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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or: 인가연
신시아가 발걸음을 멈췄다. 숨이 턱 막히는 듯하더니 이내 얼굴이 굳어졌다.

“왜 그래요?”

이에 임정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대표님께 직접 본인 불러 달라고 신청한 거 아니었어요?”

신시아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저 사직서 내러 온 거예요.”

임정현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네? 갑자기 왜요?”

“개인적인 이유예요.”

그녀는 딱 잘라 말하고는 덧붙였다.

“혹시 인사 발령 취소할 수 있을까요?”

“그것 또한 대표님 허락을 받아야죠.”

임정현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신시아는 차오르는 무기력함에 미간을 짚었다.

“연말이라 한창 바쁠 때잖아요. 사표 얘기는 연휴 지나고 다시 하고 일단 가서 짐 정리부터 해요. 오자마자 바로 할 일이 생겼네요. 은유라 씨가 오후에 들어올 때 밀크티 한 잔 사다 달래요.”

“알겠어요.”

임정현의 권유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 챙기러 지사로 향했다.

오후 한 시, 신시아는 정확히 비서실 자리에 앉았다.

짐을 다 정리하고 밀크티 한 잔을 들고서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오후의 햇살이 짙게 내리쬐는 사무실 안, 흰 셔츠 차림의 정우진이 앉아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날렵한 턱선까지, 남자는 차가운 위엄과 귀족적인 기운을 내뿜었다.

한편 은유라는 휴게실 소파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온갖 주전부리가 널브러졌다.

신시아가 들어서자 정우진은 힐끗 쳐다볼 뿐 다시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은유라에게 다가갔다.

“은유라 씨, 주문하신 음료입니다.”

“놔두세요.”

은유라가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밀크티를 내려놓고 신시아는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가 물건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내선 전화가 울렸다.

받아보니 정우진의 낮게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녀는 수중의 물건을 내려놓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정우진이었다.

그는 눈꺼풀을 살짝 들어 올려 은유라 쪽을 보라는 듯 턱짓했다.

신시아는 그 시선을 따라가다가 은유라의 불만 어린 눈동자와 마주쳤다.

“밀크티 왜 따뜻한 거로 사 왔어요?”

“지금 겨울인데 아이스로 원하세요?”

신시아가 조용히 되묻자 은유라는 콧방귀를 뀌었다.

“당연하죠.”

무심코 정우진을 바라봤지만 남자는 미동도 없이 일에만 전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지금 바로 아이스로 다시 사 오겠습니다.”

잠시 후, 그녀가 얼음을 가득 넣은 밀크티를 다시 가져왔지만, 은유라는 좀처럼 건네받지 않고 비아냥거렸다.

“얼음은 적게 넣으랬어요, 많이 넣으랬어요?”

“은유라 씨가 원하시는 대로 해드린 겁니다. 여기요, 드세요.”

신시아가 음료를 내려놓았다.

“이봐!”

말꼬리를 잡힌 은유라가 분한 듯 소리쳤다.

“그럼 가서 감자 칩도 사 와요!”

“감자 칩 말고 더 필요한 건 없으신가요? 한꺼번에 사 오는 게 시간도 절약하고 좋으니까요.”

신시아가 메모지를 꺼내며 담담하게 물었다.

“우진 오빠!”

은유라는 그런 그녀를 힐끗 째려보더니 정우진에게 달려갔다.

“오빠, 쟤 좀 봐.”

그제야 남자가 서류에서 눈을 뗐다. 시계를 확인한 그는 곤란한 기색으로 한숨을 쉬었다.

“오늘 저녁에 연회도 있고 나 지금 처리할 일이 많아. 그만해, 유라야.”

은유라가 눈을 굴리더니 신시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나 쟤랑 드레스 고르러 갈래.”

정우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블랙 카드를 꺼내 신시아에게 건넸다.

“유라 드레스 좀 골라주고 네 것도 한 벌 골라.”

신시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끝내 카드를 받아 들었다.

“알겠습니다.”

평소 정우진과 함께 연회에 참석할 때는 회사 비용으로 의상을 해결했다.

가장 싼 옷이라 해도 몇백만 원은 훌쩍 넘었으니까.

하지만 은유라는 달랐다. 그녀는 경원에서도 가장 비싼 드레스샵을 고집했다.

30분 후, 목적지에 도착해 차를 세웠다.

신시아가 먼저 내려와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이거 들어요.”

파란색과 분홍색이 섞인 가방이 눈앞에 던져졌다. 바로 최신 유행하는 국제 브랜드의 신상품이었다.

신시아는 가방을 받아 들고 은유라의 뒤를 따랐다.

예약해둔 스타일리스트가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은유라 씨!”

은유라가 스타일리스트와 눈을 맞추며 은밀하게 눈짓했다.

이에 스타일리스트는 신시아를 훑어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제일 신상으로 가져와 봐요.”

은유라는 허리를 살짝 꼬며 안으로 들어가 소파에 앉았다.

가게 안에는 여러 사람이 그녀를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드레스를 가져다주는 사람, 메이크업 효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사람, 차를 따라주고 과일을 가져다주는 사람, 거기에 주전부리까지 있었다.

신시아는 가게 안에 걸려있는 화려한 드레스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저렴한 드레스도 수천만 원 대를 호가했다.

그녀가 가격표를 보면서 너무 비싸지 않은 거로 고르려고 하는데 은유라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신 비서, 이리 와요.”

신시아는 살짝 방향을 틀어 은유라에게 다가가서 가방을 전해줬다.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요? 여기 꼼짝 말고 서 있어요.”

은유라는 메이크업 효과 이미지를 훑어보며 고개도 안 든 채 명령을 내렸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 신시아는 가방을 건네주려던 손을 거두고 묵묵히 그녀 뒤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두 시간 동안 은유라는 드레스를 고르고 메이크업을 받는 내내 신시아를 세워두었다.

뭘 할 때마다 ‘거기 서 있어’, ‘움직이지 마’ 등등의 명령을 내던졌다.

다만 신시아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고 근무 시간에 단지 서 있는 거라면 사무실에서 스트레스받는 것보다 나으니까.

한참 후, 은유라가 마침내 모든 걸 마치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여기서 제일 싼 드레스로 가져와 봐요.”

스타일리스트가 피식 웃더니 직원에게 눈짓했다.

잠시 뒤 가져온 드레스는 참담함 그 자체였다. 검은색 바탕에 촌스러운 회색과 주황색 리본이 덕지덕지 달려서 보기 흉하단 말로는 표현조차 안 됐다.

특히 가까이서 보니 알록달록한 리본과 조잡한 박음질이 정말이지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신시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졌다.

“은유라 씨가 얼마나 배려해 주는 줄 아세요? 이 옷 무려 8천4백만 원이에요.”

스타일리스트가 은유라의 드레스를 정리하면서 빈정거렸다.

8천4백만 원이라, 확실히 저렴한 건 아니었다.

신시아는 평생 이렇게 비싼 드레스를 사 본 적이 없었다. 회사에서 전액 부담한다고 해도...

“우진 오빠 돈 쓰는 거니까 내 말 들어야죠. 불만 있으면 직접 사시든가요!”

은유라는 거울에 비친 그녀를 힐긋 쳐다봤다.

본인은 연보라색 드레스에 풀 메이크업까지 받아서 우아하고 아름다울 따름인데 만약 신시아가 저 옷을 입고 옆에 선다면 광대 꼴이 날 게 뻔했다.

“그럼 이걸로 해요!”

은유라는 흡족한 얼굴로 거울 속 제 모습을 쳐다봤다.

“결제해요, 가서.”

카운터에서 드레스 두 벌의 계산서를 가져와 신시아에게 건넸다.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 카드를 꺼내 두 벌의 값을 모두 치렀다.

“혹시 메이크업도 받으시겠어요?”

스타일리스트가 형식적으로 물었다.

“아니요.”

신시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계산을 마친 그녀는 드레스에 은유라의 가방까지 들고 먼저 샵을 나섰다.

등 뒤에서 은유라와 스타일리스트가 주고받는 비웃음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돌아가는 길, 정우진에게 전화가 왔다.

“시간 없으니 바로 호텔로 와.”

“알겠습니다.”

신시아는 차를 돌려 호텔로 향했다.

연회 시작 5분 전, 그녀는 마침내 호텔 앞에 도착했다.

임정현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선뜻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우진 씨는요?”

은유라가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

“거래처 손님이 계셔서 대표님은 먼저 들어가셨어요.”

그는 대답하면서 아직 옷을 갈아입지 않은 신시아를 보고 당황했다.

“신 비서님, 아직 환복 안 했어요?”

신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라 씨 모시고 먼저 들어가세요. 금방 따라갈게요.”

신시아는 드레스를 들고 차에서 내렸다.

호텔 안으로 향하는 은유라는 득의양양하게 그녀를 째려보곤 하이힐 소리를 내며 걸어갔다.

“어떻게 된 거죠?”

임정현은 두 여자 사이에 감도는 심상치 않은 기운에 어리둥절해졌다.

한편 신시아가 고개를 내젓고 나직이 대답했다.

“요즘 감기 기운이 있어서 약을 먹는 중이라 술은 못 마실 것 같아요. 안에서 대표님 의전 부탁드려요.”

그녀와 임정현은 늘 업무 분담이 철저했다. 한쪽은 외부 만남을, 다른 한쪽은 운전을 맡았다.

“알았어요.”

대답을 마친 임정현이 먼저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신시아는 드레스를 흘끗 내려다보고 몇 초간 침묵한 뒤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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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8화

    은유라로서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신시아 배 속의 아이가 정우진의 자식이 아니라면서, 대체 무엇 때문에 그 사실을 애써 숨기려 드는 걸까? 만약 그 아이가 하선재의 핏줄이라면... 설마 하씨 가문의 며느리로 들어가지 못할까 봐 겁이 나서, 일단 몰래 아이를 낳은 뒤 아이를 빌미로 팔자를 고쳐보겠다는 심산인 걸까?’재벌가에서 사생아 스캔들이 나는 것은 가문의 얼굴에 먹칠하는 짓이었기에 대개는 소란을 피하기 위해 조용히 수습하려 들고, 아기는 인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거액의 돈을 쥐여주며 내치기 마련이다.하지만 대기업 재벌들에게는 푼돈에 불과할 그 액수조차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평생 먹고살 걱정 없이 떵떵거릴 수 있는 거금이었다.신시아의 얄팍한 계산속이 뻔히 들여다보였기에 은유라는 그녀가 원하는 대로 순순히 흘러가게 둘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한편, 정우진이 자리를 비우자 업무량은 늘어났지만 신시아의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눈앞에 안 보이니 속이 다 시원했다.하지만 꼭 눈치 없이 초를 치는 불청객이 존재했다.정우진이 은유라를 대동해 해외로 나갔다는 소문이 꼬리를 물고 퍼지자 하선재는 정부 프로젝트를 핑계 삼아 당당하게 백영 그룹 본사로 들이닥쳤다.아무리 그래도 구창 그룹의 대표 자리에 있는 인물이었기에 1층 안내 데스크에서도 무작정 막을 수는 없었고, 결국 임정현에게 다급한 연락이 취해졌다.임정현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사색이 되어 신시아의 자리로 뛰어왔다.“하 대표는 분명히 신 비서님 만나러 오신 겁니다.”신시아는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미처 마음의 준비를 하기도 전에, 비서실 맞은편 엘리베이터 문이 부드럽게 열렸다.연회색 슈트에 튀는 핑크색 셔츠 깃을 풀어헤친 하선재의 모습이 나타났다. 머리는 아주 깔끔하게 빗어 넘겨 제법 그럴듯한 신사처럼 보였다.“신 비서.”하선재가 특유의 매혹적인 눈매를 가늘게 접으며, 신시아를 향해 살살 녹는 듯한 능글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하 대표님 오셨습니까.”임정현은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7화

    정우진은 그 메시지를 신시아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며 아무런 덧붙임 없이 건조하게 말했다.“됐어.”그는 휴대폰을 신시아에게 다시 건네주었다.“그럼 우리 언제 출발해...”수화기 너머로 은유라가 여전히 종알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시아는 가차 없이 통화를 종료해 버렸다.그녀는 오늘 밤 8시 비행편을 선택해 예매를 마친 뒤, 정우진에게 일정표를 전송했다.“유라한테도 한 부 전송해 줘.”정우진은 서류철을 무심하게 넘기며 나직하게 지시했다.신시아는 휴대폰 화면을 조용히 껐다.“은유라 씨는 대표님이 직접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걸 훨씬 좋아할 겁니다.”방금 전 은유라가 자신에게 얼마나 기고만장하고 쌀쌀맞게 굴었는지 정우진도 뻔히 보았을 터였다.그저 은유라가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정우진의 관심 밖이었을 뿐이다.정우진은 찌푸린 미간으로 불쾌함을 뿜어내며 신시아를 노려보았다.“대표님, 정부 프로젝트 건은 이제 마무리 단계라 제 손길이 크게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인센티브 신청 결재 서류는 이미 메일로 발송해 두었습니다.”신시아는 은유라 얘길 굳이 길게 끌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지난 이틀 동안 1년이 10년 같은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지만, 다행히 결과가 무사히 정상으로 나와 안도할 수 있었다.하지만 이번 위기를 겪으면서 그녀는 아기가 제게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았다.그녀는 더 이상 출산 예정일 직전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고 느꼈고, 정우진이 임신 사실을 알아채기 전에 하루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그러기 위해서는 약속된 인센티브를 무사히 손에 넣어 당장의 쪼들리는 수중에 숨통을 틔워야만 했다.정우진은 성과급 지급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늘 시원시원하고 뒤끝이 없었다.게다가 그동안 신시아가 이 일을 위해 얼마나 밤낮없이 고생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비록 프로젝트가 완벽히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성공이 거의 확실시된 만큼, 그는 결재 메일을 확인하자마자 막힘없이 승인해 주었다.신시아는 승인된 메일을 즉시 재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6화

    정우진이 그 자리에 차갑게 버티고 서자, 임정현은 흠칫 놀라며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그는 미안함이 역력한 눈빛으로 신시아를 쳐다보았다. 사석에서야 연애하느라 업무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가볍게 투덜거려도 괜찮았지만, 대놓고 최고 상사인 정우진 앞에서 이런 실언을 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이는 결과적으로 정우진 앞에서 신시아가 사적인 연애에 빠져 일도 팽개친 채 데이트를 다녔다고 은근히 고자질을 한 셈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임정현은 결코 그런 나쁜 의도를 품고 한 말이 아니었다.신시아 역시 그의 당혹감을 눈치채고 있었다.그녀는 정우진과 허공에서 얽힌 시선을 자연스럽게 거두며 서류를 정리했다.“며칠 동안 임 비서님께서 고생 많으셨어요.”“아니에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걸요.”임정현은 얼른 눈치 빠르게 맞받아쳤다.“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해본 말이에요. 생각만큼 그리 바쁘지도 않았어요.”두 사람은 무안한 듯 부지런히 말을 보태며, 조금 전의 가벼운 소란을 어떻게든 어영부영 넘기려 애썼다.정우진은 범접할 수 없는 서늘한 얼굴로 그들에게 다가오더니, 마디가 굵은 손가락 끝으로 신시아의 책상을 툭툭 두드렸다.“잠시 내 방으로 들어오지.”차가운 목소리로 짧은 지시를 내린 정우진은 찬 바람이 부는 뒷모습만 남긴 채 대표실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갔다.“망했다.”임정현의 얼굴이 금세 울상이 되었다.“대표님이 이렇게 타이밍 좋게 들이닥치실 줄 알았으면 입이라도 조심하는 건데.”그도 그럴 것이 정우진은 사적인 감정 때문에 공적인 업무에 지장을 주는 것을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다.신시아는 안절부절못하는 임정현을 다독이며 안심시켰다.“그래 봤자 한 소리 듣고 마는 정도일 거예요. 신경 쓰지 말고 얼른 가서 일 보세요.”그녀는 발길을 돌려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널찍한 대표실 안으로 통창을 통과한 아침 햇살이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빛을 등지고 선 정우진의 입체적이고 뚜렷한 이목구비 아래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체로행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5화

    이와 동시에 지난 며칠 동안 눈가에 가둬두고 애써 꾹 참아왔던 눈물이 봇물 터지듯 왈칵 쏟아져 내렸다.“나, 나 방금 한 말 취소할래!”김지원은 신시아를 품에 와락 껴안으며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히 취소해야지! 우리 아기가 기특하게도 제힘으로 다 이겨낸 거야. 신령님이랑 거래해서 얻은 평안이 아니니까, 아까 했던 약속 안 지켜도 절대 부정 같은 거 안 타!”신시아의 얼굴 위로 마침내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정한 미소가 부드럽게 피어올랐다.“됐다, 이틀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텐데 이따 이모님한테 맛있는 거 잔뜩 해달라고 할 테니까 저녁 든든히 먹고 가. 영양 보충 좀 듬뿍 해 둬야지. 그리고 회사 복귀하는 건 너무 서두르지 마. 나 저번에 방송 복귀한 것도 반응이 꽤 괜찮고, 우리 빈이 영상 올리려고 새로 만든 부계정도 팔로워가 엄청 빠르게 늘고 있거든.”이번 일을 겪으며 김지원은 확실히 깨달았다.이 아기가 신시아에게는 목숨보다 소중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네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언제 들통나든 상관없지만, 처음에야 아무도 그 애가 정우진 자식인 걸 눈치채지 못할 거야. 하지만 아기가 태어나서 만에 하나 정우진이랑 판박이처럼 닮아지면 그때는 감당할 수 없어. 그러니까 출산 직전까지 일하다가 바로 사표 던져. 내가 너 하나쯤은 평생 먹여 살릴 수 있으니까, 몸 풀고 아무 일도 없을 때 그때 다시 회사 구해서 다녀.”신시아 역시 마음속으로 이미 같은 계획을 세우고 있던 참이었다.진행 중인 정부 프로젝트가 끝나면 꽤 두둑한 인센티브를 받을 테니, 그것만 있으면 당분간의 경제적 쪼들림은 가뿐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지원아, 정말 고마워.”그러자 김지원은 쯧 하고 혀를 찼다.“내가 처음 1인 미디어 시작했을 때 돈 한 푼도 못 벌어서 네가 몇 달 동안이나 나 먹여 살려줬잖아. 난 그때 고맙단 소리 한 번도 안 했는데, 넌 무슨 이런 걸로 고맙다고 하냐? 나를 아주 남으로 생각하는 거지?”신시아는 아랫배 위에 가만히 손을 얹은 채 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4화

    “결과 나왔어? 신시아 배 속의 애... 우진 오빠 자식 맞아?”박도영은 투명한 튜브 두 개를 손에 쥔 채, 미동도 없이 그것들을 매만지며 침착하게 대답했다.“맞았으면 좋겠어, 아니었으면 좋겠어?”은유라는 가슴이 까맣게 타들어 갈 것만 같았다.“지금 농담할 기분 아니거든? 그게 내가 바란다고 바뀔 일이야?”박도영은 여유로운 태도로 튜브를 꽂아둔 뒤, 하얀 장갑을 벗어 던졌다.“친자 확인 결과지야. 직접 확인해 봐.”그가 서랍에서 보고서를 꺼내 건네자 은유라는 낚아채듯 받아 들었다.불일치, 친자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선명하게 적혀 있었다.“진짜... 우진 오빠 아이가 아니라고?”은유라는 멍해진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박도영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심드렁하게 말했다.“친자식이 아니라는데, 기뻐해야 하는 거 아니야?”“검사가 잘못됐을 리는 없고?”은유라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그녀는 직감적으로 이 아이가 정우진과 어떻게든 얽혀 있을 거라고 굳게 확신해 왔기 때문이다. 이혼 후 반년이나 지나서 임신했다는 사실도, 최근 두 사람의 행보가 눈물겹도록 결백하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 자체가 이미 은유라의 마음속에 깊게 박힌 가시였다.“신시아한테 말해. 아이에게 심각한 결함이 있어서 지워야 한다고.”은유라는 테이블 위에 결과지를 툭 던져두고 가방을 챙겨 문으로 향했다.순간, 박도영의 눈빛이 순식간에 차갑게 식어 내렸다.“난 의사지 백정이 아니야. 그건 하나의 생명이고, 아무 죄도 없는 생명이라고.”문가에 다다랐던 은유라의 발길이 멈추었다.은유라는 고개를 돌려 박도영을 빤히 바라보더니, 몇 초 뒤 갑자기 헛웃음을 터뜨렸다.“박도영, 너한테 선택권이 있기는 해?”박도영의 눈빛이 점차 매섭게 가라앉았다.“은유라, 그런 얄팍한 수작으로나 남자를 붙잡아 두려고 하다니 참 꼴불견이야. 원한다면 끝까지 가줄게. 난 의사 면허 날아가도 그만이니까, 너도 정우진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213화

    “그래, 이런 뻔한 위로가 전혀 와닿지 않겠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단순한 확률 문제야. 결과가 정상으로 나올 희망이 여전히 훨씬 크다고.”신시아가 깊은 침묵에 빠지자, 김지원은 제 어떤 위로도 그녀의 귀에 닿지 못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난 살면서 단 한 번도 내가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본 적이 없어.”신시아는 가쁘게 떨리는 호흡을 애써 가다듬으며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고 냉정해지려 애썼다.“괜찮아, 지원아. 제일 좋은 결과를 기대하면서 최악의 상황도 담담하게 준비하면 돼.”차라리 울기라도 하면 안아주고 같이 울어주련만, 억지로 강한 척을 해대니 보는 사람 마음에 피눈물이 났다.김지원은 그 모습을 볼수록 가슴 끝이 저릿하게 아려왔다. 가녀리고 고집스러운 그 얼굴에 서린 단호한 눈빛은, 더 이상 위로하지 말라는 소리 없는 아우성과 같았다.참으로 허망한 위로였다.“신시아 씨, 이제 준비되셨으면 들어오시죠.”초록색 무균복으로 갈아입은 박도영이 시술실에서 나와 신시아를 안으로 안내했다.시술실의 밝은 조명은 눈이 시릴 정도로 강렬했고 사방을 메운 무거운 침묵은 가슴을 옥죄어 왔다.침대에 누운 신시아가 상의를 걷어 올리자, 뽀얀 피부 위로 미세하게 부풀어 오른 아랫배가 모습을 드러냈다.“몸이 너무 말랐어요.”박도영은 누워 있으니 한층 더 납작해 보이는 그녀의 배를 보며 걱정스레 말했다.“영양 섭취에 더 공을 들이셔야겠어요.”“네.”신시아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그녀의 극심한 긴장감을 감지한 박도영이 그녀의 팔을 툭툭 가볍게 다독였다.“긴장 푸세요, 별 탈 없을 겁니다.”신시아는 눈을 감고 아랫배 부근에서부터 가느다란 한기가 천천히 번져나가는 것을 느꼈다.두 시간 후, 신시아는 김지원을 따라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며칠 동안은 그냥 회사 쉬어. 정우진한테는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네가 간병해 줘야 한다고 대충 핑계 대고.”김지원은 신시아를 안방으로 데려가 침대에 눕히고 이불을 꼼꼼히 덮어주었다.“그 박도영이라는 의사 실력이 아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48화

    하선재가 몰락하며 위약금을 더 이상 물어줄 수 없게 됐고 이로써 신시아도 백영을 못 떠나게 됐다.그녀의 앳된 얼굴에는 어떤 감정도 숨길 수 없었다.정우진은 날카로운 턱선을 드러내고 혀로 뺨 안쪽을 굴리면서 무척 태연한 척했지만, 눈빛만큼은 폭풍전야처럼 험악했다.“신 비서도 하 대표가 몹시 걱정되는 모양인데 그럼 백영 그룹을 대표해서 병문안 다녀와. 11시 회의 전까지는 돌아와야 해.”신시아는 순간 깨달았다. 하선재와 정우진이 만났고 방금 들었던 녹음 파일도 그들의 대화였다.그렇다면 어젯밤에 일어난 일일까?“왜?”정우진은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9화

    술자리에서 마주칠 때마다 하선재는 어떻게든 정우진에게 시비를 걸려고 들었다.하지만 그의 상대가 될 리 만무하다는 걸 잘 알기에 비겁하게도 정우진의 주변 사람들을 건드리는 차선책을 택했다.예를 들자면 신시아처럼...신시아는 방향을 틀어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이를 눈치챈 하선재가 응대하던 사람들을 밀쳐내고 쏜살같이 그녀를 따라왔다.신시아가 연회장을 막 빠져나왔을 때, 그는 좁은 구석에서 그녀를 가로막았다.“어머 이게 누구야? 신시아 씨? 난 또 잘못 봤나 했네.”정우진은 말수가 적고 냉철한 편이다. 잘생긴 외모에 훤칠한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8화

    연회장.정우진이 발길을 옮기는 곳마다 사람들이 떼를 지어 몰려들었다.그는 몇몇 상계 원로들과 대화를 나누면서도 틈틈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정중히 응대했다.“우진 오빠.”은유라가 그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정우진의 팔이 아주 잠깐 뻣뻣하게 굳었다가 이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부드럽게 풀렸다.“마침 잘 왔어. 인사해, 이분은 전 회장님이야.”은유라는 정우진의 팔에 살며시 몸을 기댄 채 그가 소개하는 상대에게 우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전 회장님, 안녕하세요. 아버님께 익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오늘 이렇게 뵙게 되어

  • 대표님 아이 아니라고요!   제6화

    정다슬은 겉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현주가 방을 나가자마자 그 뒷모습을 향해 입을 삐죽거렸다....한편, 은유라의 손을 잡고 주방으로 향하던 정우진과 서로 밀착해 앉아 있던 두 사람의 잔상이 신시아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차라리 보지나 말걸...’돌아오는 길에서 신시아는 찬 밤바람을 맞으며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 편의점에서 따뜻한 죽 한 그릇을 먹고 나서야 집으로 돌아왔다.이어진 며칠 동안 정우진과 은유라의 결혼 임박 뉴스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정작 신시아를 초조하게 만든 것은 사직서에 대한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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