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당신이 묻은 여자가 돌아왔다: Chapter 1 - Chapter 10

13 Chapters

1화

“아…… 태경 씨. 조금만 천천히…….”안방 문틈에서 여자의 간드러진 신음이 흘러나왔다.서은채는 계단을 올라오던 걸음을 멈췄다. 손에는 여덟 주 된 아이의 초음파 사진과 독주회 초청장을 넣은 봉투가 들려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남편에게 좋은 소식을 전할 생각에 마음이 들떠 있었는데, 익숙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발끝부터 차갑게 식어 갔다.백유림이었다.태경의 오랜 지인이라고 소개받았던 여자이자, 회사 일로 자주 만난다던 사람이었다. 은채가 두 사람의 관계를 불편해할 때마다 남편은 쓸데없는 의심이라며 오히려 그녀를 나무랐다.“정말 이래도 돼요? 오늘 언니랑 결혼기념일이라면서요.”“그 얘기는 그만해.”남자의 목소리는 너무나 익숙했다. 네 해 전, 평생 자신만 사랑하겠다며 결혼반지를 끼워 주었던 남편 한태경이었다.은채는 계단 난간을 붙잡았다. 오늘 아침 병원에서 아이의 심장 소리를 들었을 때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는데, 지금은 다리에 힘이 풀려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왜요? 언니가 갑자기 들어오면 어떡하려고.”“저녁까지 안 와.”“그래도 언니 침대잖아요.”잠시 뒤 태경의 낮은 웃음이 들렸다.“백유림, 당신은 이런 순간에도 꼭 그 여자 얘기를 해야겠어?”유림이 교태스럽게 웃었다.“질투 나니까 그러죠. 언니는 태경 씨 아내잖아요.”“서류상으로는 그렇지.”은채는 숨을 멈췄다.“그럼 나는요?”태경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침대가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유림의 짧은 탄성이 흘러나왔다.“당신은 지금 내 옆에 있잖아.”유림의 웃음소리가 한층 짙어졌다.“그럼 오늘은 언니 생각하지 말아요.”은채는 떨리는 손으로 문손잡이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기를 바랐지만, 이제는 더 이상 부정할 수 없었다.오늘 아침 병원에서 초음파 화면을 바라보며 울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작은 심장이 규칙적으로 뛰는 모습을 보면서 남편도 자신만큼 기뻐하리라 믿었고, 아이가 태어나면 어떤 이름을 지을지 함께 이야기하는 미래까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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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그때 유림이 눈물을 훔치는 척 손등을 눈가에 가져갔다.“태경 씨, 언니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제가 잘못한 거잖아요.”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지만 손가락 사이로 은채를 살피는 눈에는 눈물 한 방울 맺혀 있지 않았다. 오히려 태경이 자신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확인하려는 듯 시선을 움직였다.“그만해.”태경은 유림의 손을 잡고 엄지손가락으로 손등을 가볍게 문질렀다.“당신 잘못 아니야.”그 다정한 목소리에 은채의 가슴이 무너졌다.결혼 전 공연을 망쳤다고 울던 날에도 태경은 똑같은 말로 그녀를 달랬다. 그때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위로였는데, 지금은 다른 여자를 보호하기 위한 말이 되어 돌아왔다.은채는 손에 들고 있던 봉투를 내려다보았다. 초음파 사진과 독주회 초청장이 들어 있는 종이봉투는 어느새 모서리가 구겨져 있었다.남편에게 주려고 준비한 두 가지 선물이 손안에서 망가지고 있었다.***유림이 욕실로 들어가자 태경은 침대에서 내려와 셔츠를 주워 입었다. 바닥에 떨어진 넥타이를 발끝으로 밀어 치우면서도 그의 표정에는 미안함이 없었다.은채는 그 넥타이를 바라보았다. 지난해 결혼기념일에 직접 골라 준 선물이었다.그날 태경은 넥타이를 받아 들고 그녀를 품에 안았다.'내년에도 당신이 골라 줘. 앞으로도 계속.'은채는 그 약속을 믿었다.“언제부터야?”그녀가 물었지만 태경은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추지 않았다.“뭘.”“저 여자랑 언제부터 이랬냐고.”“그걸 알아서 뭐 하게?”은채는 남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내가 당신 아내잖아.”태경은 마지막 단추를 채운 뒤 고개를 들었다.“그래, 아내지. 그런데 당신은 언제부터 내가 남편이라는 걸 기억했어?”은채는 숨을 삼켰다.그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훑어보더니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당신한테는 늘 첼로가 먼저였잖아. 결혼하고도 무대 타령, 연습 타령. 집에 들어오면 연습실에 있고, 같이 있어도 머릿속에는 다음 공연밖에 없었지.”은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남편을 바라보았다.“당신이 싫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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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는 손목시계를 차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렇다고 좋은 아내였던 건 아니지.”은채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태경은 그 표정을 보고도 말을 멈추지 않았다.“유림이는 적어도 내가 뭘 원하는지 알아. 당신처럼 자기 세계에 빠져서 남편을 외롭게 만들지는 않아.”은채는 남편을 오래 바라보았다.그가 처음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날이 떠올랐다. 국제 콩쿠르 결선 무대가 끝난 뒤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남자였다.'서은채 씨의 음악을 평생 곁에서 듣고 싶습니다.'그렇게 말하던 남자가 지금은 그녀의 음악을 결혼생활을 망친 원인처럼 취급하고 있었다.“당신은 내가 첼로를 놓으면 행복해질 줄 알았어?”태경은 별다른 고민 없이 대답했다.“적어도 우리 결혼생활은 지금보다 편했겠지.”그 순간 은채는 깨달았다.남편은 음악을 연주하는 자신에게 반했지만, 결혼한 뒤에는 그 음악까지 독차지하고 싶어 했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자가 무대 위에서 빛나는 모습은 좋아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그 빛을 바라보는 것은 견디지 못했던 것이다.은채는 고개를 숙였다.더 이상 남편에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욕실 문이 열리자 유림이 자신의 원피스로 갈아입고 나왔다. 머리카락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었지만 목덜미의 붉은 자국은 일부러 가리지 않은 듯 선명했다.그녀는 은채를 보자마자 고개를 숙였다.“언니, 정말 죄송해요.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요.”은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림은 천천히 다가왔다.“태경 씨가 너무 힘들어해서 위로해 주려던 것뿐인데, 일이 이렇게 커질 줄은…….”그녀의 목소리는 애처로웠다. 그러나 태경이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은채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금 전과 같은 조심스러움이 없었다.“언니는 모르시겠지만 태경 씨, 요즘 집에 들어오기 싫어했어요.”은채의 손가락이 굳었다.유림은 눈물을 닦는 척하며 말을 이었다.“언니가 연습실에만 계셔서 외롭다고 하셨어요. 밤에 잠도 잘 못 주무시고…….”“유림아.”태경이 낮게 부르자 유림은 곧바로 입술을 깨물었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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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유림이 떠난 뒤 태경은 서재로 향했다. 은채는 복도에 홀로 남아 손에 들린 봉투를 내려다보았다.초음파 사진은 다행히 찢어지지 않았다.흑백 화면 한가운데 작은 생명이 있었다.오늘 아침 의사는 화면을 가리키며 웃었다.'심장 뛰는 것 보이시죠? 아주 건강합니다.'은채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결혼한 지 네 해 만에 처음으로 생긴 아이였다.그동안 시어머니 정혜숙은 아이가 생기지 않는 이유가 은채에게 있는 것처럼 말했다. 집안에 후사를 들이는 것이 며느리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며, 연주 따위에 마음을 빼앗기니 아이가 생기지 않는다고 나무랐다.은채는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태경은 어머니의 말을 막아 주지 않았다.'어머니도 손주를 기다리셔서 그러는 거야.'그는 늘 그렇게 말했다.은채는 병원에 다니며 검사를 받았고, 몸에 좋다는 음식도 챙겨 먹었다. 그렇게 기다렸던 아이였기에 임신 사실을 확인한 순간에는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그런데 아이가 생겼다는 사실을 알린 첫날, 남편은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은채는 사진을 가슴에 안았다.“아가…… 엄마가 오늘은 좀 많이 속상하네.”목소리가 떨렸다.눈물이 흘러내리자 그녀는 급히 손등으로 닦았다. 아이에게까지 슬픔을 전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참으려 해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아빠한테 제일 먼저 보여 주고 싶었는데…….”말끝이 무너졌다.남편이 초음파 사진을 보고 기뻐할 모습을 얼마나 많이 상상했던가. 태경이 자신을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말해 주기를 바랐고, 아이가 태어나면 작은 손을 잡고 함께 걷는 미래를 꿈꾸었다.그러나 이제 그 모든 장면이 낯설게 느껴졌다.은채는 사진을 조심스럽게 산모수첩에 넣고 배 위에 손을 얹었다.“엄마가 지켜 줄게. 무슨 일이 있어도.”***은채는 연습실로 들어갔다.창가에는 오래된 첼로가 놓여 있었다. 국제 콩쿠르 결선 무대에도 함께 올랐던 악기였다.의자에 앉아 첼로를 무릎 사이에 세우자 익숙한 나무의 감촉이 손바닥에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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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은채는 그 약속을 믿었다.그러나 결혼 후 자신이 얼마나 자주 울었는지 남편은 알지 못했다.그녀는 액자를 다시 내려놓고 가방을 닫았다. 일어서자 갑작스러운 어지러움이 밀려왔지만, 침대 모서리를 붙잡고 잠시 숨을 고르자 조금씩 가라앉았다.하루 종일 제대로 먹지 못한 탓이었다.은채는 부엌으로 내려가 따뜻한 죽을 부탁했다. 가정부가 놀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지만, 더 묻지 않고 죽을 데워 주었다.식탁 끝에 앉아 천천히 숟가락을 들었다. 눈물이 나려고 할 때마다 잠시 멈춰 숨을 고르면서도 남은 죽을 끝까지 먹었다.자신은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까지 굶길 수는 없었다.식사를 마친 은채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향했을 때, 태경이 계단을 내려왔다.검은 정장에 남색 넥타이를 맨 모습이었다. 은채가 한때 가장 좋아했던 차림이었지만, 이제는 그 얼굴을 보는 것조차 힘들었다.태경은 여행 가방을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어디 가?”“며칠 나가 있을게.”그의 표정이 굳어졌다.“지금 장난해?”“아니.”“결혼기념일에 집을 나가겠다고?”은채는 남편을 바라보았다.“당신은 결혼기념일에 다른 여자랑 잤잖아.”태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또 그 얘기야?”그는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고쳐 매더니 은채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서은채, 언제까지 피해자처럼 굴 거야?”은채는 손에 든 가방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피해자처럼……?”“내가 당신한테 평생 사랑만 주겠다고 약속했어도 결혼생활이 늘 당신 뜻대로 흘러갈 수는 없는 거야.”은채는 남편이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행동보다 아내의 반응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당신이 원하는 게 뭐야? 내가 무릎이라도 꿇어야 해?”은채는 대답하지 않았다.그녀가 원했던 것은 남편이 무릎을 꿇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상처 입힌 사람이 그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알아주기를 바랐을 뿐이었다.하지만 태경은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당신이 그렇게 나가면 내가 붙잡을 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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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평소 은채는 연습을 마치면 반드시 문을 닫았다. 악기의 상태를 세심하게 살피고 습도까지 확인하던 여자였다.태경은 무심코 연습실로 향했다.불을 켜자 익숙한 공간이 드러났다. 창가에는 악보대가 놓여 있었고, 벽에는 은채가 국제 콩쿠르에서 입상했을 때 찍은 사진이 걸려 있었다.사진 속 그녀는 첼로를 안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태경은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그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여자였다.무대 위에서 첼로를 연주하던 은채는 아름다웠다.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숨을 죽이고 그녀의 연주를 들었고, 태경도 그중 하나였다.그는 그날 은채를 반드시 자신의 여자로 만들겠다고 결심했다.그리고 정말로 그녀와 결혼했다.하지만 결혼 후에도 사람들이 은채를 바라보는 것은 싫었다. 남자 지휘자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칭찬하는 모습도, 공연이 끝난 뒤 낯선 남자들이 꽃을 건네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은채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제는 자신만 바라보기를 바랐다. 그녀가 무대에 서지 않아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태경은 연습실 중앙에 놓인 의자로 시선을 옮겼다. 은채가 밤늦도록 첼로를 연주하던 자리였다.그동안 그는 연주가 길어질 때마다 문을 닫으라고 했고, 때로는 시끄럽다는 이유로 연습을 그만두게 만들기도 했다. 공연 준비 때문에 자신을 소홀히 한다고 화를 냈던 날도 적지 않았다.그런데 지금은 이상했다.집 안이 지나치게 조용했다.태경은 첼로 케이스에 손을 얹었다.“서은채.”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그는 케이스 옆의 작은 탁자를 바라보았다. 평소 그곳에는 은채가 연습 일정을 적어 놓은 수첩이 있었지만, 오늘은 보이지 않았다.연습실 한쪽에 두었던 작은 여행용 악보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태경은 미간을 찌푸렸다.아내가 단순히 화를 내고 나간 것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연결음이 몇 차례나 이어졌지만 은채는 끝내 받지 않았다.태경은 전화를 끊지 않은 채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처음으로 불쾌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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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공연기획사 대표가 그 말을 꺼냈을 때, 은채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탁자 위에는 아직 독주회 프로그램 초안이 펼쳐져 있었다. 무대 중앙에 놓일 첼로의 위치와 객석 배치도까지 정리되어 있었고, 첫 장에는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자신의 이름이 선명하게 인쇄되어 있었다.첼리스트 서은채.그 이름을 다시 무대에 올리기까지 얼마나 오래 걸렸던가.“취소라니요? 어제까지만 해도 일정에 문제가 없다고 하셨잖아요.”대표는 은채의 눈을 피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복귀를 누구보다 반기던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마주 앉아 있는 것조차 불편해 보였다.“공연장 측에서 대관 승인을 철회했습니다. 후원사 두 곳도 오늘 오전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통보했고요.”“그럼 다른 공연장을 알아보겠습니다. 후원금이 부족하면 공연 규모를 줄여도 괜찮아요.”은채는 준비해 온 자료를 펼쳤다. 예상 비용을 줄일 수 있는 항목과 대체 공연장 명단까지 적어 둔 서류였다.대표는 그 서류를 보자 오히려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서은채 씨,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휴대전화를 은채 앞으로 밀었다. 화면에는 오늘 오전 도착한 이메일이 열려 있었다.발신인은 한태경의 비서실이었다.메일에는 서은채가 건강상의 이유로 당분간 공연 활동을 중단할 예정이며, 가족 측의 요청에 따라 독주회 추진을 보류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외부에는 본인의 의사에 따른 일정 변경이라고 안내해 달라는 문장까지 덧붙어 있었다.은채는 화면을 오래 바라보았다.“제가 동의했다고 되어 있네요.”대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어요.”은채가 고개를 들었다.“제 남편이 제 공연을 취소해 달라고 요청한 건가요?”“한 대표 측에서 직접 연락이 왔습니다.”“왜요?”대표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공연장 운영법인에 한 대표 측 계열사가 투자하고 있습니다. 후원사들도 그쪽과 거래 관계가 있고요. 저희로서는…….”그는 끝내 말을 마치지 못했다.은채는 다시 프로그램 초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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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은채가 인사하기도 전에 윤명숙이 다가와 손을 잡았다.“얼굴이 왜 이 모양이니? 어디 아픈 건 아니지?”은채는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 선생님.”그러나 목소리가 생각처럼 나오지 않았다.윤명숙은 더 캐묻지 않고 그녀를 끌어안았다.“왔으면 됐다. 잘 왔어.”은채는 스승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다.그동안 자신을 기다려 준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흔들렸다. 남편의 집에서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사람이 없었다. 첼로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연주하지 못하는 시간이 얼마나 괴로운지 알아주는 사람도 없었다.윤명숙은 은채를 놓아주고 창가를 가리켰다.“네가 쓰던 의자, 아직 그대로 있다.”창가에는 오래된 연습용 의자가 놓여 있었다. 결혼 전 마지막으로 이곳을 찾았던 날, 은채는 스승에게 당분간 공연을 쉬겠다고 말했다.그때 윤명숙은 이유를 묻지 않았다.다만 언젠가 돌아올 거라며 의자를 치우지 않겠다고 했다.은채는 의자 등받이를 쓰다듬었다.“정말 안 치우셨네요.”“주인이 돌아오지도 않았는데 왜 치우니.”은채는 웃으려다가 고개를 숙였다.윤명숙은 그녀의 손을 바라보았다.“연주해 보겠니?”은채는 첼로를 꺼내 무릎 사이에 세웠다.악기의 무게가 몸에 닿자 오래전의 감각이 되살아났다. 활을 현 위에 올리는 순간 손끝이 떨렸지만, 숨을 고르고 첫 음을 냈다.낮고 거친 소리가 연습실을 채웠다.은채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활을 움직였다.처음에는 손가락이 원하는 자리를 정확히 찾지 못했다. 오래 쉬었던 탓에 왼손이 쉽게 굳었고, 활을 움직이는 오른팔도 예전처럼 부드럽지 않았다.그러나 곡이 이어질수록 몸이 기억을 되찾기 시작했다.은채는 악보에서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결혼 전 마지막 독주회가 떠올랐다.객석에서 숨을 죽이던 사람들, 무대 뒤에서 기다리던 스승, 연주가 끝났을 때 밀려오던 박수 소리까지 선명했다.그날 태경은 가장 큰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당신이 연주하는 모습을 평생 보고 싶어.'그 말을 믿었다.은채는 마지막 음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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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태경은 그 이름을첼리스트 서은채. 오래 바라보았다.결혼 전에는 그 이름이 자랑스러웠다. 사람들이 은채의 연주를 칭찬하면 자신이 특별한 여자를 얻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그러나 결혼한 뒤에는 달라졌다.아내가 무대에 서면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남자 지휘자가 은채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하는 모습도, 공연이 끝난 뒤 낯선 남자들이 꽃을 건네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태경은 은채가 자신의 아내가 되었으니 이제는 자신만 바라보기를 바랐다.그녀가 무대에 서지 않아도 행복할 것이라고 믿었다.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대표님.”비서가 조심스럽게 불렀다.태경은 서류를 내려놓았다.“기획사에 연락해.”“어떤 내용으로 말씀드릴까요?”“서은채는 당분간 공연하지 않아.”비서는 잠시 머뭇거렸다.“사모님께서 직접 그렇게 말씀하신 건가요?”태경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내가 그렇게 말하면 되는 거 아니야?”비서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태경은 서류를 밀어 놓으며 덧붙였다.“건강상 이유라고 해. 괜한 소문 나지 않게 조용히 처리하고.”“알겠습니다.”“공연장하고 후원사에도 연락해. 일정이 확정되지 않게 해 두고.”비서의 얼굴이 굳어졌다.“대표님, 그렇게까지 하시면 사모님께서…….”태경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내가 당신 의견 물었어?”비서는 고개를 숙였다.태경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취소한다고 떠들썩하게 만들 필요는 없어. 공연장 대관이 어렵다고 하면 다른 곳을 찾겠지. 후원이 끊기면 또 다른 후원사를 알아볼 테고.”그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렸다.“그러니까 한 군데만 막지 말고, 관련된 곳은 전부 확인해.”비서는 침을 삼켰다.태경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서은채가 공연할 수 있는 길을 남겨 두지 마.”그 말에는 분노보다 냉정한 계산이 담겨 있었다.태경은 아내가 무대에 서지 못하면 결국 집으로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공연이 취소되면 현실을 깨닫게 될 것이고, 자신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할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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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화

“그런데 언니가 공연 준비하시면 태경 씨는 더 외로워지겠네요.”태경은 대답하지 않았다.유림은 그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예전에도 그랬잖아요. 언니가 연습실에 계시면 태경 씨는 혼자 식사하시고, 밤늦게까지 기다리시고…….”그녀는 안타까운 듯 눈썹을 내렸다.“저는 태경 씨가 그렇게 지내시는 게 너무 싫었어요.”태경은 서류를 덮었다.“그래서?”유림은 잠시 망설이는 척했다.“언니가 태경 씨한테 복수하려고 공연을 이용하시는 건 아닐까요?”태경의 눈빛이 차갑게 변했다.“무슨 뜻이야?”“아니에요. 제가 괜한 생각을 했나 봐요.”유림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어제 그렇게 큰일이 있었는데 바로 공연을 준비하신다니까 조금 이상해서요. 언니가 정말 음악이 좋아서 그러시는 건지, 아니면 태경 씨가 싫어하시는 걸 알고 일부러 그러시는 건지…….”그녀는 말을 끝내지 않았다.태경이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기다렸다.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당신은 은채가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해?”유림은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그런 뜻은 아니에요. 다만 언니가 태경 씨를 너무 잘 알잖아요.”그녀는 조심스럽게 그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태경 씨가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면서도 공연을 강행하시면…….”태경은 손을 빼지 않았다.유림은 속으로 미소 지었다.그녀가 원하는 것은 태경이 은채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었다.은채가 무엇을 하든 자신을 거스르는 행동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었다.그래야 태경은 더 강하게 아내를 붙잡으려 할 테고, 은채는 그에게서 더 멀어질 것이었다.그 사이에 자신이 들어갈 자리가 생겼다.유림은 태경의 손등을 가볍게 쓸어내렸다.“저는 태경 씨가 또 상처받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태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시선은 이미 서은채의 공연 자료로 돌아가 있었다.***오후가 되자 은채는 기획사 대표를 만났다.윤명숙의 소개로 마련된 자리였다.은채는 공연 준비에 필요한 일정과 프로그램을 논의할 생각으로 찾아갔지만, 대표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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