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사안이 워낙 중대한 만큼 증거도 모두 석유가 회사 기밀을 유출한 쪽을 가리키는 듯했다.하지만 김하운은 아무 조건 없이 석유를 믿었기에 침착하게 모두를 진정시키며 말했다.“다들 부사장님과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오셨잖아요. 부사장님이 어떤 분인지 누구보다 잘 아실 거예요.”“부사장님은 절대로 회사를 배신할 분이 아니에요. 게다가 이번 일은 여러 부분에서 너무 이상해요.”그때 누군가 의문을 제기했다.“RT그룹은 원가를 최적화해서 제안서를 제출했고, 입찰가는 우리보다 딱 2억만 낮았어요. 기술 수치도 완전히 똑같았고요.”“그 자료는 마지막에 부사장님만 알고 있었는데, 본부장님은 이걸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수백억 원이 오가는 대형 프로젝트였고, 입찰 금액 역시 원 단위까지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산정되어 있었다.그런데 경쟁사가 제시한 금액은 하필이면 정확히 2억 원이 낮았다. 이걸 단순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아무래도 쉽게 믿기 어려웠다.김하운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래서 이번 일이 이상하다는 거예요. RT그룹의 입찰가는 우리와 거의 같고 기술 데이터도 완전히 똑같아요.”“이건 대놓고 우리한테 입찰 제안서가 유출됐다고 알려 주는 거나 다름없어요.”“그렇게 해서 RT그룹이 얻는 게 뭘까요? 자기들 신뢰와 평판에도 도움이 안 되잖아요.”이건 상대에게 피해를 주면서 자신들도 큰 손해를 감수하는 일이었다.RT그룹은 굳이 이렇게 할 이유가 없었다.김하운은 말을 이었다.“그런데도 이렇게 한 이유는 하나뿐이죠. 우리 회사가 부사장님을 의심하게 만들려는 거죠. 그게 저 사람들의 진짜 목적이에요.”모두 잠시 곰곰이 생각했다.김하운의 말에는 일리가 있었지만 기술팀 책임자가 입을 열었다.“이번 입찰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밤낮없이 일했어요.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모두가 큰 충격을 받았고요.”“우리가 부사장님을 믿는다는 것과 RT그룹의 의도를 추측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려워요.”“본부장님께서 부사장님이 결백하다고 믿으신다면 더더욱 사장님께 보고
주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석유 씨를 알게 된 건 제게 정말 큰 행운이야.”김하운은 부드럽게 주아를 품에 안았다.“친구 사이에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돼. 친구는 진심으로 이어지는 거니까.”차는 도로 위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다.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어두운 차 안으로 스며들어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했다.주아는 복잡한 눈빛을 감추며 시선을 내리깔았고 그 말에 대답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다.“알고 있어.”...월요일, 석유는 해성으로 출장을 가야 했다.아침 일찍 짐을 챙기고 있는데 명빈은 침대 가장자리에 엎드려 여자를 바라보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어제는 왜 말 안 했어요? 떠나기 직전에야 알려 주네요. 나도 같이 갈래요.”석유는 명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 단번에 거절했다.“오늘은 월요일이고 처리해야 할 일이 많잖아요.”명빈은 한숨을 내쉬었다.“정말 일개미 인생이네요. 마음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요.”석유는 피식 웃었다.“사장님, 사장님 일개미는 나죠.”그러자 명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아니죠. 난 석유 씨 거잖아요.”석유는 순간 멈칫하더니 희고 차가운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석유는 몸을 돌려 갈아입을 옷을 여행 가방에 넣었고 명빈이 말했다.“일 끝나면 바로 해성으로 갈게요.”석유는 난처한 얼굴로 돌아봤다.“이틀만 있다가 올 거예요.”그러나 명빈은 콧방귀를 뀌었다.“하루를 못 보면 삼 년 같다고 하잖아요. 이틀이면 얼마나 긴지 계산해 봐요.”석유는 결국 참지 못하고 이불을 집어 들어 명빈 머리 위로 덮어 버린 뒤, 침실을 나와 아침을 먹으러 갔다.집을 나서려던 그때 명빈이 갑자기 뒤에서 석유를 끌어안았다.현관에는 희미한 아침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명빈은 석유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꼭 보고 싶어 해야 해요. 계속 보고 싶어 해야 해요.”석유는 잠시 말이 없다가 손에 들고 있던 여행 가방을 내려놓고 몸을 돌려 명빈을 안았다.그러자 명빈은 곧바로 석
예슬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사과하러 왔어요. 부사장님께서 소송을 취하해 주셨으면 좋겠어요.”“한 번만 용서해 주시면 안 될까요? 더 이상 절 고소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정말 전과가 남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그렇게 되면 인생이 망가질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결국 마지막으로 석유에게 선처를 구해 보기로 한 것이다.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든, 석유에게 실컷 혼이 나든 모두 감수할 생각이었다.이에 주아는 더욱 궁금해졌다.“석유 씨가 왜 고소한 거예요?”예슬은 더 이상 말하려 하지 않았으나 주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전 석유 씨 친구예요. 사정을 말씀해 주시면 도와드릴 수도 있어요. 말씀 안 하시면 저도 도와드릴 방법이 없고요.”예슬은 주아의 온화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잠시 망설였다.그러다 어색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제가... 명빈 사장님께...”“하석유 부사장님과 김하운 본부장님이 부적절한 사이라고 말했어요. 인맥이랑 뒷배 덕분에 부사장 자리까지 올라갔다고도 했고요.”말을 마치자마자 서둘러 변명했다.“저도 회사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은 것뿐이에요. 다들 그렇게 말했는데 왜 저만 고소하는 거예요? 전 이미 해고까지 당했잖아요.”주아의 눈빛이 흔들렸다.“그 두 사람이 부적절한 사이라고요? 어떻게 부적절한데요?”예슬이 머쓱하게 말했다.“남녀 관계라는 거죠. 본부장님이 예전에 부사장님을 좋아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부사장님이 승진하면서 두 사람이 헤어졌대요.”“이건 제가 지어낸 말이 아니에요. 회사 오래 다닌 직원들이 다 그렇게 말했어요.”주아의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다.김하운이 석유를 좋아했었다는 것이다.‘승진해서 헤어진 것이 아니라, 하운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서 헤어진 것이 아닐까?’‘그래서였구나... 하운이 석유 씨를 바라보는 눈빛이 늘 어딘가 다르다고 느꼈던 이유가.’‘그리고 석유 이야기가 나오기만 하면 언제나 무조건 석유 씨 편을 들었던 이유도 다 그래서 그랬던 거였어.’그 말에 모든
사람들은 테라스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술을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전시회 주최자와 책임자, 그리고 명빈 일행은 한자리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평소 업무 때의 엄격한 분위기는 온데간데없었고, 책임자는 유난히 온화한 표정이었다.“주아 작가님이 김하운 본부장님 여자친구인 줄은 몰랐어요.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거든요. 정말 겸손하시네요.”“본부장님, 사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앞으로 모든 방면에서 빈틈없이 주아 작가님을 잘 챙길게요.”주최자도 곧바로 맞장구를 쳤다.“주아 작가님 작품 정말 인기 많고 업계 여러 작가님들께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 들었어요.”“앞으로도 주아 작가님과 오래 함께 협력하고 싶네요.”...조금 떨어진 곳에서 주아는 난간 앞에 서 있었다.밤바람이 긴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어둠 속에서 쉼 없이 흔들렸다.입가에 떠오른 비웃음도 바람결에 스쳤다가 사라졌다.전시회 개막식 날 김하운과 김하운의 할아버지는 모두 전시장을 찾았었다.그날은 전시회 책임자를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김하운의 할아버지가 업계에서 가진 명성을 생각하면 책임자 역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오늘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은 김하운을 통해 명빈과의 관계를 더 가깝게 만들려는 의도일 뿐이었다.명예와 이해관계가 얽힌 세상의 인간관계란 원래 이렇게 현실적이었다.마치 인맥만 있으면 누구나 전시에 참여할 수 있고, 작품 자체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처럼 보였다.석유가 술잔 두 개를 들고 다가와 한 잔을 건넸다.“저분들이 직접 만든 술인데 한번 마셔 볼래요?”예전 같았으면 석유가 직접 술을 건네준 것만으로도 기뻤을 것이지만 오늘의 주아는 좀처럼 흥이 나지 않았다.그저 잔을 받아 들고는 한쪽에 내려놓으며 옅게 웃었다.“방금 차를 마셔서요. 조금 있다가 술 마실게요. 지금 마시면 맛이 섞일 것 같아요.”석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화려한 야경을 바라봤다.날씨는 좋았지만 밤바람은 여전히 조금 차가웠다.차가운 바람이 얼
다음 날, 석유와 희유는 우한을 만나기로 약속했다.우한은 임신 중이었기 때문에 희유가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사실도 일부러 알리지 않았다.전화를 받고 나서야 우한은 마치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깜짝 놀랐다.우한은 품이 넉넉한 옷을 입고 있었는데 안색은 좋고 윤기가 돌았으며 눈빛에도 생기가 가득했다.지금의 생활이 얼마나 행복하고 만족스러운지 한눈에 알 수 있었다.세 사람은 함께 앉아 지난 몇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했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끝이 없었다.우한은 과일주스 한 잔을 따라 들며 웃었다.“술은 못 마시니까 과일주스로 대신할게요. 그래도 진심을 가득 담아서 축하할게요.”“희유가 돌아온 것도 축하하고 언니한테도 고맙다는 말 하고 싶어요.”연애를 시작한 뒤 우한은 1년 전 원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새 회사로 옮겼다.하지만 입사하자마자 부장의 견제와 부당한 대우를 받아야 했다.그때 남자친구는 다른 지역으로 발령받아 강성에 없었다.괜히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우한은 자신이 열심히 일해서 성과만 내면 상사의 시선도 달라질 거라고 믿었다.하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흘러가지 않았다.무슨 일을 하든 그 상사는 사사건건 흠을 잡으며 괴롭혔다.더는 버티지 못해 사표를 내려던 무렵, 석유는 우연히 그 사실을 알게 됐다.석유는 직접 나서서 우한의 편을 들어줬고, 두 회사의 협력 관계를 이용해 우한을 괴롭히던 상사를 다른 곳으로 발령까지 보냈다.지난 몇 년 동안 석유가 도와준 일은 그것 하나뿐이 아니었다.희유가 떠난 뒤 석유는 우한과 자주 연락하지는 않았지만, 우한이 어려움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기만 하면 언제나 나서서 해결해 주었다.이런 친구 한 명은 평범한 친구 열 명, 백 명보다도 소중했다.석유는 옅게 미소 지었다.“별말을 다 하네. 친구는 원래 서로 도와주는 거잖아.”그 말에 희유는 시원하게 웃었다.“언니 말이 맞아. 친구는 원래 서로 챙겨주는 거야.”“우리 건배해요. 오래오래 변하지 않을 우리 우정을 위하여!”희유의
석유는 희유에게 돌아온 뒤 어디에서 지낼 예정인지 물었다.희유의 뽀얗고 사랑스러운 얼굴은 마당에 막 꽃망울을 터뜨리려는 해당화처럼 화사했다.희유는 생긋 웃으며 말했다.“돌아오기 전에 남편이 다 준비해 놨어요.”두 사람은 이미 결혼한 사이였기에 명우가 희유를 혼자 밖에서 집을 구해 살게 둘 리 없었다.하지만 명우가 원래 살던 집은 희유가 근무할 박물관과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명우는 박물관 근처에 새집을 하나 마련했다.돌아오기 전부터 집 안도 모두 꾸며 놓고 청소까지 끝내 두었으니 이제 돌아가 바로 들어가 살기만 하면 됐다.밤바람 속에서 희유의 경쾌한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석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희유는 분명 행복할 것이다.누구보다도 행복하게 살 것이었다.희유는 곧 웃으며 말했다.“결혼식 할 때 언니가 제 들러리 서줘야 해요.”예전에는 결혼식을 올릴 생각이 없었지만 하기로 결정한 이상 여러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다른 건 몰라도 들러리만큼은 직접 고르고 싶었다.석유는 맑은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좋아.”희유는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신이 난 얼굴로 돌아봤다.“그럴 거면 우리 같이 결혼식 올리는 건 어때요?”오늘 석유와 명빈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두 사람의 관계도 충분히 안정돼 보였다.하지만 석유는 잠시 표정이 굳더니 옅게 웃으며 말했다.“난 아직 결혼할 생각은 없어. 너무 갑작스럽기도 하고 너 먼저 결혼해. 내가 들러리 설게.”“알겠어요.”희유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밖으로 나오자 명빈과 명우가 각각 차를 세워 두고 기다리고 있었다.다들 모두 서로 인사를 나눈 뒤 각자의 차를 타고 돌아갔다....집으로 돌아온 석유는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눕자마자 명빈에게 붙잡혔다.명빈은 몸을 뒤집어 석유를 덮쳤다.은은한 조명 아래 명빈의 눈동자는 밤처럼 짙었고 남자는 웃으며 석유를 바라봤다.“오늘 기분 좋았어요?”막 샤워를 마친 석유의 눈가에는 물기가 어려 있었다.석유는 맑고 서늘한 얼굴로 가볍게 고개를
희유는 장난기가 어린 눈빛을 감추지 못하며 말했다.“근거요? 매일 밤마다 나한테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희유는 유변학의 몸에서 굴러 내려오며 웃음을 참았다.“아빠라고요.”말을 끝내자마자 희유는 재빨리 이불을 끌어당겨 머리끝까지 덮었는데 마치 그렇게만 하면 안전해지는 것처럼 굴었다.“진희유.”유변학이 또박또박 이름을 불렀다.희유는 이불 속에서 유변학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는 걸 상상하며 아무렇지 않게 말을 덧붙였다.“위험에 처했는데 누가 자기 아빠부터 안 챙겨요?”말끝에 웃음이 새어 나왔고 유변학은 움찔거리는 이불
희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유변학이 한 말이 맞다는 걸 알았기에, 머릿속에서 스치던 위험한 생각을 바로 지워냈다.희유는 이를 악물고 칼을 상처 안쪽으로 천천히 밀어 넣었다.피가 그대로 솟구쳐 희유의 손을 적셨고 두려움에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심장은 떨리고 손도 떨려 차마 눈을 뜨고 상처를 바라볼 용기도 나지 않았다.유변학은 희유가 아무런 경험도 없는 어린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극심한 통증을 참아내면서도 낮게 달랬다.“괜찮아. 피도 고통도 다 내 거야. 그냥 계속해. 너는 나 미워했잖아. 지금이 네
깊은 밤, 유변학이 방으로 돌아왔다.불을 켜고 신발을 갈아 신던 유변학은 문득 시선을 멈추고 소파 쪽을 돌아보았다.소파 위에는 한 여자아이가 담요에 몸을 웅크린 채 얼굴까지 꼭 가리고 누워 있었는데 잠든 모습이었다.유변학은 다가가 담담하게 물었다.“왜 여기로 돌아온 거지?”여자아이는 화들짝 놀라 깨어 앉더니, 멍한 눈으로 유변학을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섰는데 경계심이 가득한 모습이었다.그 모습은 희유가 처음 이 방에 왔을 때와 똑같았다.그때 유변학의 휴대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는데 홍서라가 보낸 메시지였다. 저 아이는 기용
우행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다른 가능성은 이게 그냥 게임 설정이라는 거지.”화영은 말없이 우행을 바라봤다.역시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건 여자 쪽이었다.우행은 화영의 표정을 살피며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내 말이 틀려요? 이렇게 설정돼 있으니까 우리가 단계별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이에 화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맞아요. 우행 씨 말이 다 맞아요.”“근데 말투가 좀 미묘한데요?”우행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화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생각은요 지금 빨리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