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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제5조, 서로를 가장 먼저 의심하라

Author: 유니버쓰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1-04 18:51:20
세아는 밴 쪽으로 반 걸음을 내딛다가 멈췄다.

"세아 언니. 빨리 타요. 시간 없어요."

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억양도, 숨을 들이켜는 간격도 조금 전과 똑같았다. 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은 같은 말을 같은 숨으로 두 번 하지 못한다.

"……녹음이네."

그녀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구두 소리가 대리석을 찢듯이 달려왔다. 회전문이 거칠게 돌았다. 도헌이었다. 재킷은 풀어헤쳐지고 넥타이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로비에서 보여 준 얼음 같은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

"세아!"

"서준, 연기는."

"끝났어. 연기는 끝났다고."

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밴 뒷문이 완전히 열리고 두 개의 팔이 튀어나왔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세아의 코트 자락을 낚아챘다. 도헌이 그 손목을 비틀어 쳐 냈지만, 다른 손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두 사람은 엉킨 채 밴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문이 쾅 닫히고 잠금 소리가 울렸다. 밴이 급발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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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6화. 합의는 입맞춤으로

    세아는 전화를 끊고 한참 어둠 속에 앉아 있었다.혼자 정리하고 싶다는 생각이 목까지 올라왔다. 이전의 자신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옆에서 자는 남자의 어깨를 흔들었다."서준. 일어나 봐요.""……응.""강태성이 전화했어요. 보석 심문이 내일 아침으로 앞당겨졌고, 제 18퍼센트와 아버님이 살아 계신 사실을 맞바꾸자고요."도헌의 눈이 한 번에 맑아졌다. 그가 상체를 일으키자 시트가 허리께로 흘러내렸다. 세아의 시선이 아주 잠깐 거기 머물렀다가 돌아왔다."혼자 들었어?""네. 근데 혼자 안 정하기로 했잖아요."도헌의 입가가 천천히 올라갔다."……배웠네.""배운 건 서준한테요.""그럼 작전 회의부터 하자.""하는 김에 규칙도 정해요.""무슨 규칙."세아가 이불 위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눈이 장난기를 머금고 있었다."합의할 때마다 입맞춤으로 도장을 찍는 거예요. 한 가지 정하면 한 번.""서류에는 서명이고, 우리는 키스?""갑의 명령이에요."도헌이 웃음을 터뜨렸다. 낮고 즐거운 웃음이었다."받아들이지.""첫 번째. 보석 심문에는 제가 나가요. 서준은 나가지 않고.""반대야.""그럼 합의 실패네요.""……나도 같이 간다. 단, 방청석 맨 뒤.""좋아요, 그건 합의."세아가 몸을 기울여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도장처럼 짧았다. 도헌이 아쉬운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그게 다야?""하나 정할 때마다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두 번째는 내가 정해도 돼?""뭔데요.""아버지는 내가 직접 모셔 올 때까지 최 이사님과 함께 안가에 두기.""합의."이번에는 도헌이 먼저 그녀의 턱을 끌어올려 입을 맞췄다. 도장이 조금 길어졌다. 세아의 손이 그의 가슴에 얹혔다."세 번째.""이번엔 제가요. 강태성이 어떻게 옥상의 일을 알았는지 찾을 때까지, 우리는 둘 다 서로의 휴대폰을 지켜요.""서로의 것?""네. 서준 건 제가, 제 건 서준이.""……그건 위험한 조항인데.""왜요.""당신 휴대폰을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5화. 옥상 위의 죽은 사람

    정오 직전, 옛 한진정밀 본사 옥상.바람이 차가웠다. 세아와 도헌, 그리고 서윤이 계단 끝의 철문을 밀고 나서자 낡은 난간 너머로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옥상 한가운데에 한도식 회장이 서 있었다. 환자복이 아니라 짙은 회색 코트 차림이었다. 지팡이를 짚지 않았다. 등은 곧게 서 있었다."아버지.""왔구나."세아는 달려가려다 멈췄다. 아버지의 두 다리가 아무렇지 않게 땅을 딛고 있었다. 한 회장이 쓴웃음을 지었다."3년을 누워 있다 보니 일어서는 법을 잊을까 봐, 석 달 전부터 몰래 걷는 연습을 했다. 네 어머니만 알았지.""저한테는 왜.""오늘 한 번에 말하려고 아껴 뒀다."한 회장이 난간 위에 놓인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검은 몸통에 금빛 로고, 한진정밀의 이름이 햇빛 아래 반짝였다. 그가 서윤을 돌아보았다."서윤아. 이리 오너라."서윤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한 회장이 만년필 뚜껑 쪽을 그녀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속삭이듯 말했다."네가 어릴 때 은서가 자주 불러 주던 자장가. 그 첫 소절이면 된다.""……그걸 아세요?""은서가 내게도 불러 준 노래다."서윤이 숨을 삼켰다. 눈을 감고 아주 낮게 노래를 불렀다. 가사는 없고 선율만 있는 짧은 소리였다. 만년필 몸통에서 작은 기계음이 울렸다. 딸깍. 뚜껑 아래 숨겨진 틈이 열렸다. 안에는 은색 마이크로 칩 하나가 들어 있었다."이게.""한진정밀의 마지막 비밀이다. 태성그룹 창업주의 유언 원본이 이 안에 담겨 있다. 강태성이 숨기려 한 것이지."도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유언의 내용이 뭡니까.""후계자의 이름이다."한 회장의 시선이 도헌의 얼굴에 닿았다."창업주가 지목한 사람은 강태성이 아니었다. 그 위의 장남, 강태호였다.""……제 아버지.""그리고 그 장남이 죽었다고 알려진 건 23년 전 교통사고 때문이었지."도헌의 얼굴이 굳었다. 세아는 그의 손을 잡았다. 그 손이 아주 조금 떨렸다."그 사고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오늘 모두 말하겠다. 그런데 그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4화. 두 번째 딸에게

    아침 7시, 병원 휴게실.서윤은 봉투를 두 손으로 받았다. 겉에 적힌 자기 이름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세아와 도헌이 맞은편에 앉아 기다렸다. 최 이사는 문 쪽에 서 있었다. 밤새 의심을 받은 사람의 어깨였다. 금고를 연 사람은 한도식이었다는 게 밝혀졌지만, 최 이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윤 곁을 지켰다."열어 봐도 돼요?""당신 편지예요."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봉투를 뜯었다. 종이가 한 장 나왔다. 왼손으로 눌러 쓴 글씨가 단정하게 이어져 있었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읽기 시작했다.[서윤에게. 너를 처음 본 건 스물여덟 해 전, 은서가 품에 갓난아이를 안고 내 집 문을 두드리던 밤이었다. 나는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묻지 않았다. 다만 이 아이는 오늘부터 내 딸이라고 말했다. 세아에게는 숨겼다. 네게도 숨겼다. 네가 태어난 곳을 아는 순간 너는 그 사람의 아이가 될까 봐 무서웠다. 호적에 올린 이름은 한서윤이다. 은서가 네게 준 성은 지켜 주지 못했지만, 네가 이름을 고르는 날이 오면 어느 쪽이든 따르겠다.]서윤의 어깨가 떨렸다. 편지를 든 손이 종이 끝을 구겼다가 급히 펴기를 반복했다. 세아는 말없이 일어나 그녀 옆에 앉았다. 서윤이 고개를 들었다. 눈이 붉었다."저, 평생 성이 두 개인 줄 몰랐어요.""저도 이제 알았어요.""언니라고 불러도 돼요?""이미 그렇게 부르고 있잖아요."서윤이 웃다가 울었다. 세아가 그 어깨를 안았다. 도헌이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문 앞의 최 이사가 안경을 벗고 눈가를 훔쳤다.편지의 마지막 장은 한참 뒤에야 읽혔다.[만년필 속에는 한진정밀의 마지막 비밀이 들어 있다. 그것을 여는 열쇠는 세아가 아니라 서윤, 네 목소리다.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날, 한진정밀 옛 본사 옥상에서 기다리겠다. 둘이 함께 오너라. —도식]"제 목소리요?"서윤이 눈을 깜박였다."음성 인식 잠금장치일 거예요."도헌이 낮게 말했다."한진정밀은 원래 정밀 부품 회사예요. 옛날 방식으로는 만들 수 없는 장치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3화. 금고를 연 사람

    세아가 휴대폰을 내려놓기도 전에 도헌이 눈을 떴다."……무슨 일이야.""집 금고요. 누가 열었대요."화면을 본 도헌의 얼굴에서 졸음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이불을 걷고 일어나 셔츠를 집었다. 세아도 따라 일어섰다. 손끝이 아직 차가웠다."번호를 아는 사람이 또 있다는 거예요.""내가 정한 번호는 당신 아버지 생신이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아.""몇 명이요.""어머님, 회장님, 나, 그리고 당신.""그리고 최 이사님도요. 아버지 생신을 20년 넘게 챙기셨으니까."도헌이 단추를 채우던 손을 멈췄다. 두 사람의 시선이 어두운 방 안에서 마주쳤다. 방금까지 믿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믿음이 이렇게 쉽게 흔들린다는 것이 가장 서늘했다."가 보자. 가서 보면 알아."새벽 3시 40분, 도시로 내려가는 국도.도헌이 직접 운전했다.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가르고 지나갔다. 세아는 조수석에서 창밖을 보다가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내려다보았다. 떨리고 있었다. 도헌이 운전대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손을 뻗어 그 손을 감쌌다."차가워.""긴장해서 그래요.""데워 줄게."그가 그녀의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아주 짧았는데도 따뜻한 숨이 살갗 위에 오래 남았다. 세아의 숨이 얕아졌다. 이런 순간에도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 우스웠고, 동시에 위안이 되었다."서준, 앞 봐요.""보고 있어.""입술은 손등에 있는데요.""눈은 앞에 있잖아."그가 낮게 웃었다. 그 손이 그녀의 손가락 사이로 들어와 깍지를 엮었다. 그렇게 잡힌 채로 차는 새벽의 도로를 달렸다.도헌의 집은 어두웠다. 현관문은 잠겨 있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서재 문이 열려 있었고, 금고 앞에 민재가 서 있었다. 그가 돌아보며 고개를 저었다."문은 안 부서졌어. 번호로 열었어. 그리고 이거."민재가 금고 안쪽을 가리켰다. 비어 있었다. 만년필이 놓여 있던 선반 위에는 접힌 종이 한 장만 남아 있었다. 도헌이 그것을 집어 펼쳤다. 세아가 어깨 너머로 읽었다.낯익은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2화. 갑이 된 비서

    언덕 위 저택의 거실에는 장작 난로가 타고 있었다.세아는 현관을 지나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소파와 의자마다 사람이 앉아 있었다. 서윤, 최 이사, 서린, 민재, 그리고 한쪽 벽에 기대 서 있는 박지윤까지. 지금까지 세아의 곁에서 의심과 도움이 번갈아 오가던 얼굴들이 한 방 안에 다 모여 있었다. 모두 놀라지 않은 얼굴이었다."……다들 알고 있었어요?""아니요."서윤이 먼저 대답했다. 목소리가 조금 굳어 있었다."저는 오늘 오후에야 여기로 불려 왔어요. 언니가 밴에 타기 직전에 녹음을 틀어 달라는 부탁만 받았고요. 이유는 못 들었어요.""저도요."서린이 팔짱을 낀 채 말했다."저는 대표님 약혼자 역할이나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저도 판 위의 한 조각이었네요."은서가 난로 옆 의자에 앉았다. 불빛이 그녀의 옆얼굴 위에서 흔들렸다. 도헌이 세아 앞으로 반 걸음 나서며 물었다."어머님. 이제 설명해 주세요. 왜 이렇게까지.""앉아라. 길지 않을 거다."세아와 도헌이 나란히 소파에 앉았다. 은서가 가죽 계약서를 무릎 위에 올렸다."강태성은 지금 구치소에 있지만, 닷새 뒤 보석 심문이 열려. 그의 변호사는 28년 전의 계약서를 법정에 낼 거야. 거기 제0조가 있으니까. 서윤은 그 조항에 따라 강태성의 소유가 된다는 주장이지.""그건 말이 안 되는 조항이잖아요.""법은 말이 안 되는 계약도 서명이 있으면 한동안은 효력이 있다고 본단다. 그래서 그 효력을 없앨 방법을 20년 동안 찾았어."은서가 계약서의 한 페이지를 펼쳤다. 낡은 종이가 아니라 새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문장의 형식은 오래전 서류와 똑같았다.[제99조. 본 계약의 갑은 을의 딸이 선택한 사람으로 교체될 수 있다.]세아의 눈이 커졌다."그건.""내가 28년 전에 몰래 넣은 조항이야. 강태성은 이 계약서의 모든 장을 읽지 않았어. 읽은 사람은 자기 비서가 이렇게까지 준비할 줄 몰랐으니까. 그의 서재 금고 속 원본에도 이 조항이 남아 있을 거다.""그럼 제가

  • 대표님, 야간 특약은 100일입니다   31화. 제5조, 서로를 가장 먼저 의심하라

    세아는 밴 쪽으로 반 걸음을 내딛다가 멈췄다."세아 언니. 빨리 타요. 시간 없어요."같은 목소리가 한 번 더 흘러나왔다. 억양도, 숨을 들이켜는 간격도 조금 전과 똑같았다. 세아의 눈이 가늘어졌다. 사람은 같은 말을 같은 숨으로 두 번 하지 못한다."……녹음이네."그녀가 뒤로 물러서려는 순간, 등 뒤에서 구두 소리가 대리석을 찢듯이 달려왔다. 회전문이 거칠게 돌았다. 도헌이었다. 재킷은 풀어헤쳐지고 넥타이는 어디론가 사라진 채였다. 로비에서 보여 준 얼음 같은 얼굴은 흔적도 없었다."세아!""서준, 연기는.""끝났어. 연기는 끝났다고."그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아 자기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 순간 밴 뒷문이 완전히 열리고 두 개의 팔이 튀어나왔다. 검은 장갑을 낀 손이 세아의 코트 자락을 낚아챘다. 도헌이 그 손목을 비틀어 쳐 냈지만, 다른 손이 그의 어깨를 밀었다. 두 사람은 엉킨 채 밴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문이 쾅 닫히고 잠금 소리가 울렸다. 밴이 급발진했다.어둠이었다. 창문은 검게 칠해져 있었고, 천장에서 푸른 비상등 하나만 희미하게 번졌다. 세아는 도헌의 가슴 위에 엎어진 채였다. 그의 팔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다친 데 없어?""없어요. 서준은.""없어. 팔이 조금.""조금이요?""조금 많이."도헌이 낮게 웃다가 숨을 삼켰다. 세아가 그의 소매를 걷자 팔뚝에 길게 쓸린 자국이 보였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그의 팔을 쥐었다. 밴은 어딘가로 계속 달렸다. 운전석과 뒷좌석 사이는 철판으로 막혀 있었다.그때 천장 한쪽에서 작은 화면이 켜졌다. 얼굴은 없었다. 검은 화면 위에 흰 글씨만 떠올랐다.[환영합니다. 제5조를 읽을 시간입니다.]글씨가 사라지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계로 한 번 거른, 성별도 나이도 알 수 없는 소리였다."두 분의 연기는 훌륭했습니다. 로비에서 계약서를 찢던 순간, 대표님의 눈이 흔들리는 것까지. 그래서 제5조를 먼저 알려 드립니다."화면에 문장이 떠올랐다.[제5조.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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