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새벽의 공기는 차가웠지만, 병원 복도 끝에서 스며드는 햇살은 따뜻했다.윤지아는 창가에 기대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하얀 김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피어오르며 공기 속으로 녹아들었다.병원은 늘 같은 풍경이었다.기계음, 발자국, 환자의 숨소리.그 모든 익숙한 소리들 속에서도,그녀는 매일 조금씩 다른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다.오늘은 라벤더 정원이 문을 연 지 정확히 15년째 되는 날이었다.그녀는 그 숫자가 믿기지 않았다.처음 이 정원이 생겼을 때만 해도,그저 ;의미 있는 시도' 정도로 여겨졌을 뿐이었다.하지만 지금은 세계 각국의 의사와 연구자들이 이곳을 찾아왔다.병원의 한 구석에 불과했던 정원이 이제는 생명과 회복의 상징이 되었다.“원장님, 이쪽으로 오세요.”젊은 간호사가 그녀를 불렀다.정원 앞에는 새로 심은 라벤더 묘목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그녀가 다가서자 아이들이 줄을 서서 그녀를 바라봤다.병원에서 회복 중인 아이들, 작은 손에 흙이 묻은 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이 꽃 이름 아는 사람?”지아가 물었다.아이들 중 한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라벤더요! 향기 나는 꽃이에요!”“맞아요.”지아는 무릎을 굽혀 아이의 눈높이에 맞췄다.“그런데 이 꽃은 향기만 좋은 게 아니라, 사람 마음도 편하게 만들어줘요.누군가가 그걸 믿고 처음 심었거든요.”“누가요?”또 다른 아이가 물었다.지아는 잠시 미소 지었다.“두 사람이요. 서로를 아끼고, 환자를 사랑했던 사람들.”그녀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정원의 한켠으로 향했다.라벤더 사이에 작은 표석이 있었다.“우리가 함께 있었던 모든 시간은 결국 한 사람의 삶을 지탱하는 향기로 남았다.”-강우혁 & 차수연그 문장을 볼 때마다,지아는 마치 시간의 문을 살짝 열어보는 기분이 들었다.정오가 가까워지자 기자들과 병원 관계자들이 정원에 모였다.오늘은 라벤더 프로젝트의 새로운 확장 계획이 발표되는 날이었다.지아는 연단에 섰다.그녀의 뒤로, 정원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유리창
윤지아는 새벽부터 잠을 이루지 못했다.창문을 열면 라벤더 향이 바람을 타고 들어왔다.익숙한 향이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진하게 느껴졌다.마치 누군가가 다가와 속삭이는 것처럼 오늘은 꼭 와야 한다고, 기다리고 있다고.병원 기념관 한켠에는 라벤더 프로젝트의 기록 전시가 준비되고 있었다.10년 동안 이어온 시간,그 안에 담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그리고 그 모든 시작이 되었던 두 사람.강우혁과 차수연.지아는 조심스레 전시 패널을 정리하고 있었다.손끝에 닿는 오래된 사진,붉은 원으로 표시된 수술 메모,환자들의 감사 편지. 그 속엔 숫자보다도 더 많은 온기가 담겨 있었다.“원장님, 이거… 여기로 옮길까요?”보조 스태프의 목소리에 지아는 고개를 들었다.그가 가리킨 건 유리 프레임 속의 한 장의 사진이었다.라벤더 정원 한가운데에서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두 사람의 모습.“그래요. 제일 앞에 두세요.”지아의 목소리가 잠시 떨렸다.“그 사진이…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게 했으니까요.”행사는 오후 세 시에 시작됐다.대강당 안은 따뜻한 조명으로 가득했다.무대 뒤편의 대형 스크린엔‘라벤더 프로젝트 10주년, 그리고 그 이후’라는 문장이 걸려 있었다.지아는 연단에 올랐다.그녀의 시선은 객석 한가운데,한 칸 비워둔 두 좌석에 잠시 머물렀다.라벤더 모양의 리본이 조용히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오늘 우리는, 두 사람의 이름을 다시 부르기 위해 모였습니다.”지아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들은 의사였지만, 무엇보다 한 사람의 삶을 끝까지 붙잡은 ‘사람’이었습니다.그리고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그 향기를 다시 느낄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영상이 재생됐다. 기록실에서의 인터뷰, 수술실의 긴장된 공기,정원 벤치에서 서로에게 건네던 미소. 사람들은 숨죽여 그 장면을 바라봤다.어떤 이는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지아는 화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자신도 모르게 손끝이 떨렸지만, 그 떨림은 슬픔이 아니라, 감사였다.행사가 끝
병원 옥상 정원은 또 한 번의 계절을 맞았다.라벤더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햇살은 그 위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윤지아는 난간에 기대어 바람에 스치는 잎사귀 소리를 한참 동안 들었다.지난겨울, 병원은 큰 변화를 겪었다.새로운 인공심장 연구팀이 꾸려졌고,라벤더 프로젝트는 국내를 넘어 해외 병원들과 협력 연구로 확대되었다.언제나 그랬듯 지아는 바쁘게 움직였지만, 이상하게도 올해의 봄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그건 아마도… 병원 한켠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원장님, 차트 서명 완료하셨나요?”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문 틈 사이로 고개를 내민 사람은 신입 펠로우, 이현우였다.한때 라벤더 정원의 토양을 바꾸겠다고 나서던 청년.이제는 스스로 수술대에 서는 법을 배워가고 있었다.“네, 들어와요.”지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현우는 파일을 들고 다가와 조심스레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어제 심장외과 팀에서 회의했는데요.라벤더 프로젝트의 신규 케이스 중 한 분이 해외에서 수술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그 병원… 이름이 좀 낯익더라고요.”지아가 고개를 들었다.“어디요?”“서울제중심장센터요. 기록을 보니까… 주치의가 강우혁 교수로 되어 있더라고요.”순간, 공기가 멈췄다.그 이름이 입 안에서 맴도는 동안,시간이 미세하게 뒤로 흘러가는 느낌이었다.“…그래요.”지아는 눈을 깜빡였다.“그럼, 환자분 기록을 다시 검토해요.혹시 그때 남은 데이터를 활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네, 원장님.”현우가 고개를 숙이고 나가자, 지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향했다.멀리서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살짝 스치는 빗줄기가 유리창에 부딪히며 투명한 선을 그렸다.그녀는 이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다시 당신 이름을 듣게 될 줄은 몰랐어요.”며칠 뒤, 지아는 그 환자를 직접 보기로 했다.중년의 남자, 심근 절개 부위의 섬유화가 예상보다 심했고,과거 수술로 이식된 판막 근처엔 작은 혈전이 보였다.그녀는
오전 회진을 마치고도 병동의 공기는 좀처럼 가벼워지지 않았다. 수술 대기 중인 소아 환자의 어머니는 팔짱을 낀 채 창밖만 바라보고, 새로 입원한 중년 남성은 심전도 패치가 꺼질까 봐 손을 가슴에 대고 가만 서 있었다. 윤지아는 노트를 닫아 포켓에 넣고, 차트를 끌어안은 채 숨을 길게 내쉬었다. 라벤더 정원이 병원의 한복판에 만들어진 뒤로, 향기는 분명 사람들의 어깨를 조금은 내려앉게 했지만 두려움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의사는 향기보다 더 정확한 무언가를 내밀어야 한다.“윤 원장님.” 의무기록팀장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아카이브 정리하다가, 이걸 발견했습니다.”얇은 외장하드 하나가 그녀의 손에 건네졌다. 라벨에는 낡은 볼펜 글씨로 두 단어가 쓰여 있었다. 보고. 기록. 뒷면 구석엔 작은 이니셜-K.W.H.와 C.S.Y.지아는 잠깐 손끝에 힘이 빠지는 걸 느꼈다. 강우혁과 차수연이 공동 서명을 올린 병원 자료는 많지 않았다. 대부분의 순간, 둘은 같은 곳을 바라보면서도 각자 자리에서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함께 만든 흔적을 만지는 일은 늘 조심스러웠다. 가느다란 유리잔을 들어 올릴 때처럼.“보안실에서 열람하세요. 영상 파일이라… 용량이 큽니다.” 팀장이 덧붙였다.보안실은 오후 빛이 닿지 않는 복도 끝에 있었다. 문을 닫으니 바깥 소음이 일시에 꺼졌다. 지아는 모니터를 켜고 외장하드를 연결했다. ‘라벤더_프로젝트_프리브리핑’, ‘응급OP_리뷰_내시경캡쳐’, 그리고 마지막에 ‘Two_Seats_Final.mp4’. 두 개의 의자. 정원의 중심에 놓인 그것들. 파일 이름만으로도 목구멍이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재생 버튼을 눌렀다.잡음 섞인 프레임이 잠시 흔들린 뒤, 화면이 또렷해졌다. 기록실의 오래된 조명 아래, 회색 니트와 흰 셔츠의 남자, 그리고 옅은 미소의 여자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카메라가 초점을 잡는 동안, 두 사람의 손이 테이블 아래에서 스치듯 닿았다 떨어지는 게 보였다. 그
햇살이 병원 건물의 유리벽에 부딪혀 반사될 때, 윤지아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오늘은 ‘라벤더 정원’ 개관식이 열리는 날이었다.몇 년의 시간 끝에 완성된 그 공간은 단순한 식물원이나 추모공간이 아니었다.그건 ‘두 사람의 약속’이 물리적인 형태로 세상에 남은, 살아 있는 증거였다.정원 입구에는 아직 봉인된 현판이 하얀 천으로 덮여 있었다.그녀의 시야에 환한 보라빛이 스며들 듯 번졌다.바람에 흩날리는 향기가 익숙했다.라벤더. 언제나 그들이 남긴 이야기를 불러오는 향기.기념식 준비를 마친 스태프들이 분주히 움직였고,언론의 카메라가 세워지며 조명이 켜졌다.지아는 여전히 조용히 서 있었다.그녀의 손에는 오래된 펜 하나가 쥐어져 있었다.차수연이 썼던 펜.잉크는 거의 말라 있었지만, 그녀는 그것을 늘 품고 다녔다.그 펜은 기억의 무게 를 지닌 물건이었다.“윤 원장님, 잠시 후 10분 남았습니다.”보좌관의 목소리가 들렸지만,지아는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푸른 하늘 위로 얇은 구름이 떠 있었고, 그 틈으로 부드러운 빛이 쏟아졌다.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교수님, 대표님… 오늘은 당신들의 약속이 완성되는 날이에요.”정원은 병원 한가운데 자리했다.유리 온실의 형태를 띠고 있었지만,어디서도 볼 수 없는 따뜻한 구조였다.라벤더 화단은 빙 둘러 동그랗게 배치되어 있었고,중앙에는 작은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였다.그 의자는 그들 의 자리였다.의도적으로 이름표는 붙이지 않았다.누구의 자리라 규정하기보단,함께 있었던 사람들의 상징이 되길 바랐기 때문이다.식이 시작되자 병원 관계자들과 언론, 환자 가족들,그리고 오랜 동료들이 자리를 채웠다.지아는 단상 앞에 서서 마이크를 잡았다.“라벤더 정원은, 단순히 한 병원의 상징이 아닙니다.이곳은 누군가를 위해 싸우고, 버티고,그리고 사랑했던 모든 사람의 흔적을 품은 공간입니다.”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하지만 손끝은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지아는 잠시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가을비가 그친 병원 정원에는 낙엽이 절반쯤 물들어 있었다.윤지아는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며칠째 이어지는 회의와 연구 일정 때문에 몸은 지쳤지만, 머릿속은 이상하게 또렷했다.그녀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되뇌었다.끝난 이야기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진행 중일 수 있다.라벤더 프로젝트의 자료를 정리하던 중이었다.기록실 한쪽 서랍, ‘Private’이라 손글씨로 적힌 파일박스를 옮기다 무언가 작은 노트 하나가 떨어졌다.가죽 표지, 모서리의 미세한 균열, 그리고 볼펜으로 눌러 쓴 이름.차수연.그녀는 본능적으로 손끝이 떨렸다.표지를 열자, 안쪽에 잔잔하게 번진 잉크 자국이 있었다.‘201X년 3월, 봄비가 처음 내리던 날부터.’그 문장 하나로 이미 마음 한가운데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했다.지아는 조용히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그 안에는 의료 기록이 아닌, 한 사람의 온전한 감정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오늘은 이상하게 그 사람의 걸음소리가 들리지 않는다.익숙하게 들리던 구두의 리듬이 사라지고 나니 복도는 너무 길다.그가 떠난 게 아니라, 내 하루에서 사라진 것 같다.”“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그 사람과의 대화뿐 아니라내 안의 목소리 하나가 사라지는 일이구나.”지아는 손끝으로 글자 자국을 천천히 따라갔다.잉크가 눌린 자리에 손톱이 걸렸다.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그 필압에서 느껴지는 건 고통보다도 다짐에 가까웠다.다음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나는 여전히 그가 심장 수술 때 쓰던 펜을 사용한다.그 펜은 잉크가 조금씩 새고 있지만, 그 새는 흔적이 마치 그 사람의 목소리 같다.조용히, 하지만 확실하게 내 옆을 스친다.”그녀는 숨을 고르며 다음 장을 넘겼다.종이 한쪽이 반쯤 찢어져 있었고, 거기엔 짧은 문장이 남아 있었다.“나는 아직도 그를 ‘대표님’이라 부를까,아니면, 그가 마지막에 바랐던 대로 우혁 씨라고 불러야 할까.”지아는 속으로 답했다.둘 다 맞아요. 그건 존경과 사랑이 동시에 남아
밤이 내려앉은 병원 본관 앞에는 수십 명의 기자들이 몰려 있었다. 카메라 플래시가 번쩍거리고, “차수연은 어디 있습니까?”라는 질문이 연신 날아들었다. 그 중심에 민도혁이 서 있었다. 완벽하게 맞춘 수트 차림, 눈썹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얼굴. 그는 마치 자신이 정의의 대변자인 듯 미소를 지었다.“차수연 교수는 불과 몇 달 전, 환자를 수술 도중 사망에 이르게 했습니다. 오늘 봉사 현장에서 잠시 보여준 행동은 그 죄를 덮기 위한 쇼에 불과합니다. 병원은 의료사고를 저지른 자를 두 번 다시 수술실에 세울 수 없습니다.
밤이 깊었지만 오피스텔의 불빛은 꺼지지 않았다.우혁은 노트북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된 공기가 방 안에 감돌았다. 그의 눈가엔 피로가 드리워져 있었지만, 손끝은 단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여기… 드디어 연결이 잡혔습니다.”그는 마우스를 움직이며 접속 로그를 확대했다. 수연이 다가와 숨을 죽였다. 화면에는 외부 계정이 남긴 접속 경로가 표시되어 있었다.“병원 본관 서버실, 특정 시각. 그리고 이 접속은 관리자 권한을 가진 계정으로만 가능했습니다. 더구나, 이 계정이 사용된 기기의 고유 번호가 남아
진료가 끝난 후, 지현이 다가와 속삭였다.“대단한 용기네. 이렇게까지 버티다니. 하지만 곧 끝날 거야. 이미 서울에선 네 이름으로 기소 얘기까지 오가고 있어.”수연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지만, 이번엔 곧장 차갑게 맞섰다.“…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에요. 진실은 남아 있습니다. 그게 제가 살아 있는 이유니까.”지현은 비웃듯 미소를 지었지만, 순간적으로 흔들린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오피스텔로 돌아온 저녁, 우혁은 전산망에서 새로운 흔적을 찾아냈다.“여기 보세요. 수술 당시 환자 차트에 접근한 계정이 있습니다. 그
지현의 얼굴이 굳어졌다.“당신 말만으로 충분할 것 같아? 병원 기록, 차트, 동료들의 증언까지 다 있는데?”우혁은 지현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거짓된 기록은 언제든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의 심장은 위조할 수 없죠.”순간, 수연의 눈가가 젖었다. 우혁의 말이 그녀의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아 주고 있었다.그날 밤, 의료팀 숙소. 지현은 동료 몇 명과 함께 비밀리에 서류를 받아 들고 있었다. 서류 안에는 ‘부검 기록’이라 적힌 문건과 함께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이게…” 지현은 눈빛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