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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주현군
석현이 이정을 부축한 손에 중건의 시선이 멈추자, 표정이 잔뜩 가라앉았다.

그동안 이정 어머니의 치료비는 줄곧 중건이 책임져 왔다.

석현도 몇 차례 중건을 만난 적이 있었기에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석현이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서 대표님, 말씀이 지나치시네요.”

이정의 손을 잡아 끄는 중건의 손바닥은 뜨겁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건 선생님이 알 바는 아니죠.”

석현이 곁에 있어서였을까?

아니면 중건에게 완전히 실망했기 때문이었을까?

이정은 힘껏 손을 빼며 또박또박 말했다.

“대표님.”

그 앞에서 처음으로 터져 나온 말이었다.

“저는 5년 동안 대표님 곁에 있었어요. 부르면 가고, 내치면 물러나는 개처럼 살았죠.”

“이나연 씨보다 제가 못하다는 건 인정할 테니 여기서 좋게 끝내죠. 오늘로 끝입니다.”

“이미 우리 둘 사이는 끝이 났으니, 제가 누구와 무엇을 하든 간섭할 자격은 없으세요. 그러니 저한테 손대지도 마시고요.”

이정의 눈에 눈물이 맺히더니 일부러 석현의 손을 꽉 잡았다.

이에 중건은 고개를 숙여 이정을 내려다봤다.

폭풍전야처럼 고요한 눈빛이 오히려 더 무겁고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른 뒤 허스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게 네 진심이야?”

이정은 고개를 들었다.

“네.”

중건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비웃듯 말했다.

“후회나 하지 마. 내일부터 서문그룹에서 꺼져.”

이정은 이미 그 결과를 예상했다.

그래서 그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석현의 팔을 잡아 그 자리를 떠났다.

얼마나 걸었는지 몰랐지만, 어느샌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이정은 그제야 울음이 터졌다.

그 모습을 석현이 내려다보며 달랬다.

“이정아, 너무 슬퍼하지 마. 어머니 치료비는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그 말에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내가 해결할게.”

다른 길이 없는 것도 아닌데도, 더는 남에게 기대고 싶어하지 않은 이정의 모습에 석현은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알았어. 그러면 집까지 데려다줄까?”

이정은 씁쓸하게 웃었다.

‘집이라 부를 곳이 있긴 한가?’

하정혁이 있는 곳을 집이라 할 수도 없었고, 남은 곳은 중건이 사준 아파트뿐이었다.

이에 이정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병원에 가자.”

...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

차 안에서 이정은 이전에 이야기가 잘 통하던 투자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는 기뻐하며, 서문그룹 퇴사 후의 입사 시점을 바로 정했고 첫 월급의 선지급에도 동의했다.

그렇게 급한 불을 끄게 된 이정은 그제야 숨을 돌렸다.

차에서 내린 이정은 석현과 함께 병실로 향했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잠든 어머니의 얼굴을 보자, 온몸을 휘감던 긴장감이 한꺼번에 풀려버렸다.

“고마워.”

석현은 어린 시절처럼 이정의 머리 위에 손을 얹어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나한테 고맙다는 말은 하지 마. 내일 아침 근무라서 나도 오늘은 병원에서 잘 거야. 그러니 뭐 필요하면 바로 문자 보내.”

이에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석현이 떠난 뒤, 간이침대에 앉은 이정은 어머니인 박수련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확실히 박수련의 곁에 오니 일과 생활의 압박감이 사라졌다.

이내 피로감이 파도처럼 몰려왔고 눈꺼풀이 무거워지더니 하품을 한 번 하고는 그대로 기대 잠들었다.

잠시 후, 석현이 이불을 들고 들어왔다.

창백하고 마른 그녀의 얼굴을 보고 한숨을 내쉰 석현은, 이불을 펼쳐 이정의 몸 위에 조심스럽게 덮었다.

그리고 이정이 깊이 잠든 것을 확인한 뒤에야 병실을 나섰다.

이정은 오랜만에 악몽을 꾸지 않고 아침까지 잠들 수 있었다.

이정이 눈을 뜨자, 병상 옆 탁자에는 제법 그럴싸한 아침이 놓여 있었다.

이에 박수련이 웃으며 말했다.

“이건 다 석현이가 가져온 거야. 네가 좋아하는 그 집 만두야.”

이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몸은 어때요?”

“그럭저럭 괜찮아.”

박수련은 이정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석현이가 너한테 프러포즈는 했어?”

뜬금없이 프러포즈라는 단어에 이정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말이에요?”

이에 박수련은 피식 웃었다.

“속일 생각은 하지 마. 너희 둘은 어릴 때부터 사이도 좋았고 그렇게 서로 잘 챙겨 줬잖아. 석현이는 좋은 사람이니까 놓치지 마.”

“정 안 되면 먼저 같이 살든지. 걔도 널 모른 척하지는 않을 테니까.”

이정은 미간을 문지르며 말했다.

“엄마.”

박수련은 눈살을 찌푸렸다.

“왜?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여자는 결국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야 하는 게 제일 좋아.”

한참 이어진 말에 더는 버틸 수 없던 이정은 일을 핑계로 병원을 나섰다.

휴대폰을 보니 석현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점심을 먹고 집에 데려다 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이정은 잠시 생각하다가 괜찮다고 답했다.

석현이 근무 중이었고 중건과의 일을 더 알리고 싶지 않았다.

이정은 바로 짐을 빼서 다른 곳으로 옮길 생각으로, 택시를 타고 곧장 아파트 단지로 향했다.

이곳은 최근 몇 년 사이 새로 지은 아파트라 그런지 한 층에 한 가구뿐이었다.

집 앞에 도착해 보니 현관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자신의 물건들은 쓰레기처럼 문 앞에 내던져져 있었다.

이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진 이정이 달려갔다.

그때, 나연이 안에서 걸어 나왔다.

사실 이정은 나연을 본 적이 있었다.

5년 전 유학을 떠나기 전, 서문그룹에 들렀을 때였다.

그때 이정은 막 입사한 인턴이었고 첫눈에도 나연이 정말 아름답다고 느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브랜드 로고도 보이지 않는 흰 원피스를 입은 나연은 완전히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그 순간 이정은 알았다.

어른들이 말하던 기품과 분위기가 무엇인지, 사람의 분위기는 살아온 환경이 만든다는 걸.

자신이 아무리 예뻐도 다른 남자들에게는 천박해 보일 뿐이라는 걸.

이정의 물건을 쓰레기 던지듯 바닥에 내던지던 나연은, 여자를 보자 일부러 놀란 척했다.

“오늘 중건이도 없는데... 이정 씨가 여기에는 왜 온 거예요?”

그 말에 이정은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사는 곳이에요. 그리고 지금 던지시는 것도 제 물건이고요.”

나연은 더 놀란 표정을 짓더니 난처한 기색을 띠며 말했다.

“여긴 중건이 나보고 쓰라고 했어요. 안에 있는 건 마음대로 처리해도 된다고 했고요.”

“다 오래되고 값어치도 없어 보여서 버리려던 참이었는데, 이정 씨 물건인 줄 정말 몰랐어요. 미안해요.”

나연이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였는데 말투에는 미안함이 전혀 담기지 않았다.

그런 모습에 이정은 이유 없이 웃음이 났다.

나연에게는 사과조차 사치일 터였고, 손을 더럽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라는 듯한 태도였다.

이에 이정은 표정을 굳힌 채 말했다.

“오늘 이사할 준비하러 왔어요.”

나연은 눈빛이 흔들리며 물었다.

“도와줄까요?”

“그러실 필요 없어요.”

이정은 바닥에 쪼그려 앉아 하나씩 짐을 주웠다.

자신의 물건은 많지 않았기에 캐리어 하나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지난 5년 동안 함께 쓰던 커플템들이지만, 이제 더 이상 가져갈 이유가 없었다.

중건이 떠나는 사람에게 배려조차 없는데, 이정도 과거에 매달릴 필요가 없었다.

안에서는 여전히 물건을 밖으로 던지고 있었는데, 아직 마르지 않은 속옷도 섞여 있었다.

이정은 캐리어를 닫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났다.

나연은 문가에 기댄 채, 이정이 캐리어를 끌고 엘리베이터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며 경멸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휴대폰을 꺼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 지내라고 하신 이 아파트 정말 편해요.”

전화기 너머로 중건의 어머니인 한연숙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면 됐어. 걔가 요즘은 거길 집처럼 쓰더라.]

[그러니 네가 들어가 사는 게 둘 사이에 정을 붙이는 데도 좋을 거야.]

한연숙의 말에 나연의 얼굴에 수줍음이 어렸다.

“중건이는 아직 모르는데 말 안 해도 괜찮을까요?”

[걔랑 무슨 상관이야? 집은 내가 준 건데 걔가 뭐라 하겠어?]

한연숙은 웃으며 덧붙였다.

[네가 잡아먹힐지도 모르겠지만 말이야. 나연아, 넌 내가 인정한 며느리야.]

한편 이정이 엘리베이터를 나와 단지 입구에 막 도착했을 때였다.

그때 하정혁이 다시 이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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