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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24시간, 계약 밖의 사람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5 19:22:38

“77조를 읽은 사람이 있어.”

도헌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졌다. 세아는 침대 끝에 서서 휴대폰 화면을 내밀고 있었다. 새벽빛이 그의 맨어깨 위로 차갑게 번졌다.

"서린이 보낸 거예요. 민재가 봉투를 가져갔대요."

“……열었겠지. 그 녀석은 열어.”

"조항에 뭐라고 쓰셨어요. 이제 말해 줘요. 읽힌 이상 비밀이 아니잖아요."

도헌은 오래 눈을 감았다. 다시 떴을 때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제77조. 본 조항이 계약 당사자 외 제3자에게 열람된 경우, 계약은 그 시점으로부터 24시간 후 자동 종료된다. 종료 후 갑은 을에게 접근하지 않으며, 을의 가족에 대한 보호 권한 일체를 을에게 이양한다."

세아의 입술이 벌어졌다.

“……접근하지 않는다고요? 당신이?”

"당신 아버지가 쓰게 하셨어. 계약이 새어 나가면 강태성의 칼끝이 당신으로 향할 거라고. 그때는 내가 당신 곁에서 떨어져야 당신이 안전하다고."

"그래서 77일째 밤이 아니라."

"이 조항은 원래 77일째에 읽게 할 생각이었어. 그때쯤이면 당신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이렇게 빨리, 이렇게 읽힐 줄은."

시계는 5시 52분을 가리켰다. 세아가 천천히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24시간이면, 내일 새벽 6시 전까지네요.”

"세아."

"오늘이 마지막이에요. 계약상으로는."

"그래서 보내야 해. 지금이라도 당신을 병원으로 보내고, 나는."

"싫어요."

대답은 짧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세아가 침대 위로 한 무릎을 올렸다. 가운 끈이 느슨하게 풀리며 어깨선이 드러났다. 그녀는 그의 턱을 손끝으로 올렸다.

"계약이 끝나기 전 24시간이 남았어요. 제1조는 밤 10시부터 새벽 6시까지였죠. 그건 틀렸어요."

“……뭐가.”

"오늘은 낮도, 밤도, 전부 당신 거고 내 거예요. 제가 정한 규칙이에요."

도헌의 숨이 목에서 걸렸다.

"세아, 지금 그런 말을 하면."

"하면요?"

“6시 알람이 울리기 전에 내가 당신을 못 보내.”

"안 보내면 되죠."

그녀의 입술이 그의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그날 하루는 이상하게 길고 이상하게 짧았다.

세아는 출근하지 않았다. 도헌은 이사회 일정을 전부 비서실에 넘겼다. 처음으로 낮에 그의 집 거실에 해가 들었고,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서로의 얼굴을 환한 빛 아래서 보았다.

"눈 밑이 덜 어둡네요."

"당신 덕이야."

"그만 말해요. 자꾸 그런 말만 하면."

"하면?"

"저도 무너지니까."

도헌이 식탁에 앉은 세아의 의자를 끌어 자신 쪽으로 돌렸다. 다리 사이에 그녀의 무릎이 닿았다. 그의 손이 가운 자락 아래 맨무릎을 감쌌다.

"오늘은 규칙 하나만 쓸게."

"뭔데요."

"내가 당신을 보는 동안 눈을 피하지 않기."

“……부끄러운 규칙이네요.”

"피하면 벌이야."

"무슨 벌인데요."

그가 그녀의 손목을 끌어당겨 안쪽에 입술을 댔다. 어젯밤의 그 자리였다. 세아의 허리가 의자에서 살짝 들렸다.

"이런 거."

"그건 벌이 아니라 상 같은데요."

"그럼 상으로 해 두지."

식탁 위에 놓인 커피는 식어 갔다. 그의 입술이 팔 안쪽을 따라 올라와 어깨에서 멈췄다. 가운이 한쪽 어깨에서 흘러내렸고, 세아가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창으로 쏟아진 햇살이 두 사람의 그림자를 식탁 위에 길게 눕혔다.

“……여기서요?”

"안 돼?"

"해가 너무 밝아요."

"그래서 좋아."

도헌이 그녀를 식탁 위에 앉혔다. 세아의 손바닥이 차가운 상판을 짚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가운 끈을 한 겹, 두 겹 풀었다. 매듭이 풀릴 때마다 그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과 몸 사이를 오갔다. 눈을 피하지 말라는 규칙대로, 세아는 그 시선을 끝까지 받았다.

“……도헌.”

"응."

"그렇게 보면, 심장이."

"들려."

“……말하지 마요.”

"당신이 말 못 하게 만드는 게 내 일인데."

그가 낮게 웃고 그녀의 무릎 안쪽에 입술을 눌렀다. 입맞춤은 천천히 허벅지를 거슬러 올랐다. 세아가 상판을 움켜쥐었다. 목이 젖혀지고 숨이 끊겼다. 햇빛 속에서 하얀 목선이 떨렸고, 입술 사이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헌은 그 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사람처럼 느리게, 집요하게 그녀를 읽어 내려갔다.

“……이제 저도.”

"아직."

"도헌."

"당신이 내 이름을 그렇게 부를 때까지 기다렸어."

세아의 손이 그의 어깨를 끌어올렸다. 두 입술이 포개지고, 식탁 위의 컵이 쓰러졌다. 그가 그녀를 안아 올려 소파로 옮겼다. 쿠션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녀가 그의 셔츠를 잡아 벗기고, 그가 그녀의 가운을 어깨에서 밀어 내렸다. 피부와 피부가 햇살 속에서 맞닿았다. 살갗이 데워지는 온도에 두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세아."

"네."

"오늘 하루 종일,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러세요.”

"그만두라고 하면."

"제100조."

"그래. 그 말이 나올 때까지."

소파 위에서, 이어 카펫 위에서, 오후의 빛이 기울 때까지 이어졌다. 때로는 느렸고 때로는 서로를 삼킬 듯 급했다. 세아가 그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도헌의 손은 그녀의 허리를 따라 올라와 목덜미를 받쳤다. 그녀가 천천히 움직이자 그의 눈이 감겼다.

"눈 감지 마요."

“……이런 규칙은 내가 만든 건데.”

"제가 가져왔어요."

그가 눈을 떴다. 어두운 눈동자가 그녀를 담았다. 숨이 엉켰다가 풀리고, 이름이 두 번, 세 번 불렸다. 마지막 순간, 세아의 몸이 그의 가슴 위로 무너졌고 그의 팔이 그녀를 부서질 듯 끌어안았다. 방 안에는 해 질 녘 노을과 가쁜 숨소리만 남았다.

밤 11시.

두 사람은 침대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세아의 머리는 그의 팔 위에 있었다. 창밖 도시의 불빛이 천장에 흔들렸다.

"한 가지 물어도 돼요?"

"해."

"계약이 끝나면, 그다음엔요."

“……당신 말대로면 접근 금지지.”

"그건 계약 얘기고요. 당신 얘기를 하고 있어요."

도헌이 한참 말이 없었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칼을 쓸어내렸다.

"나는 당신 곁에 못 있어. 그게 77조고, 당신 아버지가 걸어 둔 조건이야. 당신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그런 조건이 계속 지켜진다고 누가 정했어요?"

"세아."

"계약서는 쓰면 고칠 수 있어요. 제13조도 제가 쓴 거잖아요."

그가 몸을 돌려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변해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직 몰라요. 근데."

세아가 그의 목에 팔을 둘렀다.

"저는 당신이 시킨 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아버지가 시킨 대로도 아니고요."

도헌의 입술이 천천히 올라갔다. 위험하고, 기쁘고, 두려운 웃음이었다.

“……그럼 남은 7시간 동안 뭘 할 건데.”

"남은 7시간 동안은."

세아가 그의 귓가에 입술을 댔다.

"당신이 나를 기억하게 만들 거예요. 계약이 끝나도 지워지지 않게."

그가 숨을 삼켰다. 그녀가 몸을 일으켜 그의 위로 올라앉았다. 달빛 대신 도시의 불빛이 그녀의 어깨와 가슴선을 따라 흘렀다. 그녀의 손이 그의 손목을 붙잡아 머리 위 베개 쪽으로 눌렀다. 깍지가 엮였다. 그녀가 몸을 숙이자 긴 머리카락이 두 사람의 얼굴 사이로 커튼처럼 내려앉았다.

"한 번만 더 물을게요. 나 사랑해요?"

“……제13조.”

“77일째 밤이라고 하셨죠. 그날이 못 오면요?”

도헌의 눈이 흔들렸다. 그녀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입술을 덮었다. 이번 키스는 불이 아니라 약속의 온도였다. 시간이 줄어들수록 서로를 새겨 넣으려는 사람들의 입맞춤이었다. 그의 손이 깍지에서 빠져나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고, 밤은 천천히 깊어졌다.

새벽 5시 40분.

세아는 눈을 떴다. 도헌의 팔 안이었다.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은 계약이 끝나기 20분 전. 그는 아직 자고 있었다. 약 없이, 악몽 없이.

그녀는 조용히 몸을 빼내 서재로 들어갔다. 금고를 열고, 파란 파일의 마지막 장 아래에서 계약서 원본을 꺼냈다. 그리고 제77조 아래, 비어 있던 여백에 펜을 눌러 적었다.

[제77조 부칙. 갑과 을이 서로를 선택한 경우 본 조항은 효력을 잃는다.]

그녀가 서명하려는 순간, 등 뒤의 문이 열렸다.

"그걸 쓰면, 당신 아버지가 걸어 둔 보호가 풀려."

도헌이 문틀에 서 있었다. 눈이 맑았다. 처음부터 깨어 있었던 얼굴이었다.

"알아요."

"강태성이 당신을 노릴 거야."

"알아요."

"그래도 쓸 거야?"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흔들리지 않았다.

"당신이 서명하면요."

시계가 5시 59분을 가리켰다. 도헌이 천천히 걸어와 펜을 받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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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17화. 당신의 피가 아니라, 당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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