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제7화

Penulis: 안개자욱
그 높지도 낮지도 않은 웃음소리가 날카로운 가시처럼 강윤서의 가슴에 깊숙이 박혔다.

서다빈은 강윤서가 김혜민에게 뺨을 맞는 비참한 모습을 봤고, 아주 당당하게 그녀를 비웃었다.

심지어 박태경이 그녀를 전혀 감싸주지 않는 모습까지 전부 보았다.

이미 박태경과 이혼하려고 결심했음에도 내연녀인 서다빈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견딜 수 없을 만큼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박태경은 차가운 눈빛으로 김혜민을 바라보더니 서다빈에게 이따 다시 얘기하자고 말하고는 영상통화를 끊었다.

파문 하나 일지 않는 눈빛이 강윤서의 붉어진 뺨을 스쳐 지나가 김혜민에게 고정되었다. 박태경은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건 무슨 상황이죠?”

박태경은 강윤서에게 괜찮은지 묻지조차 않았다.

강윤서는 애초에 박태경 얼굴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기색 같은 걸 기대하지도 않았다.

지난 7년 동안 그의 무관심에 익숙해졌으니 그런 걸 기대할 리가 없었다.

김혜민은 박태경의 눈을 바라보자 괜히 움찔했다.

강윤서는 박태경의 아내이고, 그녀가 강윤서의 뺨을 때린 건 박태경의 체면을 건드린 것과 다름없었다.

박태경이 아무리 아내를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해도 자신의 체면만큼은 중요하게 생각할 것이다. 어쩌면 박태경에게는 자신의 체면이 강윤서보다 훨씬 더 중요할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이 들자 김혜민은 곧바로 강윤서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이게 다 강윤서 때문이야. 네가 서다빈이랑 같이 병원에 간 사실이 알려졌어. 그 병원이 강윤서가 다니는 병원이잖아! 당연히 강윤서가 한 짓이겠지. 그 게시물에 역겨운 말들이 가득 적혀 있었어. 서다빈이 네 아이를 가졌다느니, 둘이...”

김혜민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그저 강윤서를 노려보기만 했다.

서다빈은 김혜민 아들의 약혼녀이고 결혼식을 올릴지 말지 아직 제대로 얘기를 나눈 적도 없는 상태이다.

그래서 이 사건으로 그들은 체면을 구기게 되었다.

‘앞으로 어떻게 사람들을 만나고 다녀? 사람들이 얼마나 비웃겠어?’

김혜민은 아직도 아이를 갖지 못한 강윤서를 무능하다고 생각했다.

7년 동안 결혼 생활을 했으면서 남편 마음 하나 붙잡아두지 못했고, 그 탓에 박태경이 그녀의 아들과 결혼할 예정이었던 여자와 바람이 났으니 말이다.

강윤서는 조금 놀랐다.

그녀는 서다빈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하겠다는 말만 했었지, 실제로 그런 글을 올린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절묘한 타이밍에 글이 올라왔으니 그녀가 한 짓처럼 보일 만도 했다.

강윤서는 휴대폰으로 검색해 봤고 실제로 그 글을 보게 되었다.

글쓴이는 단어 하나하나 꽤 신중하게 고른 듯했고 박태경과 서다빈을 마치 비극적인 순애처럼 포장해 놓았다.

강윤서는 자기도 모르게 박태경을 돌아봤다가 그제야 그가 자신을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다음 순간, 박태경은 마치 남 일인 것처럼 물었다.

“그렇게 걔가 신경 쓰여?”

박태경은 별말 하지 않았지만 강윤서는 그가 어떠한 의도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를 금방 눈치챘다.

박태경은 그녀가 질투심 때문에 서다빈에 관한 루머를 퍼뜨린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게 된 상황에 강윤서는 표정 관리를 하기 힘들었다.

“저였다면 이렇게 둘 사이를 예쁘게 포장할 리가 없죠.”

강윤서가 그들의 관계를 아름다운 단어로 미화할 리가 있겠는가?

그러나 김혜민은 믿지 않았다.

“당연히 대놓고 욕하지는 못하겠지. 너는 태경이한테 버림받고 싶지 않을 테니까!”

박씨 가문 사람들 중에 강윤서가 박태경 없이는 못 산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강윤서는 김혜민의 말을 듣고 굉장히 불쾌해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비참한 것은 그 말에 반박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과거의 강윤서는 오로지 박태경만 바라보고 살았고 그를 위해 자신의 자존심까지 전부 내다 버렸었다.

박태경은 강윤서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는 강윤서가 변명하든 말든 관심이 없었다. 그저 그녀의 붉어진 뺨을 보고 고개를 돌려 가정부 김명희에게 말했다.

“윤서한테 얼음팩 좀 가져다주세요.”

김명희는 옆에서 구경하고 있다가 그제야 정신이 들어 서둘러 얼음팩을 가지러 갔다.

잠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던 강윤서는 그 말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박태경이 자신을 신경 쓰든 말든 그녀는 더 이상 마음에 아무런 파문이 일지 않았다.

그녀가 보기에 박태경의 배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다정함이나 걱정이 아니라, 그저 어려서부터 몸에 밴 교양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울뿐인 자상함이었다.

뭔가에 의미 부여를 하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름길이었다.

박태경은 김혜민을 바라보며 제안했다.

“일이 커지면 좋을 게 없으니 박씨 가문의 명예를 생각한다면 다빈이랑 재원이 파혼시키고 대외적으로는 아예 약혼한 적이 없다고 발표하세요.”

김혜민의 표정이 굳었다.

그녀는 박태경이 이런 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줄은 몰랐다.

원래는 따지러 온 것인데 지금 상황에서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강윤서는 얼음팩을 쥔 채 박태경의 차갑고 고고한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는 그제야 박태경의 진짜 목적을 깨닫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박태경은 서다빈을 파혼시켜 앞으로 서다빈과 당당하게 결혼할 생각일 것이다.

박태경은 이미 서다빈과 결혼하고 싶어서 안달 난 상태였다.

“아주머니, 손님 배웅하세요.”

박태경은 애초에 김혜민과 상의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그렇게 말한 뒤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강윤서를 바라본 후 위층으로 올라갔다.

김혜민은 화가 나서 씩씩댔지만 곧 박씨 가문을 장악하게 될 후계자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기에 떠나기 전 화풀이하듯 강윤서를 매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전업주부는 진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니까. 할 줄 아는 게 집안일 말고 뭐가 있어? 그리고 얼굴이 예쁘면 뭐 해. 능력도, 눈치도 서다빈 발끝도 못 따라가니까 버림받지. 강윤서, 그러니까 네가 안 되는 거야.”

강윤서는 반박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동안의 의미 없는 헌신과 헛된 기대가 사랑에 눈이 멀어 저지른 미친 짓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강윤서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김혜민의 손이 거의 스치다시피 했는데도 피부가 워낙 흰 탓에 뺨이 붉게 부었다.

강윤서는 김혜민의 손이 닿았던 피부를 깨끗한 물로 씻어낸 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그녀는 병원 응급실에서 있었던 일을 폭로했다는 누명을 쓰고 싶지는 않았다.

김명희에게 물어보니 박태경은 다시 침실로 들어갔다고 했다.

이번에 강윤서는 노크를 했다. 어차피 앞으로는 그녀의 집이 아닐 테니 손님으로서 예의는 지켜야 했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시 기다리자 그제야 안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작은어머니가 강윤서를 찾아갔지?”

최미진의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에서 흘러나왔다.

박태경은 욕실에서 나와 서랍 앞으로 걸어간 뒤 허리를 숙이고 뭔가를 찾았다.

“네.”

“너랑 다빈이가 같이 산부인과에 갔다는 소문 말이야. 그거 네가 퍼뜨린 거니, 아니면 다빈이가 퍼뜨린 거니? 강윤서한테 누명을 씌워서 화살을 돌릴 생각이었던 거지?”

그 말에 강윤서는 흠칫했다.

이렇게 우스운 이유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강윤서는 그들의 뒤틀린 관계를 위한 방패막이였던 것이다.

그러나 박태경은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것이 묵인인지, 아니면 굳이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답하지 않은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최미진이 웃으며 말했다.

“어차피 일이 크게 번질 리도 없어. 조짐이 보이면 바로 막으면 되니까. 그리고 강윤서는 너라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애니까 신경 쓰일 만한 일은 만들지 않을 거야.”

“알아요.”

박태경은 그제야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가 최미진이 한 말들 중 어느 부분에 동의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문밖에 서 있던 강윤서는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그녀는 황급히 고개를 젖히며 감정을 추슬렀다.

그리고 박태경이 요구한 대로 문을 두드릴 생각을 하지 않고 그냥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리가 들리자 박태경은 말없이 뒤를 돌아봤다.

전화는 이미 끊긴 상태였다.

강윤서는 박태경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고,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굳이 밝히지도 않았다. 자신에게 누명을 씌운 사람 앞에서 해명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으니 말이다.

강윤서는 금고 앞으로 걸어가 비밀번호를 입력한 뒤 소중히 보관해 온 책을 꺼냈다.

박태경은 가냘픈 강윤서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는 강윤서가 기분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오히려 몸을 돌리더니 긴 다리를 뻗으며 테라스에서부터 방 안쪽으로 걸어갔다.

강윤서의 화장대 앞을 지나칠 때 그의 시선이 화장대 위에 놓인 서류봉투에 닿았다.

그 순간 박태경은 걸음을 멈췄다.

Lanjutkan membaca buku ini secara gratis
Pindai kode untuk mengunduh Aplikasi

Bab terbaru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100화

    배건하의 말이 떨어지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박태경에게로 향했다.강윤서는 배건하를 한 번 바라봤다. 그는 그녀를 배려하듯 자연스럽게 감싸주고 있었다.강윤서가 모든 화살을 혼자 맞는 상황을 피하게 해주면서도 그녀가 직접 박태경의 정체를 밝히고 그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까지 막아준 것이었다.이제 중요한 건 박태경의 대답뿐이었다.“내가 그런 걸 신경 써야 하나요?”남자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평온했다. 기복이라고는 전혀 없었지만 듣는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의미는 달랐다.약리팀 남자 직원 몇 명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맞죠. 박 대표님이 어떤 분인데 자기랑 상관없는 사람 일까지 신경 쓰겠어요.”강윤서는 그 말의 의미를 단번에 알아차렸다.박태경은 그녀와의 관계를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강윤서가 서다빈의 정체를 들춰낼 수 있는 길을 막아버렸다. 게다가 자신이 바로 그 당사자이기 때문에 이런 질문에 답할 필요조차 없다는 뜻도 담겨 있었다.그는 늘 그랬다.말 한마디에도 빈틈이 없었다.그 대답 하나로 사람들은 박태경이 이런 화제에 관심이 없다고 판단했고 자연스럽게 분위기는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완벽한 정리였다.배건하는 안쓰러운 눈빛으로 강윤서를 바라봤다.강윤서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삼켰다.자신이 쓰고 있는 가면이 참 처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이쯤 되니 이제야 이해가 됐다. 박태경이 왜 자신을 박씨 가문과 함께 이곳에서 명절을 보내게 하려 했는지, 왜 이 많은 돈을 써가며 팀 전체를 진명까지 불러들였는지.결국 이유는 하나였다.서다빈과 함께 명절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한창 연애 중인 연인답게 떨어져 있기 싫었을 테고 처음에는 강윤서를 데려오려 했다가 거절당하자 아예 팀 전체를 끌고 온 것이었다. 그러면 그녀가 어쩔 수 없이 따라올 테니까.어르신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강윤서가 필요했고 뒤에서는 서다빈과 마음껏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이다.결국 그녀는 박태경에게 이용당한 셈이었다.강윤서는 눈을 내리깔고 손바닥을 펼쳐봤다. 손톱이 파고든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9화

    경원대 팀은 서다빈이 들어오자마자 반갑게 시선을 모았다.“선배, 괜찮아요. 오히려 선배 남자친구가 이번 행사 후원해 준 거 감사해야죠.”“맞아요. 선배 덕분에 이렇게 두둑한 출장비를 받게 됐잖아요.”“선배는 이제 우리 사모님이랑 다를 바 없는 거 아니에요?”누군가 감탄하듯 말을 보탰다.생각해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박태경이 서다빈을 위해 후원을 했으니 그들의 상사이자 밥줄이나 다름없었다. 서다빈이 사모님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서다빈은 입을 가리고 살짝 웃었다. 눈가에 번지는 기쁨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다.“다들 무슨 말씀을요. 너무 그러지 마세요.”강윤서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마치 남의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광경을 바라봤다. 그러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서다빈 곁에 앉은 박태경에게 향했다. 그는 마치 서다빈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해줄 수 있을 것처럼 그녀만을 바라보고 있었다.박태경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머물러 있었고 ‘사모님’이라는 말에도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한 여자에게만 온 마음을 내어주는 모습은 쉽게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반면 자신은 7년 동안 박씨 집안의 며느리로 살았지만 존재감조차 없는 사람처럼 지내왔다.생리통이 아랫배를 한 번씩 비틀어 쥐며 온몸의 신경을 건드렸지만 그 통증 덕분인지 오히려 정신은 더 선명해졌다.강윤서는 눈을 내리깔며 눈동자 속 냉소를 감췄다.“다들 아까 무슨 얘기 했어요? 그렇게 시끌벅적하게.”서다빈은 강윤서를 본 척도 하지 않은 채 박태경 옆자리에 앉아 환하게 물었다.그러자 회의실 안의 화제는 순식간에 다시 강윤서에게 쏠렸다.경원대 팀 몇 명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선배 모르셨어요? 강윤서 씨가 어젯밤 누군가랑 같이 있었다는데 남편이래요. 그래서 그 남편이 누구인지 물어보던 참이었어요.”“맞아요. 왔으면 같이 밥도 먹고 하면 더 재밌을 텐데요.”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강윤서는 맞은편에서 날아오는 박태경의 무심한 시선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그쪽을 보지 않았다.애초에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8화

    박태경이 아직도 부부처럼 같은 침대에서 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들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고 강윤서는 몸을 돌려 쓰레기통을 향해 두 번이나 헛구역질을 했다. 순전히 생리적인 반응이었다. 서다빈과 관련된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몸이 제멋대로 반응했다.마침 세면실에서 나오던 박태경이 그 모습을 봤다. 빛 한 점 없는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그녀의 아랫배로 향했다.“임신했어?”강윤서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달아오른 뺨에는 아직 열기가 남아 있었다.“아니에요.”두 사람이 함께 있는 장면을 떠올리다 속이 울렁거렸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박태경은 별다른 말 없이 시선을 거둔 뒤 소매 끝의 에메랄드 커프스 단추를 잠갔다.“검사 예약해 줄게.”강윤서는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랐다. 이혼을 두고 다투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 전에 부부 관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박태경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제가 의사예요, 아니면 당신이 의사예요? 걱정 마요.”강윤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눈을 마주했다. 보조개가 드러날 만큼 옅게 웃으며 안심시키듯 말을 이었다.“우리 사이에 아이는 없을 거예요.”박태경이 이런 문제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가 아이를 기대하고 있다고 착각할 만큼 자기 위안에 빠질 생각도 없었다. 결국 서다빈과의 관계에 영향을 줄까 걱정하는 것뿐일 테니까.강윤서는 그대로 욕실 안으로 들어갔고 박태경은 그 자리에 선 채 닫힌 문을 몇 초 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재킷을 챙긴 뒤 방을 나갔다.강윤서는 자신도 신기했다. 무슨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그렇게 깊이 잠들 수 있었다니. 꿈 한 번 꾸지 않고 열 시간이 넘도록 잤다.그녀는 허겁지겁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호텔에는 회의 전용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이미 회의를 기다리고 있던 수십 명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모든 눈빛에는 묘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심지어 배건하마저 의미심장한 눈짓을 보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7화

    박태경은 가죽 소파에 앉은 채 바닥 카펫 위에 놓인 그녀의 캐리어를 슬쩍 바라봤다.“여긴 무슨 일로 온 건데?”“약재 기지 출장이요.”강윤서는 입꼬리를 꾹 눌렀다.박태경은 긴 속눈썹을 들어 올리며 입가에 옅은 비웃음을 띠었다.“일 때문에 온 거라면서. 내가 뭘 속였는데?”강윤서는 말문이 막혔다.박태경과 크게 다퉈본 적은 거의 없었지만 말싸움으로는 도저히 당해낼 수 없는 상대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필요할 때면 기가 막히게 말을 막아버리곤 했다.무엇보다 그가 굳이 자신을 박씨 가문과 함께 이곳에서 명절을 보내게 하려는 이유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의 관계는 엉망이 된 지 오래였는데 그런 상황에서 아무 일 없는 척 같은 공간에 머무르는 건 너무 의미 없는 일이었다.“그럼 오늘 밤은 어디서 잘 건데요?”며칠째 생리통이 심해 몸 상태도 좋지 않았다. 더 따지고 들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박태경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 메시지를 확인하고 있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입가에는 희미한 웃음기가 감돌고 있었고 다시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여유가 묻어났다.“어디 있어야 할 것 같은데?”가볍게 던진 말이었다. 살짝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강윤서는 그가 휴대폰 너머 누군가와 나누는 대화 때문에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걸 알아차렸다. 예의를 지키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박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모두 도착했을 테고 어르신에게 이혼 사실을 숨기겠다고 약속한 것도 자신이었다.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알아서 해요.”강윤서는 더 이상 따질 기력도 없었다. 애초에 박태경이 이번 출장비를 전액 지원한 순간부터 이미 퇴로는 막혀 있었다.팀원들 역시 높은 출장비 때문에 기꺼이 명절 연휴까지 반납하고 이곳에 왔고 그녀 또한 그 흐름을 따라 자연스럽게 오게 된 것이었다. 이미 박씨 가문의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이상 제멋대로 행동할 수도 없었다.강윤서는 캐리어를 끌고 한쪽 침실로 들어갔다. 잠옷을 꺼내 샤워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6화

    서다빈이 좋게 넘어가 준 게 다행이었다. 만약 다른 사람이었다면 진작 일이 커졌을지도 몰랐다. 특히 서다빈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마음만 먹었다면 강윤서는 순식간에 여론의 표적이 되어 악성 댓글에 시달렸을 것이다.자신이 강윤서에게 첫눈에 끌렸던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제는 이 여자에게 흔들릴 일은 절대 없었다.강윤서는 해온으로 돌아와 실험실에 틀어박혀 약리 분석에 몰두했다. 머릿속에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설 틈을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경원대와의 공동 실험실이 이제 본궤도에 올라 팀 전체의 방향을 총괄하는 책임자로서 해야 할 일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약물 관리, 진행 상황 점검, 방안 리스크 조율에 임상과 허가 대응까지, 박태경 일로 감정이 흔들릴 겨를조차 없었다.박태경과 함께 진명으로 설 연휴를 보내러 가자는 제안을 거절한 이후 그는 더 이상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강윤서는 외할머니의 혼수품을 어떻게 돌려받을지 내내 마음에 걸렸다. 설 연휴가 다가오면서 각 기업들이 하나둘 연휴에 들어갔다. 강윤서는 장시원 댁에서 함께 명절을 보낼 계획이었다.그러던 중 배건하가 갑자기 찾아와 말했다.“설에 출장 한 번 가는 거 어때?”강윤서는 잠시 망설였다.“무슨 일인데요?”“국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약재 거래 기지에서 곧 희귀 약재 공개 경매가 열려. 우리 연구팀이랑 경원대에서 필요한 원료 약재가 몇 가지 있는데 워낙 귀한 물건들이라 직접 가서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아.”하필 설 연휴에 걸린 일정이었다. 강윤서는 잠시 생각했다.“좋아요. 근데 팀원들은 괜찮겠어요?”배건하는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싫다고 할 수 있겠어? 큰손이 나섰거든. 박태경이 전액 지원해서 비행기랑 숙소, 식사까지 다 패키지로 잡아주고 1인당 출장비로 2,000만 원까지 준다니까 다들 좋아서 난리야.”강윤서는 곧 이해했다. 서다빈이 경원대에서 첫 번째 약물 프로젝트를 순조롭게 등록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참 지극정성이었다.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그럼 우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95화

    갤러리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박태경은 구입을 마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고 강윤서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태경 씨, 잠깐요.”힐을 신은 채 빠르게 걸었지만 박태경의 보폭을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계단 아래에서 몸을 돌린 박태경 앞에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전승우가 내려서 문을 열고 있었다.서다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강윤서는 그걸 신경 쓸 여유조차 없었다. 그녀는 박태경의 깊고 차가운 눈을 똑바로 마주했다.“그 물건은 강씨 집안 거예요. 외할머니 혼수품이라고요.”“그래서?”박태경의 표정은 한 치도 흔들리지 않았고 외할머니의 혼수품을 서다빈에게 주는 것이 문제 될 게 없다는 듯 행동하고 있었다.그 당연한 듯한 태도가 강윤서의 가슴 깊숙이 날카롭게 박혔다. 소리 지르며 따지고 싶은 충동이 치밀어 올랐지만 박태경의 차갑고 담담한 눈빛은 오히려 그녀를 정신 차리게 만드는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졌다.“뭐든 상관없어요. 서다빈에게 별을 따다 줘도 안 말려요. 하지만 강씨 집안 물건만큼은 내어줄 수 없어요.”강윤서는 깊게 숨을 들이켜며 목소리를 가라앉히려 애썼다.“태경 씨, 지금까지 당신한테 뭔가를 부탁한 적 없었는데 이번 한 번만...”박태경에게 강하게 밀어붙이는 행동이 분명 이성적이지 않다는 걸 그녀도 알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 앞에서 떼를 쓰고 협박한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박태경 역시 강윤서의 이런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옆구리에 늘어뜨린 손은 무의식적으로 손톱으로 살을 파고들고 있었고 긴장과 감정이 격해질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박태경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그건 서다빈이 동의해야 해. 선물로 준 이상 그 사람 거니까.”그 말을 듣는 순간 강윤서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차가운 물을 한 바가지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순식간에 식어버렸고 가슴 한구석까지 서늘하게 얼어붙는 기분이었다.박태경의 말은 결국 서다빈을 찾아가 부탁하라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강씨 집안의 물건을 되찾기 위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6화

    박태경은 겉으로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그저 싸늘한 눈빛으로 언짢은 듯이 강윤서를 바라볼 뿐이었다.차민석과 노형준은 순간 넋이 나갔다.강윤서는 말을 너무 심하게 했다.박태경의 관심을 끌려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게다가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겠다니.그건 사람들 앞에서 대놓고 서다빈에게 망신을 주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서다빈은 표정을 굳히며 상처받은 듯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강윤서 씨, 이제 좀 그만해요.”강윤서는 당당하게 피해자 행세를 하는 서다빈의 모습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그녀는 자기가 믿고 싶은 대로 믿는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5화

    옆에 있던 또 다른 친구 노형준이 웃으며 물었다.“그러게. 표정이 왜 그렇게 안 좋아?”차민석은 자리에 앉은 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서다빈을 바라봤다. 서다빈은 마음이 넓었고 그들과 어울릴 때도 선을 잘 지켰으며 처신도 잘했다. 그런데 강윤서는 남몰래 그런 서다빈의 험담을 하고 다녔다.“내가 아래층에서 누구를 봤는지 알아? 강윤서를 봤어.”박태경은 그 말을 듣고도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손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채 느긋하게 테이블을 툭툭 두드릴 뿐이었다.강윤서 이야기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서다빈이 차민석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2화

    간호사는 입을 다물고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강윤서가 이렇게 태연하게 남편의 치부를 까발릴 줄은 생각지 못했다.그런데 오히려 그래서 더 믿음이 갔다.결혼한 지 7년이나 되었는데 아직도 아이가 없는 건 이상한 일이었으니 말이다.그래서 간호사는 강윤서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강윤서는 진실을 숨겼다.사실 박태경은 강윤서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는 걸 원치 않았다.그는 신혼 첫날 밤 차가운 얼굴로 쌀쌀맞게 말했었다.“나는 일이 바빠서 아이까지 신경 쓸 여유가 없어. 그리고 애초에 아이를 가질 생각도 없으니까 너도 기

  • 당신은 필요 없고 딸만 데려갈게요   제1화

    결혼한 지 7년이 된 강윤서는 남편 몰래 아이를 낳았고 그 아이가 이제는 다섯 살이 되었다.그러나 강윤서의 남편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강윤서는 남편 박태경에게 아이의 아빠로 살 기회를 줄 생각이 없었다.야간 근무를 하던 강윤서는 다른 도시에서 살고 있는 딸이 보낸 음성메시지를 클릭했고, 이내 귀엽고 앳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엄마, 우리 아빠는 어디 있어요? 아빠는 죽은 거예요?”강윤서는 진지하게 생각해 봤다.비록 죽지는 않았지만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긴 했다.권하람은 최근 들어 호기심이 많아지기 시작하면서 조그마한

Bab Lainnya
Jelajahi dan baca novel bagus secara gratis
Akses gratis ke berbagai novel bagus di aplikasi GoodNovel. Unduh buku yang kamu suka dan baca di mana saja & kapan saja.
Baca buku gratis di Aplikasi
Pindai kode untuk membaca di Aplikasi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