민재 씨 대체 어떻게 된거야?”다짜고짜 대체 어떻게 된거냐고 묻는 통에 벙쪘다.“무슨 일 있었어요?”“아니 민재 씨가 어제 알바 펑크내고 문자로 그만두겠다고 통보했어.”“네?”믿을 수가 없었다. 민재는 책임감이 강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어린 동생을 부양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그는 이유없이 약속에 늦지도 않았고 맡은 일을 성실하게 했다. 귀를 의심했다.사장은 분통이 터진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뭐야. 은성 씨도 모르고 있었어? 사람이 왜 이렇게 무책임해. 그것 때문에 사람 다시 뽑아야 하잖아. 요새 가뜩이나 사람 구하기 힘든데.”불평불만을 쏟아내다가 점장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끊었다. 은성은 멍해진 나머지 통화가 끝났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무책임하다는 말은 민재와 가장 안 어울
민재가 떠나고 선우는 멍하니 앉아있었다. 그가 원하는대로 되었다. 이제 민재는 은성의 삶에서 없어질 것이다."만나... 내가 제대했을 때는 헤어질 수도 있어. 그러니까 만나."그 말은 진심이었다. 은성은 그 어떤 남자를 만나도 된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한 그 어떤 남자도 은성을 만나서는 안되었다.그녀는 머리털 하나 다치면 안되지만 그녀에게 접근하는 남자들은 달랐다. 떼어내기 위해서 무슨 짓이든 할것이다.그런 면에서 민재는 현명했다. 만약 회유책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그는 장학금을 끊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야구 모자를 쓰고 있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없어진 것이 신경 쓰여서 쓴 모자였다.씻고 나서 집으로 메이크업 아티스트를 불렀다. 공식적인 자리에 나갈 때 메이크업이 필요할 때 빼고는 한번도 부른 적이 없었다.하지만 오늘은 필요했다. 민재 앞에서 기가 죽고 싶지 않았다. 선우에게는 돈도 권력도 있었다.하지만 단 하나 은성의 미소를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그 하나를 가진 그가 밉고 싫었다.그래서 VIP라운지를 비우는 쇼까지 벌이면서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와 자신의 차이가 무엇인지.“은성이가 알면 싫어하겠지…”그러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선우는 이틀 후면 군대로 다시 복귀해야했다. 자신이 없는 곳에서 민재가 접근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라운지에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유 실장이 다가왔다.&l
“내 말 안 들려?”“들었어.”“근데 왜 답을 안해?”“답을 왜 해야하는데.”선우가 걸음을 멈춰서는 바람에 뒤따라오는 유라와 몸이 닿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그는 메스꺼움을 느껴 구토를 했다.“우욱…!”“괜찮아…?”놀란 유라가 다가서려했지만 그가 손을 들어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진정이 되고 나서 그는 무미건조하게 응시했다.“오늘 같은 일 다시는 없었으면 해. 반에서 얼굴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불편하거든.”다시 걸음을 옮기려는 그때 유라가 소리쳤다.“거짓말! 너 나 좋아하잖아.”선우가 멈칫했다. 그
무거운 발걸음으로 고용인 숙소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경자는 이미 본채로 넘어가서 볼일이 없었으나 감정이 좀처럼 다스려지지 않았다.“오늘은 버스타고 간다고 할까?”학교까지는 걸어서 1시간 정도 걸렸지만 버스를 타면 30분이면 도착했다. 선우하고 같이 다닐때는 걸어서 다녔다. 사실 그가 걸어서 학교를 다니는 것을 선희는 못마땅하게 여겼다. 차가 없는 것도 기사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선우는 차로 이동하는 것을 선호하지 않고 정체된 도로도 싫어했다. 무엇보다 은성과 둘이서만 있기를 바랬고 그래서 걸어서 다녔다. 고3이 되면서
“네.”긴장한 은성이 무슨 일이냐는 듯 선우를 봤다. 선우는 빙그레 웃을 뿐 별 말을 하지 않았다. 그도 선희도 찻잔을 향해 손을 뻗었고 아주 잠시 손이 닿았다.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것처럼 손을 황급하게 거둬드린 그가 구토를 했다.“우욱…!”스치는 접촉에도 그의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선우가 화장실로 달려갔다. 은성은 따라가고 싶었지만 선희의 눈치가 보여서 가지 못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가득했다. 이 세상에 불편한 모자 사이는 많았지만 잠깐 손이 닿는 접촉만으로도 이렇게 격렬한 반응을 보이는 경우는 없었다. 한성그
은성은 방문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만 누르면 방문을 열 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방은 안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었지만 이 방은 특이하게도 밖에 번호키가 있어 안에서는 문을 열고 나올 수 없었다.비밀번호는 자신의 생일이라서 잊어버릴 수가 없었지만 손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방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두려움이 컸다. 그 안에는 그녀의 남자친구인 선우와 유라가 있을 것이다. 바람 현장을 잡으러 온 것이냐 하면 그건 아니었다.최음제를 선우에게 먹이고 유라와 이 방에 집어넣은 것이 바로 은성이었다. 그럼에도 확인하는 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