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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eur: 안개자욱
박태경은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언짢은 듯이 강윤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차민석과 노형준은 순간 넋이 나갔다.

강윤서는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다.

박태경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

게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겠다니.

그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서다빈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서다빈은 표정을 굳히며 상처받은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강윤서 씨, 이제 좀 그만해요.”

강윤서는 당당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는 서다빈의 모습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그녀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사람들한테 굳이 힘들게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이혼할 사이인데 쓰레기 같은 인간들과 얽혀봤자 그녀만 피곤해질 뿐이다.

그래서 강윤서는 몸을 돌렸다.

그런데 박태경 옆을 지나치는 순간, 박태경이 무심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너무 필사적인 거 아니야?”

강윤서는 잠깐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요?”

박태경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피식 웃었다.

“왜 내 말에는 반박을 안 해?”

아까는 그렇게 날을 세웠으면서 말이다.

강윤서는 그 말을 이해하는 순간 화가 나서 눈이 빨개졌다.

그녀가 분노를 쏟아내는 것도, 슬퍼하며 괴로워하는 것도, 상처를 받는 것에 무뎌져서 절망에 빠져 이혼하려고 하는 것도, 박태경에게는 전부 그의 관심을 끌려는 수작으로 보이는 걸까?

심지어 화가 나서 피가 거꾸로 솟는 것만 같은데도 박태경은 그걸 연기라고 생각했다.

서다빈은 감싸주는 사람이 많겠지만 강윤서는 기댈 구석이 없었기에, 계속 말싸움을 해봤자 그녀만 비참해질 게 뻔했다.

게다가 박태경은 여전히 그녀가 투정을 부린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철없음을 나무라고 있었다.

그녀가 아무리 설명해도 박태경은 절대 믿지 않을 텐데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서서히 평정심을 되찾은 강윤서는 더 이상 다툴 기력이 없어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앞으로 두 사람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랄게요. 이제 됐죠?”

강윤서는 박태경의 표정을 보지도 않고 그대로 떠났다.

3개월.

3개월만 더 버티면 이 지긋지긋한 결혼생활도 끝이었다.

박태경은 강윤서를 차갑게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그는 강윤서의 부정적인 감정을 무시했다.

그런 감정은 무시하면 금방 사라질 테니 말이다.

그게 지난 7년 동안 두 사람 사이의 암묵적인 룰이었다.

...

강윤서는 권지율에게 그 일을 굳이 얘기하지 않았다. 얘기한다면 권지율이 화를 내며 그들을 찾아가 싸우려고 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밥맛이 떨어진 강윤서는 권지율과 헤어진 뒤 아파트로 돌아가서 짐을 정리했다.

어느 정도 마무리했을 즈음엔 밤 9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확인해 보니 선생님이 줬던 책을 챙기지 않았다.

강윤서는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다가 그 책을 박태경의 집 금고에 넣어둔 걸 떠올렸다.

그녀는 지체하지 않고 대충 겉옷만 걸친 채 차를 타고 박태경의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박태경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기에 그와 마주칠 일은 없을 것이다.

강윤서는 익숙하게 계단을 올라 침실 문을 열었고, 그 순간 안에 있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박태경은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고 그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영상 통화를 하고 있었는데 언뜻 보니 서다빈의 얼굴이 보였다.

그들은 마치 연인처럼 시도 때도 없이 서로를 보고 싶어 하는 듯했다.

박태경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강윤서가 갑자기 문을 열고 들어온 게 언짢은 듯 그는 무심한 목소리로 싸늘하게 말했다.

“왜 노크를 안 해?”

그 말에 강윤서는 순간 당황했다.

그녀는 박태경의 아내로서 7년 동안 그 집에 살았다. 그런데 그와 서다빈의 연애 때문에 이제는 노크를 해야 한다는 규칙까지 생긴 걸까?

“나가.”

박태경이 차갑게 명령했다.

마치 그녀가 일부러 엿듣기 위해 들어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강윤서는 순간 심장이 조여오는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문을 닫고 나갔다.

그녀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취미는 없었기에 굳이 남편이 다른 여자와 달콤한 얘기를 주고받는 걸 들을 생각은 없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자 가정부 김명희가 소리를 듣고 나왔다.

그녀는 강윤서를 보자마자 말했다.

“사모님, 어르신께서 전화하셨어요.”

거실의 전화기를 바라본 강윤서는 잠시 망설이다 다가가 수화기를 들었다.

김명희는 강윤서가 박태경에게 사랑받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박태경의 할머니가 강윤서를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강윤서에게 꽤 잘해주었다. 그녀는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으려고 세탁물을 정리하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윤서야.”

수화기 너머로 박태경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윤서는 시간을 본 뒤 책을 챙겨야 한다는 걸 상기하며 말했다.

“할머니, 왜 아직도 안 주무셨어요?”

박태경의 할머니는 웃으며 타박했다.

“내가 워낙에 건강하다 보니 젊은 애들 따라서 밤도 좀 새고 그래. 그리고 네가 자주 몸에 좋은 것들을 보내줘서 괜찮아.”

강윤서는 조용히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박태경의 할머니는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윤서야, 의사인 애가 왜 자기 몸은 챙기지 않는 거니? 아이를 가지려면 미리 준비를 해야지. 그래야 건강한 아이를 낳을 수 있지 않겠어? 너도 알다시피 우리 박씨 가문은 딸이 귀해. 네가 증손녀를 안겨주면 정말 좋을 텐데... 아이가 생기면 부부 사이도 좋아질 거야. 태경이도 사실은 아이를 굉장히 좋아해.”

강윤서는 아이를 낳으라는 말을 몇 년째 들어왔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동안 권하람의 존재를 단 한 번도 밝힌 적이 없었다.

이제는 이혼까지 결심했으니 더더욱 얘기할 이유가 없었다.

설령 이혼하지 않더라도 그녀만 건강 관리를 해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박태경이 아무런 욕구가 없는데 말이다.

게다가 박태경은 이미 오래전에 그녀에게 자신은 아이를 원치 않는다고 밝혔었다.

그리고 박태경의 할머니가 박태경이 불임이라는 소문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강윤서에게 약을 먹어 몸을 관리하라고 했다.

강윤서는 문득 이 세상의 여자들이 모두 끝없이 희생당하면서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억울하게 비난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너무 불공평했다.

그러나 일단 그 화제를 끝내기 위해 강윤서는 주먹을 움켜쥐며 솔직한 생각을 말했다.

“할머니, 저 태경 씨랑 이혼하려고요.”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박태경의 할머니는 충격을 받은 건지 한참 뒤에야 어색하게 말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지? 할머니도 다 알아. 태경이 걔는 타고난 성격 때문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방법을 몰라. 그래도 그동안 서로 존중하며 잘 살아왔잖니. 조금 더 고민해 보는 건 어때?”

“아니요. 저는 이미 결정했어요.”

박태경의 할머니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깊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윤서야, 우리가 참 너한테 미안한 게 많아. 걱정하지 마. 이혼하게 되더라도 할머니가 네 앞길을 책임질게. 좋은 애들 많으니까 너랑 잘 맞을 것 같은 애가 있는지 할머니가 알아봐 줄게.”

강윤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박태경의 할머니가 그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새로운 상대를 찾아주겠다니.

‘너무 빠른 거 아닌가?’

강윤서는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사실 박태경이 남편으로서 얼마나 최악이었는지 다들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강윤서가 박태경을 위해 계속 참고 양보할 거로 생각했고, 그 누구도 그녀의 고통을 제대로 봐주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통화를 끝낸 강윤서는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10분이 지나 있었다.

그녀는 아직 법적으로는 그녀의 남편인 박태경이 지금쯤이면 여자 친구와의 행복한 통화를 끝냈을지 생각해 봤다.

강윤서는 그저 책만 챙겨서 빨리 떠나고 싶었다.

그녀가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갑자기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박태경의 작은어머니 김혜민이 잔뜩 굳은 얼굴로 성큼성큼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손을 들어 강윤서의 뺨을 때리려고 했다.

강윤서는 아주 빠르게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덕분에 제대로 맞지는 않았지만 손가락 마디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짝!

강윤서는 뺨이 화끈거리는 걸 느꼈다.

김혜민이 강윤서를 손가락질하며 욕설을 내뱉었다.

“너 질투심 때문에 눈이 먼 거니?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다른 사람까지 끌어내리려고 들어? 정말 지독하네!”

강윤서는 갑작스럽게 맞은 탓에 아직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해서 반박할 틈이 없었다.

그때 발소리가 들렸고,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내려온 박태경이 보였다. 그의 휴대폰은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강윤서는 휴대폰 화면 속 서다빈이 그녀가 뺨을 맞는 순간 작게 웃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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