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구속영장을 막으려면 주총을 연기하고 탄원서를 내십시오.”새벽 두 시, 이사회 고문은 회사 명의로 건우의 도주 우려가 없다고 보증하자고 했다. 주총까지는 여섯 시간도 남지 않았다.“회사가 연인의 신원을 보증하지는 않습니다.”“그럼 해원이 영장 청구서를 주총장에서 읽을 겁니다.”“읽으라고 하세요. 대신 우리가 보존한 자료 목록도 같이 공개하겠습니다.”나는 건우의 키가 닿은 서버, 위조 초대장 원본, 박상철의 권한 인계 기록을 한꺼번에 동결했다. 내부조사 지휘는 독립감사위원장에게 넘겼다.“대표님 접근권도 끊을까요?”“건우 관련 폴더에는 끊으세요. 열람 요청도 위원장 승인을 받겠습니다.”“회사 전체 권한까지 내려놓으라는 요구가 나올 겁니다.”“이해충돌이 있는 범위만 분리합니다. 그 밖의 책임까지 버리지는 않아요.”감사팀은 원본 서버의 해시값을 공증하고 국내외 백업을 각각 봉인했다. 회복센터에는 범행 전후 일주일의 출입 영상, 교육 방송, 직원 근무표를 삭제하지 말라는 보전 통지가 갔다.“평소 보관 기간이 지난 영상도 포함합니까?”“관련 여부는 우리가 고르지 마세요. 그 기간의 원본 전부입니다.”“비용이 커집니다.”“증거가 사라진 뒤 치를 비용보다 작아요.”건우의 변호인에게도 같은 보전 목록을 보냈다. 유리한 자료만 골라 제출하지 말고, 센터 회선과 교육 기록 원본을 보존해 달라는 요청이었다.곧 건우에게서 변호인을 통한 답이 왔다.‘전부 동의합니다. 조사 중 연락 제한도 따르겠습니다.’그는 나를 만나게 해 달라고 하지 않았다. 결백을 믿는다는 말을 공개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나는 한 줄을 더 써 보냈다.‘도망치지 말아요. 이번에는 나는 당신을 믿어요.’답은 짧았다.‘그 믿음을 증거 대신 쓰지 않게 하겠습니다.’변호인이 별도 통화로 건우가 영장심사에 자진 출석하겠다고 전했다.“센터 직원 명의의 탄원서도 받지 않겠답니다.”“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쓰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어요.”“업무상 영향이 있었다는 오해를 피하려는 겁니다
박상철의 휴대전화가 꺼졌습니다.”영상회의가 끊긴 지 삼십 분 뒤, 준법지원실은 텅 비어 있었다. 그의 인증서 인계 확인서는 끝내 서명되지 않았다.“출국 금지를 요청해야 합니다.”“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소재 불명 신고와 증거 보전입니다. 수사 조치는 수사팀이 판단하게 하세요.”감사팀이 박상철의 접근 권한을 동결했다. 서버를 삭제하지 않고 읽기 전용 복제본을 만들던 중 낯선 인증키 하나가 발견됐다.“이건 박 팀장 키가 아닙니다.”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숨이 막혔다.이건우.사십칠 화 한시 자문 때 발급됐다가 계약 종료와 함께 폐기된 키였다. 접속 시각은 사흘 전 오후, 가져간 자료는 태림 공급망 전체였다.“폐기됐다면 어떻게 인증됐습니까?”“사용자 화면에서 지운 뒤 서버 폐기 목록에 올려야 합니다. 두 번째 처리가 빠졌습니다.”“누가 확인할 책임이었죠?”“준법담당이 최종 승인합니다.”박상철이 서명한 확인서에는 두 절차를 모두 끝냈다고 적혀 있었다. 화면에서는 사라졌지만 서버 안에서는 살아 있는 열쇠였다.“폐기 확인서는 누가 썼죠?”“박상철입니다. 외부 감사에도 같은 확인서를 냈습니다.”“원본과 키 발급 서버를 바로 봉인하세요.”감사팀장은 망설였다.“대표님, 주총이 내일입니다. 이 사실이 나가면 끝입니다.”“그래서 우리가 먼저 보존해야 합니다.”나는 건우에게 전화하기 전 독립감사위원과 수사팀에 로그를 동시에 보냈다. 연인에게 먼저 알려 대응할 시간을 줬다는 의심조차 남기지 않기 위해서였다.그다음 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당신의 옛 인증키가 자료 유출에 쓰였어요.”잠깐의 침묵 뒤 그가 물었다.“언제, 어떤 자료야?”“사흘 전 오후 두 시 십칠 분. 공급업체 계좌와 계약 단가 전부예요.”“내가 제출할 목록을 보내 줘. 센터 서버와 개인 기기 모두 보전하겠습니다.”“수사팀이 곧 갈 거예요.”“기다릴게. 직원들이 놀라지 않게 압수 범위만 설명해도 될까?”“증거에 손대지 않는 범위에서요. 변호인도 따로 선임해요.”“
“이미 열세 곳이 위임장에 서명했습니다.”해외 브랜드 담당자의 말과 함께 위조 초대장 사본이 도착했다. 내 이름으로 열린 간담회는 한 시간 뒤 시작될 예정이었다.“행사장을 폐쇄할까요?”“아뇨. 참석자부터 안전하게 확인해요. 서명 원본은 누구에게도 넘기지 못하게 하고요.”장소는 해원 계열 호텔의 작은 연회장이었다. 현장 감사팀과 브랜드 법무대리인을 먼저 보내고, 나는 초대장 발급대장 원본을 들고 갔다.입구에는 루미에르 문양이 찍힌 금색 안내판이 서 있었다. 윤세라는 내 이름 아래 ‘공동 주최자’라고 적힌 명찰을 달고 손님을 맞고 있었다.행사 순서표의 내 영상 축사는 개장식 인터뷰를 잘라 붙인 것이었다.“서 대표님이 왜 오셨어요?”“제 간담회라면서요.”세라가 잠시 굳었다가 웃었다.“해외 브랜드들이 중재를 부탁했어요. 바쁘실 것 같아 대신 준비했죠.”“제가 위임장도 부탁했습니까?”“다들 태림을 걱정해서 자발적으로 가져온 거예요.”탁자 위에는 의결권 위임장과 해원 공개매수 동의서가 한 묶음으로 놓여 있었다. 참석자들은 두 문서가 같은 절차인 줄 알았다고 했다.나는 행사를 멈추기 전에 마이크로 사실부터 밝혔다.“이 초대장은 태림이 발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서명한 문서는 외부 법무인이 봉인하고, 각 회사가 돌려받을지 결정하게 하겠습니다.”“가짜라는 증거가 있습니까?” 세라가 끼어들었다.“일련번호 첫 자리부터 틀렸어요.”그녀가 가슴에 단 루미에르 브로치를 가리켰다.“공식 브로치도 받았어요. 번호가 같잖아요.”“그래서 둘 다 가짜예요.”루미에르 행사물 일련번호는 상품 이력 코드와 겹치지 않게 홀수로 끝났다. 초대장과 브로치에는 같은 짝수 번호가 복제돼 있었다.초대장 오른쪽 아래 나침반도 북쪽 바늘이 빠져 있었다. 어머니 원본을 따라 만든 공식 표식이라면 생길 수 없는 오류였다. 복사한 사람은 문양의 뜻도 발급 규칙도 몰랐다.내가 검증기에 브로치를 대자 화면에 ‘폐기된 샘플’이라고 떴다. 세라는 기계를 탓했지만 원본 발급대장은 처음
“건우 도련님이 나서면 우리 표를 모을 수 있습니다.”태림 원로주주의 음성메시지는 건우를 아직 가문의 아들로 불렀다. 나를 위해 의결권을 모아 달라는 말 뒤에는 복귀를 보장하라는 조건이 붙었다.“저한테 온 연락 전부예요.”건우는 답을 보내기 전에 메시지와 통화 요청 목록을 내 화면에 공유했다.재무담당은 세 사람의 지분을 합치면 이 점 삼 퍼센트라고 했다.해원과의 예상 표 차이보다 컸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건우에게 모였다.“개별적으로 설득해 주실 수 있습니까?”“은채 씨와 역할부터 정하겠습니다.”“시간이 없습니다. 과거 인연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내가 물었다.“무엇을 약속해야 표를 준답니까?”“이건우 씨의 경영 복귀와 태림가 우호 지분 보호입니다.”“둘 다 드릴 수 없는 약속이네요.”재무담당은 경영 복귀를 검토한다고만 말해도 된다고 했다. 실제 결정은 주총 뒤에 바꿀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건우가 먼저 고개를 저었다.“받을 수 없는 대가를 흘려서 표를 얻지 않겠습니다.”“그러다 회사가 넘어가면 책임지실 겁니까?”“제가 책임질 수 없는 회사라서 더 약속하지 않는 겁니다.”나는 원로주주들에게 같은 답을 보냈다. 건우 개인과 비공개로 거래하지 않으며, 태림의 사업 계획을 듣고 싶다면 모든 주주에게 열린 설명회에 오라고 했다.독립위원회에는 건우의 발표 범위와 이해관계를 먼저 신고했다. 자료 선택은 직원위원이 맡고, 참석 주주의 명단은 건우에게 주지 않았다. 설명회 뒤 개별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확인도 받았다.우리가 지키려는 경계는 건우를 의심해서 세운 벌이 아니었다. 다시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회사의 문까지 열리지 않게 하는 난간이었다.“건우 씨가 설명회는 맡아 줄 수 있어요?”“어느 범위까지 말하면 될까?”“과거 구조조정과 협력사 현황만요. 의결권 요청은 하지 말고, 내 연인 자격도 내세우지 마세요.”건우는 센터 자료도 동의받은 것만 쓰겠다고 했다.“발표문은 독립위원회 검토를 받아요.”“그렇게 하자.”그가
“이 장부만 보면 최명희가 주범이고 윤태성은 매수인입니다.”수사관의 설명에 나는 첫 장을 다시 봤다. 어머니에게 누명을 씌운 날짜 옆에는 최명희의 결재표시만 있었다.“장물인 줄 몰랐다는 주장도 가능합니까?”“해원은 이미 그렇게 답했습니다.”감정을 마친 장부는 열람용 사본으로 제공됐다. 현금 지급, 가짜 납품전표, 화재 뒤 자료 폐기 비용이 날짜별로 적혀 있었다.종이와 잉크는 모두 십칠 년 전 생산분으로 확인됐다. 장부에 적힌 송장번호 다섯 개는 태림 보관 서버의 원본과 순서까지 맞았다.최명희는 서지안의 원가 계정에 비자금을 섞고, 책임 확인서에 복제 서명을 붙였다. 누명을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흐리지 않았다.그러나 장부 뒷면의 작은 부속표에는 윤태성 비서실 문서번호가 반복됐다.“이 항목을 확대해 주세요.”‘원권리자 이의 제기 시 추가 보상.’나는 그 문장을 소리 내 읽었다.“권리자가 따로 있다는 걸 알았다는 뜻 아닌가요?”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최소한 분쟁 가능성을 인식한 계약이야. 다음 줄도 봐.”다음 지급 조건은 더 노골적이었다. 원설계 노트 두 장과 고객 수선 이력 원본을 넘긴 뒤 잔금을 지급한다고 돼 있었다.“해원은 특허 아이디어만 산 게 아니군요.”“고객 데이터까지 샀어. 오리진 패스 초기 가입자를 단숨에 확보한 이유가 이거야.”“개인정보 침해도 별건으로 분리해 주세요.”담당 검사가 내 요청을 막았다.“혐의 구성은 수사팀이 합니다. 서 대표님은 피해 자료를 제출해 주십시오.”“알겠습니다. 대신 서지안 사건과 고객 피해를 한 금액으로 합의하지 않겠다는 의견서를 내겠습니다.”나는 수사 방향을 명령할 자리에 있지 않았다. 다만 서로 다른 피해자가 한 사람의 협상 카드로 묶이지 않게 기록할 수는 있었다.감사팀 벽에는 책임표를 두 칸으로 나눠 붙였다. 최명희 칸에는 허위 계정, 복제 서명, 방화 책임 전가가 놓였다. 윤태성 칸에는 악의 취득, 고객정보 사용, 증거 폐기 대금이 놓였다. 가운데 겹치는 칸에만 이면계약
“최명희 씨가 직접 만나면 보관 장소를 말하겠답니다.”법률대리인의 첫 문장은 열쇠보다 조건을 앞세웠다. 선처 의견서와 비공개 면담을 요구한다는 공문도 함께 들어 있었다.“만나지 않겠습니다.”나는 증거 가방에서 손을 뗐다. 비서에게 봉인 번호부터 촬영하게 하고 감사위원을 불렀다.대리인이 전화기 너머로 재촉했다.“서 대표님 어머니 사건을 완전히 밝힐 기회입니다.”“그래서 개인 거래로 만들지 않겠다는 겁니다.”“의뢰인은 이미 많은 것을 잃었습니다.”“형량은 제가 돌려줄 수 있는 재산이 아닙니다.”“그럼 열쇠도 쓸 수 없습니다. 거래번호 뒤 네 자리는 의뢰인만 압니다.”“수사기관에 같은 말을 하세요.”통화를 끝내자 재하가 가방 주위에 증거 보전 테이프를 붙였다.“저쪽이 일부러 출처를 흐렸을 수 있어.”“우리가 열어 보면 오히려 덫이 되겠죠.”“압수 절차를 밟는 게 안전해. 오늘 안으로 담당 검사에게 인계하자.”나는 열쇠와 거래번호를 회사 자산처럼 확인하지 않았다. 어머니 사건의 피해자라는 이유로 증거 관리 권한까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건우는 가방을 보자 얼굴이 굳었다.“어머니가 보낸 게 맞아?”“대리인 공문은 확인했어요.”“내가 아는 번호인지 봐야 할까?”“아뇨. 당신도 원본을 만지지 않는 게 좋아요.”“알겠어. 필요하면 가족관계와 과거 금고 위치만 진술하겠습니다.”그는 열쇠를 가져가거나 어머니를 설득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내게 면담을 받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당신은 만나고 싶어요?” 내가 물었다.“아니. 만나지 않겠다는 당신 결정을 바꿀 생각도 없어.”“선처를 바라고 준 증거예요. 사과로 받아들이지 않을 거예요.”“그게 맞아. 어머니가 한 일의 목적까지 바꿔 줄 필요는 없으니까.”수사관 두 명과 디지털 증거 담당자가 도착했다. 봉인을 뜯기 전부터 영상 기록이 시작됐다.“임의제출자로 서 대표님 이름을 적겠습니다.”“실제 제출자는 최명희 씨 대리인입니다. 저는 전달 경로에만 넣어 주세요.”“선처 의사를 밝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