تسجيل الدخول박태경은 그대로 몸을 돌려 서재 안으로 들어갔다.400억.서다빈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쓸 수 있는 돈이었다.‘기다리지 말라고? 웃기네.’강윤서가 집을 나온 지도 벌써 며칠째였다. 그런데도 박태경은 아직 그 사실조차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얼마나 무관심해야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는 건지, 강윤서는 오히려 웃음이 날 지경이었다.그녀는 가족사진을 챙긴 뒤 그대로 집을 나섰다.다시 차에 올라 시동을 걸었지만 엔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다. 사람이 힘들 때는 차까지 말을 안 듣는다더니 시계를 보니 어느새 밤 8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강윤서는 결국 차에서 내려 상태를 살펴봤지만 딱히 손쓸 방법은 없었다.그때였다.서재에서 나온 박태경이 그 모습을 발견했다. 그는 강윤서가 저 차를 결혼 초부터 계속 몰고 다녔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박태경은 차에 올라 기사에게 옆으로 천천히 세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창문을 내린 채 담담하게 말했다.“병원 가? 타. 가는 길이야.”강윤서는 돌아보며 그를 바라봤지만 별다른 반응은 하지 않았다.박태경은 그녀 얼굴을 한번 흘끗 보더니 기사에게 말했다.“문 열어드려.”기사는 곧바로 내려와 뒷문을 열었다.“사모님, 타세요.”박태경이 이렇게까지 자상하게 나오는 건 뜻밖이었다. 하지만 상황을 생각하면 선택지도 많지 않았다. 차는 고장 났고 이곳은 사유지 안이라 택시도 쉽게 잡히지 않았다. 밖으로 나가려면 한참을 걸어야 했다. 괜히 그와 기싸움을 하다가 혼자 고생할 이유는 없었다.강윤서는 결국 차에 올라탔다.그녀는 박태경과 나란히 뒷좌석에 앉았다.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이상할 정도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박태경은 시종일관 고개를 숙인 채 아이패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먼저 대화를 꺼낼 생각은 없어 보였다.오히려 그편이 강윤서에게는 편했다. 그녀 역시 조용히 창밖만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사유지를 빠져나오는 데만 거의 20분이 걸렸다. 막 큰
강윤서는 박태경이 집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좀처럼 들어오지 않는 사람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요즘 들어 자꾸 마주치는 일이 많아졌다.박태경은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피곤이 묻어나는 강윤서 얼굴을 한번 훑어보며 낮게 물었다.“일이 그렇게 바빠?”요즘 강윤서는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본가 쪽에서도 며칠째 보양식을 보내오지 않는다고 말이 나왔다. 예전에는 회사까지 챙겨 보내던 사람이었는데 박태경 역시 이유 정도는 알고 있었다.전부 서다빈 때문이었다.무엇보다 최근의 강윤서는 예전처럼 쉽게 다룰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하지만 강윤서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김명희를 바라보며 물었다.“사진은요?”김명희는 손을 닦으며 박태경 쪽을 가리켰다.“저기 대표님 책상 앞에 놔뒀어요.”그제야 강윤서는 가족사진이 박태경 노트북 옆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곧장 그쪽으로 걸어가 몸을 숙였다.하지만 사진을 집기도 전에 길고 마디가 굵은 손이 먼저 손목을 붙잡았다.순간 강윤서 몸이 굳었다.고개를 돌리자 박태경의 깊고 짙은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그는 별다른 표정 없이 턱짓으로 옆자리를 가리켰다.“앉아서 이야기해.”“할 말 있으면 그냥 해요.”강윤서는 조용히 손목을 빼냈다.곧 이혼할 사이인데 왜 자꾸 손을 잡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끝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박태경은 느긋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그 집, 서다빈한테 양보해. 조건은 네가 정해.”강윤서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지금 뭐라고 했어요?”간신히 붙잡고 있던 평정심이 천천히 흔들리기 시작했다.박태경은 책상 위 가족사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사진 가장자리를 천천히 쓸며 담담하게 말했다.“시세 두 배로 쳐줄게. 더 좋은 집 알아봐. 서다빈이 그 집 마음에 들어 해서 다른 데는 안 보겠다고 하더라고.”“그러니까 제가 양보해야 한다는 거네요?”결국 논리는 언제나 같았다.서다빈이 원하면 자신이 물러나야 했다. 예전
강윤서는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누구요?”안내실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소파에 앉아 있는 서다빈을 본 강윤서는 바로 상황을 짐작했다.서다빈은 다리를 꼰 채 단정하게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강윤서가 나타난 걸 보고도 전혀 놀란 기색이 없었다. 마치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얼굴이었다.그녀는 곧바로 입을 열었다.“계약금 넣은 그 집, 내가 마음에 들었어요. 얼마면 되는지 말해봐요. 내가 살게요.”조금의 돌려 말하기도 없었다. 세상 모든 것이 당연히 자신에게 양보 되어야 한다는 듯한 태도였다.강윤서는 피식 웃었다.“뭐든 직접 맛을 봐야 직성이 풀리나 보네요. 그럼 다음엔 분뇨차라도 몇 대 집 앞으로 보내드릴까요? 그것도 한번 체험해 보시게.”순간 서다빈 얼굴이 굳었다.‘지금 나보고 똥 먹으라는 건가?’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차갑게 비웃었다.“천하고 상스럽기는. 태경 오빠가 당신 거들떠보지도 않는 이유를 알겠네요.”그러고는 싸늘한 눈빛으로 강윤서를 바라봤다.“딱 한 번만 물을게요. 양보할 거예요, 말 거예요?”상의가 아니라 통보에 가까운 말투였다. 조금의 여지도 없는 냉정한 목소리였다.게다가 이제는 서다빈 정체까지 알게 된 상태였다. 강윤서가 좋은 얼굴을 해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강윤서는 곧장 담당 직원 조성훈을 돌아봤다.“지금 바로 계약서 쓰죠.”서다빈 말은 들은 척조차 하지 않았다.조성훈은 난처한 표정으로 서다빈 눈치를 한번 흘끗 살폈다. 그는 서다빈을 알고 있었다. 요즘 한의학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는 유명 의사였고 집안 배경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조성훈은 목소리를 낮춰 슬쩍 귀띔했다.“강 선생님, 혹시 모르실 수도 있어서 말씀드리는데요. 저분이 박씨 가문 사모님이십니다. 박씨 가문 아시죠? 국내에서도 손꼽히는 재력가 집안에 금융계 큰손으로 유명한 박 대표님 부인이세요. 괜히 척지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순간 강윤서 미간이 천천히 좁혀졌다.서다빈 역시 그 말을 들은 듯 입꼬리를 아
유리창 너머로 강윤서의 눈에 들어온 건 박태경과 서다빈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맞은편에는 중년 부부와 낯익은 얼굴의 서진우가 앉아 있었다.셋 다 자주 마주치던 얼굴이었다.그런데 그 중년 남자는 강윤서의 친아버지 서한수였고 그의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은 엄마와의 결혼 생활 내내 수년 동안 불륜 관계를 이어왔던 백영희였다.막 도착한 권지율도 안쪽을 들여다보다가 박태경과 서다빈을 발견하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더러운 것들.”욕을 내뱉던 권지율은 곧 강윤서의 안색이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녀는 얼른 강윤서 팔을 붙잡고 식당 안쪽 자리로 데려갔다.“이제 막 이혼하려는 상황인데 마음이 복잡한 건 당연하지. 7년이야. 7년을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털어내겠어.”권지율은 원래 섬세한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름대로는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하지만 강윤서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그게 아니야.”“그럼 뭐 때문인데?”강윤서는 입가에 쓴웃음을 띠었다.“서다빈 새아버지 있잖아. 나를 시골에 버리고 10년 넘게 나 몰라라 했던 내 친아버지야.”이리 돌고 저리 돌아 결국 이런 식으로 다시 서한수와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순간 권지율 얼굴도 굳어졌다.강윤서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권지율이었다.강윤서 엄마가 사고로 의식을 잃자 서한수는 곧바로 변호사를 불러 이혼 서류를 준비했다. 병상에 누워 있던 아내 손에 억지로 도장을 찍게 한 뒤,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여자를 집 안으로 들이기 위해 겨우 아홉 살이던 강윤서를 시골로 내버렸다.그 여자, 백영희가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집에 들어가는 건 좋지만 남의 아이까지 키우기는 싫고 서다빈에게 아버지 사랑을 나눠주는 것도 원하지 않으니 강윤서를 없애달라고.그리고 서한수는 그 말 한마디에 친딸을 버렸다.강윤서는 그 뒤 10년 넘는 세월 동안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생을 했다. 원래는 부족할 것 없이 자란 집안의 딸이었는데 누군가에게 인생 자체를 통째로 빼앗긴 셈이었다.원래 서다빈
강윤서는 집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박태경을 속여 합의서에 서명을 받아낸 상태였다. 그런데도 갑자기 저런 식으로 관심을 보이니 괜히 마음 한구석이 찔리는 기분을 감출 수 없었다.“아직이요.”강윤서는 멀지 않은 곳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서다빈을 바라보다가 무심한 얼굴로 덧붙였다.“지금 같이 봐줄 수 있어요?”박태경은 그녀를 한번 흘깃 바라봤다. 하지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곧 등 뒤에서 서다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태경 오빠, 가자.”강윤서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서다빈 눈빛에는 불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마치 본처가 자기 남자친구 시간을 빼앗고 있는 상황 자체가 못마땅하다는 듯한 얼굴이었다.하지만 박태경은 단 1초도 망설이지 않았다.“응, 타.”그는 그대로 몸을 돌려 서다빈 쪽으로 걸어갔다.굳이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박태경은 서다빈을 두고 강윤서의 집을 보러 갈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니었다.서다빈 표정은 금세 누그러졌다. 그녀는 강윤서를 한번 흘겨보며 입꼬리를 올렸다.“저희 볼일 있어서요. 태워드리긴 어려울 것 같네요.”강윤서는 피식 웃었다.‘봐봐. 얼마나 자연스럽게 안주인 행세를 하는지.’마치 강윤서만 완전히 외부인이고 저 둘이 진짜 부부라도 되는 것처럼 예의상 한마디 건네는 태도였다.마침 호출한 차가 도착했다. 강윤서는 더 이상 저들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차에 올라탔다.그때 밖으로 나온 차민석이 그 장면을 목격했다. 그는 주변을 한번 둘러본 뒤, 약속 상대라는 사람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는 걸어오며 고개를 저었다.“역시 강윤서 혼자 꾸며낸 거였네. 체면 세우려고 너 신경 쓰이게 하려던 거지.”서다빈도 흥미롭다는 듯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박태경은 담담한 얼굴로 차 문을 열며 말했다.“상관없어.”강윤서는 집 문제를 최대한 빨리 정리할 생각이었다.원래는 박태경을 속이기 위해 꺼낸 핑계였지만 그가 쉽게 넘어갈 사람이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실제로 집
차민석 나름대로는 위로를 건넨 것이었다.‘고맙게 받아들일 줄 알았는데.’차민석은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뒤쫓아 나온 자신의 행동이 새삼 우습게 느껴졌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 같았다.하지만 강윤서는 차민석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그녀는 아래층으로 내려가 이른바 프라이빗 룸을 찾아갔다. 하지만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아까 위층까지 뛰어 올라왔던 직원이 다시 조심스럽게 다가왔다.“강윤서 씨, 죄송합니다. 저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에요.”강윤서는 금세 상황을 눈치챘다. 오늘 소위 약속 상대라는 사람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모두 할머니가 꾸민 일이었다. 박태경과 같은 룸에서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만들고 함께 식사라도 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심지어 존재하지도 않는 남자까지 끌어들여 박태경의 질투심을 자극하려 했던 모양이었다.최혜란은 아직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하지만 최혜란 역시 오늘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줄까지는 예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애써 마련한 자리에 강윤서와 박태경 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서다빈까지 끼어들 줄은 몰랐을 테니까.강윤서는 직원에게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가보세요.”어차피 오늘은 직접 상황을 정리하러 나온 길이었다. 상대가 없다면 없는 대로 오히려 신경 쓸 일이 줄어든 셈이었다.할머니가 이렇게까지 애쓰는 이유도 강윤서는 알고 있었다. 자신을 특별히 아껴서가 아니었다. 이혼 문제로 집안이 흔들리는 걸 걱정하는 것이었다. 박재원은 큰 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었고 집안에서도 이미 손을 써둔 상태였다. 머지않아 밖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했다. 그 전에 또 다른 변수가 생길까 봐 불안한 것이었다.하지만 그들이 무슨 계산을 하고 있든 이제 강윤서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어차피 여기까지 온 이상 빈속으로 돌아갈 생각도 없었다. 언제까지 감정에 끌려다니며 살 수는 없었고 자기 삶은 결국 스스로 꾸려가야 하는 법이었다. 사랑이라는 정신적 허기만으로 평생을 버틸 수 있는 사람은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