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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eur: 인가연
거실에 있던 몇 사람이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위층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정우진의 어머니 기현주가 다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쉰을 바라보는 나이였지만 그녀의 몸매는 30대처럼 완벽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그녀는 빨간 숄 하나만 어깨에 걸친 채 영하 10도에 달하는 바깥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님을 맞으러 나섰다.

눈이 부시던 헤드라이트가 꺼지자 신시아는 비로소 정우진과 함께 차에서 내리는 은유라를 똑똑히 보게 됐다.

평소 신시아 앞에서는 고고하게 거리만 두던 기현주가 은유라에게는 제 팔짱을 흔쾌히 내어주고 있었다.

정우진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트렁크에서 쇼핑백 몇 개를 꺼내더니 두 여자의 인사치레가 끝나기를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그 모든 광경이 신시아의 눈에는 못내 따갑게 박혔다.

그녀는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갑자기 바늘방석에 앉은 듯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상대가 새 연인을 데리고 온 마당에 그녀가 계속 여기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이제 와 자리를 피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꼼짝없이 정면으로 마주쳐야 할 판이었다.

“우진이가 잘 안 챙겨줬니? 왜 이렇게 말랐어?”

기현주의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얘한테 ‘구박’이라도 받아서 살이 빠진 거면 내가 무슨 면목으로 너희 집안 사람들을 마주하겠어?”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와 함께 은유라의 애교 섞인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엄마는 제가 우진 오빠 일을 방해할까 봐 걱정이지, 살이 빠졌는지는 관심도 없으실걸요? 어머님, 우리 어릴 때 산부인과에서 바뀐 거 아니에요? 두 분 다 자기 자식보다 서로의 자식만 더 챙기시잖아요!”

기현주는 그 말에 웃음을 터뜨리며 은유라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즐겁게 이어지던 두 여자의 대화는 거실에 들어서자마자 뚝 끊겼다.

쇼핑백을 들고 뒤따라 들어오던 정우진 역시 신시아를 보자 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구겼다.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거실을 채우고 있던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산산조각이 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뜨린 사람은 오롯이 신시아 한 명뿐이었다.

“어머, 어머님, 집에 손님이 계셨네요?”

은유라는 단번에 신시아를 알아봤다.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운 그녀, 가만히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여자들에게 본능적인 위기감과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얼굴이었다.

‘이러니까 우진 오빠도 결혼을 하지.’

기현주가 아까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 정말로 신시아를 못 본 것인지 아니면 보고도 못 본 척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웃음기가 싹 가시고 불만조로 쏘아붙였다.

“네가 여긴 왜 왔어?”

“새언... 아니 시아 씨 내가 오라고 했어요.”

이때 정다슬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과일 쟁반을 탁자에 툭 내려놓았다.

“왜요? 난 뭐 집에 친구도 마음대로 못 데려와요?”

기현주는 그런 딸아이를 매섭게 노려보더니 고개를 홱 돌렸다.

“다슬이 친구래. 얘는 참, 아무나 집에 막 들인다니까.”

그러고는 은유라의 손을 이끌어 소파에 앉혔다.

정우진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신시아를 몇 번 살피더니 들고 있던 쇼핑백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얘기들 나누세요. 전 올라가서 업무 좀 봐야겠어요.”

그는 곧장 위층으로 올라갔다.

“할머니, 할아버지, 저 지금 막 우진 오빠랑 체로에서 돌아오는 길이에요. 올 때 두 분 선물도 사 왔어요.”

은유라가 일어나 쇼핑백들을 챙겼다.

그녀는 정씨 가문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온 선물들을 차례대로 건넸다.

한편 정다슬은 그녀에게 통 관심이 없었다. 선물을 받아들고는 시큰둥하게 고맙다는 인사만 남기고 대충 옆에 내팽개칠 따름이었다.

정씨 가문의 두 어르신은 예비 손주며느리인 은유라를 마냥 모른 척할 수는 없었기에 잠시 형식적인 안부 인사가 이어졌다.

“역시 두 분 모두 좋아하실 줄 알았어요! 제 안목이 틀리지 않았네요. 앞으로 우진 오빠랑 해외 나갈 일이 많을 텐데 그때마다 좋은 거 더 많이 사 올게요.”

은유라는 남은 쇼핑백 하나를 기현주에게 건넸다.

“이건 아버님 거예요. 어머님께서 대신 전해 주세요!”

기현주는 입이 귀에 걸릴 지경이었다.

“역시 유라가 속이 깊네. 우진이 저 녀석은 매번 나갈 때마다 빈손으로 돌아오더니만...”

정다슬이 피식 웃으며 신시아 곁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전에 언니가 선물 사 왔을 땐 저렇게 웃지도 않더니.”

신시아는 양옆에 내린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집안 좋고 예쁜 데다 말재주까지 있는 은유라는 정우진의 연인이기도 하니 기현주의 사랑을 듬뿍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에 반해 신시아는 살가운 말 한마디 못 하는 데다 출신까지 보잘것없었다.

그녀는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억누르며 정다슬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은 이미 바늘방석에 앉은 상태였다.

적당한 틈을 타 신시아가 얼른 입을 뗐다.

“할머니, 할아버지. 그리고 여사님, 유라 씨, 다들 얘기 나누고 계세요. 전 이만 가볼게요.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그녀는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편 권미희의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서렸다.

“저녁 먹고 가야지.”

“아니요, 또 볼일이 생겨서요, 할머니.”

신시아는 두 어르신께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조금 이르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늘 건강하시고요.”

마음속으로는 그 위에 무거운 ‘안녕’을 덧붙였다.

권미희는 못내 서운해하면서도 정우진이 돌아온 마당에 신시아가 불편해할 것을 알기에 더 붙잡지 못했다.

“다슬아, 네가 좀 배웅해 줘라.”

정다슬이 알겠다며 신시아를 따라나섰다.

“괜찮아요. 그럴 필요 없어요.”

기현주의 안색이 확 일그러지자 그녀는 서둘러 신발을 갈아 신었다. 그런데 이때, 2층 모퉁이에서 정우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시아.”

그 순간, 1층 전체가 싸늘한 정적에 휩싸였다.

신시아는 몸이 확 굳은 채 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보았다.

계단 입구에 선 남자는 검은 셔츠의 깃을 풀어헤치고 여유로우면서도 숨길 수 없는 귀티를 풍기고 있었다.

소파에 앉아 있던 은유라가 입술을 깨물며 신시아와 정우진을 번갈아 쳐다봤다.

“잔업 좀 해. 회의록 작성해 줘야겠어.”

신시아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대표님, 본사 업무에서 손을 뗀 지 오래라 회의 속도를 따라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2층 복도는 불이 꺼져 있어 남자의 얼굴이 어둠 속에 잠겼다.

“잔말 말고 빨리 올라와”

그는 조급한 듯 이 말만 남기고는 서재로 홱 들어갔다.

신시아는 아랫입술을 꼭 깨물었다. 거실에서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두 여자의 불만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올라가야 할지 망설이던 찰나, 정다슬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얼른 올라가요! 안 그러면 오빠가 나 시킨다니까요. 기록도 제대로 못 한다고 구박만 잔뜩 할 거예요.”

가끔 정우진이 집에서 업무를 볼 때면 정다슬이 억지로 불려 가곤 했다.

안 한다고 버틸 수도 없고 못 하면 혼나기 일쑤였다.

그녀는 신시아를 구세주라고 여기며 정우진의 서재 안으로 밀어 넣고는 쾅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아버렸다.

그 소리가 너무 컸는지 정우진이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신시아를 쳐다보았다.

박시한 검은색 패딩에 복슬복슬한 흰색 털모자를 눌러쓰고 굽 없는 단화를 신은 그녀, 예전의 옷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정우진이 기억하는 그녀의 옷차림은 늘 한결같았다. 킬힐에 딱딱한 오피스룩, 아무리 추워도 코트 한 벌이 전부였던 철저한 비즈니스 스타일.

그는 다시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결혼 생활 2년 동안, 쉬는 날에도 그녀가 단화나 패딩 차림을 한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오늘 출근 안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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