ログイン이전에는 두 사람도 제법 가까워진 사이였다.하린은 김하운과 농담도 하고 장난스럽게 놀리기도 했다.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머리가 하얘지고 혀까지 꼬여 버렸다.하린이 앞으로 다가가 찻잔을 집으려 했다.“저도 차는 끓일 줄 아... 앗!”말을 끝내기도 전에 뜨거운 찻잔에 손이 닿아 황급히 손을 뺐다.“데었어요?”김하운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옆에는 찻잔을 씻는 곳이 있어 김하운은 하린의 손목을 잡아 그곳으로 데려간 뒤, 여자의 손을 잡아 차가운 물 아래에 갖다 댔다.손가락은 빨갛게 달아올라 화끈거리고 있었다.하린은 그런 김하운의 잘생긴 옆모습을 바라보다가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는 걸 느꼈다.조금은 창피했지만 조금은 설렜다.오늘의 하린은 평소답지 않게 너무 덤벙거렸다.“아파요?”김하운이 부드럽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시원한 물이 손끝을 적시자 화끈거림도 조금씩 가라앉았고, 하린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요.”“조금 더 식혀야 해요.”김하운은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이 말했다.“오늘 원래는 린당서점에 가려고 했어요.”“집을 나서려는데 그제야 할아버지께서 하린 씨랑 이순철 어르신이 집에 오신다고 말씀하시더라고요.”하린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이 번지더니 손끝도 저도 모르게 살짝 움츠러들었다.곧 하린은 눈을 내리깔고 물었다.“책 사러 오려고 했어요?”“아니요.”김하운은 물을 잠근 뒤 옆에 있던 휴지를 집어 하린의 손을 조심스럽게 닦아주고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하린 씨를 만나러 가려고 했어요.”그 말은 마치 한 줄기 빛이 심장 위에서 터진 것만 같았다.하린은 갑자기 고개를 들고 다시 물었다.“뭐라고요?”그러자 김하운은 하린의 손을 놓고, 단정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처음 만났을 때는 하린 씨가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괜히 부담을 드릴까 봐 제가 먼저 할아버지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씀드렸고요.”“근데 그게 오히려 오해를 만들었던 것 같아요. 미안해요.”하린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래서요?”
하린은 이제야 모든 자초지종을 이해했다.두 사람은 이순철의 양옆에서 남자를 부축하며 별장 안으로 걸어갔다.계단을 오를 때 김하운은 이순철의 팔을 받쳐 드리면서도 일부러 고개를 돌려 하린에게 말했다.“하린 씨, 조심하세요.”그 말에 하린의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이에 하린은 분홍빛 입술을 살짝 다문 채 조용히 대답했다.“네.”분명 이미 여러 번 만나 익숙한 사이였는데, 김하운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또 낯선 느낌이 들었다.괜스레 긴장됐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이순철은 손녀를 한 번 바라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그때 김군호가 직접 마중을 나오며 시원시원하게 웃었다.“며칠 뒤에 내가 하운이를 데리고 찾아가기로 했는데, 왜 이렇게 눈 오는 날 굳이 온 거야? 오히려 우리가 예의를 못 지킨 것 같잖아.”하린은 김군호가 ‘하운이'라고 부르는 걸 듣고 웃음이 나올 뻔했다.무심코 고개를 살짝 돌려 김하운을 바라봤는데, 공교롭게도 남자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진 하린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그러자 이순철이 웃으며 말했다.“저녁 무렵 눈이 오려는데 한잔하지 않겠냐는 말도 있잖아. 집에서 혼자 있는 것보다 이런 분위기가 더 좋지 않겠어?”김군호는 호탕하게 웃더니 시선을 하린에게 옮겼고 인자한 눈빛이 금세 환하게 빛났다.“이 아가씨가 자네 손녀 이하린인가?”“내 손녀야.”이순철은 자랑스럽게 하린의 손목을 잡자 여자는 얌전히 인사했다.“할아버지, 안녕하세요.”“그래, 그래.”김군호는 기쁜 얼굴로 대답한 뒤 농담을 던졌다.“이순철이 평생 허풍을 떨며 살았는데, 너를 칭찬한 건 몇 안 되는 진심이구나.”하린은 수줍게 웃었다.“감사드려요, 할아버지.”몇 사람은 함께 거실로 향했고 김하운이 말했다.“이순철 어르신과 하린 씨는 먼저 앉아 계세요. 차는 제가 준비할게요.”“그래, 다녀와.”김군호가 손을 가볍게 들어 보였고 이순철은 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너도 가서 하운이를 좀 도와줘.”하린은 잠시 멈
김하운은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말했다.“제가 직접 이 어르신을 찾아뵙기로 하지 않았나요?”그 말에 김군호는 웃으며 말했다.“원래는 우리가 그 집으로 가기로 했었지. 이번 주말에 찾아뵙기로 약속도 해 뒀어.”“그런데 오늘 눈이 와서 아침에 전화해서 날짜를 미루자고 했더니, 성격이 급한 양반이라 오히려 너를 보러 직접 오겠다고 하더구나.”“먼저 온다는데 내가 거절할 수는 없지 않겠니?”김하운의 단정하고 온화한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그리고 이내 남자는 옅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 집에서 기다릴게요.”김군호는 손자를 위아래로 훑어본 뒤 만족스럽게 말했다.“옷도 갈아입을 필요 없어. 지금 그대로가 딱 좋구나.”김하운은 다시 고개를 끄덕인 뒤 시간을 확인했다.“곧 도착한대요?”“거의 다 왔을 거야.”김군호가 대답했다.김하운은 창밖으로 점점 굵어지는 눈발을 바라보다가 말했다.“제가 나가서 모시고 올게요.”“그래.”김군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조금 의아했다.‘분명 전에는 하린이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어째서 갑자기 이렇게 적극적으로 변한 걸까?’게다가 꽤 신경 쓰는 눈치였다.이유야 무엇이든, 김하운이 마음을 열기만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이씨 집안의 차량이 김씨 집안 별장 정문으로 천천히 다가왔다.운전기사는 속도를 줄였고 하린은 멍하니 창밖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생각은 이미 먼 곳으로 흘러가 있었다.‘한동안 서점에 오지 않았어.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으니 더더욱 오지 않겠지.’‘하지만 혹시 오늘 왔다가 서로 엇갈리면 어떡하지?’갑자기 마음이 조급해졌다.괜히 할아버지를 따라 김씨 집안에 오겠다고 한 것이 후회됐다.차가 검은 철문 앞에 멈춰 서자 이순철이 웃으며 말했다.“도착했다. 내리자.”하린은 복잡한 생각을 접고 할아버지의 뒤를 따라 차에서 내렸다.눈길이라 바닥이 미끄러웠다.그래서 하린은 운전기사에게 우산을 받아 한 손으로는 할아버지의 팔을 붙잡고, 다
낮에 한가한 시간이 생겨도 하린은 더 이상 잠을 자지 않았다.그저 혼자 창밖을 오가는 사람들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내가 그 사람을 도망가게 만든 거야.'하린은 풀이 죽은 채 그렇게 생각했다.한겨울이 찾아오자 서점 안으로 스며드는 햇살마저 차갑고 쓸쓸해 보였다.그날도 날씨는 좋지 않았고, 밤새 찬바람이 거세게 불더니 아침부터 잔설이 흩날리기 시작했다.아침을 먹고 아직 집을 나서기도 전, 이순철이 갑자기 하린을 서재로 불러 웃으며 말했다.“오늘은 눈도 오니까 서점은 가지 말고 할아버지랑 같이 나가자.”하린은 서점에 가고 싶었다.오늘은 주말이었기에 어쩌면 김하운이 올지도 몰랐다.희망은 아주 희박했지만 그래도 기다려 보고 싶었다.“어디 가시는데요? 오늘은 아빠도 쉬니까 아빠랑 다녀오세요.”하린은 가기 싫어 적당한 핑계를 댔다.“오늘 손님이 책 찾으러 오기로 했어요. 어제 미리 약속했거든요.”이순철은 웃으며 말했다.“지난번에 할아버지가 소개팅 주선했던 거 기억하지? 김씨 집안 그 남자가 다시 만나 보겠다고 했대. 오늘 같이 김씨 저택에 가자.”하린의 표정이 금세 굳었다.“싫어요. 왜 그 사람이 만나겠다고 하면 제가 가야 하는데요?”이순철은 다정하게 달랬다.“지난번 일 때문에 우리 하린이가 속상했던 거 나도 알아. 하지만 이번에는 소개팅이 아니야. 그냥 그 집에 놀러 가는 거야.”“그 집 손자도 한 번 만나 보고, 마음에 들면 천천히 알아가면 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할아버지랑 바람 쐬러 다녀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너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하잖아? 마침 조언도 받을 수 있고.”하지만 하린은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김군호 어르신은 국화의 대가시잖아요. 저는 만화를 그리는 사람이고요. 애초에 분야도 다르고 수준도 달라요.”잠시 말을 멈췄던 하린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리고...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그래?”이순철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연애 중인 거냐? 학교 친구야? 이름이 뭐니?”하린은 말문이 막혔다.정
일기는 거기에서 끝나 있었다.김하운의 표정은 당황스러움에서 미묘한 흥미로움으로 바뀌었다.김하운은 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내려간 뒤에야 노트를 조용히 덮어 원래 있던 자리에 가져다 놓았다....하린은 친구와 함께 애니메이션 전시회를 다녀온 뒤, 저녁에는 같은 업계 사람들 모임까지 참석했다.늦은 밤이 되어서야 모든 일정이 끝났고 일부러 자신을 바쁘게 몰아붙였다.조금이라도 한가해지면 쓸데없는 생각이 많아지고, 괜히 긴장하게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하지만 하루 종일 그 남자에게서는 전화 한 통 오지 않았고 카톡 추가도 없었다.‘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아무런 반응도 없는 침묵이 오히려 마음속을 거센 파도처럼 뒤흔들었다.밤이 되자 어머니에게서 일찍 들어오라는 전화가 왔다.하지만 집으로 가기 전, 하린은 결국 서점에 한 번 더 들렀다.밤 11시.김하운은 이미 돌아간 뒤였다.서점의 불을 켜자마자 소파 위에 그대로 놓여 있는 일기장이 눈에 들어왔다.심장이 제멋대로 빨라졌다.천천히 다가가 쪼그려 앉은 채 한참 동안 그 노트를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집어 들었다.한 장 한 장 넘기며 자신이 써 내려간 글을 다시 읽었다.김하운이 이 내용을 읽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상상하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마침내 마지막 페이지를 펼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김하운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기대에 부풀어 있던 마음이 한순간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어느 정도는 각오했다고 생각했는데도 밀려오는 실망감은 막을 수 없었다.머릿속이 새하얘졌고 허탈함과 슬픔, 창피함이 한꺼번에 밀려와 목을 꽉 막아 버렸다.순간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짝사랑이었고 용기를 내 고백했지만 거절당한 기분은 정말 견디기 힘들었다.하린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그 사람이 날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부족한 건 아니야.’‘안목이 없는 건 그 사람이야.'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였지만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다.하
[11월 6일, 흐림.세 번째로 그 남자를 만났다.오늘은 정장을 입고 왔는데, 왠지 더 멋있어 보였다.지금도 서점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다.이상하게도 나는 자꾸만 바닥에 드리운 그 남자의 그림자를 바라보게 되는 것 같다.그려야 할 캐릭터 디자인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어젯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였을까?결국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아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창가를 바라봤는데 언제 갔는지 그 남자는 이미 떠난 뒤였다.][11월 9일, 밤.오늘 밤에는 지하와 우안이 놀러 왔다.우리는 창가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밖에서 그 남자를 본 것 같았다.급히 문밖으로 나가 봤지만 이미 보이지 않았다.정말 그 남자였을까? 아니면 내가 너무 신경 쓰고 있는 걸까?겨우 몇 번 마주쳤을 뿐이었다.이름도 모르고 게다가 여자친구도 있는 사람인데...]글 아래에는 턱을 괸 작은 여자아이가 그려져 있었고 잔뜩 고민에 빠진 표정이었다.[11월 16일, 흐림.드디어 그 남자가 또 왔다.밖에서 타르트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데, 곁눈질로 보니 남자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못 본 척해야 했는데 나는 그런 걸 너무 못 참는 편이다.결국 고개를 돌려 그 사람을 바라보고 말았다.그 사람은 조금 놀란 것 같더니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날 같이 있던 여자가 여자친구라고 직접 말한 적은 없었다.정말 여자친구가 있다면 왜 주말마다 혼자 서점에 와서 책을 읽는 걸까?그 사람이 돌아갈 때 결국 참지 못했다.그래서 회원카드를 만들어 주겠다는 핑계를 대며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는데 거절당했다.마음이 너무 허전했다.그리고 나는 지하에게 그 사람은 절대 좋아하지 말라고 말했다.여자친구가 있는 사람이니까.사실은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괜한 마음을 품지 말라고 말이다.][11월 22일, 맑음.좋아하면 안 된다고 계속 다짐했는데도 보면 자꾸만 기분이 좋아진다.정말로 그
우행은 여전히 침착한 얼굴로 말했다.“다른 가능성은 이게 그냥 게임 설정이라는 거지.”화영은 말없이 우행을 바라봤다.역시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건 여자 쪽이었다.우행은 화영의 표정을 살피며 약간 의아한 듯 물었다.“내 말이 틀려요? 이렇게 설정돼 있으니까 우리가 단계별로 단서를 찾을 수 있었던 거잖아요.”이에 화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맞아요. 우행 씨 말이 다 맞아요.”“근데 말투가 좀 미묘한데요?”우행이 의미심장하게 웃자 화영은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제 생각은요 지금 빨리 나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나 희문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진씨 집안 사람들이 화영을 무척 좋아한다는 걸 본인도 당연히 알고 있었다. 신서란은 내내 화영과 이야기를 나누며 살뜰히 챙겼고 그 따뜻한 모습은 이미 화영을 식구로 여기는 듯했다. 바로 그렇기에 희문은 가윤을 떠올리며 억울함을 느꼈다.희문의 그런 마음을 빼면 나머지 모두는 아주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생일 파티가 끝날 무렵, 다들 블루드로 옮겨서 더 놀자고 제안했다.그때 희문의 휴대전화가 울리자 남자는 화면을 확인하곤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고 복도에서 전화받았다.“가윤아.”가윤은 짧게
“둘은 마치 연애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수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살아오면서 이런 관계는 처음 봐요.”그러고는 손짓하며 화영을 불렀다.“이리 와요. 내가 우리 우행이 여자를 어떻게 거절하는지 말해줄게요.”화영은 호기심이 생겨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궁금하네요. 말해봐요.”수호가 웃음을 터뜨렸다.“우행이랑 나, 중학교 때부터 같은 반이었거든요. 그때부터 여자애들이 우행한테 연애편지를 썼어요.”“한 번은 어떤 여자애가 세 장짜리 장문의 편지를 써서 줬는데, 우행이 그날 저녁 자습 시간에
여경은 곧바로 조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는 단숨에 억울하고 서러움으로 가득 찼다.“누가 나를 이 별장에서 쫓아내려고 해요. 내가 이 집에서 산 지가 벌써 이십 년이 넘었고, 이건 내 집이잖아요, 맞죠?”조변우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여경, 당신 강성을 떠나.]그 말에 여경은 숨을 들이마셨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당신 지금 뭐라고 한거지?”조변우는 단호하게 말했다.[유신희 일에 조시안이 연루됐고, 이번엔 내가 더는 못 봐주겠어. 그리고 우리 사이도 여기까지야.]여경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