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들고 다시 서재로 돌아갔다.임구택은 그릇을 씻고 주방까지 깨끗이 치운 후 거실에 잠시 앉아 있었다. 그러다 한참 후 일어나 서재로 다가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나 갈게. 걱정 마, 요 며칠 사이로 다 끝날 거야."책상 앞에 앉은 소희는 문 밖의 나지막한 소리를 들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곧 문밖의 발자국 소리는 점점 멀어졌고 집안이 다시 조용해졌다.소희는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온몸의 힘이 다 빨려나간 느낌이 들었다.......다음 날, GK 측은 연예인 이현과의 계약을 일방적으로 해지한다고 통고를 냈다. 그러면서 오늘부로 이현은 더 이상 GK 측의 모델이 아니거니와 앞으로도 영원히 계약을 맺지 않을 거라고 의사를 똑똑히 밝혔다.GK의 결정에 이현뿐만 아니라 많은 동업자들도 어안이 벙벙해졌다.남자친구와 절친의 "배신"으로 인해 많은 팬과 네티즌의 동정, 그리고 지지를 얻어낸 이현은 지금이야말로 화제 중심의 공중파 인물로 되어 많은 브랜드, 심지어 업계 감독들이 앞다투어 가면서 이현과 합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번 기회를 빌려 이현 팬들의 지지를 얻으려고.그런데 GK는 오히려 이현과의 계약을 해지하겠다고 의사를 밝혔으니,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었다.게다가 GK는 이현이 찍은 첫 번째 대형 광고 브랜드로 이현에게 많은 인지도와 인기를 더해주었고 또 몇 년 동안 꾸준히 작업해 왔는데 갑자기 이현이 제일 잘 나가고 있을 때 계약을 해지한다니, 다들 이해할 수가 없었다.이에 팬들은 곧 다시 GK를 인터넷 폭력 속으로 끌어들였다. 그들은 GK의 흑역사까지 파내면서 GK 측이 이유 없이 계약을 해지하고 신용을 지키지 않았다고, 인성이 바닥난 소희를 동조하고 있다고 호되게 질책했다.나중에 기자들이 GK로 몰려드는 바람에 하영은 어쩔 수 없이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게 되었다. 하영은 전혀 찔린 곳이 없는 사람마냥 당당하게 대답했다."저희 GK 측은 이현 씨가 신용과 인성 방면
몸에 알맞은 양복을 차려입은 임구택이 고개를 돌려 기자를 향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현 씨가 나의 여자친구라는 걸 인정한 적이 없었습니다. 약혼에 관한 일은 더욱 사실무근이고. 그러니 더 이상 사실도 아닌 소문을 퍼뜨려 나의 정상적인 생활에 영향을 주지 마시죠."기자들이 임구택의 대답에 순간 어리둥절했다. 그러다 그중의 한 기자가 분개해서 다시 물었다."임 대표님, 대표님과 이현 씨의 일은 만천하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한사코 부인하고 있는 건 설마 이현 씨를 농락하시고 버린 행위에 구실을 찾고 있는 게 아닙니까?"임구택이 차가운 눈빛으로 물음을 제기한 기자를 쳐다보았다."나와 이현 씨가 언제 공개석상에서 우리가 연인이라고 밝힌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연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었습니까? 만천하가 다 알고 있다고요? 그건 당신들 같은 양심 없는 기자들이 이상한 사진을 찍어 없는 사실까지 만들어내면서 벌인 일들이 아닌가요?"임구택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감히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묻어있어 기자들로 하여금 등골이 서늘하여 할 말까지 잃게 했다.그런데 한 여기자가 두려움을 짓누르고 물었다."임 대표님, 정말로 이현 씨와 사귀어 본 적이 없습니까?""한 번도 없습니다, 단지 회사의 행사에 함께 참석했을 뿐. 예전에 해명하지 않은 건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해서였는데 지금 여러 분들의 발언이 이미 나의 생활에 부득이한 피해를 가져다주었습니다. 만약 또 누군가가 유언비어를 날조했다간 난 법으로 그 사람이 다시는 입을 열지 못하게 할 겁니다."한 무리의 기자들이 서로를 쳐다보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했다. 사실 그들은 이현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러 온 건데 이렇게 임구택의 꾸지람을 들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임구택은 더 이상 대꾸하고 싶지 않아 몸을 돌려 차에 오르려 했다.그런데 또 한 기자가 단념하지 않고 물었다."임 대표님, 정말 이현 씨 좋아한 적이 없
미연이 듣더니 깜짝 놀라 얼른 이현을 달랬다."그래, 안 물어볼게. 그러니까 울지 마, 현이야. 진정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우리 어서 실검을 내리고 열기를 낮추자. 그러고 나서 네가 공식 계정에 올라 팬들의 정서를 달래."이현이 평정심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네."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공식 계정에 글을 올렸다. 하지만 현재 컨디션이 몹시 안 좋아 냉정하게 사고할 수 없으니 시간을 조금만 더 달라고 팬들에게 양해를 구했을 뿐 임구택과의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그리고 이현이 올린 글에 팬들은 더욱 마음이 아파 다시 이현을 수호하기 시작했다.같은 시각, 노명성 회사의 홍보팀 팀원이 성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연희 아가씨, 이현 쪽 사람들이 스스로 열기를 낮추고 있습니다.]임구택의 인터뷰 영상은 성연희도 진작에 봤었다. 그래서 눈알을 한 번 돌리더니 냉소하며 입을 열었다."열기를 올리고 싶으면 올리고 내리고 싶으면 내려? 인터넷이 아주 그들 손아귀에 있는 줄 알지? 당장 열기를 다시 올려. 사람을 사든, 실검을 사든, 모든 방법을 써서라도 그 일을 다시 실검에 올려. 실검 순위가 두 번째로 밀려나기라도 했다간 너희들 전부 꺼져야 할 거야."홍보팀은 자신들의 실력이 부족한 것 때문에 이현 팬들에게 여론 통제권이 빼앗긴 것도 모자라 주도권마저 빼앗기게 되었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뭐라 하지도 못하고 필사적으로 다시 이현의 일을 실검으로 올렸다.그리고 실검이 철수되기는커녕 오히려 다시 1위로 올랐다는 걸 발견한 미연은 당황하여 직원에게 당장 누가 뒤에서 조작하고 있는지를 알아보라고 했다.‘소희, 분명 우리가 선심을 써서 손을 뗐는데 대체 뭘 하려는 거야?’‘죽고 싶어 환장을 하고 있네!’미연은 화난 나머지 사람을 시켜 계속 여론을 조종하고 소희한테 더러운 물을 끼얹게 했다.하지만 앞서 중립적인 태도를 취했던 네티즌들이 이때 분분히 나서 임구택과 이현 사건의 전말을 냉정하게 분석하기 위해 많은 사진과 이전 뉴스를 검색
이정남의 장편 글은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의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현의 팬들은 분분히 나서 이정남이 시비를 전도하여 일부로 중점을 혼돈시킨다며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또 이현의 인기를 이용하여 유명해지고 싶어서 그런 거라며 한마디 덧붙이기까지 했다.다행히도 그 와중에 대부분의 네티즌들은 이성적인 태도로 사진 속 이현의 모습과 현재 이현의 모습을 비교해 보았고, 이현의 이목구비가 확실히 많이 달라졌다는 걸 발견하게 되었다.눈은 더 커졌고 코는 더 오똑해진 게 점점 소희를 닮아가고 있었다.반대로 소희의 모습은 여전히 그대로 변하지 않았다.그러니 대체 누가 성형했는지에 대해 더는 논쟁할 가치가 없었다.하지만 여전히 포기하려 하지 않는 이현의 팬들은 이정남이 분명 사진에 손댔을 거라고, 이현은 원래부터 예쁘게 생겼다며 억지까지 부렸다.이에 곧 한 네티즌이 당시 이현이 주 감독님 영화에 출연했을 시 찍힌 스틸 컷을 공개하여 이현 팬들의 입장을 반박했고, 팬들은 그제야 할 말이 없어졌다.소희가 성형했다는 게 모함인 것으로 결론이 났으니 다른 일도 참작해야 한다는 게 네티즌들의 태도였다.대체 누가 뒤에서 소희를 모함한 거지?만약 이정남이라는 스태프가 한 말이 사실이라면, 설마 주범이 정말로 이현인 건가?하지만 네티즌들은 바로 이현이 주범일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현은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 배우로서 소희 같은 일개의 디자이너를 겨눌 가치가 없었으니까.그러나 이현이 기자들의 인터뷰를 받을 때 말끝마다 소희가 자신의 외모를 부러워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소희가 이현의 모습대로 성형했을 거라고 착각하게 한 건 사실이었다.그 점만으로도 네티즌들은 이현이 그녀의 팬들이 말하는 것처럼 솔직하지 않다는 건 확실히 알게 되었다. 더군다나 많은 네티즌들이 또 이현이 전에 킹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기자들 앞에서 킹이 직접 자신을 위해 드레스를 디자인했다고 자랑했다가 바로 들킨 일을 들추어내는 바람에 대중들의 공격방향이 다른 곳으로 기울이
특히 인터뷰를 받을 때 기자에게 소희가 자신의 모습을 본떠 성형했다고 암시하는 말과 동영상이 다시 들춰지면서 네티즌들은 분분히 이현이가 여우라며 욕설을 퍼부었다.심지어 이현의 공식 계정으로 가서 질책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분명히 그가 소희 얼굴을 본떠 성형했으면서 왜 사실을 전도하여 소희를 사지로 몰아넣었냐고, 자신이 한 일때문에 저녁에 악몽을 꾸는 게 두렵지 않냐고.많은 댓글 중 이현과 미연의 핸드폰을 해킹한 ‘묵언’의 행위가 틀린 거라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사건이 거듭되는 반전을 겪으며 결국 이현만이 당황함에 빠지게 되었다.그는 일이 이렇게 빨리 반전을 맞이하게 될 줄은 몰랐다. 미연의 핸드폰을 해킹한 것도 모자라 심지어 두 사람의 통화 내용까지 몰래 녹음한 자가 있었다니.현재 매일 수많은 사람이 이현에게 전화가 오고 주소도 노출되는 바람에 아래층에는 매일 그녀의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팬들로 에워싸여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 집에만 박혀 있는 채 인터넷에 오르지도 못하고 전화도 받을 담이 없이 극도로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물론 이현에게 있어 이건 단지 시작일 뿐이며, 그녀를 지옥으로 끌어내릴 최후의 공격은 하루 후에 나타났다.전반 사건에서 제일 볼품없었던 작은 조연, 류 조감독이 갑자기 자신의 공식 계정에 올라 그와 이현의 관계를 폭로했다.그는 자신과 이현이 연인 사이라고, 소희를 모함한 것도 이현이 자신에게 시킨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면서 요 며칠 소희가 인터넷 폭력을 당하고 있는 모습에 양심의 가택을 느끼고 진실을 털어놓기로 결정한 거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하지만 이현의 일부 팬들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고 류 조감독의 공식 계정에 댓글을 달아 류 조감독이 주제도 모르고 감히 이현을 넘보려 하는 두꺼비라고, 이현의 인기를 이용하기 위해 이제야 나타나 이현한테 돌을 던지는 나쁜 사람이라고 욕설을 난발했다.이현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누구나 밟을 수 있는 존재는 아니다.이에 류 조감독은 자신이
임구택이 덤덤하게 입을 열었다.[내가 경고했을 텐데, 소희한테 접근하지 말라고.]"어찌 되었건 내가 구택 씨를 도왔었잖아요! 구택 씨도 나에게 보답하겠다고 했고."이현의 목이 쉰 질책에 임구택이 냉소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그래서, 내가 보답하지 않았나? 모든 행사나 작품은 내가 전부 허진더러 가장 좋은 거로 안배해 줘라고 했고, 모든 접대 장소도 내가 사람을 시켜 막아줬어. 그래서 지금의 넌 무명 배우에서 일류 스타로 진급하며 대박 났는데 뭐가 불만인 거지? 네가 나를 속여 네 생일 파티에 참석하게 한 것도 모자라 일부러 소희 앞에서 자랑한 거에 대해서도 난 참았어. 그리고 정중히 경고했지, 소희를 건들지 말라고. 하지만 네가 듣지 않았으니, 날 탓할 수는 없는 거지?]"그렇긴 하지만......"임구택이 소희를 건들지 말라고 경고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후에 그녀가 여민을 이용하여 소희를 모함했을 때 임구택은 분명 그녀가 한 짓이라는 걸 발견했으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현은 당연히 임구택이 소희에 대한 감정이 식었기에 자신의 행위를 방임하는 줄 알고 심지어 임구택의 마음을 떠보고 얻기 위해 점점 지나치게 소희를 대했던 건데, 임구택이 그녀를 류 조감독에게 선물해 주고서야 그녀는 자신이 줄곧 임구택의 뜻을 잘못 추측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하지만 이미 늦었다."나 알겠다!"이현이 눈물을 흘리며 절망에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임구택, 당신 일부러 그런 거 맞지? 당신은 나를 이용하여 소희의 마음을 떠보려고 고의로 잘못된 신호를 주었어. 내가 소희를 괴롭혀야만 당신이 소희를 접근하고 보호할 수 있으니까. 난 처음부터 당신한테 이용당하고 있었어!"이현은 마침내 모든 걸 알게 되었다.임구택의 마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희한테 가 있었다.그가 한 모든 짓도 소희를 만회하기 위해서였고.임구택이 나지막하게 웃으며 이현을 비웃었다.[아니, 네가 너무 탐욕스러워 자제할 줄 몰라서 그런 거야. 난 처음부터 분명 너에게 똑
이현의 자살 뉴스로 그녀와 소희 사이의 일은 드디어 서서히 식어가기 시작했고, 소희도 운수로에서 다시 경원주택단지로 돌아가게 되었다.그녀의 집 밖에 쌓여있었던 쓰레기와 화환 등은 이미 깨끗이 정리되었을 뿐만 아니라 백합 몇 다발이나 놓여있었고, 카드에는 미안함이 담긴 말들이 쓰여 있었다.전에 인터넷에서 그녀를 욕했던 네티즌들이 보내온 것인 듯했다.소희는 기분이 좋아져 백합을 들고 집으로 들어갔다.그리고 마침 청아의 전화가 걸려왔다.[어서 아래층으로 내려와. 내가 맛있는 음식들을 엄청 많이 만들었거든, 너를 위해 축하파티 열려고!]"곧 내려갈게!"소희는 가방을 내려놓고 백합을 꽃병에 꽂은 후에야 몸을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요 며칠간의 일을 거쳐 네티즌들도 반성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본 게 반드시 진실인 거는 아니니 독립적인 사유와 사상을 가져야지 인터넷상의 일부 유언비어에 이성까지 잃어가면서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마구 폭언을 날려서는 안 된다고.그러면서 네티즌들은 약속이나 한 듯 소희가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할 수 있게끔 소희에게 더 이상 관심을 주지 않았다.미안한 마음 때문이든, 잘못을 뉘우치고 싶은 마음 때문이든, 방해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지지였다.그리고 이틀 후, 소희는 구은서의 전화를 받게 된다.구은서가 부드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어쩐지 나와 손 잡으려 하지 않더라니. 진작에 이현을 상대할 계획이 있었네? 이현을 이렇게 철저하게 끌어내리다니, 역시 대단해.]"네 앞가림이나 잘해. 나쁜 마음은 될수록 적게 가지고, 이현처럼 되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소희의 경고에 구은서가 냉소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내 지금의 처지가 이현보다 많이 좋은 거 같아? 사랑도 잃고, 명원이도 너 때문에 나와 절교하고, 사업도 곤두박질치고. 소희야, 나한테 아직도 더 잃을 게 남았다고 생각해?]"이현의 병문안을 한 번 가봐. 그럼 네가 지금 이현보다 얼마나 더 행복한지 알게 될 거야."소희는 구은서와 더 이상
이정남이 듣더니 웃음을 참지 못했다."제가 한 번 소희에게 물어볼게요.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품지 마시고요. 소희가 얼굴을 알리는 걸 제일 싫어해요. 전에 주 감독님께서도 소희의 외모가 마음에 들어 얼굴을 알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고 했지만 소희가 거절했거든요.""정말이야?"이 감독은 아직도 명성과 이익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여인이 있을 거라는 걸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당연하죠!"이정남이 엄청 진지하게 대답했다.하지만 이 감독은 여전히 포기하고 싶지 않은 기세였다."그래도 한번 해 보고 싶어. 내가 당분간 배역을 선정하지 않을 테니 정남 씨가 먼저 소희 씨를 잘 설득해 줘. 정 안 되면 내가 직접 찾아가서 설득할 거야.""소희가 동의하지 않는 일은 하느님이 와도 소용없을 건데."이정남이 웃으며 말했다."알았어요, 제가 일단 한 번 물어보긴 할게요.""부탁해!"이 감독의 성의에 이정남은 너무 오래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아 그날로 소희를 경원 주택단지 맞은편에 있는 바비큐 가게로 불러냈다.소희가 매운 음식을 좋아한다는 걸 알고 이정남은 특히 소희를 위해 매운 것들만 가득 주문하고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이현에 대해 언급하게 되었다.이정남은 고개를 들어 단숨에 맥주 한 잔을 원샷하고는 이현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가라앉지 않은 듯 분개해서 입을 열었다."다들 연예계가 복잡한 곳이라고, 아무리 좋은 사람이 발을 들여도 결국엔 껍질까지 발려진다고는 하지만 이현은 겨우 발을 들인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잖아. 2년 만에 저렇게 귀신으로 변하다니!"소희가 가재의 껍질을 천천히 벗기며 입을 열었다."사람이 변하는 과정엔 필연적으로 흔적이 남아있게 되어있어요. 다만 쉽게 발견하지 못했을 뿐.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이현이 변해가고 있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현은 이미 변해있었고, 그게 우리에겐 갑작스럽게 느껴졌을 뿐이겠죠."이정남이 갑자기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눈살을 찌푸렸다."네 말이 맞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
“정말 못됐어요. 그런데도 난, 이렇게 좋아하니까.”유진은 코끝을 훌쩍이며 속삭이듯 말하자, 은정의 눈빛이 짙게 가라앉았고, 유진을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유진은 흐느낌 속에 물었다.“그래도 또 떠날 거예요?”“안 떠나.”은정은 마치 유진의 몸이 자기의 일부라도 된 것처럼 꼭 끌어안았다.유진은 입술을 꾹 다물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도 입가엔 참을 수 없이 번지는 미소가 피어올랐다.멀찍이서 둘을 바라보던 소희는 마침내 안도한 듯 미소를 지었고,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돌아섰다.은정은 티켓 환불을 마치고, 유진의 손을 꼭 잡고 공항 로비를 빠져나왔다.그때 소희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유진이는 맡길게. 잘 달래줘. 난 먼저 갈게.]은정은 묵직한 음성으로 대답했다.“소희, 정말 고마워.”[혹시 집안 문제,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해.]은정은 원래의 냉정한 눈빛을 되찾으며, 대답했다.“아니, 내 일은 내가 해결할게.”[그래.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해. 임씨 집안 쪽 설득도 내가 도와줄 수 있어.]은정은 낮게 웃었다.“혼자 힘으로 안 되면 그때 부탁할게.”전화를 끊은 뒤, 유진이 옆에서 물었다.“소희, 갔어요?”“응. 우리 집에 가자.”은정은 다시 유진의 손을 꼭 잡았다.유진은 그날 회사에 가지 않고, 전화를 걸어 휴가를 냈다. 이경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문을 열고 들어선 은정은 유진을 번쩍 안아 들고 그대로 입을 맞췄다.유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고,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세게 은정을 끌어안고 입맞춤에 응했다.유진의 반응은 은정을 더욱 자극했고, 입술은 불꽃처럼 뜨거웠다. 은정은 강렬함과 부드러움을 오가며 끊임없이 유진의 반응을 확인했고, 만족할 만한 대답을 얻었을 때에야 숨을 고르며 입술을 떼었다.유진은 숨을 헐떡이며 눈을 반쯤 감고 있었다.“언제 기억난 거야?”은정은 유진의 입술 위에서 낮게 물었다.유진의 커다란 눈동자엔 얇은 안개 같은 물기가 맺혀 있었고, 눈가엔 눈물 자국이 남아 붉
“나쁜 놈!”유진은 이를 악물고 욕설을 내뱉으며,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그대로 뛰쳐나갔다.허둥지둥 엘리베이터를 내려가던 중, 예상치 못하게 1층 현관 앞에서 막 차에서 내리는 소희와 마주쳤다.유진은 달려가 소희를 끌어안으며, 눈물로 목소리가 떨렸다.“소희야. 그 사람, 갔어.”소희는 차가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손을 들어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며 침착하게 말했다.“지금쯤 공항 도착했을 거야. 얼른 차 타. 우리가 가서 막자.”유진은 울먹이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응.”차에 올라탄 후, 소희는 아침 출근길 교통체증을 피해 가능한 한 빠른 길로 달렸다. 조수석에 앉은 유진은 여전히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소희는 유진을 스치듯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두려워하지 마. 이번엔, 걔가 지구 반대편까지 도망친다 해도 내가 꼭 데려올게.”유진은 이를 악물며 눈물 맺힌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응.”공항에 도착하자, 소희는 시계를 확인했다.“지금쯤이면 막 보안 검색대 들어갔을 거야. 넌 안으로 들어가. 난 밖에서 기다릴게.”유진은 급히 고개를 끄덕이며,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항 안을 정신없이 뛰어다녔다.탑승 게이트 앞, 마침내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토록 익숙하고, 아프도록 그리운 구은정의 뒷모습을 발견했다.너무 긴장한 탓일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은정이 거의 들어가려던 순간, 유진은 겨우 목을 눌러 뜨거운 한마디를 토해냈다.“서인!”이에 은정의 발걸음이 멈췄고, 순간 고개를 홱 돌렸다. 사람들 사이 너머로, 유진이 서 있었다.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그 순간, 시간이 멈춘 듯했다. 지나가는 사람들, 소음, 움직임. 모든 게 멀어지고, 과거와 현재가 한꺼번에 겹쳤다.처음 만났던 순간. 잃어버린 가방을 찾아 건네주던 은정의 등.“정말 대단해.”감탄하던 유진의 눈빛. 차가웠던 은정의 반응. 하지만 그녀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은정이 궁금했고, 따랐고, 그렇게 샤브샤브집에서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었다.유진은
방연하는 어이없다는 듯 여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지금 진심이에요? 머리 괜찮아?”여진구는 연하를 째려보았다. 연하는 주변의 예쁘게 꾸며진 꽃길과 풍선을 둘러보며 부러움 섞인 말투로 말했다.“이거 진짜 예쁘네요. 나도 나중에 이런 대접 한번 받아볼 수 있을까요?”“너한테 고백할 남자가 이런 것도 못 하면, 내가 대신 해줄게.”진구는 시원하게 말하자, 연하는 헛웃음을 지으며 받아쳤다.“미리 감사 인사드릴게요, 여진구 사장님.”그 시각, 유진은 집에 돌아왔지만 마음은 여전히 뒤숭숭했고, 계속 뭔가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그날 밤은 뒤척이기만 하다가, 새벽이 되자 일찍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침 7시가 되자, 임유민이 방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문에 기대선 그는 느슨하게 말했다.“누나, 이번 주 금요일 우리 학교 축구 경기 있어. 내가 수비수로 나가는데, 학교에서 가족 참관 받는대. 올래?”유진은 고개를 들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좋지. 꼭 응원하러 갈게.”유민은 그녀가 짐을 싸는 걸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근데 누나, 짐은 왜 싸?”유진은 노트북을 가방에 넣으며 말했다.“이젠 다시 이경 아파트로 돌아가려고.”유민은 조금 놀랐다.“안 돌아가겠다고 하지 않았어?”유진은 눈을 내리깔며 담담하게 대답했다.“가고 싶어졌어.”유민은 문에 기댄 채 웃으며 중얼거렸다.“역시 내 예상이 맞았네. 근데 이번에는 그렇게 바보처럼 굴지 마.”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뭐라고?”이에 유민은 씩 웃었다.“엄마는 아침 일찍 나갔고, 할머니한테는 꼭 인사하고 가. 안 그러면 또 가출했다고 난리 나실걸.”유진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내가 집에 없을 땐, 네가 좀 더 착하게 굴어. 할머니 기분 잘 맞춰 드리고.”유민은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말했다.“그건 숙모한테나 하라고.”유진은 참지 못하고 푸흐 웃음을 터뜨렸다. 짐을 정리한 후, 운전기사에게 짐을 차에 실어달라 부탁하고 자신은 할머니에게 인사드리
유진은 은정이 차를 타고 떠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나서야 다시 호텔 위층으로 돌아갔다. 혹시나 여씨 집안 사람들이 경찰에 신고할까 봐 대비해야 했다.라운지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흩어졌고, 유진이 그 안으로 들어섰을 때, 여씨 집안의 두 명의 며느리가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셋째네는 평소에 그렇게 거칠게 굴더니, 오늘 자기 아들이 그렇게 당했는데도 조용하네?”다른 여성이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들었는데 인후가 아가씨를 모욕해서 그렇게 된 거라더라고요. 이 일, 임씨 쪽이 알게 되면 여인후 가만두지 않을걸요?”“그래서였구나! 근데 때린 사람이 누군데?”“그건 잘 모르겠어요.”유진은 고개를 돌려 벽에 기대었다. 그 순간, 조금 전 은정의 어두운 눈빛과 먹먹한 표정이 머릿속을 스쳤고, 가슴이 다시 시리게 아파왔다.그때 여진구가 메시지를 보내오자, 유진은 핸드백을 챙겨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유진아!”호텔 정원에서 진구가 유진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다가왔다. 그는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꺼내려 했지만 유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선배!”이에 진구는 웃으며 말했다.“먼저 말해봐.”유진은 진지한 표정으로 진구를 바라보며 말했다.“선배, 전 늘 당신을 선배로, 좋은 친구로 생각했어요. 그 이상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요.”“오늘 가족 모임에 참석하면서 다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부디 오해가 더 커지지 않도록, 할아버지랑 어른들께는 확실히 말씀드려 주세요.”진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직 아무 말도 꺼내지도 않았는데, 유진은 이미 자신의 마음을 간파하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선을 그어버린 것이다.유진은 미소를 지었지만 그 표정엔 피곤함이 묻어났다.“조금 피곤해서 먼저 갈게요. 할아버지께는 대신 인사 부탁드려요.”유진은 말을 마치고 돌아섰다.몇 걸음만 걸었을까? 그 순간, 뒤쪽 정원에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형형색색의 하트 모양 꽃장식이 환하게 빛났고, 수많은 풍선과 조명이 하늘로 떠올랐다. 몽환적이고 낭만적인 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