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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서명 위에 서명을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10-25 22:07:08

"서명하지 마세요, 대표님."

서재 문이 열렸다. 문턱에 선 남자는 회색 코트 차림에 오른손에 태블릿을 들고 있었다. 세아는 그 얼굴을 알았다. 아버지 곁을 20년 지킨 사람, 최진우 이사였다. 3년 전 사고로 죽었다고 들은 사람이었다.

“……최 이사님?”

"오랜만입니다, 아가씨. 놀라시는 건 나중에 하시고, 지금은 이걸 보셔야 합니다."

그가 태블릿을 책상 위에 세웠다. 화면이 켜지고, 가죽 의자에 앉은 백발의 노인이 나타났다. 강태성 회장이었다. 도헌과 같은 눈매인데 온기가 하나도 없었다.

"아들아. 새벽부터 부산스럽구나."

도헌의 손이 펜 위에서 멈췄다.

"계약서를 고치려는 모양인데, 그 종이는 원본이 아니다. 원본은 3년 전부터 내 금고에 있어. 너희가 쓰는 건 사본에 불과하지."

세아의 심장이 철렁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회장님은 왜 지금 전화를 거셨죠? 사본이라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을 텐데요."

화면 속 노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영리하구나, 한도식의 딸답게."

"사본이 무의미하다면 최 이사님을 이 새벽에 여기 보내실 이유가 없어요. 서명이 무서우신 거죠. 우리가 같은 종이에 이름을 올리는 게."

침묵이 흘렀다. 노인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굳었다. 도헌이 세아를 보았다. 놀라움 뒤로 낮은 웃음이 스며들었다.

“……이게 내가 반한 사람이야, 아버지.”

"도헌, 네가 그 아이 때문에 무엇을 잃는지."

"잃을 건 이미 잃었어요. 3년 전에."

도헌이 펜을 들어 세아가 적은 부칙 아래에 이름을 휘갈겼다. 세아가 그 옆에 자기 이름을 겹쳤다. 두 사람의 서명이 한 줄 위에서 엉켰다. 시계가 정각 6시를 알렸다.

화면 속 강태성이 천천히 몸을 뒤로 젖혔다.

"좋다. 그럼 이것도 보거라."

카메라가 옆으로 돌았다. 병실이었다. 침대에 누운 한도식 회장, 그 곁에 서 있는 여자. 긴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한서린이 그의 어깨 너머로 이쪽을 보고 있었다. 표정이 없었다.

세아의 숨이 멎었다.

"서린 양은 처음부터 내 사람이었다. 아버님은 지금 내 손 안에 계시고, 오늘 밤 열두 시까지 대답을 듣겠다. 한세아, 직접 와서 전부 내려놓아라."

화면이 꺼졌다.

최 이사가 고개를 숙였다. 세아의 귀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도헌이 그 손을 감싸 쥐었다.

"세아, 숨 쉬어."

"서린 씨가…… 아니, 아버지가……"

"오늘 밤 열두 시까지야. 시간이 있어."

“……제가 가야 하나요.”

"우리가 가는 거야."

세아는 그의 눈을 오래 보았다. 두려움 아래서 무언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았다.

"최 이사님, 서린 씨 쪽 병원 배치를 아시죠. 대표님과 함께 계획을 세워 주세요. 저는 준비할 게 있어요."

저녁 9시 50분.

계획은 짜였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림뿐이었다. 도헌은 서재에서 최 이사와 마지막 점검을 끝내고 침실로 돌아왔다. 문을 닫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세아는 창가에 서 있었다. 검은 실크 가운이 맨어깨에서 흘러내리다 걸려 있었다. 머리는 풀려 등을 덮었고, 도시의 불빛이 그 위로 가늘게 번졌다.

"열두 시에 가야 하잖아요."

"응."

"그럼 두 시간 남았네요."

그녀가 돌아섰다. 눈이 붉었지만 울지는 않았다.

"무서워서 그래요. 이 말, 부끄럽지 않게 하려고 지금 해요. 오늘 밤 이후에 제가 어떻게 될지 몰라서.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을, 한 장도 놓치기 싫어요."

도헌이 한 걸음 다가섰다.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허락해 줄래? 오늘은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네.”

"그리고 중간에 멈추고 싶으면."

"제100조. 알아요."

그가 가운 끈 끝을 손가락에 감았다. 당기지 않았다. 그저 쥐고만 있었다.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서 어깨로, 쇄골로, 천천히 내려갔다. 닿지도 않았는데 세아는 피부가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이 시선 때문에 숨이 막혀요."

"눈 피하지 않는 규칙, 아직 유효해."

"알아요."

"그럼 지켜."

끈이 풀렸다. 실크가 허리에서 미끄러져 발치로 떨어지는 소리가 방 안에 길게 남았다. 세아는 눈을 피하지 않았다. 도헌이 그 앞에서 한 번, 깊게 숨을 들이켰다.

“……예쁘다는 말로는 부족해.”

"그럼 말고, 보여 줘요."

그가 그녀를 번쩍 안아 침대에 눕혔다. 시트가 서늘하게 등에 닿았다. 그의 입술이 이마, 눈썹, 눈가의 눈물 자국을 지나 천천히 내려왔다. 목을 지나 쇄골 위에서 오래 머물렀다. 그가 낮게 속삭였다.

"여기, 어제 내가 남긴 자국이 아직 있네."

“……지우지 마요.”

"지우기는. 위에 하나 더 얹을 거야."

그의 입술이 같은 자리에 눌렸다. 아프지 않게, 그러나 확실하게. 세아의 손이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갔다. 가슴 사이의 얕은 숨, 갈비뼈의 선, 배 위로 이어지는 입술이 지나간 곳마다 불이 번졌다. 그녀의 허리가 시트에서 떠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도헌, 나…… 이러다."

"알아. 천천히."

"말로만 천천히 하지 말고요."

“……정말, 당신.”

그가 웃음을 흘리다 숨을 삼켰다. 다음 순간 속도가 달라졌다. 손이 허벅지 안쪽을 따라 오르고, 입술은 그녀의 입술을 되찾아 깊이 물었다. 서로의 숨이 한 호흡이 되도록 입을 맞추며 그는 그녀의 이름을 반복했다. 세아의 손톱이 그의 등을 파고들었다. 어둠 속에서 몸이 맞물렸고, 첫 번째 파도가 그녀를 덮쳤을 때 입에서는 이름 대신 끊어진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 떠."

“……못 해요, 지금은.”

"떠. 나 봐. 오늘은 전부 봐야 해."

세아가 가까스로 눈을 떴다. 눈물이 맺힌 눈이 그의 눈과 마주쳤다. 땀에 젖은 이마, 흐트러진 숨, 억누르고 있는 얼굴. 그가 그녀 안에서 서서히 움직이는 동안 둘은 시선을 놓지 않았다. 느린 리듬이 점점 깊어지고, 때로는 멈추고, 때로는 이름이 목에서 부서졌다. 세아의 다리가 그의 허리를 감았고, 그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시트 위에서 깍지로 눌렀다.

"세아, 나…… 당신을 놓지 않을 거야."

“……알아요.”

"열두 시가 지나도, 아버님을 되찾아도."

“…….”

"당신이 나를 죽이러 온 사람이어도. 그래도 놓지 않아."

그 말에 마지막 방어선이 부서졌다. 세아가 그의 목을 끌어안고 얼굴을 묻었다. 두 사람의 몸이 같은 떨림 위에서 무너졌다. 긴 침묵 뒤에 방에는 가쁜 숨과 심장 소리만 남았다.

밤 11시 20분.

세아는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누워 있었다. 도헌의 손이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창밖의 불빛이 천장에서 흔들렸다.

"하나만 약속해 줘."

"뭐든지요."

"오늘 밤, 내가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거야. 그건 당신을 지키려는 거니까."

“……그럼 저도 하나만요.”

세아가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제가 안 된다고 해도, 끝까지 제 편이어야 해요. 그건 저를 믿는 거니까."

도헌의 눈빛이 가라앉았다가 환해졌다. 그가 이마를 맞대고 낮게 말했다.

"약속할게. 제13조 위에, 지금부터는 내 이름으로."

“……그 조항, 이제 의미가 없잖아요. 우린 이미.”

"그러니까 고쳐 쓰는 거야."

그가 협탁 위 펜을 집어 세아의 손바닥 위에 글씨를 적었다. 잉크가 살갗 위에서 서늘했다.

[제13조. 먼저 마음을 준 쪽이 이긴다.]

세아가 소리 내어 웃다가 눈가가 젖었다.

“……그럼 우리 둘 다 이긴 거네요.”

"그래. 이 싸움은 우리가 이겨야 해."

벽시계가 11시 40분을 가리켰다. 도헌이 먼저 일어나 셔츠를 걸쳤다. 세아도 일어서서 거울 앞에 섰다. 그가 뒤에서 그녀의 머리를 묶어 주며 목덜미에 입술을 짧게 눌렀다.

"가자."

"네."

문고리를 잡는 순간, 도헌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한서린. 두 사람이 동시에 화면을 보았다. 메시지는 한 줄이었다.

[병원으로 오지 마세요. 그건 함정이 아니라, 두 번째 함정입니다. 진짜는 지금 두 분이 계신 그 집이에요.]

세아가 고개를 들었다. 어디선가 현관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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