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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Author: 인가연
신시아는 자신도 모르게 패딩 자락을 끌어당겨 아직 평평한 배를 가렸다.

“했어요 출근. 올해는 유독 추위를 타네요. 나이를 먹었나 봐요.”

그녀는 자리에 앉으며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제 노트북이 필요하신가요? 그럼 차에서 가져올게요.”

“내 거 써.”

정우진이 노트북을 그녀 앞으로 내밀었다.

잠금 화면에 남녀의 뒷모습이 담긴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띄워져 있었다.

신시아는 한눈에 알아봤다. 남자는 정우진이고 여자의 실루엣을 보아 은유라와 닮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곧장 파일을 열어 기계적으로 회의록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업무에 있어서만큼은 두 사람의 호흡이 여전히 완벽했다.

정우진의 눈짓 한 번에 그녀는 어떤 항목을 강조하고 중점적으로 살펴야 할지 즉각 알아챘다.

또한 그가 가벼운 손짓을 하면 보고를 끊고 다음 순서로 넘겼다.

반년의 공백이 무색할 만큼 찰떡궁합이었다.

어느새 정우진의 미간에 잡혔던 주름이 서서히 펴졌다.

그의 시선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업무가 아닌 신시아에게로 향했다.

딱딱한 오피스룩을 벗어던진 그녀의 얼굴은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젊고 화사한 그 미모는 새삼 압도적이었다.

한때 얇은 이불을 꽉 쥐고 있던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

실내 열기 때문인지 패딩을 벗지 않은 그녀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붉게 상기된 뺨 위로 길고 짙은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신시아는 첫눈에도 예쁘지만, 자세히 볼수록 더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어느덧 정우진은 넋을 잃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화면 너머 상대방의 보고가 끝났음에도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키보드를 두드리던 신시아는 의아한 듯 고개를 들었다가 그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서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몇 자까지 타자를 마친 후 그녀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더우면 벗어. 회의 길어질 테니까.”

그녀의 작은 움직임을 눈치챈 정우진이 한 마디 툭 내뱉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다만 신시아는 찔리는 구석이라도 있는지 좀처럼 옷을 벗지 못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정우진이 다시 그녀를 쳐다봤다. 조명 아래 비친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번들거리고 있었다.

“계속해.”

그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았다.

신시아의 이마에 맺혔던 땀은 어느덧 방울져 뺨을 타고 흘러내려 머리카락까지 적셨다.

덥고 배고픈 데다 속까지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마침내 회의가 끝났다.

신시아는 서둘러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회의록 저장해 뒀습니다. 별일 없으시면 전 이만 가볼게요, 대표님.”

정우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는 이미 서재를 빠져나갔다.

복도 끝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찬 바람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하지만 여전히 뒤틀리는 속을 달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거실을 지나 현관으로 바로 빠져나갈 생각이었으나 거실 너머에서 풍겨오는 음식 냄새가 발목을 잡았다.

평소 좋아하던 생선찌개 냄새였지만 오늘따라 그 비릿한 향이 코끝을 찔러서 구역질이 밀려왔다.

“시아 씨, 회의 끝났어요? 밥이라도 먹고 가요!”

눈치 빠른 정다슬이 그녀를 발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시아가 고개를 저으려는 찰나, 속이 뒤집히며 위액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헛구역질을 쏟아냈다.

“아줌마, 위장약 좀 갖다 주세요.”

정우진이 초조하게 걸어오며 말했다.

어린 시절 보육원에서 끼니를 거르며 생긴 신시아의 고질적인 위장병은 정씨 가문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었다.

정우진의 할아버지 정태석이 직접 지어준 약으로 다스려온 터라 가끔 탈이 나도 약 몇 알이면 금방 괜찮아지곤 했다.

그러나 오늘 이 반응은 위장병이 아닌 입덧이었다.

또한 임산부는 위장약을 먹어서는 안 됐다.

신시아는 서둘러 입을 헹구고 괜찮다고 말하려 고개를 돌렸지만, 다시 풍겨오는 비린내에 또 한 번 주저앉아 구역질했다.

권미희가 다가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두드려주었다.

“속이 너무 비어서 그런가 보다. 위장약 먹고 따뜻한 국물이라도 좀 마시고 가렴.”

“물 좀 마셔요.”

정다슬이 미지근한 물을 한 컵 건넸다.

신시아는 물로 입을 헹구고 한 모금 마셔 울렁거림을 억눌렀다.

“식사 중에 죄송해요. 그냥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그래요. 집에 약 있으니까 가서 먹으면 돼요.”

주방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그중에서도 기현주의 불만 섞인 눈빛이 가장 날카로웠다.

은유라는 어느새 정우진의 팔짱을 낀 채 그와 함께 신시아를 지켜보고 있었다.

“감기인데 왜 토를 해요? 얼굴색이 말이 아니네요. 할아버지께 진맥이라도 한 번 받아봐요.”

정다슬이 거들었다.

정태석의 의술이 대단치 않다고 해도 임신 진맥 정도는 할 수 있었다.

신시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더욱 정중하게 거절했다.

“아니요! 자꾸 할아버지 번거롭게 해드리면 안 되죠. 저 진짜 괜찮아요.”

은유라까지 와 있는 이 자리를 더 이상 망치고 싶지 않았다.

권미희는 그런 신시아를 이해하면서도 지난 2년간 가족처럼 지낸 정을 생각해 그냥 보낼 수가 없었다.

“얘야, 네 할아버지께 한번 보이기만 해. 그래야 이 할미 마음이 편하지 않겠니?”

신시아는 권미희를 향해 간절하게 고개를 저었다. 설령 임신이 아니더라도 은유라가 있는 이 집에서 자신이 주목받는 상황 자체가 불편했다.

참다못한 기현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밥도 제대로 못 먹겠네!”

어느덧 식탁에는 정태석 부자만 남았다.

사실상 식사 분위기는 이미 엉망이 되었고 신시아는 졸지에 그 ‘주범’이 된 꼴이었다.

권미희도 그녀가 진심으로 곤혹스러워하는 것을 보고 결국 한발 물러섰다.

“정말 괜찮겠어?”

“네, 할머니.”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신시아가 억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그럼 조심히 가거라.”

기현주의 따가운 눈총을 더 받게 할 순 없었기에 권미희가 그녀를 보내주었다.

별장을 나서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훅 끼쳐왔다. 이마에 맺혔던 땀방울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었다.

정우진은 집 안에서 창밖으로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화려한 조명으로 가득 찬 저택을 등지고 그녀는 차갑고 어두운 대문 밖을 향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갔다.

마치 뒤에서 무서운 물체라도 쫓아오는 것처럼 다급한 발걸음이었다.

“밥 먹자, 오빠.”

은유라가 그의 팔을 끌며 식탁으로 이끌었다.

정우진은 시선을 거두고 못 이기는 척 그녀를 따라 자리에 앉았다.

기현주가 콧방귀를 뀌더니 다시 화제를 돌려 은유라와 화기애애한 대화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고 정우진이 은유라를 데려다주러 나간 사이, 기현주가 정다슬의 방을 찾았다.

“너 앞으로 신시아랑 아는 척도 하지 마!”

“갑자기 왜요? 친구도 못 사귀어요 난?”

정다슬이 뻔히 알면서도 되물었다.

이에 기현주는 기가 막힌다는 듯 쏘아붙였다.

“몰라서 물어? 너희 오빠랑 유라가 곧 약혼할 텐데 신시아는 이제 우리 집에서 금기어나 다름없어!”

정다슬이 허리를 곧게 폈다.

“오빠가 진짜 그 약혼 한대요?”

“둘이 소꿉친구인데 당연히 해야지 그럼. 한 번만 더 내 말 안 들으면 국물도 없을 줄 알아.”

시어른들은 어쩔 수 없다지만 딸자식만큼은 확실히 휘어잡겠다는 듯 기현주가 엄포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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