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소하는 군을 이끌었기에 손헌의 계략을 알 수 있었다.그의 말을 들은 소하는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허나, 내가 장군을 도왔다는 점은 잊지 마시오. 자네가 장양강에 사람을 찾기 위해, 내가 사람을 빌려준 사실을 말이오.”“그 일에 대해 말입니다..”소하의 목소리가 점점 낮아졌다.그리고 손헌을 바라보는 눈빛에 냉기가 서렸다.“만일 손 장군께서 온곳에 소문을 내지 않았다면, 단이도 산적의 손에 들어가지 않았겠지요. 그리고 강에 빠지지도 않았을 겁니다.”그의 말에 손헌이 깜짝 놀랐다.소하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 이유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는 표정이다.그는 소리를 꽥 질렀다.“이봐 소 씨! 분명 자네가 나에게 말을 전하라고 하지 않았소? 나는 그저 도움을 주었을 뿐 이오. 더하여 내가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그 산적이 미리 알고 있을 수도 있지 않는가.”그럴 수도 있다.그는 김단의 계획을 알아채고 이각에게 명을 내렸었다.동시에 손헌이 일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결국 장양강에 몸을 뛰어든 일도, 손헌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그를 한양에 가만히 남겨두는 것은,소하에게 있어서는 미친 짓이 아닌가.코웃음을 치고는 입을 열었다.“여봐라.”궁 문 옆에 서있는 호위들이 다가왔다.“예.”“백성 손헌이 감히 궁 문 옆에서 소란을 피우고 있다. 끌어가서 곤장 삼십대를 때려라.”“예!”호위들이 서둘러 손헌을 붙잡았다.손헌이 크게 외쳤다.“감히!”그는 수년간 금군 총령이었다.궁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허나, 오늘날 그는 더 이상 금군 총령이 아니기에 호위들도 그의 부하가 아니지 않은가.소리를 아무리 질러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곤장이 그의 살에 맞닿을 때마다, 손헌은 크게 분노하며 소리를 질렀다.하지만 소하는 그를 한번 보고는 몸을 돌렸다.단이를 괴롭힌 사람들은 모두 대가를 치러야 하지 않은가.오늘이 그 첫걸음일 뿐이다...김단은 자신이 눈을 뜬 날이 얼마나 되는지 세어보았다.적어도 닷새는 지났
김단이 움찔거렸다.그녀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춘 숙모가 서둘러 대답했다.“동꽃 숙모 말 듣지 마시오. 백도령은 이 근처에서 사냥하는 놈들이랑 두,세 달에 한 번씩 산속으로 들어가곤 하오. 산속에 있는 것이 밖에 있는 것보다 좋지 않겠소?”밖에 있는 것은 닭이나 토끼를 의미한다.허나, 산속에 있는 것은 다르다.깊은 산속에는 멧돼지, 곰 그리고 호랑이도 나타난다.저번연도에 백우는 사냥꾼들과 함께 짐승을 잡은 적이 있다.그리고 시내로 나가 은을 몇 푼 나누곤 했다.그 이후로, 백우는 다시 산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다.동꽃 숙모는 짜증 섞인 얼굴로 말했다.“내가 틀린 말 했소? 백도령이 산속에서 나온 지 한 달도 안 되었는데, 또다시 들어가지 않았는 가?”한 달에 두 번이나 산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은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닌가.춘 숙모는 김단이 안 좋은 생각을 할까 봐, 동꽃 숙모를 한번 노려 보았다.“말 적게 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렸소?”동꽃 숙모는 그제야 제정신을 차린 듯했다.그리고 김단을 보고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아이고,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백도령은 아무 일도 없을 것이오! 그리 재빠른 사내가 어디 있다고!”김단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허나, 퍼져가는 걱정을 멈출 수는 없었다.그녀는 백우와 어떠한 관계도 아니다.생명의 은인에게 어떻게 은혜를 갚을지 우왕좌왕하고 있는 도중에, 자신 때문에 백도령이 깊은 산속에 들어가고 말았다.위험천만한 깊은 산 속에서, 백도령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이때, 김단이 눈살을 찌푸렸다.뇌리에는 ‘천살고성’ 이라는 네 글자만 맴돌았다.순간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그녀는 억지로라도 진정을 찾으려 애썼다.‘괜찮을 거야.’백우와 하루에 두 마디도 하지 않기에, 친하다고는 할 수 없다.자신이 아무리 천살고성의 팔자라고 하여도, 백우에게 피해를 끼치지는 않을 것이다.숙모들은 몇 마디를 나누고는 돌아갔다.때가 늦었기에 돌아가 밥을 차릴 준비를 했다.한편, 김단은 여전히 침상
그는 그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곰을 사냥하였습니다. 숨이 붙어 있을 때, 읍내로 데리고 갔소이다.”곧이어 그는 품에서 작은 인삼을 꺼냈다.“명일에 인삼 삼계탕을 끓여 주셨으면 합니다.”촌에는 내올만한 음식이 없었기에, 삼계탕이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죽었다가 살았기에 영양을 보충해야 하지 않겠는 가.그리고는 은냥을 꺼내 춘 숙모에게 건넸다.그녀는 거절의 의사를 건넸다.“됐습니다. 이전에도 은 다섯 냥을 주지 않으셨습니까?”“이전은 이전이지 않습니까.”춘 숙모는 최지습의 힘에 밀려 어쩔 수 없이 은을 받았다.“밥 좀 가지고 오겠나이다!”그리고는 서둘러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최지습은 그제야 부엌으로 들어갔다.물독 안에서 바가지로 찬물을 퍼서 들이켰다.김단은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물을 마시고 있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그의 몸에 커다란 혈흔이 있는 것을 보고,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방금 전에 춘 숙모와 그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곰을 잡았다면, 위험했을 터인데.최지습은 물을 다 마시고 몸을 돌렸다. 마침 자신을 보고 있던 김단과 눈이 마주쳤다.그녀의 생각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숙여 몸에 있는 혈흔을 바라보았다.그리고 부엌에서 나와 그녀에게 말했다.“내 것이 아니오.”사실 오늘 사냥은 위험천만했다.무리 중 두 사람이나 다치지 않았는 가. 다행히도 작은 외상이라 한숨 돌릴 수 있었다.김단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했다.최지습이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그의 뜻을 알아차렸다.곧이어 그는 집 뒤쪽으로 가서, 목욕을 하러 갔다.김단을 데리고 오고 나서는 정원이 아닌 뒤뜰에서 목욕을 하곤 했다.그 탓에 방음이 잘되지 않았다.김단은 침상 옆에 앉아서 첨벙첨벙 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최지습이 안으로 들어오자, 김단은 자신도 모르게 방 문 앞에 서 있었다.왼발은 허공에 떠있고, 몸은 반쯤 문에 기대었다.물에 젖어있는 최지습을 보고 입을 열었다.“몸이 한결 나아졌나이다. 다리만 나으면 서
그녀는 최지습을 위아래로 훑었다.거친 삼베를 입고 있어도, 몸의 근육이 어렴풋이 보였다.눈빛은 독수리처럼 예리하고, 얼굴의 상처는 그의 준수한 외모에 흉악함을 더했다.곰도 죽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김단은 순식간에 사라질지도 모른다.허나, 동시에 백우가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촌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높게 평가했다.심지어 다들 그를 좋은 사람이라, 칭하기도 했다.김단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백도령, 소녀는 혼인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여 은냥은 받지 않겠나이다.”“…”최지습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김단을 바라보았다.방 안은 촛불 몇 개가 켜져 있었다.그는 김단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허나, 반짝이는 두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똑똑히 보였다.자신의 말이 오해를 샀다는 것을 깨닫고, 최지습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하만촌이 정이 많다고 하여도, 쥐새끼처럼 간악한 자들이 없으리라고는 보장하지 못하오. 돈주머니를 침대 밑에 두면 안전할 것이오.”오십 냥이다.작은 돈이 아니었다.일반 백성이 몇 해 동안 먹고 살기 충분한 금액이다.김단은 멈칫했다.오해를 한 것인가.그녀의 양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상대는 호의를 베풀어 자신을 구해 주었는데, 목적이 있다는 생각에 주제를 넘고 말았다.강렬한 수치심에 김단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죽을 죄를 지었나이다! 소녀, 소녀가 잘못 생각..”허나 최지습은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다.“내가 말이 적은 탓이오.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시오.”그리고는 벽에 기대어 놓았던 나무판을 내려놓았다.옷을 입은 채로 그대로 위에 드러누웠다.김단을 구해주고 난 후로, 마당에서 잠을 청하는 사내가 어찌 그녀에게 마음이 있을 수 있겠는 가.김단은 속으로 자신을 꾸짖기 바빴다.그녀는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그리고 돈 주머니를 침상 밑으로 숨겼다.늦은 밤, 백우가 말한 ‘쥐 새끼’ 가 나타났다.김단은 꿈에서 누군가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순간 눈을 번쩍 뜨자,
대체 어떤 신분의 여인인 것인가.…소하가 금군에서 돌아오고 나서, 자신의 서재로 들어갔다.서재의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소한과 눈이 마주쳤다.그의 안색이 어두워졌다.그리고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다가가 물었다.“왜 이곳에 있는 것이냐, 장양강에 가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야?”“사람을 시켜 감시하라 일러 두었나이다.”소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허나 매의 눈처럼 소하를 바라보았다.소하의 시선이 탁상으로 비켜 나가는 모습을 보고, 소한이 코웃음을 쳤다.그는 서찰을 손가락에 끼워 보였다.“형님께서는 이것을 찾으시는가 봅니다.”소하의 안색이 어두워졌다.장양강의 지류에 보낸 사람의 서찰이었다.모두 찾지 못하였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소한은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저를 뒤로하고 서찰을 받으시는 연고가 무엇이옵니까? 혹여 단이를 찾게 되면 같이 도망갈 계획이셨습니까?”그의 모습은 마치 간통한 두 남녀를 잡는 것 같았다.소하는 웃음을 터뜨렸다.“소한, 단이는 내 처야. 이후에 단이와 내가 어딜 가든, 너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야.”“처?”소한이 의자에 비스듬히 기대었다.그의 웃음기가 점점 사라졌다.“이혼하지 않으셨나이까.”화리서를 건넨 사람은 소 씨 부인이었지만, 안에는 소하의 손이 찍혀 있었다.혼미하여 깨지 못하던 이십 시진 동안, 소하는 김단과 아무런 인연도 없게 되었다.이 사실은 소하의 상처였다.뒷짐을 지고 있던 그의 손은 주먹을 꽉 쥐었다.소하는 차갑게 말했다.“그렇다고 하여도, 네가 단이를 감금하여서는 아니 되었다! 네가 아니었다면 단이가 장양강에 몸을 던지지도 않았을 터. 더하여 지금까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지도 못하지 않느냐!”이때, 소한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단이는 내 사람이옵니다! 김단은 진산군의 친 딸, 본디 저와 혼인을 해야 하는 여인이옵니다. 형님께서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저는 정정당당하게 혼인을 올렸을 것입니다!”소한이 소리쳤다.말투에는 분노가 섞여 있다. “내가 단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는지는
소한의 주먹은 그대로 소하의 얼굴을 가격했다.그 탓에 소하는 몸 전체가 뒤로 쓰러졌다.소하의 뒤에 서 있던 소 씨 부인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소하!”그녀는 서둘러 소하를 부축하였다.눈물이 고인 채로 소한을 노려 보았다.“한아! 이게 뭐 하는 짓이야!.어찌 네 형과 주먹다짐을 한단 말이냐?!”소한은 소 씨 부인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사실 소하는 공격을 충분히 피할 수 있었다.허나, 그가 공격을 피했다면 소 씨 부인이 맞았을 것이다.이러한 생각에 소한은 미간을 찌푸렸다.동시에 타오른 분노가 점점 사라지고, 진정을 되찾았다.소하는 소한의 주먹에 맞아 입가에 피가 터졌다.소 씨 부인은 그를 일으켰다.걱정하는 눈빛으로 소하를 바라보았다.“괜찮느냐.”소하는 고개를 저었다.그는 소한을 한번 바라보았다.소한은 여전히 씩씩거렸다.허나 방금 전 주먹에는 힘이 실리지 않았다.만일 힘을 실었다면 이빨이 뽑혔을 지도 모른다.소 씨 부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녀는 소한을 바라보았다.“어서 네 형에게 사과하지 못하느냐!”소한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하를 힐끗 바라보았다.그리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분명 잘못을 한 자는 형이다, 어찌 자신이 먼저 사과를 한단 말 인가.그의 모습에 소 씨 부인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그리고 소한을 쫓아가며 “이 놈이!” 라며 말했다.허나 그의 발걸음이 빠른 탓에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이때, 소하가 소 씨 부인을 안심 시켰다.“어머니, 성을 내지 마시옵소서.”“어찌 성을 내지 않을 수 있단 말이냐, 저 자식의 행실을 보거라!”그녀는 말하면서 눈시울을 붉혔다.허나 그녀는 소한이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단이가 장양강에 빠지고부터 생사를 알기 위해 매일 장양강에 찾아간다.허나, 어찌 찾을 수 있겠는 가.이미 살과 뼈가 으스러지고,.물고기의 사료가 되었을 것이다!십중팔구 모두 단이가 죽었을 것이라 이야기한다.허나, 두 형제는 귀를 닫고 있다.잠시 생각하던
소 씨 부인의 마음 한켠에는 죄책감이 자리를 잡았다.허나, 아무리 많은 눈물을 흘려도 돌이킬 수 없었다.소한은 소하의 마당에서 나와서 관저의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나간지 얼마 되지 않아 뛰어오는 임학이 보였다.소한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에게 다가갔다.“단이의 소식이 있는 것이오?”예상과는 달리 임학은 그의 멱살을 잡고 말했다.“원이는 어디 있소?”소한이 눈살을 찌푸렸다.임학의 손을 뿌리치고는 인상을 쓰며 답했다.“폐하께 여쭤보시오!”임원은 동래로 추방되었다.황제가 내린 명이었기에 소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임학은 끈질기게 달라붙었다.“원이가 실종 되었단 말이오! 원이를 데려 간 관차가 어젯밤에 납치 당하였다고 하였소, 진정 자네가 한 짓이 아니란 말이오?!”소한은 임학을 밀어냈다.“내가 어찌 임원 낭자를 납치 한단 말이오?”“자네가 아니면 대체 누구란 말이오!원이가 단이를 다치게 하였으니, 단이를 대신하여 복수를 하고 싶었겠지!소한, 원이도 무고하오... 그 계집도 산녀 한테 깜빡 속은 것이오!”그의 말에 소한은 방금 전 다 쏟아내지 못한 분노가 다시 끌어 올랐다.주먹을 쥐어 그대로 임학을 향해 가격했다.“단이가 그 계집한테 그렇게 당했는 데, 아직도 그 계집의 편을 드는 것이오? 내가 보아하니, 자네는 미친 것이오! 똑똑히 알려주겠소, 나는 그 여인을 납치한 적이 없소이다! 만일 내가 어디선가 마주친다면, 당장이라도 칼로 두 동강을 낼 것이오!”임학은 주먹을 맞았는데도 전혀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자네가 알긴 하오?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이미 딸을 하나 잃었소. 어찌 두 딸을 모두 잃을 수 있겠소?”진산군 관저는 임원을 미워했다.만일 임원이 관저를 찾아오지 않았다면, 단이도 이러한 결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다.허나 그들은 침착함을 되찾고, 임원의 말을 들어 보았다.일리가 있는 말이었다.아무것도 몰랐고, 산녀가 모든 것을 감추었다는 사실이었다.임원은 아무런 잘못이 없지 않은가.여러 해를 지내면서
임학은 비틀거리며 관저로 돌아갔다.문을 열자마자 진산군과 마주쳤다.임학이 돌아오자, 진산군이 다가갔다.“어찌 되었어? 소 장군께서는 뭐라고 하시더냐?”임학의 두 눈에 핏줄이 보였다.“아버지께서 임원을 납치하였다 했습니다.”진산군은 소한이 한번에 알아맞힐 줄 몰랐다.그 바람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그,그 말을 믿는 것이야?”허나, 당황하는 진산군의 모습을 임학이 모를리가 없었다.그는 작게 중얼거렸다.“아버지,이 어찌 된 일이옵니까. 주상 전하께서 아시기라도 하면, 온 집안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옵니다!”임학은 소한이 계획한 일 인줄 알고 있었다.자신의 아버지가 그럴 줄은 전혀 몰랐던 눈치다.“조용히 하지 못할까!”진산군도 작게 으름장을 놓았다.그리고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어찌 할 도리가 있겠느냐. 원이가 동래로 추방되고 나서, 네 어머니는 눈물로 밤을 지내셨다. 단이는 이미 사고가 났고, 만약 원이라도..”“그렇다고 하질 언정, 온 집안의 목숨을 가지고 농을 할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임학이 작게 꾸짖었다.“하물며 단이의 일은 원이 때문입니다! 원이가 한 마디만 해주었더라면, 단이가 오랜 시간 동안 그 많은 수모를 당하지도 않았을 터. 동래에 추방된 것은 오히려 원이에게 잘된 일이 아니옵니까?”“네가 어찌 이리 말할 수 있느냐!”진산군이 낮게 꾸짖었다.“원이는 네 누이로 삼 년을 지냈다. 이 삼 년은 네게 아무것도 아니더냐.”“단이야말로 제 누이이옵니다!”임학이 소리를 높였다.“생사조차도 모르옵니다. 지금 제가 해야 할 것은 서둘러 단이를 찾는 일 이옵니다! 시체가 되어도 집으로 데려갈 것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희 집안 전체가 단이에게 죄를 지었나이다! 이제 그 일로 찾지 마시 옵소서. 임원이 명일 동래에 나타나지 않으면, 윗분들께 알린다고 소한이 일러 두었나이다. 황천길 떠나도 단이를 다시 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옵니까?”“허나..허나 임원도 무고하지 않느냐! 그 산녀가 이 진산
이튿날 아침, 김단은 궁무를 맡지 않았기에 평양관저에 머물며 맹영지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탓인지 맹영지의 눈빛에는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김단의 곁에 있을 때만큼은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조용한 정원, 김단은 맹영지와 함께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계수나무 아래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숙희가 건네준 과자가 들려 있었고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번져있었다. 맹영지는 고개를 들어 만개한 계화를 바라보며 평온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소하가 평양관저를 찾아왔으나 그는 맹영지와의 만남을 최대한 피하려 애썼다. 아마도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김단은 맹영지를 바라보며 과거 소하가 왜 그리도 그녀를 칭찬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한때 소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여인답게 그녀는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가까웠던 두 사람이었는데 맹영지는 어쩌다 소하에게 독을 먹이려 했던 것일까?김단은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맹영지의 몸과 마음이 회복되면 그때 자연스럽게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김단이 생각에 잠겨 있던 찰나 평양관저의 겸인이 급히 달려와 말했다.“아가씨, 맹가 사람들이 도착했습니다.”이런 큰일이 발생했으니 맹씨 집안에서 그녀를 보러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김단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겸인에게 말했다.“알겠소. 이리로 모셔오시오.”잠시 후, 맹씨 부인이 정원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김단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한 뒤 슬픈 눈으로 자신의 딸을 바라보았다. “김 의원님께 정말 감사드립니다. 의원님이 아니었다면 제 딸이 그 짐승 같은 자에게 학대받으며 살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말을 마친 맹씨 부인의 눈동자가 붉어졌다.김단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맞이하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과찬이십니다, 맹씨 부인. 민태훈, 그 자의 말에 따르면 맹영지 아가씨의 병은 이미 4~5년 전부터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완전히 회
소한은 코웃음을 치며 말없이 등을 돌렸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소하의 조용한 목소리가 방안의 침묵을 깨뜨렸다.“이번에는 정말 잘했어.”영의정 저택에서 벌어진 일은 소한이 형벌을 받은 후에야 비로소 소하의 귀에 들어갔다. 만약 소한이 과감하게 영의정 저택에 침입하지 않았다면 김단은 쉽게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했을 것이다.비록 민씨 사람들이 직접적으로 김단을 해치지 못한다고 해도 그녀가 겪었을 모욕과 고통은 상상하기 어려웠다.소하의 갑작스러운 칭찬에 소한은 많이 당황한 듯했다.“제가 충동적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때로는 그 충동이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지.”소한은 아무 말 없이 그저 김단의 얼굴을 떠올렸다. 처음에 그녀도 자신을 발견하고 놀란 듯했지만 곧 냉랭한 표정으로 일관하였다. 김단은 마차에 오를 때까지 자신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과거의 그녀였다면 그가 나타나자마자 바로 그의 품에 안기며 그를 향해 미소 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너무나도 차갑게 변해버렸다. 자신을 외면하는 그녀가 소한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그는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큰 실수를 저질렀는지를 다시금 깨달았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며 굳게 결심했다.그는 잃어버린 것을 되찾기 위해 이미 어떤 대가든 치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반 시진 후, 김단은 방 안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다.그러자 숙희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아가씨?”김단은 정신을 차리고 숙희를 바라보았다.“무슨 일이냐?”“두 도련님께서는 모두 돌아가셨습니다.”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전 발생한 일을 되새겨 보았다. 그녀는 소한이 오랫동안 계획해 온 것을 포기하면서까지 자신을 선택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에도 그는 소가를 위해, 전하를 위해 심지어 임원을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그러나 그녀만은 제외였다.그녀는 소한이 자신의 어머니를 걱정하는 척하며 평양관저로 따라온 것도 단지 자신의 동정심을 얻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처
김단은 아무 말 없이 소한을 부축하며 걸었다. 궐에서 나오는 길은 유난히 길고 고요했다. 그들의 발걸음은 무겁고 느렸으며 말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궐문에 도착했을 때 소한의 마차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말을 타고 왔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의 상태로 다시 말을 타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된 김단은 곁에 있던 경씨에게 부탁했다.“도령님, 장군님을 먼저 집으로 모셔다 주실 수 있겠습니까?”그러자 소한이 놀란 듯 김단을 바라보며 물었다.“내게 약을 발라주지 않겠다는 것이오?”김단도 당황해하며 되물어 보았다.“소가에는 의원이 없습니까?”소한은 김단의 물음에 할 말을 잃었다. 자신의 의도가 너무 노골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어머니께서 내가 또 다쳤다는 걸 아시면 얼마나 걱정하겠소? 그러니 그냥 근처에서 치료받을 것이오. 낭자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돌아가시오.”김단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먼저 평양관저로 함께 가서 약을 바르시죠.”소한은 그녀의 제안에 놀란 기색을 내비쳤다.“불편하지 않겠소?”김단은 그를 바라보며 단호히 말했다.“괜찮습니다.”그렇게 소한은 김단과 함께 평양관저로 향했다. 그곳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김단의 몸종 숙희였다.소한을 발견한 그녀는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그러자 김단이 숙희를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차분히 말했다.“숙희야, 장군님을 객실로 안내해 주거라. 나는 약을 준비하러 가야겠구나.”그녀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김단의 지시를 따랐다.객실에 혼자 남은 소한은 조심스럽게 상의를 벗고 등을 드러냈다. 그의 등에는 형벌로 인한 상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그는 거울을 통해 자신의 등을 바라보며 오늘의 형벌이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음을 깨달았다.하지만 그는 김단이 이 상처를 보면 마음 아파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감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약을 들고
긴장감이 맴도는 분위기 속에서 전하는 이해 안 되는 듯한 어투로 물었다,“조선의 장군인 네가, 수많은 전공을 세운 네가, 원하는 여인 하나 얻는 것이 그리 어렵단 말이냐? 어찌 김단 하나 때문에 수년간 공들여 쌓아온 모든 것을 무너뜨리려 하는 것이야? 그 낭자가 그럴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느냐?”전하의 말투는 엄중했지만 그 속에는 실망과 안타까움이 섞여 있었다.그러자 소한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단호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그렇습니다.”전하는 눈썹을 찌푸리며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김 의원, 들었소?”그 순간 소한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그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조용히 서있는 김단이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담담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소한은 그녀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녀가 이 모든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에 당황했지만 그녀의 표정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을 수 없었다.소한은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김단, 왜 이곳에 있는 것이오?”그녀는 천천히 방 안으로 들어와 무릎을 꿇고 전하에게 예를 올렸다.“소녀 김단, 전하를 뵙습니다.”전하는 손짓으로 그녀를 일으키며 말했다.“일어나거라. 오늘 발생한 일에 대해 자세히 말해 보거라.”김단은 소한을 보지 않기 위해 시선을 정면에 고정한 채 차분하게 사건의 전말을 설명했다. “제가 직접 목격한 바는 없습니다. 하지만 민대부를 제외하고는 영의정 댁 장남의 부인에게 감히 손을 댈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전하는 그녀의 말을 듣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맹 낭자의 상처를 확인하기 위해 두 명의 궁녀를 보내겠다. 평양관저에서 확인해 보도록 하거라.”학대의 이유가 무엇이든 맹영지는 필시 중전의 친척이었다. 만약 폭력을 가한 사람이 민대부라고 할지라도 이는 중전의 가문을 모욕하는 행위와 다름없었기에 결코 그를 용납할 수 없을 것이다.전하는 소한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어쩌면 네 죄가 묻힐 수도 있겠구나.”민씨 가문의 잘못이 드러나게 된다면
소한은 곧바로 병사들과 함께 어서재에서 물러났다. 그가 다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향 한 자루가 탈 정도의 시간이 흘러 있었다.소한이 걸어 들어오는 것을 본 전하는 하던 일을 멈추고 냉랭하게 물었다.“영의정이 너를 더 때리라고 명하지 않았느냐?”소한은 조용히 전하 앞으로 걸어가 무릎을 꿇고 허리를 곧게 세운 채 대답했다.“전하의 깊은 뜻을 아는 자입니다. 그러니 더 심한 처벌을 요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전하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물었다.“그렇다면, 내 뜻이 무엇이더냐?”소한은 고개를 들어 전하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전하께서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을 겁니다. 그래서 영의정을 불러 제가 벌을 받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게 하셨죠. 그리고 동시에 제가 전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셨습니다. 전하께서는 영의정이 이 사실을 눈치채기 바라신 것 아니었습니까?”전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손에 들고 있던 붓을 책상에 내던지며 소리쳤다.“이 불경한 자식아! 내 너를 아낀다고 해서 이렇게 제멋대로 행동해도 된다고 생각하느냐? 영의정 저택 외에 또 어디에 첩자를 심어두었느냐?”소한은 눈을 내리깔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3품 이상의 모든 관료의 집에 첩자를 두었습니다.”그 말을 들은 전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소한을 가리켰지만 제대로 말을 잇지 못하였다.그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더니 한참 동안 방안을 서성이었다.잠시 후 그는 분노를 억누르지 못하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네가 감히! 그렇게 많은 곳에 첩자를 심어두고 무슨 일을 꾸미려는 것이냐? 이렇게 행동하면 내가 소씨 집안을 멸문시켜도 할 말이 없을 것이다.”소한은 여전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조용히 말했다.“저도 위험한 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다섯 해 전, 저희 소가는 거의 멸문 당할 뻔했습니다.”그 해 소하가 지닌 병권은 다른 집안의 탐욕스러운 먹잇감이 되었고 그로 인해 조정의 문
김단은 그제야 잊고 있었던 민태훈을 떠올렸다.그녀는 맹영지를 몸종에게 맡기고 민태훈 곁으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허벅지에 박힌 은침을 뽑아냈다.침이 빠져나가자마자 민태훈은 마치 고통에서 해방되기라도 한 듯 온몸의 긴장이 풀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은 한 가닥의 은침이 이토록 큰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큰 마님은 김단을 바라보며 속으로 생각했다.그녀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고 말이다.그때 경씨가 마차를 몰고 도착했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걸어 나오자 경씨는 놀란 얼굴로 다가와 안부를 물었다.“낭자, 괜찮소?”방금 전 김단이 영의정 저택에서 곤란한 상황을 겪고 있다는 소식을 접한 소한은 급히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왔다.덕분에 한발 늦게 도착한 경씨는 자신이 더 일찍 김단을 챙기지 못한 것을 자책하며 말했다.“내가 미처 신경 쓰지 못했소.“김단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대답했다.“저는 괜찮습니다. 먼저 맹 아가씨를 평양관저로 모시고 가야 할 것 같습니다.“그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김단과 몸종이 맹영지를 부축하며 마차에 오르자 경씨는 바로 마차를 출발 시켰다.김단은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조용히 서 있는 소한에게로 향했다. 소한은 그녀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지만 김단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소한은 그런 김단의 뒷모습을 씁쓸하게 바라보더니 옅은 미소를 지었다.그 후 소한은 곧장 궁으로 향했다.어서재에 도착한 그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앉아 오늘 영의정 저택에서 있었던 일을 전하에게 보고했다.그의 말을 들은 전하는 노여움을 감추지 못하며 소한을 꾸짖었다.“네가 감히 허락도 없이 영의정 저택을 침입했단 말이냐? 정말 대담하구나! 내가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느냐?”그러나 소한은 그저 묵묵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벌을 달게 받겠습니다.“전하는 그의 담담한 태도에 더 분노하며 외쳤다.“민가
김단은 민씨 부인의 말에 담긴 의미를 정확히 파악했다.보내서는 안 된다라...오늘 이 자리에서 맹영지뿐만 아니라 김단 자신도 민가를 벗어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김단은 민씨 부인이 자신의 아들을 위해 이런 결정을 내릴 줄 몰랐다.그녀는 자신의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선택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김단의 눈빛이 서서히 날카롭게 변해갔다. 그녀의 내면에서는 분노와 실망이 교차했다.큰 마님은 민씨 부인의 표정을 보고 심각한 상황임을 직감했다.맹영지의 몸에는 증거가 남아있었고 그 사실이 세간에 알려지게 된다면 엄청난 파장을 불러올 것이다.하지만 지금 김단을 보내지 않는다면 그녀는 분명 궐로 들어가 이 일을 고발할 게 뻔했다.지금 김단을 적으로 돌린다면 그에 따른 후과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큰 마님은 사랑하는 손자를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김단을 보내면 민태훈의 입지가 위험해질 것이고 보내지 않는다면 민가 전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었다. 그러기에 그녀는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그때, 한 하인이 급히 달려와 외쳤다.“큰 마님! 소 장군님께서 오셨습니다!”소 장군? 소한을 말하는 것인가?그의 이름이 언급되자 큰 마님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소한이 이렇게 빨리 이곳에 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김단도 그가 왜 이곳에 나타났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녀가 생각에 잠긴 사이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큰 마님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뵙게 되어 송구합니다.”모두들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보이는 것은 당당하게 정원으로 걸어 들어오는 소한의 모습이었다.“소한, 주인의 허락도 없이 들어오다니! 대체 영의정 저택을 무엇으로 보시는 것이오? 이곳은 마음대로 들락날락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소한은 그 말을 한 사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이런 무례를 범한 것은 제 잘못입니다. 곧 전하 앞에서 사죄드리지요.”그는 정원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더니 큰 마님에게 다가가 정중히 인사했다.
머뭇거리는 그들의 모습에 김단은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마님, 만약 지금 이 자리에서 저를 막으신다면 저는 곧장 궐로 가 이 모든 일을 고할 것입니다.”그녀의 말은 칼날처럼 날카로웠고 그 안에는 확고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김단의 말이 끝나자 민가의 사람들은 긴장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큰 마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그녀는 김단이 단순한 의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김단은 진산군 댁의 적녀이자 평양원군의 의남매이다. 그리고 그녀는 소가의 두 형제와도 깊은 인연이 있었다. 지금 그녀를 적대시하는 것은 곧 여러 권세 있는 가문을 적으로 만드는 것과 다름없었다.큰 마님은 민태훈을 바라보았다. 그는 고통에 찬 얼굴로 땀을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그러나 동시에 마음속에는 김단에 대한 의심도 피어올랐다. 만약 그녀의 말이 과장된 것이라면 민씨 가문은 부당한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다.한참을 고민하던 큰 마님은 굳게 결심한 듯 민씨 부인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네가 직접 확인해 보거라. 만약 낭자의 말이 거짓이라면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민씨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김단과 함께 방으로 들어갔다.김단은 조심스럽게 맹영지의 소매를 걷어 올렸다. 그녀의 팔 안쪽에는 선명한 멍 자국이 여러 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민씨 부인은 숨을 들이켰다.“이런 상처가… 정말로…”그녀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자 김단은 차분하게 말했다.“다리 쪽은 더 심각합니다. 보시겠습니까?”민씨 부인은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이 상처, 정말로 태훈이의 짓입니까?”김단은 잠시 침묵하더니 그녀의 말에 대답해 주었다.“제가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그 말에 민씨 부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우리 태훈이는 절대 그럴 애가 아닙니다. 어릴 적부터 착하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던 사람이었단 말입니다.”김단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았다.
공주의 이름이 거론되자 민씨 일가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스쳤다. 그러나 큰 마님은 여전히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채 입을 열었다.“낭자가 공주의 명을 받고 우리 영의정 저택에 들어와 병자를 돌보는 것은 알겠소. 허나 공주의 허락 없이 사람을 해치는 것은 무엄한 일이오. 공주라 할지라도 국법을 지켜야 하지 않겠소? 그러니 함부로 공주의 이름을 빌어 협박하지 마시오.”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단은 박수를 치며 말했다.“참으로 옳은 말씀이십니다.”민가의 큰 마님은 김단이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자신을 치켜세운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김단의 입가에는 더욱 짙은 미소가 떠올랐고 눈빛에는 경멸이 스쳤다.“공주님께서도 국법을 지키셔야 하는데 민가의 사람들은 더욱 그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민가의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높이며 반박했다.“그게 무슨 뜻이오? 우리 민씨 일가는 예로부터 법을 준수하며 국법에 어긋나는 일을 한 적이 없소!”“김 의원께서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우리 민가에 누명을 씌우려는 것 아니오?” 김단은 그저 조용히 서서 그들의 말을 듣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김단의 이런 차분한 태도가 큰 마님의 신경을 건드렸다.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김단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큰 며늘 아씨는 중전마마의 친조카이시며 공주자가의 사촌이십니다. 그래서 제가 그분의 치료를 맡게 되었지요. 원래는 상태가 호전되고 있었으나 오늘 갑자기 증상이 악화되었습니다. 이는 분명 누군가가 큰 며늘 아씨의 회복을 방해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의원으로서 제 환자가 이곳에서 고통받는 것을 두고 볼 수 없으니 제가 데려가야겠습니다. 만약 제 앞을 가로막으신다면 다음번에는 민대부님의 다리에 은침을 꽂아 버릴 것입니다.”이에 큰 마님은 지팡이를 바닥에 세게 내리치며 외쳤다.“허튼소리 마시오! 낭자의 의술이 부족해서 생긴 일을 왜 우리한테 덮어씌우려는 것이오?”“맞소! 무슨 명의의 제자라더니... 다 헛소리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