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누군가의 사랑을 이어주려는 행동 뒤에는 분명 다른 이유가 숨어 있을 터였다.신시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둘러댔다.“율제시 상황이 복잡하니까 내가 사고라도 당할까 봐 체면까지 내려놓고 진승현 대표를 찾아간 거야.”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면, 정우진이 여전히 자신에게 보상하려 한다는 것이었다.물론 신시아는 이미 끝난 결혼에 그의 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그래?”장건우는 한 번도 신시아와 정우진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은 적이 없었다.선을 지킬 줄 알았고, 두 사람의 관계는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캐물을 만큼 가깝지도 않았다.하지만 이번만큼은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정 대표님은 쉽게 속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만약 사실을 알게 되면 그 결과를 생각해 봤어?”신시아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굳이 깊이 파고들지 않아도 어떤 결과가 기다릴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그래서 오히려 생각하기가 두려웠다.장건우에게는 최대한 빨리 정리하겠다고 대답했지만, 정작 신시아 자신도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다.집에 돌아왔을 때, 그녀의 하얀 얼굴에는 고민이 잔뜩 묻어 있었다.“정 대표님이 또 무슨 말이라도 했어?”김지원은 신시아의 표정만 보고도 정우진과 관련된 일이라는 걸 알아챘다.“아무 일도 없어.”신시아는 억지로 마음을 추스르며 김지원을 향해 미소 지었다.김지원은 매일 빈이를 돌보느라 전보다 훨씬 야위었다.원래는 자유분방하기 그지없던 사람이 매일 집에 갇혀 지내니 눈에 보일 정도로 성질도 거칠어졌다.신시아는 이런 골치 아픈 일까지 말해 김지원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다.김지원이 계속 자신을 쳐다보자 신시아가 한마디를 덧붙였다.“그냥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래. 대체 언제쯤 좀 편해지나 싶어서.”“일단 이리 와서 뭐라도 먹어. 너랑 아이 둘 다 통통하게 살 좀 붙여. 3개월만 더 지나면 너도 해방이잖아.”김지원도 매일 억지로 버티는 중이었다. 빨리 육아 도우미를 구해 아이를 맡기고 싶었다.빈이는 오늘 오후
진승현은 정우진의 자리 옆에 허리를 굽힌 채 서 있었다.“장건우 씨를 제 쪽으로 보내주셨으면 합니다.”정우진이 담담히 말했다.진승현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그는 얼굴빛이 창백해졌다가 붉어지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그, 그게... 신 비서님 때문인가요?”정우진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그 뜻은 너무나 분명했다.장건우가 능력이 뛰어나긴 했어도 정우진이 직접 체면을 내려놓고 찾아와 사람을 달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정 대표님, 어떤 일은 그냥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두는 게 제일 좋지 않겠어요? 두 사람 일에 저희가 굳이 끼어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만...”진승현의 등에는 식은땀이 흘렀다. 그럼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최대한 완곡하게 정우진의 요구를 거절했다.정우진은 그 말속에 다른 뜻이 있다는 걸 알아들었다.“전에 미크로가 율제시에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진 대표님이 건우 씨를 그쪽으로 보내실 줄 알고 건우 씨한테 물어봤는데, 본인이 안 간다고 했어요.”진승현은 말을 마치고 덧붙였다.“어머니가 많이 편찮으셔서 지금 경원에서 치료 중이라 자리를 비울 수가 없다고 했어요.”‘아, 이런 일이 있었구나.’정우진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머리가 복잡해져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진승현은 옆에 선 채 정우진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어 계속 마음을 졸였다.“그럼 됐어요.”한참 뒤 정우진의 얇은 입술에서 짧은 말이 흘러나왔다.진승현은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그런데 막 앉자마자 정우진은 이미 일어서고 있었다.“갑자기 처리할 일이 생각나서 먼저 가봐야겠네요.”진승현은 황급히 따라나가 정우진을 배웅한 뒤 다시 돌아왔다.상 위의 음식에는 손도 대지 않았지만 식욕이 전혀 없었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장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건우 씨, 신시아랑 헤어졌다고 한 거, 나한테 거짓말한 건 아니지?”반대편에서 장건우가 단호하게 대답했다.“대표님, 저는 거짓말하지 않
날짜를 따져보면 신시아가 율제시에 간 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고작 7일인데도 마치 반세기나 떨어져 있었던 것처럼 길게 느껴졌다.화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정우진에게는 서로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그는 마른침을 삼킨 후 낮고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갑자기 후회되네. 널 율제시에 보낸 거.”신시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며 깊게 가라앉은 그의 눈빛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정우진은 몇 초간 그녀를 바라본 뒤 테이블 위의 펜을 집어 들고 천천히 돌렸다.“율제시 상황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좀 복잡해. 네가 감당하기 힘들까 봐 걱정되네.”그의 목소리는 낮고 무거웠다.신시아는 헛기침하며 목을 가다듬은 뒤 천천히 말했다.“정 대표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 안전은 제가 알아서 지킬게요. 이번 일은 이사회에 제가 직접 설명드리겠습니다.”지금 신시아는 율제 지사 상무였기 때문에 작은 문제라도 생기면 이사회에 보고해야 했다.“그럴 필요 없어. 이사회 문제는 내가 처리할게.”정우진은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았다.그는 다른 손으로는 서류를 만지작거리며 제법 여유 있는 모습을 보였지만,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는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최대한 빨리 사람을 보내서 널 돕게 할게.”율제 지사 본부장 자리는 아직 비어 있었다.신시아가 갑작스러운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다른 인력이 함께 가면 좋을 터였다.신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네.”그 뒤로 침묵이 내려앉았다.화상통화는 그대로 이어지고 있었고 특별할 게 없어 보였다.하지만 자세히 보면 두 사람 모두 사소한 동작을 반복하고 있어 분위기가 미묘해졌다.한참 뒤 신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대표님, 회의 계속하시죠.”그녀는 고작 이런 말을 하려고 모두를 내보낼 필요까지 있었나 싶었다.정우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낮게 말했다.“몸 잘 챙겨.”신시아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우진이 문 쪽을 보며 불렀다.“임 비서.”곧바로 회의실 문이 열렸고, 임정현이 임원들을 다시
“며칠 전 고현조 대표님이 한승윤 부장님과 사석에서 한 번 만났습니다. 그 뒤로 다시 만난 적은 없지만, 둘이 몰래 뭔가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해요. 게다가 민여정 여사님까지 자꾸 신 비서님에게 접근하고 있고요. 신 비서님 혼자서 다 상대하기엔 벅찰까 걱정되네요.”신시아는 사업판의 노련한 여우들을 상대해야 하고, 상류층 사모님들까지 신경 써야 했으니 정신없이 바쁠 수밖에 없었다.“미크로 대표와 약속 잡아.”정우진이 손목시계를 내려다봤다.“오늘 저녁.”임정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네?”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정우진은 서류를 들고 회의하러 나가버렸다.“누구를 만나시겠다고요?”임정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정우진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미크로 대표님이라니요? 진승현 대표님을 만나겠다는 거예요? 왜요?”질문을 연달아 쏟아냈지만 대답해 줄 사람은 없었다....신시아가 민여정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곧바로 기사가 떴다.기자는 몰래 찍은 사진과 함께, 신시아가 상류층 사모님들을 포섭해 율제시에서 재계 인맥을 뚫으려 했다고 보도했다.그리고 신시아의 신상도 샅샅이 털렸다. 정우진의 신임을 받는다는 것 외에는 내세울 만한 배경이 전혀 없었고, 사모님들도 그런 수에 넘어갈 리 없다는 내용이었다.결국 신시아가 체면만 구긴 채 라운지에서 쫓기듯 나왔다고 보도했다.기사가 뜨자마자 한승윤의 전화가 걸려 왔다.“신 상무님, 이런 기사까지 나면 본사에 뭐라고 설명하시려고 그러세요?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회사 일은 저희가 알아서 할 테니, 상무님은 그 자리에 조용히 계시는 게 제일 낫다고요.”신시아는 기사를 읽으며 전화를 받았다.좁은 차 안에 한승윤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울렸다.그가 한참 말을 쏟아내고 잠잠해진 뒤에야 신시아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저는 해임될 수는 있어도 일손을 놓을 수는 없어요. 제가 벌인 일은 제가 본사에 직접 설명할 테니 한 부장님께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말을 끝내자마자 신시아는 전화를 끊었다.이번 일이
“결혼하겠다고 약속한 이상 번복하지 않아.”정우진이 힘주어 또박또박 말했다.“하지만 결혼만 생각할 순 없어. 그 이후도 생각해야 하고, 어른들께도 설명할 수 있어야 하니까.”맞은편에 앉은 은유라는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했다. 그녀는 정우진의 말뜻을 알아들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알아. 내가 오빠한테 부족하다는 거...”“정말 알면 협조해. 의사 예약해 뒀으니까 내일 가.”정우진은 명함 한 장을 꺼내 은유라 앞으로 밀었다.은유라가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나... 오빠, 설마 도영이 실력을 못 믿는 거야?”“믿어. 하지만 더 뛰어난 의사가 있을 수도 있지.”정우진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박도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자신에게 은유라를 다른 의사에게 데려가 보라고 한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다고 느꼈다.반박을 허용하지 않는 정우진의 말투에 은유라는 거절할 수 없었다.그가 결혼을 약속했을 때 자신이 거절할 수 없었던 것처럼.은유라는 입술을 살짝 깨물다가, 한참 뒤에 조심스럽게 물었다.“우진 오빠, 아까 질문 하나는 대답 안 했잖아. 오빠는 시아 씨랑 이혼한 거 후회해?”“지금 얘기하는 건 그 문제와 상관없어. 시아와도 무관하고.”정우진은 대답을 피했다.은유라가 목소리를 높였다.“오빠도 피하고 있잖아. 시아 씨만 아니었으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엉망이 되진 않았어. 예전엔 이렇지 않았다고.”정우진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예전의 정우진은 자신을 달래주었고 곁에 있어 주었다.그런데 약혼에서 결혼으로, 분명 관계는 더 가까워지고 있는데 정우진은 오히려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예전처럼 회사에 찾아와 그와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고, 둘이 함께 밥을 먹은 지도 한참 됐다.이젠 가장 기본적인 전화나 문자조차 거의 없었다.“우리가 지금 이렇게 된 데에는 네 책임도 있고 내 책임도 있어. 하지만 시아 책임은 없어.”정우진은 조리 있게 말했다.“네가 무슨 일을 했는지는 네가 제일 잘 알잖아.”은유라는
“왜 찾지 않으세요? 혹시 시아 씨를 잃어버린 가족을 원망하는 거예요?”신시아가 순간 멈칫했다.그때 방 안이 갑자기 한층 밝아졌다. 밖에 나갔던 피부 관리사가 들어온 것이다.민여정은 그제야 정신이 든 듯 입꼬리를 올리며 어색하게 웃었다.“미안해요. 내가 몇 년 전부터 아이를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공익 재단을 후원하고 있거든요. 길을 잃거나 유괴된 아이들을 찾아주는 일이에요. 아이를 잃은 부모들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많이 봐서 그런지 이런 얘기만 들으면 마음이 급해져서 그만... 신시아 씨 부모님도 많이 애타게 찾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한 거예요.”“여사님은 마음이 따뜻한 분이네요.”신시아는 조금 전 들었던 대화를 떠올렸다.민여정이 예전에 여자아이를 버렸다는 이야기였다.진실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모습만 보면 민여정이 자신이 고아라는 사실에 유난히 흥분하는 건 분명했다.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민여정이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젊은 여자가 혼자 힘으로 지금 자리까지 올라오는 게 정말 쉽지 않았을 텐데. 그동안 많이 힘들었죠?”신시아는 가볍게 웃었다.“운이 좋았어요. 좋은 상사를 만났고요.”신시아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정우진의 공이 컸다.“그럼 됐어요. 혼자 잘 살고 있으면 가족은 굳이 찾지 않아도 되죠.”민여정은 다시 누워 피부 관리사에게 팩을 떼어 달라고 했다.신시아는 차를 마시며 기회를 엿보다 휴대폰 알림이 울리자 몸을 일으켰다.정우진에게서 온 문자였다.“여사님, 처리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뵐게요.”민여정은 얼굴에 팩을 하고 있어 대답 대신 손을 살짝 들어 인사했다.신시아는 가방을 들고 몸을 돌려 나갔다. 발소리가 점점 멀어졌다.그녀의 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뒤, 방 안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신시아는 차에 돌아온 뒤에야 휴대폰을 열어봤다. 하지만 정우진이 문자 하나를 취소했다는 흔적만 남아 있었다.그녀는 물음표 하나를 보냈다.그 시각, 창가에 서서 담
신시아는 보육원 출신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케이스였다. 우수한 성적 덕분에 국내 최고 대학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했고 그곳에서 정우진을 만났다.수많은 부잣집 도련님들 사이에서 그는 단연 눈에 띄었다.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그녀의 시선을 단번에 장악한 사람이 바로 정우진이었다.신시아는 지난 2년간의 결혼 생활과 밤마다 나누었던 그 뜨겁던 순간들만으로 평생을 버틸 추억이라 치부하려 했다.그런데 하필 배 속에 아이가 생겨버렸다.세상에 유일하게 남은 혈육을 차마 지울 수는 없었다.정우진이 아이를 빼앗아갈까 봐 두려우면서도 한편으
깊은 밤, 신시아가 갓 태어난 아기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렸다.[드디어 엄마 되었어요. 우리 첫째랍니다!]피드를 올린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반년 전에 이혼한 전남편 정우진이 집 문을 두드렸다.문을 열자 정우진의 침울한 얼굴이 비좁은 방 안의 공기를 싸늘하게 식혔다.신시아는 문고리를 더 세게 잡았다.“무슨 일이에요?”남자는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번쩍이는 새 구두가 낡은 복도식 아파트의 빛바랜 꽃무늬 장판 위를 밟자 그 위화감이 공기를 가르고 들어오는 듯했다.그가 이곳을 찾은 것이 처음은
술자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하선재는 어떻게든 정우진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었다.하지만 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기에 비겁하게도 정우진의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는 차선책을 택했다.예를 들자면 신시아처럼...신시아는 방향을 틀어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이를 눈치챈 하선재가 응대하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쏜살같이 그녀를 따라왔다.신시아가 연회장을 막 빠져나왔을 때, 그는 좁은 구석에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어머 이게 누구야? 신시아 씨? 난 또 잘못 봤나 했네.”정우진은 말수가 적고 냉철한 편이다.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연회장.정우진이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그는 몇몇 상계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응대했다.“우진 오빠.”은유라가 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정우진의 팔이 아주 잠깐 뻣뻣하게 굳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마침 잘 왔어. 인사해, 이분은 전 회장님이야.”은유라는 정우진의 팔에 살며시 몸을 기댄 채 그가 소개하는 상대에게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 회장님, 안녕하세요. 아버님께 익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