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류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허승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안방으로 향했다.그러나 침실은 텅 빈 채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욕실 문도 닫혀 있었다.하승민은 문 앞에 서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서현, 아직 안 끝났어?”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하승민이 손을 들어 문을 두드리려 했으나 그 순간 욕실 문이 저절로 열렸다.그는 순간 멈칫했다가 안으로 들어갔다.그러나 넓은 욕조는 텅 비어 있었다.이미 오래전에 그녀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어디 간 거지?’하승민이 나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자 기숙사.“아야... 너무 아파. 수아야, 살살 해줘.”지서현은 서원 별장에서 돌아와 여자 기숙사에 있었다.엄수아는 얼음팩으로 그녀의 얼굴을 찜질해 주고 있었는데 지서현이 아파서 신음을 흘리자 그녀는 분노했다.“주지훈 그 짐승 같은 놈! 어떻게 너한테 이렇게 심하게 굴 수가 있어? 지금 어디에 있어? 아니, 그런데 서현아, 너 어떻게 혼자 온 거야?”노크 소리가 들려서 문을 열었을 때 엄수아는 얼굴에 선명한 손자국이 남은 지서현을 보고 경악했다.그녀의 팔과 다리에도 손톱으로 꾹 눌린 자국이 가득했고 폭력을 당한 흔적이
지서현이 핸드폰을 꺼내 하승민의 번호를 찾았지만 쉽사리 전화를 걸지 못했다.정말 예상 밖이었다.‘지유나 말이면 뭐든 다 들어주는 거 아니었나? 그런데도 부탁을 거절했다고?’어젯밤 그녀는 그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나왔다.‘침대 협탁 위에 남긴 그 쪽지는 봤을까?’“서현아, 뭐해? 빨리 하 대표님께 연락해. 이번엔 정말 네 편을 들어줬잖아.”엄수아가 재촉했다.지서현은 망설임 끝에 전화를 걸었다.벨 소리가 울리자 하승민은 느긋하게 전화를 받았다.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숨소리조차 들리
그녀가 없으니 오히려 지예슬이 더 돋보이게 되었다.지예슬은 학생들에게 사인을 해주고 기분 좋게 지서현에게 다가갔다.“지서현, 듣자 하니 너 납치당했다며? 너는 왜 항상 말썽이야? 정말 우리 지씨 가문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구나!”지서현에게 사고가 나도 지씨 가문 사람들의 반응은 언제나 비난과 책망뿐이었다. 그 아무도 그녀를 걱정해 주려 하지 않았다.하지만 지서현은 전혀 화내지 않았다.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는지 오히려 장난스럽게 눈을 깜빡이며 지예슬을 칭찬했다.“내가 집안 망신 좀 시켜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언니 한 명만 있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고우섭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젠장!”그는 지팡이를 들고 막 앞으로 달려가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지서현이 회전하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더니 손에 든 도끼로 단숨에 그를 내려쳤다.게임 속 고우섭의 캐릭터가 그대로 죽어버렸다.말도 안 되게 진짜 한 방에 게임이 끝났다.너무 흥분한 탓에 고우섭의 반응은 하승민의 주의를 끌었다. 하승민은 문서를 보던 시선을 살짝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고우섭은 이를 악물었다.[지서현 씨, 다시 한 판 더.]지서현은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렇게 두 번째 라운드가 시작
지서현이 빠르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하승민은 게임에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그런데 지금 그의 상대는 지서현이었다.그녀와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으니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고우섭은 불안했다.“젠장, 형! 이거 이상한데? 지서현 씨가 감히 형이랑 맞먹을 수 있다고? 형, 제발 정신 똑바로 차려. 이거까지 지면 나 다이아에서 브론즈로 강등된다고!”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대표님, 저택에서 연락이 왔습니다.”조현우가 들어오며 하승민에게 보고했다.대저택
“네가 할머니께 남긴 보양식 처방전이 없어졌어.”하승민의 말에 지서현은 그가 전화를 한 이유를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그녀는 지체 없이 펜을 집어 들었다.“하 대표님, 잠시만요. 지금 다시 적어드릴게요.”그리고 고개를 숙여 처방전을 쓰기 시작했다.그런데 그 순간, 숙인 탓에 하얀 끈나시 아래 부드러운 곡선이 살짝 드러났다.그녀의 가녀린 허리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가늘었지만 그 위쪽은 탄탄하고 둥글게 감싸져 있었다.이런 몸매는 남자를 홀리는 타고난 무기였다.하승민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그는 이미 지서현의
지서현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한 건지도 몰랐다.그저 반사적으로, 손에 든 아이스크림을 하승민에게 내밀었다.“드시겠어요?”하승민은 아이스크림을 한번 보고 다시 그녀의 새하얀 얼굴을 바라보았다.그러다 목소리를 낮추어 지서현에게 되물었다.“뭘 먹을까?”그는 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한 걸까?지서현의 머릿속은 새하얘졌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이 분위기는 아주 위험했다.그녀는 서둘러 이 상황을 끝내기로 했다.“하 대표님, 저... 이제 자야 해요. 먼저 끊을게요!”그리고 손을 뻗어 영상통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엄수아는
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도 마치 따귀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지서현은 하승민을 바라보았다.“하 대표님, 이제 제 말 믿으시겠죠?”그녀의 맑은 두 눈은 영롱하게 빛났고 소문익의 품에 안겨 있는 모습에 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은 먹구름이 낀 것처럼 어두워졌다.‘이 요망한 여자가! 소문익까지 자기 치마폭에 둘러싸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야!’“서현아, 너 쇼핑하러 온 거잖아. 어때? 마음에 드는 원피스 있어?”점원은 곧바로 레이스 원피스를 가져왔다. “이 원피스가 손님께 아주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지서현은 고
소문익이 왔다.지유나 일행은 어제 동연당에서 소문익을 만났었기에 오늘 다시 만나자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소문익은 지서현 옆으로 다가왔다.“서현아, 잠깐 전화 받느라 밖에 나갔었는데 무슨 일 있었어? 뭔가 재밌는 걸 놓친 것 같은데.”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끌어올렸다.“아니. 타이밍 딱 맞춰서 잘 왔어. 다들 내 남자친구인 당신을 보고 싶어 했거든..”지서현은 소문익에게 눈짓했다.소문익은 바로 눈치채고 지서현의 가녀린 어깨에 팔을 둘렀다.“이분들은?”지서현은 한 명씩 소개했다.“이분은 지씨 가문 어르신, 이윤희 씨, 지
지예슬은 곧바로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붉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서현아, 부러워할 것 없어. C신은 내 남자친구야. 우리 곧 결혼할 거라고.”지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재산이 열 배로 늘었다며? 그럼 그 돈은 어디 있어? 그 C신이라는 사람이 언제 준다고 했어?”박경애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그게...”“말 안 했나 보네요. 돈이 들어온 것도 아닌데 C신이 열 배든 백 배든 마음대로 말할 수 있겠죠. 아까도 말했지만 그 C신이라는 사람은 사기꾼이에요. 알아서들 하세요.”지예슬은 곧바로 화를 냈다. 남자친구가 C신이라는 사
하승민의 잘생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누가 준 거야?”지서현은 눈썹을 치켜뜨며 말했다.“남자친구요!”남자친구?하승민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지서현이 전에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이제 그 남자친구가 다시 나타난 것이다.“네 그 돈 많은 남자친구 말이야?”“네. 맞아요.”하승민은 냉소했다.“비싼 차를 몰고 좋은 집에 살게 해주다니 돈 좀 쓰는 모양인데. 해성이 좁은 동네인데, 도대체 네 남자친구가 누군지 감도 안 잡히네.”지서현은 입꼬리를 올렸다.“하 대표님, 내 남자친구가 누군지 모
지서현은 황급히 걸음을 옮겼다.그러나 하승민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지서현, 나한테 할 말 없어?”지서현은 맑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무슨 할 말?”하승민은 입술을 깨물었다.“네가 몰고 다니는 고급 차, 살고 있는 고급 아파트, 다 어디서 난 거야? 누구 돈 쓴 거냐고.”지서현은 가녀린 등을 꼿꼿이 펴고 말했다.“하 대표님, 어쨌든 당신 돈은 안 썼으니까 상관없잖아요. 더는 말씀드릴 게 없네요.”지서현은 가려고 했다. 그러나 하승민의 큰 키는 마치 벽처럼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지서현은 붉은 입술을 살짝
이윤희와 지예슬은 지유나가 바닥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급히 달려가 그녀를 구하려 했다.“당장 유나를 놔줘!”“세 번째 경고입니다. 이제 내보내겠습니다!”결국 지유나, 지예슬, 이윤희는 모두 제성아파트에서 쫓겨났다. 쾅 소리와 함께 제성아파트의 대문이 그들 앞에서 닫혔다.세 사람은 모두 할 말을 잃었다.그들은 이런 수모를 당해 본 적이 없었다. 특히 지유나는 하승민과 함께 다니면서 항상 환대받았는데 이렇게 푸대접을 받고 쫓겨나다니, 생전 처음이었다.지예슬도 화가 났다.“다 서현이 때문이야! 유나야, 도대체 어떻게
이윤희가 말했다.“서현아, 하 대표님 미행 안 했다고 하더니, 결국 여기까지 따라왔잖아!”“너 진짜 무섭다. 승민 오빠가 9층에 사는 것까지 알고 있었어? 너 완전 스토커잖아. 정신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지서현은 하승민을 쳐다보며 물었다.“하승민, 9층에 살아요?”하승민은 901호 문패를 가리켰다.“나 여기 살아.”“아.”지서현은 902호 문 앞으로 가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드르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지유나, 지예슬, 그리고 이윤희는 너무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지서현이 902호에 산다고?정말 제성
‘아니, 그럴 리가?’하승민은 스스로가 우스웠다. 어떻게 지서현을 그 눈부시게 아름다운 동연당 설립자와 같은 사람으로 생각했을까?‘하 대표님, 저 좀 태워다 주시겠어요?'방금 지서현이 차 밖에서 자신을 태워달라고 했었다. 하승민은 웃음이 나왔다. 자기 차가 있으면서 일부러 저런 말을 하다니, 분명 지유나를 약 올리려는 것이었다.자신을 놀리려는 의도도 있었다.지서현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있었다.그때 지유나, 지예슬, 이윤희가 차에 올라탔다. 지유나는 조수석에, 지예슬과 이윤희는 뒷좌석에 앉았다. 하승민은 액셀을 밟았고 롤스로
지서현은 어이가 없었다. 그때 마침 새로 산 차가 도착했다.“난 여기서 차 기다리고 있었어. 이만 가볼게.”“차를 기다려? 택시?”지유나가 웃었다.“서현아, 병원 앞에서 택시 잡기 힘들 텐데?”지서현은 평소에 택시를 타고 다녔기에 지유나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지예슬은 지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서현아, 넌 정말 한심해. 다른 선배들은 다들 집도 있고 차도 있는데, 넌 아직도 택시 타고 다니잖아. 천재 소녀라는 말이 아깝다.”이윤희는 지예슬의 팔을 잡아당겼다.“예슬아, 그만해. 서현이도 불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