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공연기획사 대표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은채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탁자 위에는 아직 독주회 프로그램 초안이 펼쳐져 있었다. 무대 중앙에 놓일 첼로의 위치와 객석 배치도까지 정리되어 있었고, 첫 장에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
첼리스트 서은채.
그 이름을 다시 무대에 올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
“취소라니요? 어제까지만 해도 일정에 문제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대표는 은채의 눈을 피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복귀를 누구보다 반기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불편해 보였다.
“공연장 측에서 대관 승인을 철회했습니다. 후원사 두 곳도 오늘 오전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고요.”
“그럼 다른 공연장을 알아보겠습니다. 후원금이 부족하면 공연 규모를 줄여도 괜찮아요.”
은채는 준비해 온 자료를 펼쳤다. 예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항목과 대체 공연장 명단까지 적어 둔 서류였다.
대표는 그 서류를 보자 오히려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서은채 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은채 앞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오늘 오전 도착한 이메일이 열려 있었다.
발신인은 한태경의 비서실이었다.
메일에는 서은채가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공연 활동을 중단할 예정이며, 가족 측의 요청에 따라 독주회 추진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외부에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일정 변경이라고 안내해 달라는 문장까지 덧붙어 있었다.
은채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
“제가 동의했다고 되어 있네요.”
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은채가 고개를 들었다.
“제 남편이 제 공연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한 건가요?”
“한 대표 측에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
“왜요?”
대표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공연장 운영법인에 한 대표 측 계열사가 투자하고 있습니다. 후원사들도 그쪽과 거래 관계가 있고요. 저희로서는…….”
그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
은채는 다시 프로그램 초안을 내려다보았다. 자신이 연주할 곡목과 연주 시간이 적혀 있었고, 마지막 장에는 공연이 끝난 뒤 관객에게 전할 인사말을 적을 빈칸까지 남아 있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그 빈칸에 어떤 말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오랜만에 돌아왔다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하다고, 앞으로는 더 자주 무대에서 만나고 싶다고 말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인사를 건넬 무대가 사라졌다.
은채는 서류를 집어 들었다. 손끝이 떨려 종이가 작게 바스락거렸지만, 그녀는 구겨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반듯하게 맞췄다.
“대표님, 공식적인 취소 사유를 서면으로 보내 주세요.”
“서은채 씨.”
“건강 문제라는 설명은 사실이 아니니 사용하지 말아 주세요. 제가 공연을 포기했다고 발표하시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대표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한 대표님과 먼저 상의하시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은채는 잠시 그를 바라보았다.
“제 연주를 허락받으려고 결혼한 건 아니에요.”
대표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채는 프로그램 초안을 가방에 넣었다. 마지막으로 무대 배치도를 접으려다가 첼로가 놓일 자리에 시선이 멈췄다.
작은 검은 표시 하나였다.
그곳에 앉아 관객을 마주할 자신의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다.
남편의 전화 몇 통으로 그 자리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은채는 도면을 접어 가방에 넣었다.
“저는 공연을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흔들리지 않았다.
“오늘 이 공연이 취소됐다고 해서 제가 다시는 무대에 서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요.”
***
그날 아침, 은채는 스승 윤명숙의 연습실을 찾아갔다.
결혼 전 수없이 오르내렸던 낡은 계단에는 여전히 송진 냄새가 배어 있었다. 삼층 복도 끝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자 은채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늦췄다.
문을 열었을 때 윤명숙은 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은채야.”
스승은 그녀를 보자마자 연주를 멈췄다.
은채는 손을 내밀지 않았다.유림은 명패를 건넨 자세 그대로 잠시 서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두 여자에게 모이자, 그녀는 곤란한 표정으로 태경을 바라보았다.“태경 씨, 제가 괜히 언니를 불편하게 해 드린 것 같아요.”그제야 태경이 입을 열었다.“유림아, 앉아.”은채는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는 유림이 의자에 앉는 것을 확인한 뒤 아내에게 시선을 돌렸다.“당신은 왜 여기까지 와서 일을 크게 만들어?”은채의 입술이 굳었다.“내가 일을 크게 만들었어?”“사람들 보는 앞이잖아. 할 말 있으면 따로 해.”은채는 주변을 둘러보았다.귀빈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대화를 멈춘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호텔 직원이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 못했다.은채는 다시 태경에게 시선을 돌렸다.“당신 옆에 누가 앉아 있는지 사람들이 보는 건 괜찮고, 내가 이유를 묻는 건 안 되는 거야?”태경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서은채.”그는 낮게 이름을 불렀다.“적당히 해.”은채는 한동안 남편을 바라보았다.그녀는 결혼기념일 밤, 자신의 침대에서 유림과 함께 있던 태경을 떠올렸다. 그날도 그는 미안하다는 말보다 아내가 왜 갑자기 들어왔느냐는 질문을 먼저 했다.그리고 오늘은 내연녀를 아내의 자리에 앉혀 놓고, 그 광경을 본 아내에게 조용히 하라고 명령하고 있었다.“당신은 정말 한 번도 미안하지 않구나.”은채가 말했다.태경의 턱이 굳어졌다.“그 얘기는 집에서 하자고 했잖아.”“집에서는 내 침대에 다른 여자가 있었고, 여기서는 내 자리에 그 여자가 앉아 있어.”연회장에 낮은 웅성거림이 번졌다.유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람들이 오해하잖아요.”은채는 유림을 돌아보았다.“오해?”“저랑 태경 씨는…….”“내 결혼기념일에 내 침실에 있었던 게 오해였니?”유림은 입술을 떨었다.그녀는 곧 눈시울을 붉히며 태경에게 몸을 기울였다.“태경 씨, 저 때문에 언니가 이렇게까지…….”태경은 유림의 어깨에
백유림은 서은채의 이름표를 손끝으로 밀어 버렸다.은색 명패가 흰 식탁보 위를 미끄러지더니 테이블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유림은 그 자리에 자신의 이름표를 올려놓고, 맞은편에 서 있던 행사 담당자에게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이렇게 놓으면 되는 거죠?”담당자는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사모님 좌석으로 준비된 자리라서 확인이 필요합니다.”“태경 씨가 저더러 옆에 앉으라고 하셨어요. 어머님도 알고 계시고요.”유림은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치맛자락을 정리한 뒤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를 손가락으로 만졌다.태경이 골라 준 목걸이였다.그가 처음 보석상에서 이 목걸이를 보여 주었을 때, 유림은 그것이 누구를 위한 선물인지 알고 있었다. 결혼기념일을 앞둔 남자가 아내에게 줄 선물을 고르고 있었으니까.하지만 유림은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태경은 잠시 망설였고, 결국 목걸이를 그녀의 목에 걸어 주었다.그날 유림은 깨달았다.서은채의 것을 갖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같은 시각, 은채는 자선 음악회가 열리는 호텔에 도착했다.결혼 후 해마다 참석했던 행사였다. 정혜숙이 운영하는 문화재단의 정기 자선 음악회였고, 태경은 주요 후원사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은채가 이곳을 찾은 이유는 남편 때문이 아니었다.전날 윤명숙에게서 연락이 왔다. 자선 음악회의 첼로 독주자가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출연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음악감독을 맡은 윤명숙이 은채에게 대체 연주 가능성을 물었다.정식 독주회와는 다른 행사였다. 남편의 압력으로 취소된 공연을 대신할 수는 없었지만, 은채에게는 몇 년 만에 관객 앞에서 연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윤명숙은 행사 당일 오전까지 연주 여부를 결정해도 된다고 했다.은채는 밤새 악보를 살펴본 끝에 직접 호텔로 향했다. 아직 몸과 손이 예전만큼 회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다시 무대에 서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호텔 로비에 들어서자 은채는 잠시 발걸음을 늦췄다.유리문 너머로 연회장의 화려한 조
'서은채 씨, 죄송합니다. 이번 독주회는 진행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은채는 화면을 바라보았다.잠시 뒤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공연장 대관과 후원 문제까지 겹쳐 더 이상 일정을 유지할 수 없게 됐습니다.'은채의 손끝이 굳었다.그녀는 곧바로 대표에게 전화를 걸었다.“대표님, 갑자기 무슨 일이에요?”상대방은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죄송합니다, 서은채 씨. 저희도 방법을 찾아봤는데…….”“한태경 때문인가요?”침묵이 흘렀다.그 침묵만으로도 충분했다.은채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남편이 정말로 공연을 막았다.어제 자신이 그렇게 부탁했는데도, 그는 끝내 그녀의 말을 듣지 않았다.“알겠습니다.”은채는 가까스로 대답했다.전화를 끊은 뒤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연습실 창가로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조금 전까지 펼쳐 놓았던 악보가 바람에 흔들렸다.은채는 그 종이를 바라보았다.몇 년 만에 다시 무대에 설 수 있다고 믿었던 순간이었다.그러나 남편은 그녀가 첫발을 내딛기도 전에 길을 막아 버렸다.은채는 악보를 천천히 모았다.손끝이 떨렸지만, 이번에는 찢어 버리지 않았다.그녀는 악보를 가방에 넣고 첼로 케이스를 닫았다.그리고 휴대전화를 꺼냈다.한태경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이제 그만 고집부려. 집에 오면 다 해결돼.'은채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보았다.집에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고.남편에게 고개를 숙이면 공연도, 음악도, 자신의 삶도 다시 허락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은채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그녀는 더 이상 남편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기로 했다.***그날 저녁, 한태경은 집무실에서 보고서를 읽고 있었다.비서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대표님, 서은채 씨 독주회는 취소됐습니다.”태경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알아.”“다만…….”비서가 말을 흐렸다.태경은 고개를 들었다.“뭔데?”“사모님께서 다른 공연기획사와 접촉하고 계십니다.”태경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어디?”“아직 확인 중입니
태경은 휴대전화를 귀에 댄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아내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그것도 자신의 경고를 듣고서.그는 천천히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집무실 안이 조용해졌다.태경은 책상 위에 놓인 공연 자료를 집어 들었다.서은채 독주회.그 이름이 유난히 눈에 거슬렸다.태경은 비서를 불렀다.“공연장 대관부터 확인해.”비서가 고개를 들었다.“대표님, 사모님 공연 말씀입니까?”“그래.”그는 서류를 내려놓았다.“그 공연이 어디까지 준비됐는지 전부 알아와.”비서는 잠시 망설였다.“취소를 검토하시는 겁니까?”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대신 차갑게 웃었다.“서은채가 내 말 없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한번 보자.”***은채는 전화를 끊고 한동안 복도에 서 있었다.손끝이 차갑게 식어 있었고, 가슴이 답답했다.그러나 이번에는 울지 않았다.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었다.그리고 윤명숙에게 전화를 걸었다.“선생님.”“은채야, 무슨 일이니?”은채는 잠시 망설였다.“저, 공연을 꼭 해야겠어요.”윤명숙은 조용히 대답했다.“그래. 네가 원한다면 해야지.”“조금 어려워질 수도 있어요.”“무슨 일이 있니?”은채는 남편이 기획사에 연락했다는 사실을 설명했다.윤명숙은 끝까지 말을 끊지 않고 들었다.잠시 침묵이 흐른 뒤 스승이 입을 열었다.“은채야, 네 남편이 네 음악을 대신 결정할 수는 없어.”은채는 눈을 감았다.그 말이 너무 당연한데도, 누군가에게 직접 듣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그럼 준비하자. 공연장은 다시 알아보면 되고, 후원도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어.”은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 선생님.”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을 햇살이 건물 사이로 비치고 있었다.은채는 가방에서 초청장을 꺼냈다.첼리스트 서은채.그 이름을 다시 읽었다.남편이 빼앗으려 하는 것은 공연 하나가 아니었다.그녀가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마지막 자리였다.은채는 초청
그녀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손끝에는 여전히 연습할 때 생긴 굳은살이 남아 있었다.“이제는 제가 선택할게요.”대표는 한동안 침묵했다.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한 대표와 상의하신 뒤 다시 결정하시는 건 어떻겠습니까?”은채는 고개를 저었다.“제 연주는 제 허락만 받으면 됩니다.”그녀는 서류를 정리해 가방에 넣었다.“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일정이 정리되면 다시 연락 주세요.”은채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대표가 급히 불렀다.“서은채 씨.”그녀가 돌아보았다.“저는 아직도 서은채 씨의 연주를 듣고 싶습니다.”은채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감사합니다.”그 말을 남기고 회의실을 나섰다.복도에 나오자 다리에 힘이 풀렸다.은채는 벽에 손을 짚고 잠시 숨을 골랐다.남편은 자신이 다시 무대에 서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어제는 아내로서의 자리를 빼앗더니, 오늘은 첼리스트로서의 자리까지 없애려 하고 있었다.은채는 휴대전화를 꺼냈다.한태경의 이름을 눌렀다.이번에는 그녀가 먼저 전화를 걸었다.***태경은 은채에게서 전화가 걸려 오자 곧바로 받았다.“이제야 연락하네.”그의 목소리에는 안도감이 섞여 있었다.“어디야? 내가 차 보낼게.”“기획사에 연락했어?”태경의 표정이 굳었다.“무슨 소리야?”“내 공연을 보류해 달라고 했냐고.”그는 잠시 침묵했다.“그게 왜.”은채는 눈을 감았다.“왜 그랬어?”“당신 지금 제정신이 아니잖아.”태경은 의자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어제 일 때문에 감정적으로 행동하는 것 같아서 정리해 둔 거야.”“내가 언제 당신한테 그런 부탁을 했는데?”“부탁해야만 해?”그의 목소리가 차가워졌다.“내가 당신 남편이야. 당신이 무슨 일을 하든 나랑 상의하는 게 당연하지.”은채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태경은 그 침묵을 동의로 받아들였는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덧붙였다.“은채야, 그만 고집부리고 집에 와. 어제 일은 나도 더 키우고 싶지 않아.”은채는 그 말을 듣고
“그런데 언니가 공연 준비하시면 태경 씨는 더 외로워지겠네요.”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유림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예전에도 그랬잖아요. 언니가 연습실에 계시면 태경 씨는 혼자 식사하시고, 밤늦게까지 기다리시고…….”그녀는 안타까운 듯 눈썹을 내렸다.“저는 태경 씨가 그렇게 지내시는 게 너무 싫었어요.”태경은 서류를 덮었다.“그래서?”유림은 잠시 망설이는 척했다.“언니가 태경 씨한테 복수하려고 공연을 이용하시는 건 아닐까요?”태경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무슨 뜻이야?”“아니에요. 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봐요.”유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어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바로 공연을 준비하신다니까 조금 이상해서요. 언니가 정말 음악이 좋아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태경 씨가 싫어하시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태경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기다렸다.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은 은채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해?”유림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만 언니가 태경 씨를 너무 잘 알잖아요.”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태경 씨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공연을 강행하시면…….”태경은 손을 빼지 않았다.유림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태경이 은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은채가 무엇을 하든 자신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었다.그래야 태경은 더 강하게 아내를 붙잡으려 할 테고, 은채는 그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었다.그 사이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유림은 태경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저는 태경 씨가 또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서은채의 공연 자료로 돌아가 있었다.***오후가 되자 은채는 기획사 대표를 만났다.윤명숙의 소개로 마련된 자리였다.은채는 공연 준비에 필요한 일정과 프로그램을 논의할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대표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