分享

제5화

作者: 안개자욱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 노형준이 웃으며 물었다.

“그러게.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

차민석은 자리에 앉은 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서다빈을 바라봤다. 서다빈은 마음이 넓었고 그들과 어울릴 때도 선을 잘 지켰으며 처신도 잘했다. 그런데 강윤서는 남몰래 그런 서다빈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

“내가 아래층에서 누구를 봤는지 알아? 강윤서를 봤어.”

박태경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느긋하게 테이블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

강윤서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서다빈이 차민석을 위해 물을 따라주며 여유롭게 물었다.

“둘이 싸운 거야? 상대는 여자인데 너무 그러지 마.”

차민석은 서다빈이 강윤서의 편을 들자 강윤서에게 더 화가 났다.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강윤서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진짜 충격적이라니까. 여자가 질투심 때문에 얼마나 추해질 수 있는지 강윤서 덕분에 오늘 처음 알게 됐어.”

차민석은 아래층에서 권지율이 했던 말을 그대로 읊었다.

강윤서의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던 박태경은 그 얘기를 듣자 눈빛이 차가워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강윤서가 직접 한 말이야?”

박태경이 차민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만 들어서는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서다빈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직접 들은 얘기라면 틀림없겠지.”

서다빈은 입술을 깨물며 차민석 대신 대답했다.

노형준은 곧바로 욕을 내뱉었다.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그런 거짓말을 할 수가 있어? 강윤서 본인도 여자면서 말이야. 그러니까 인생이 그 모양이지. 7년 동안 매달려도 사랑을 못 받아서 질투심이 그렇게 강한 건가?”

노형준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아무 이유 없이 루머를 퍼뜨렸으니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노형준이 그렇게 말하자 서다빈은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조용히 있는 박태경을 바라봤다. 그의 의견을 묻는 듯한 눈빛이었다.

박태경은 말없이 휴대폰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그는 참여할 생각도, 말릴 생각도 없어 보였다.

노형준과 차민석은 박태경의 태도를 보고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박태경은 강윤서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서다빈은 시선을 내리며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

음식이 막 나와 몇 입 먹지도 못했는데 직원이 갑자기 급하게 달려와서 말했다.

“혹시 여기 의사 선생님 계신가요? 위층에 계신 손님 중 한 명이 갑자기 상태가 안 좋은데 봐주실 수 있을까요?”

강윤서는 미간을 찌푸리며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것은 의사로서의 본능이었다.

“제가 의사예요. 제가 가볼게요.”

권지율은 업무 메일을 확인하느라 따라가지 않았다.

강윤서는 직원의 안내에 따라 룸 앞에 도착했다. 환자를 걱정하는 마음에 그녀는 다소 다급히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마침 안에서 사람이 나오고 있었고 문이 열리는 순간, 상대가 들고 있던 뜨거운 냄비가 강윤서 쪽으로 기울어졌다.

서둘러 뒤로 물러난 강윤서는 단단한 가슴팍과 부딪치게 되었고, 허리에 둘린 탄탄한 팔뚝이 그녀를 뒤로 끌어당겼다.

박태경이 손을 들어 강윤서를 향해 기울어진 냄비를 빠르게 막았다.

직원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허둥지둥 냄비를 받아 들며 사과했다.

강윤서는 이곳에서 박태경을 마주칠 줄 몰랐다.

그녀가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는 서다빈이 보였다.

박태경은 자신의 몸으로 서다빈을 완전히 감싸듯 보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서다빈은 강윤서와 박태경의 신체 접촉에 불쾌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강윤서는 벌레를 피하듯 다급히 걸음을 옮겨 빠르게 박태경의 품에서 벗어났고, 그 모습에 박태경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잠시 강윤서를 바라봤다.

“너도 다치는 게 무섭긴 한가 봐. 나는 네가 낯짝이 두꺼워서 안 무서워할 줄 알았는데 말이야.”

노형준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태경이가 반응이 빨라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다빈이가 다칠 뻔했어. 강윤서, 절대 착각하지 마. 너를 지켜주려고 그런 게 아니니까. 괜히 착각하면 민망하지 않겠어?”

노형준이 웃는 듯 마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박태경은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노형준의 말을 부정하지도 않았다.

강윤서는 조금 전 그 냄비 때문에 서다빈까지 다칠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박태경은 그녀를 도와주려던 게 아니라 서다빈을 지켜주려다가 그녀까지 겸사겸사 도와준 것뿐이었다.

강윤서는 당연히 착각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차민석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그의 눈빛에서 경멸이 보였다.

강윤서는 무슨 상황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본능적으로 불쾌함을 느끼고 자리를 피하려고 했다.

그녀는 그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손목이 잡히며 긴 손가락이 그녀의 손목뼈를 꽉 잡았다. 그 순간 강윤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박태경의 싸늘한 눈동자가 보였다.

박태경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갑고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빈이한테 사과해.”

강윤서는 심장에 비수가 날아와 꽂히는 기분이 들었으나 차가운 표정으로 박태경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이유가 뭔데요?”

“이유는 네가 제일 잘 알 텐데.”

박태경은 서다빈에게 불리한 얘기를 굳이 하고 싶지 않아 하는 듯했다.

그리고 마치 선을 긋듯이 그녀의 손목을 금방 놓았다.

아마도 서다빈이 신경 쓸 것 같아서 그런 듯했다.

강윤서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분위기를 보고 대충 상항을 짐작했다.

차민석은 아마 권지율이 했던 말을 과장해서 전달했을 것이다.

“강윤서, 잘못을 했으면 인정해야지.”

노형준이 말했다.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렇게 추해지지는 않을 거야.”

차민석이 테이블을 두드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다빈이는 임신하지 않았어. 아주 떳떳한 사람이라고. 그러니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을 퍼뜨리지는 마.”

노형준은 강윤서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지어낸 걸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강윤서가 어린 시절 박씨 가문의 도움을 받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씨 가문의 그 사람이 강윤서를 데리고 왔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강윤서는 박태경에게 여동생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강윤서는 뻔뻔하게 스무 살이 되자마자 박태경과 잠자리를 가졌고 결국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박태경은 강윤서에게 발목을 잡힌 셈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전부터 강윤서가 아니꼬웠었다.

서다빈은 강윤서를 바라보며 너그러운 척 말했다.

“윤서 씨, 저한테 불만이 있으면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지 말고 직접 얘기해요. 같은 여자로서 저도 윤서 씨를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요. 윤서 씨가 사람들 앞에서 사과만 한다면 그냥 넘어가 줄게요.”

강윤서는 서다빈이 임신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그녀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이내 대수롭지 않게 그 사실을 넘겼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더 이상 신경 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박태경은 불임이라는 소문까지 돌고 있었으니 정말 임신이 쉽지 않을지도 몰랐다.

어쨌든 쓰레기는 쓰레기고, 바람은 바람이다.

강윤서는 서다빈을 바라봤다. 그녀는 상대방의 뻔뻔함에 새삼 감탄하면서 말했다.

“좋아요.”

서다빈은 강윤서가 이렇게 순순히 나올 줄은 몰랐는지 살짝 놀랐다.

박태경은 시선을 내려뜨려 강윤서를 바라봤다.

마치 그녀가 당연히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강윤서는 모두의 예상을 벗어난 얘기를 했다.

“SNS 계정을 몇 개 만들어서 공개적으로 사과할게요. 제 남편 사촌 동생의 약혼녀인 서다빈 씨가 제 남편과 바람을 피우는 걸 막으려고 하다니, 제가 너무 속이 좁고 생각이 짧았어요. 내연녀가 되고 싶어서 안달 난 서다빈 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남편이 두 집 살림을 하려고 하는 것도 이해해 주지 못했으니 말이에요.”

在 APP 繼續免費閱讀本書
掃碼下載 APP

最新章節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100화

    배건하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박태경에게로 향했다.강윤서는 배건하를 한 번 바라봤다. 그는 그녀를 배려하듯 자연스럽게 감싸주고 있었다.강윤서가 모든 화살을 혼자 맞는 상황을 피하게 해주면서도 그녀가 직접 박태경의 정체를 밝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까지 막아준 것이었다.이제 중요한 건 박태경의 대답뿐이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요?”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온했다. 기복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듣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랐다.약리팀 남자 직원 몇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죠. 박 대표님이 어떤 분인데 자기랑 상관없는 사람 일까지 신경 쓰겠어요.”강윤서는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박태경은 그녀와의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강윤서가 서다빈의 정체를 들춰낼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답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그는 늘 그랬다.말 한마디에도 빈틈이 없었다.그 대답 하나로 사람들은 박태경이 이런 화제에 관심이 없다고 판단했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완벽한 정리였다.배건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강윤서를 바라봤다.강윤서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삼켰다.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참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쯤 되니 이제야 이해가 됐다. 박태경이 왜 자신을 박씨 가문과 함께 이곳에서 명절을 보내게 하려 했는지, 왜 이 많은 돈을 써가며 팀 전체를 진명까지 불러들였는지.결국 이유는 하나였다.서다빈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한창 연애 중인 연인답게 떨어져 있기 싫었을 테고 처음에는 강윤서를 데려오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아예 팀 전체를 끌고 온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테니까.어르신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강윤서가 필요했고 뒤에서는 서다빈과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결국 그녀는 박태경에게 이용당한 셈이었다.강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을 펼쳐봤다. 손톱이 파고든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9화

    경원대 팀은 서다빈이 들어오자마자 반갑게 시선을 모았다.“선배, 괜찮아요. 오히려 선배 남자친구가 이번 행사 후원해 준 거 감사해야죠.”“맞아요. 선배 덕분에 이렇게 두둑한 출장비를 받게 됐잖아요.”“선배는 이제 우리 사모님이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니에요?”누군가 감탄하듯 말을 보탰다.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박태경이 서다빈을 위해 후원을 했으니 그들의 상사이자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서다빈이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서다빈은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눈가에 번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다들 무슨 말씀을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강윤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서다빈 곁에 앉은 박태경에게 향했다. 그는 마치 서다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처럼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태경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고 ‘사모님’이라는 말에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한 여자에게만 온 마음을 내어주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반면 자신은 7년 동안 박씨 집안의 며느리로 살았지만 존재감조차 없는 사람처럼 지내왔다.생리통이 아랫배를 한 번씩 비틀어 쥐며 온몸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통증 덕분인지 오히려 정신은 더 선명해졌다.강윤서는 눈을 내리깔며 눈동자 속 냉소를 감췄다.“다들 아까 무슨 얘기 했어요? 그렇게 시끌벅적하게.”서다빈은 강윤서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박태경 옆자리에 앉아 환하게 물었다.그러자 회의실 안의 화제는 순식간에 다시 강윤서에게 쏠렸다.경원대 팀 몇 명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선배 모르셨어요? 강윤서 씨가 어젯밤 누군가랑 같이 있었다는데 남편이래요. 그래서 그 남편이 누구인지 물어보던 참이었어요.”“맞아요. 왔으면 같이 밥도 먹고 하면 더 재밌을 텐데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윤서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박태경의 무심한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애초에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8화

    박태경이 아직도 부부처럼 같은 침대에서 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고 강윤서는 몸을 돌려 쓰레기통을 향해 두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순전히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서다빈과 관련된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마침 세면실에서 나오던 박태경이 그 모습을 봤다. 빛 한 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아랫배로 향했다.“임신했어?”강윤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달아오른 뺨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아니에요.”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리다 속이 울렁거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박태경은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거둔 뒤 소매 끝의 에메랄드 커프스 단추를 잠갔다.“검사 예약해 줄게.”강윤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혼을 두고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전에 부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박태경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제가 의사예요, 아니면 당신이 의사예요? 걱정 마요.”강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눈을 마주했다. 보조개가 드러날 만큼 옅게 웃으며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아이는 없을 거예요.”박태경이 이런 문제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아이를 기대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자기 위안에 빠질 생각도 없었다. 결국 서다빈과의 관계에 영향을 줄까 걱정하는 것뿐일 테니까.강윤서는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박태경은 그 자리에 선 채 닫힌 문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재킷을 챙긴 뒤 방을 나갔다.강윤서는 자신도 신기했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그렇게 깊이 잠들 수 있었다니. 꿈 한 번 꾸지 않고 열 시간이 넘도록 잤다.그녀는 허겁지겁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호텔에는 회의 전용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미 회의를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모든 눈빛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심지어 배건하마저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7화

    박태경은 가죽 소파에 앉은 채 바닥 카펫 위에 놓인 그녀의 캐리어를 슬쩍 바라봤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건데?”“약재 기지 출장이요.”강윤서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박태경은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띠었다.“일 때문에 온 거라면서. 내가 뭘 속였는데?”강윤서는 말문이 막혔다.박태경과 크게 다퉈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필요할 때면 기가 막히게 말을 막아버리곤 했다.무엇보다 그가 굳이 자신을 박씨 가문과 함께 이곳에서 명절을 보내게 하려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엉망이 된 지 오래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 없는 척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건 너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그럼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건데요?”며칠째 생리통이 심해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더 따지고 들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박태경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유가 묻어났다.“어디 있어야 할 것 같은데?”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살짝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강윤서는 그가 휴대폰 너머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 때문에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예의를 지키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착했을 테고 어르신에게 이혼 사실을 숨기겠다고 약속한 것도 자신이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알아서 해요.”강윤서는 더 이상 따질 기력도 없었다. 애초에 박태경이 이번 출장비를 전액 지원한 순간부터 이미 퇴로는 막혀 있었다.팀원들 역시 높은 출장비 때문에 기꺼이 명절 연휴까지 반납하고 이곳에 왔고 그녀 또한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게 된 것이었다. 이미 박씨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이상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강윤서는 캐리어를 끌고 한쪽 침실로 들어갔다. 잠옷을 꺼내 샤워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6화

    서다빈이 좋게 넘어가 준 게 다행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일이 커졌을지도 몰랐다. 특히 서다빈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강윤서는 순식간에 여론의 표적이 되어 악성 댓글에 시달렸을 것이다.자신이 강윤서에게 첫눈에 끌렸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이 여자에게 흔들릴 일은 절대 없었다.강윤서는 해온으로 돌아와 실험실에 틀어박혀 약리 분석에 몰두했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경원대와의 공동 실험실이 이제 본궤도에 올라 팀 전체의 방향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약물 관리, 진행 상황 점검, 방안 리스크 조율에 임상과 허가 대응까지, 박태경 일로 감정이 흔들릴 겨를조차 없었다.박태경과 함께 진명으로 설 연휴를 보내러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강윤서는 외할머니의 혼수품을 어떻게 돌려받을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설 연휴가 다가오면서 각 기업들이 하나둘 연휴에 들어갔다. 강윤서는 장시원 댁에서 함께 명절을 보낼 계획이었다.그러던 중 배건하가 갑자기 찾아와 말했다.“설에 출장 한 번 가는 거 어때?”강윤서는 잠시 망설였다.“무슨 일인데요?”“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약재 거래 기지에서 곧 희귀 약재 공개 경매가 열려. 우리 연구팀이랑 경원대에서 필요한 원료 약재가 몇 가지 있는데 워낙 귀한 물건들이라 직접 가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하필 설 연휴에 걸린 일정이었다. 강윤서는 잠시 생각했다.“좋아요. 근데 팀원들은 괜찮겠어요?”배건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싫다고 할 수 있겠어? 큰손이 나섰거든. 박태경이 전액 지원해서 비행기랑 숙소, 식사까지 다 패키지로 잡아주고 1인당 출장비로 2,000만 원까지 준다니까 다들 좋아서 난리야.”강윤서는 곧 이해했다. 서다빈이 경원대에서 첫 번째 약물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등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참 지극정성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우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5화

    갤러리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박태경은 구입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강윤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태경 씨, 잠깐요.”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었지만 박태경의 보폭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몸을 돌린 박태경 앞에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전승우가 내려서 문을 열고 있었다.서다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윤서는 그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박태경의 깊고 차가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그 물건은 강씨 집안 거예요. 외할머니 혼수품이라고요.”“그래서?”박태경의 표정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고 외할머니의 혼수품을 서다빈에게 주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그 당연한 듯한 태도가 강윤서의 가슴 깊숙이 날카롭게 박혔다. 소리 지르며 따지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박태경의 차갑고 담담한 눈빛은 오히려 그녀를 정신 차리게 만드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뭐든 상관없어요. 서다빈에게 별을 따다 줘도 안 말려요. 하지만 강씨 집안 물건만큼은 내어줄 수 없어요.”강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태경 씨, 지금까지 당신한테 뭔가를 부탁한 적 없었는데 이번 한 번만...”박태경에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이 분명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 앞에서 떼를 쓰고 협박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박태경 역시 강윤서의 이런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옆구리에 늘어뜨린 손은 무의식적으로 손톱으로 살을 파고들고 있었고 긴장과 감정이 격해질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박태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그건 서다빈이 동의해야 해. 선물로 준 이상 그 사람 거니까.”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윤서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가슴 한구석까지 서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태경의 말은 결국 서다빈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강씨 집안의 물건을 되찾기 위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4화

    박태경은 서다빈이 쓸 물건들을 집 안에 들여놓는 걸 묵인했고, 그것은 곧 사람들에게 그녀가 박태경의 아내로서 얼마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살고 있는지를 전시하는 것과 다름없었다.아무리 곧 박태경과 이혼할 예정이라고는 하지만 ,박태경이 하루빨리 사촌 동생의 약혼녀를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어 하는 꼴을 보고 있자니 아니꼬웠다.강윤서는 최소한 이혼 합의서 효력이 발생가기 전까지는 그런 모욕을 당할 생각이 없었다.강윤서는 천천히 걸어가 최대한 차분한 얼굴로 짐을 옮기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이 들여온 물건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3화

    결혼 후, 강윤서와 박태경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다.박태경은 집에 들어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고 한 달에 두 번 부부관계를 갖는 것조차 사치에 가까웠다.평소 대화를 나눌 기회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그러다 결혼 첫해가 끝나갈 무렵, 박태경은 훗날 박씨 가문의 실권을 차지하기 위한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해외 지사로 떠나게 되었다.해외로 떠나기 전 날 밤, 거래처와 술자리를 가진 박태경은 술에 취해 돌아왔고 처음으로 피임 조치를 하지 않았다.그날 밤 박태경은 유난히 거칠고 집요했다.강윤서는 그제야 박태경이 술에 취해 자신을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7화

    그 높지도 낮지도 않은 웃음소리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강윤서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서다빈은 강윤서가 김혜민에게 뺨을 맞는 비참한 모습을 봤고,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비웃었다.심지어 박태경이 그녀를 전혀 감싸주지 않는 모습까지 전부 보았다.이미 박태경과 이혼하려고 결심했음에도 내연녀인 서다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운 일이었다.박태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혜민을 바라보더니 서다빈에게 이따 다시 얘기하자고 말하고는 영상통화를 끊었다.파문 하나 일지 않는 눈빛이 강윤서의 붉어진 뺨을 스쳐 지나가 김혜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6화

    박태경은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언짢은 듯이 강윤서를 바라볼 뿐이었다.차민석과 노형준은 순간 넋이 나갔다.강윤서는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다.박태경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게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겠다니.그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서다빈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서다빈은 표정을 굳히며 상처받은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강윤서 씨, 이제 좀 그만해요.”강윤서는 당당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는 서다빈의 모습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그녀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更多章節
探索並免費閱讀 優質小說
GoodNovel APP 免費暢讀海量優秀小說,下載喜歡的書籍,隨時隨地閱讀。
在 APP 免費閱讀書籍
掃碼在 APP 閱讀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