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정은 유진과 함께 길을 따라 걷다가 관광차를 발견했다. 요금을 내고 나서, 운전사는 둘을 케이블카 탑승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케이블카에 올라타고 나서야 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삼촌, 혹시 여진구 선배 안 좋아하세요?”‘왜 선배에게 그렇게 차갑게 대하는 걸까?’은정은 깊고 날카로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았다.“내가 좋아하는지 아닌지가 신경 쓰여?”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선배는 나랑 친한 사이예요. 삼촌이 선배를 싫어하면, 같이 다니는 게 불편할 수도 있잖아요. 그러니까 우리 그냥 따로 다니면 어때요?”은정은 다시 물었다.“어떻게 따로 다닌다는 거지?”“나랑 진구 선배가 같이 다니고, 삼촌은 방연하랑 같이 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서로 불편할 일 없잖아요.”유진은 조금 전 지형도를 살펴보면서 산에서 할 수 있는 활동이 꽤 많다는 걸 알았다. 굳이 서로 맞지 않는 사람들끼리 한 팀으로 움직일 필요는 없었다.유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은정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좁은 케이블카 안에서 그의 차가운 기운이 한층 더 강하게 퍼졌다.그러나 유진은 전혀 겁먹지 않았다. 어차피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은정이 왜 화를 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케이블카는 일정한 속도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은정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푸르른 산세를 바라보며 마음속의 복잡한 감정을 억눌렀다. 그리고 다시 유진을 바라보며 최대한 감정을 드러내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 난 방연하를 좋아하지 않아. 네가 나랑 방연하를 엮으려고 하면, 나도 곤란하고, 네 친구한테도 실례야.”유진은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은정이 이렇게까지 확실하게 선을 긋는 게 의외였다.그제야 유진은 은정이 굳이 자신과 함께 케이블카를 타겠다고 한 이유를 이해했다. 하지만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이에 유진은 미안한 듯 웃으며 말했다.“죄송해요. 너무 깊이 생각하지 않았네요. 그런데 정말 연하 안 좋아하세요?”“전 여자친구랑도 이미 헤어졌고, 다시 만날 가능성도 없다
한편, 여진구와 방연하는 나영하, 오예나와 함께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영하와 예나는 조금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며, 끊임없이 사진을 찍고 있었다. 풍경을 찾고, 각도를 맞추고, 포즈를 바꾸며 한참씩 시간을 끌었다.처음부터 등산 속도가 느렸는데, 이대로 가다간 언제 정상에 도착할지 기약이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올라가기는커녕, 오늘 안에 정상에 도착할 수나 있을지 의문이었다.진구는 짜증이 서린 표정으로 물었다.“우리가 굳이 같이 가야 해?”이에 연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우리가 따라가는 게 아니라, 저쪽이 우리를 따라오는 거죠.”“그럼 그냥 가자. 기다릴 필요 없어. 원래 같이 다니던 사이도 아니잖아. 각자 노는 게 더 낫지.”연하는 영하에게 간단히 인사하고는, 진구와 함께 속도를 높였다.두 사람은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 연하는 문득 물었다.“진구 선배, 원래 은정 씨랑 알고 지냈어요?”둘이 서로 말하는 걸 보면,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 같았다. 이에 진구는 얼굴을 찌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알긴 아는데, 친하지 않아.”연하는 한 걸음을 멈추고, 돌계단 위에서 그를 올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구은정 씨, 혹시 유진이 좋아해요?”은정이 유진이를 대하는 태도는 명확했다. 특히 유진이에게만 보이는 특별한 태도 차이.게다가 연령상으론 유진이의 삼촌뻘이긴 했지만, 사실 나이 차이는 1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더군다나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그 말을 들은 진구는 날카롭게 눈썹을 찌푸렸다.“아니야. 그 사람은 유진이를 조카처럼 생각하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고.”진구는 더 이상 과거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유진이는 이미 모든 걸 잊었다. 그렇다면 둘도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면 됐다. 그러나 연하는 진구의 반응을 보고 오히려 안심한 듯 활짝 웃었다.“정말요? 그럼 다행이네요!”진구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대체 구은정이 뭐가 그렇게 좋다고? 맨
연하는 몹시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내가 너무 심했어요. 진짜 미안해요!”진구는 대범하게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괜찮아. 용서해 줄게!”연하는 조심스럽게 진구를 살피며 말했다.“한번 일어나 볼래요? 다친 데 없는지 확인해야죠.”진구는 엉덩이도 아프고 팔도 쑤셔, 연하를 향해 손을 내밀며 말했다.“일으켜 줘.”진구의 손은 길고 하얀 손가락에 단정하게 손질된 손톱까지,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연하는 진구의 손을 잡고 힘껏 당겼다.진구는 그 힘을 빌려 몸을 일으켜 세웠고, 손을 놓은 뒤 몸을 가볍게 움직여 보며 말했다.“괜찮네. 뼈는 안 부러졌어!”연하는 진구의 유쾌한 태도에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진구에 대한 호감이 더욱 커졌다.연하가 과하게 장난을 쳐서 이렇게까지 굴러떨어졌는데도, 그는 화내기는커녕 넘어지는 순간에도 자신을 보호해 주었다.‘이런 남자, 진짜 멋있어.’연하는 밝게 웃으며 말했다.“앞으로 선배는 내 절친이에요!”진구는 몸에 붙은 잔디를 툭툭 털며 말했다.“아니야, 난 그 정도로 목숨 걸고 친해지고 싶진 않아!”그 말에 둘은 동시에 웃었고, 진구는 다시 걸으면서 말했다.“진짜 날 친구로 생각한다면, 유진이 앞에서 내 좋은 말 좀 많이 해 줘. 내가 유진이랑 잘 되면, 너한테 꼭 보답할게!”연하는 자신감 있게 말했다.“그건 내 전문이죠. 맡겨봐요!”“좋아, 콜!”두 사람은 손바닥을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다. 그 순간, 한층 더 가까워진 느낌이었다.그렇게 잠시 시간을 허비한 사이, 나영하와 오예나도 따라잡았고, 네 사람은 다시 길을 올랐다.하지만 영하는 계속해서 진구에게 바짝 붙으려 했고, 진구는 그때마다 연하를 앞으로 끌어당겨 그녀를 가로막았다.연하는 조금 전의 일로 미안하기도 했고, 애초에 영하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기꺼이 진구를 도왔다.그렇게 한 시간을 더 걸어가다가, 진구가 배낭을 연하에게 넘기며 말했다.“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진구가 자리를 비운 동안, 영하는 연하에게 다가
나영하는 화가 난 오예나를 급히 붙잡으며, 여진구를 향해 웃었다.“진구 씨, 너무 흥분하지 마요. 다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작은 오해였어요!”연하는 가방을 다시 어깨에 메고는 진구의 팔을 잡아당겼다.“쓸데없이 신경 쓰지 말고, 우리 그냥 가요!”진구는 영하와 예나를 차가운 시선으로 한 번 더 훑어본 뒤, 연하를 따라 걸어갔다.조금 걸어가자, 진구가 문득 물었다.“왜 싸운 거야?”연하는 냉소적으로 웃으며 말했다.“나랑 유진이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하더라고요. 우리가 겨우 한 시간 전에 만난 사이인데, 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요?”“그렇게 어설픈 수작은 오히려 짜증 나잖아요.”진구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너 꽤 강단 있네.”연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그런 사람한테 1초라도 친절하게 구는 건 내 자신에 대한 불친절이죠.”그러다 문득 진구를 바라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그런데 선배도 대단하네요. 왜 우리가 싸운지도 모르면서, 그냥 나부터 감싸주잖아요?”진구는 가볍게 배낭을 매만지며 말했다.“당연하지. 난 무조건 내 사람 편을 들어. 난 원래 논리보다는 의리를 따지는 사람이거든.”그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진구가 그렇게 말하니 꽤 그럴싸하게 들렸다.연하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유진이를 맡기기에 선배라면 안심할 수 있겠네요!”이에 진구도 웃으며 답했다.“네가 유진이를 챙겨주는 것도 고맙지. 우리 앞으로 잘해 보자!”둘은 가볍게 하이파이브를 주고받았다. 그러면서 방금 있었던 언쟁과 불쾌한 기분도 모두 날려버린 채, 산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한편, 임유진과 구은정은 먼저 약속한 장소에 도착해 있었다. 이곳은 주요 관광 포인트라 사람이 많았다.유리 전망대와 번지점프장이 있었고, 맞은편 산에서는 암벽 등반 대회가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이 몰려 있었다.유진은 번지점프대를 바라보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그 반응을 본 은정이 물었다.“번지점프 하고
유진이 받은 것은 손으로 직접 짠 밀짚모자였다. 흰색 실크 리본이 부드럽게 흩날리며 장식되어 있었다.유진은 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더니, 환하게 웃었다.“예쁘네요.”햇빛 아래에서 구은정의 눈빛은 깊고 부드러웠다.“마음에 들면 됐어.”그러더니 주머니에서 검은 가죽끈에 은 장식이 달린 팔찌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이것도 줄게.”은정의 진심이 이 팔찌에 담겨, 그녀가 늘 건강하고 안전하기를 바랐다. 유진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팔찌를 살펴보며, 웃으며 물었다.“삼촌, 이런 스타일의 액세서리를 선물하는 거 좋아하세요?”이에 은정은 조용히 유진을 바라보며 답했다.“너한테만 줬어.”그 말에 유진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뒤엉켰다. 자신의 서랍 속에 같은 디자인의 팔찌가 하나 있었던 것이 떠올랐다.“그럼, 전에 한 번 나한테 이거랑 똑같은 걸 준 적 있어요?”은정은 고개를 저었다.“아니, 난 아니야.”그건 원래 유진이 은정에게 줬던 것이었다. 유진은 어딘가 몽롱한 느낌을 받으며 그를 바라보았다.“그럼, 그 팔찌는 누가 준 거죠? 왜 기억이 안 나지? 내가 뭔가를 잊어버린 걸까요?”은정은 그녀를 깊은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유진은 문득 구은정에게 말하고 싶었다.은정과 함께 있을 때마다,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사람처럼 익숙한 기분이 든다고.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느낌이 점점 더 강해지고 있다고.그러나 그 순간, 휴대폰이 울렸고, 유진은 놀라듯 정신을 차렸다.여진구에게서 온 전화였다. 그와 방연하는 도착했다고, 지금 어디에 있냐고 물어왔다. 유진은 휴대폰을 들고 웃으며 말했다.“우리 번지점프장 쪽에 있어요.”유진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고개를 들자 진구와 연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반가운 얼굴로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여기예요! 나 보여요?”유진은 받은 팔찌를 조심스럽게 주머니에 넣으며, 기쁜 마음으로 진구 쪽으로 걸어갔다. 은정은 그녀의 밝은 미소를 바라보며,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그러더니
유리 전망대로 향하는 유리 다리를 걷는 동안, 호탕한 성격의 방연하는 갑자기 겁에 질려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여진구가 연하를 도우려 손을 내밀었지만, 연하는 진구의 다리를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못 하겠어요! 절대 못 가요!”“나 집에 갈래요! 엄마 보고 싶다고요!”“선배, 이거 하자고 한 거 선배죠? 일부러 나한테 복수하려고 그런 거죠? 내가 괜히 선배 보고 속 넓다고 칭찬했네요!”유리 아래로 아찔한 낭떠러지가 펼쳐져 있었고, 연하는 다리에 힘이 풀려 도저히 일어설 수 없었다. 그러자 진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터뜨렸다.“계속 그러면 나 다리 뺄 거야!”방연하는 더욱 필사적으로 다리를 붙잡았다.“진구 선배! 아니, 캡틴! 그만할게요! 제발!”유진은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결국, 유진과 진구는 한 쪽씩 연하의 팔을 잡아끌며 억지로 앞으로 나아갔다.다행히 연하처럼 유리 다리를 무서워하는 사람이 많아서, 소리를 지르며 걷는 게 창피한 일은 아니었다.은정은 멀리서 셋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미소를 지었다. 셋을 보고 있자니, 젊음이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저렇게 거리낌 없이 장난치고, 늘 열정과 흥분을 유지하는 것. 비록 자신은 그저 바라보는 입장이었지만, 그 활기찬 에너지가 옆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산 아래 캠핑장으로 돌아왔을 때는 이미 해가 지고 있었다. 어둑해진 하늘 아래, 주변을 둘러싼 산들은 더욱 웅장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옅게 깔린 산 안개가 고요한 정취를 더했다.영하와 예나는 이미 돌아와 있었다. 둘은 간이 의자에 앉아 느긋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넷이 도착하자, 영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밝게 인사했다.“유진 씨, 연하 씨! 다녀왔어요?”유진은 자연스럽게 대답하려 했지만, 연하가 유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사실, 이전에 유진이 왜 영하랑 따로 움직였냐고 물었을 때, 연하는 영하가 했던 이간질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그저 다른 코스를 갔다고 넘겼을 뿐이다. 그러니 유진은
은정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리며, 진구를 훑어보았다.“네 꼴 좀 봐. 이게 보호한다고 하는 사람이야?”진구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유진이 이미 신발을 신고 다가와 진구의 팔을 가볍게 당겼다.“그만해요. 물이나 가져가서 방연하한테 줘요.”오늘은 다 같이 놀러 온 날이었다. 괜한 싸움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진구는 속으로 불만이 있었지만,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물통을 들고 캠핑장으로 돌아갔다. 은정은 시선을 내리깔아,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드러난 유진의 가녀린 종아리를 보았다.은정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밤이 되면 산속은 금방 쌀쌀해져. 바짓단 내려.”유진은 털썩 쪼그려 앉아 바짓단을 내리면서,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우리 아빠보다 더 간섭이 심하네.”이에 은정은 표정을 굳히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둘은 조용히 캠핑장으로 걸어갔다. 그러다가 유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삼촌, 저도 알아요. 제가 어려 보일 수도 있고, 예의상 저를 챙겨 주는 것도 이해해요. 하지만 굳이 삼촌처럼 저를 돌볼 필요는 없어요.”은정은 유진의 맑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쓴웃음을 지었다.“난 널 조카처럼 생각한 적 없어.”임유진은 눈썹을 찌푸렸다.“그러면 왜 이렇게 저한테 간섭해요?”은정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널 안전하게 지켜주기 위해서.”유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어이없다는 듯 작게 중얼거렸다.“정말이지, 감사하네요.”유진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저 충분히 잘 지내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유진은 성인이었고, 혈연도 아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자신을 관리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은정은 그녀의 애써 짓는 미소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깊이를 더하며, 차분하게 말했다.“안 돼.”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답답한 듯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부러 은정과 거리를 두고 앞서 걸었다.은정은 그녀가 토라진 듯한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진은 진구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다가, 문득 옆에서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는 은정을 흘깃 바라보았다. 은정은 말없이 앉아, 혼자서 술을 기울이고 있었다.입술을 살짝 깨문 유진은 구운 스테이크 한 접시를 들고 그의 자리로 갔다.“저녁 내내 거의 안 드신 거 같아서요. 고기 좀 드세요.”“고마워.”은정은 접시를 받으며 짧게 답했고, 유진은 머뭇거리며 말했다.“아까 제가 좀 심하게 말한 것 같아요. 알아요, 삼촌이 저를 걱정해서 그러시는 거.”은정은 접시를 집어 들다가 유진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러니까, 네가 틀렸다는 걸 인정하는 거야?”유진은 바로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그건 아니죠!”유진은 은정의 얼굴이 순간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장난스럽게 웃으며 덧붙였다.“고기 드세요! 랍스터도 곧 다 익을 텐데, 나중에 가져다드릴게요.”은정은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너도 좀 쉬어. 내가 먹고 싶으면 스스로 가져가면 돼.”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서서 방연하와 여진구에게 다시 합류했다.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나영하와 오예나도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둘은 일부러 크게 떠들며, 이쪽의 관심을 끌려고 했다. 그러던 중, 또 차 한 대가 캠핑장에 들어왔다.그 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젊은 커플처럼 보였고, 둘은 영하와 예나의 맞은편에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영하는 자연스럽게 다가가 도와주었고, 직접 만든 바비큐까지 나눠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영하는 어느새 그 커플과도 친해진 듯 보였다.유진은 영하가 양쪽을 오가며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조용히 영하를 바라보자, 연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신경 쓰지 마. 그냥 우리끼리 즐기자.”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하는 맥주를 반병쯤 비우고는, 은정을 향해 장난스럽게 물었다.“연애 몇 번이나 해보셨어요?”은정은 낮고 깊은 목소리로 답했다.“한 번도 없어.”유진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왜
구은서의 말은 애절했고, 눈물 가득한 얼굴은 누가 보아도 가련했다. 구은태는 자신이 이십 년 넘게 아끼고 사랑해온 딸을 바라보며 격했던 감정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임유진과 구은정은 눈빛을 마주쳤다.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서선영 모녀를 끝장내야 한다는 예감이 동시에 스쳤다. 다시는 숨 쉴 틈을 줘선 안 된다.유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휴게실 문이 갑자기 열리고 몇 명의 경찰이 들어왔다. 방 안 상황을 본 경찰들은 잠시 놀란 듯했지만, 곧 차분히 물었다.“서선영 씨는 누구시죠?”서선영은 여전히 바닥에 무릎 꿇고 있던 참이라 얼굴에 눈물이 범벅된 채로 당황스럽게 대답했다.“저예요. 무슨 일이죠?”경찰은 단호하게 말했다.“현재 한 유괴 사건에 연루되셔서, 저희와 함께 경찰서로 가주셔야겠네요.”“유, 유괴 사건이요?”서선영은 얼이 빠진 듯 말을 더듬었고, 은서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경찰이 왜 여길 찾아온 거지?’‘분명히 손기수를 시켜 장말숙 가족에게 절대 신고하지 말라고 위협했고, 따로 사람도 붙여 감시하게 했는데, 분명 신고는 없었어. 그런데 대체 어떻게 경찰이?’유진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때가 왔고, 이번에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것이다. 이번만큼은 서선영 모녀에게서 도망칠 구멍조차 허락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이에 구은태도 놀라 물었다.“유괴라니, 무슨 소리죠?”경찰은 구은태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지금 서선영 씨께서 유괴 사건에 관련된 정황이 있어 조사 차 동행을 요청드려요. 협조 부탁드릴게요.”은태는 다시 서선영을 바라보았다.“또 뭘 꾸민 거야, 이 악마 같은 여자가.”은태의 목소리는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서선영은 얼굴이 창백해진 채 입을 벌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그때, 은정이 나섰다.“같이 가죠. 조금 전까진 은서가 우리 가족이라며 감쌌잖아요? 가족이면 함께 있어야죠.”그 말에 구은서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무언가 아주 불길한 일이 다가오고 있었다.원래 오늘 구씨 파티가 끝
서선영은 곧장 구은태에게 달려가 그를 붙잡았다.“여보!”구은태는 휘청였지만 몸을 간신히 지탱했고, 그녀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쉰 목소리로 고함쳤다.“꺼져, 이 악독한 년!”서선영은 힘없이 문 쪽으로 내동댕이쳐졌고, 그 순간 문이 열리며 구은서가 들어왔다. 방 안의 참혹한 광경을 본 은서는 당황한 듯 물었다.“무슨 일이에요?”구은태는 핏발 선 눈으로 서선영을 가리키며 외쳤다.“네 엄마한테 물어봐. 대체 뭘 한 건지!”은서는 아버지의 분노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혹시 은정을 모함한 일이 들킨 건 아닌가 싶어 애써 표정을 감추고 서선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 무슨 일이야?”서선영은 그저 얼굴을 감싸 쥐고 울고 있을 뿐이었다.그때, 구은태는 갑자기 은서를 향해 시선을 돌리더니 서선영을 바라보고 물었다.“사실대로 말해. 은서, 이 애가 정말 내 딸이 맞아?”“맞아요!”서선영은 지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은서는 당신 딸이에요. 그건 정말 확실해요!”“좋아. 지금 제대로 말 안 했다가 내가 친자 검사로 진실을 알게 되면, 그땐 죽여버릴 거야!”구은태는 분노로 이를 갈며 말하자, 서선영은 흐느끼며 소리쳤다.“정말이에요! 제 목숨 걸고 맹세해요. 제가 거짓말이면 천벌을 받아도 좋아요!”그제야 은서는 상황이 점점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이건 은정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문제였다.은서는 구은정에게 맞아 쓰러져 있는 최이석을 돌아보았다. 그 순간, 어떤 장면이 뇌리를 스쳐갔고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서선영은 엉금엉금 기어가며 구은태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했다.“여보, 제가 배신하고 잘못한 건 맞아요. 하지만 은서는 정말 당신 딸이에요. 그렇게 똑똑하고 예쁜 아이잖아요.”“당신도 얼마나 예뻐했어요. 은서 봐서, 제발 이번만 용서해 주세요!”그제야 은서는 모든 걸 직감했다. 온몸에서 힘이 빠지며,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그러나 임유진은 이를 꽉 물고 단호하게
최이석도 그 자리에 얼어붙은 채 멍하니 있다가, 순간 정신을 차리고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곧장 도망치려는 듯 문을 열었는데, 그 문 너머에는, 구은정의 날렵하고도 위압적인 실루엣이 서 있었다.은정은 말없이 다가오더니 그대로 발을 들어 최이석의 가슴팍을 걷어찼다.“컥!”이석은 뒤로 넘어지며 카펫 위에 엎어졌다. 가슴을 움켜쥐며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지만, 그 울음은 진짜인지 연기인지 분간되지 않았다.그때, 숨을 거칠게 내쉬며 구은태가 천천히 걸어왔다. 그의 얼굴은 철저히 일그러져 있었고, 그 눈빛은 분노로 이글거렸다.그리고, 구은태는 서선영 앞에 멈춰서더니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 서선영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뺨을 후려치는 소리와 함께 서선영은 그 충격에 그대로 몸이 비틀어졌고, 얼굴을 감싸 안으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이 더러운 년!”구은태는 서선영의 옷깃을 거칠게 움켜쥐고 또다시 손을 들어 그녀의 반대쪽 뺨을 갈겼다.“제가 잘못했어요. 한순간, 제가 정신이 나갔었어요.”서선영은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으며 구은태의 손을 붙잡고 오열했다. 그녀의 두 볼은 이미 시퍼렇게 부어오르고 있었다.“대체 너희 둘, 언제부터 이런 짓을 벌인 거야!”구은태는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그 순간, 최이석이 조롱 섞인 웃음을 흘리며 비틀비틀 일어섰다.“솔직히 말해줄까요? 서선영이 당신 만나기 전부터 벌써 나랑 자고 있었어요. 회사 들어간 이후로는 매주 만나서 몸 섞었고요.”“입 닥쳐!”서선영은 미쳐 날뛰듯 소리쳤지만, 최이석은 그녀를 보지도 않고 구은태만을 노려봤다.“저 여자는 당신을 사랑한 적 없어요. 사랑한 건 당신 지갑뿐이고요. 30년 전, 당신이 술 마시고 덮쳤다고 생각했죠?”“웃기지 마요. 전부 미리 짜놓은 대본이었으니까. 그때 은서가 생겼고, 도망친 척하면서도 사실 계속 강성에 있었어요.”“당신 바로 곁에서, 우릴 속이고 있었던 거죠. 참, 당신 원래 부인 왜 갑자기 병세가 악화됐는 줄 알아요?”“서선영이 일부러 임신한 배를
구은서는 서선영보다 훨씬 더 잔인했기에, 임유진은 점점 불안해졌다.“혹시 그 애까지 다치게 되는 건 아닐까요?”이번 일은 유진이 먼저 제안한 계획이었다. 그런데 은서가 장말숙을 압박하기 위해 그 손자를 납치할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그럴 일 없어.”그러나 구은정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그 아이는 절대 다치지 않을 거야.”유진은 그제야 조금 안심했고, 은정은 이어서 설명했다.“장말숙은 처음부터 독을 품은 호랑이와 손잡은 셈이지. 이건 스스로 자초한 일이야.”“은서가 장말숙의 손자를 납치했다는 건 이미 그 집안을 완전히 조사해 놓았다는 뜻이야.”“내가 강성을 떠나지 않는 한, 언젠가는 아이를 이용해서 조종하려 했을 거야.”“그런데 네가 먼저 움직여준 덕분에 우린 미리 조치할 수 있었고, 결국 아이도 지켜냈지.”유진은 고개를 갸웃하며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봤다.“예전과 완전 딴사람이 된 것 같아요. 위로까지 이렇게 부드럽게 하다니?”은정은 애옹이를 옆으로 밀어내고 유진을 품에 끌어당겼다.“질문 하나 해도 돼? 너는 서인을 좋아해, 아니면 구은정을 좋아해?”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둘 다 같은 사람 아닌가요?”은정은 묵직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넌 분명히 다르다고 생각했잖아.”유진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중얼거렸다.“사실 처음부터 한 사람이었어. 다른 건 사랑하느냐, 사랑하지 않느냐의 차이였을 뿐이죠.”그리고 고개를 들며 은정의 눈을 마주 봤다.“내 말 맞죠?”이에 은정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예전의 내가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생각해?”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촉촉히 빛나는 눈으로 미소 지었다.“아니요. 오히려 시언 사장님이 날 사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서, 나는 그게 정말 고맙거든요.”은정의 눈빛이 깊고 짙어졌다. 가슴이 저릿할 만큼 미안함과 애틋함이 가득 차올랐다. 은정은 고개를 숙여, 유진에게 입을 맞췄다.“유진아. 난 늘 널 사랑했어.”은정은 언제나 유진만을 마음에
“역시 이런 식으로 문제가 될 줄 알았어요.”은서는 싸늘한 눈빛으로 말하자, 손기수가 물었다.[이제 어떻게 하죠?]구은서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장말숙한테 손자가 있잖아요. 그 애를 데려가요. 안전한 곳에 숨겨두고 지켜여.”이에 손기수는 비죽 웃으며 말했다.[그건 납치 아닌가요?]“이건 우리 엄마 뜻이에요.”은서는 그 말을 강조하듯 단호하게 말했다.“일만 제대로 끝내면, 보수는 두 배로 줄 거예요.”그제야 손기수는 만족스레 웃으며 대답했다.[좋아요. 저한테 맡기세요.]은서는 다시 신신당부했다. “숨겨두기만 해야 해요. 절대 다치게 하면 안 돼요.”이에 손기수는 급히 말했다.[우리가 어떻게 감히 그런 짓을 하겠어요!]은서는 차가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우리 엄마 말씀만 잘 따르면, 손해 보는 일은 없을 거예요.”모든 게 은정을 내쫓는 날까지만 버티면 그만이었다. 장말숙의 아들이 위협되지 않게 만들어야 했고, 지금 중요한 건 은정을 최대한 빨리 강제로 떠나게 만드는 일이었다.두 시간 후.오현빈이 급히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형님, 큰일이에요. 장말숙 아주머니 손자가 납치당했어요!”은정의 눈빛이 차갑게 되었다. 그와 유진의 계획은 장말숙의 아들이 철없는 무뢰한이라는 걸 이용해, 서선영 쪽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나게 만들고 그 사이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것이었다.그런데 서선영은 한 수 더 앞질렀다. 직접 손자를 납치해 버린 것이다. 은정은 느긋한 듯 말했지만, 말투엔 서늘한 살기가 묻어났다.“왜 못 막았어?”현빈이 대답했다.[도착했을 땐 이미 데려가고 난 뒤였어요. 아이는 집에 혼자 있었고요.]장말숙은 요즘 일을 그만두고 손자를 돌보고 있었다. 자기 아들은 놀기 좋아하고 도박을 일삼으며 최근 큰 빚까지 졌고, 며느리는 친정으로 들어가 버렸다.장말숙이 서선영의 돈을 받은 것도 빚을 갚고 며느리를 다시 불러들이기 위한 것이었다.그날 점심을 먹고 잠시 슈퍼에 다녀온 사이, 손자가 납치된 것이다.은정은 알고 있
“아주머니는 분명 그날 일에 대해 알고 있어요. 그 사람한테 직접 확인하러 갈 거예요!”임유진은 말을 끝내자마자 그대로 뛰쳐나갔다.“유진아!”구은서는 몇 걸음 뒤쫓았지만, 유진은 이미 계단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은서는 굳게 이를 악물며 눈살을 찌푸렸다.서선영이 집에 없다는 걸 알자, 그녀는 바로 전화를 걸었다.“장말숙 아주머니 잘 지켜봐요. 유진이 그날 일 알아보려고, 지금 그 사람 찾으러 갔으니까.”그러나 서선영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걔가 뭘 안다고 찾아?]은서는 차분히 말했다.“유진은 임씨 집안 사람이야. 찾으려면 못 찾을 사람이 없죠.”이에 서선영의 말투도 조금 무거워졌다.[알았어. 내가 금방 사람 붙여서 장말숙 감시하라고 할게.]은서는 이어서 냉랭하게 따져 물었다.“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지 않는다면서요? 근데 걔는 어떻게 안 거예요?”유진이 알았다는 건, 임씨 가족들까지도 이미 감지했다는 뜻이었다. 이에 은서는 불안감에 입술을 꾹 눌렀다.서선영은 얼버무리며 말했다.[아마 도우미 중 누가 말실수했을 거야. 다시 철저히 단속해 둘게. 걱정하지 마. 소문 좀 난다 해도 너한테까지 영향은 안 가. 넌 그냥 조용히 대본 연습이나 해.][이번 영화, 내가 네 외삼촌 꼬드겨서 겨우 투자받은 거 알지? 이번 기회 잘 잡아야 해. 딴 건 신경 쓰지 마. 연기만 잘하면 돼.]은서는 그 말에 더욱 날카로워졌다. 이번 영화는 유명 감독의 대작이었고, 은서에게는 이미지 회복의 유일한 기회였다. 그렇기에 서선영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나 곧 촬영 들어가요. 그러니까 이번 일 절대 망치지 마요.”[알았어!]서선영은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유진은 급히 차로 돌아와 깊게 숨을 들이쉰 후, 곧장 은정에게 전화를 걸었다.“서선영 쪽에서 곧 움직일 거예요.”[알고 있어. 이미 준비해 뒀어.]은정의 목소리는 침착했고, 유진은 안심하며 숨을 내쉬었다.이윽고,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고생 많았어.]이에 유진은 입꼬리를 살짝 올
“아파요!”유진은 짧은 비명을 내뱉으며 순식간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는 팔을 뻗어 구은정의 목에 매달리듯 안으며, 자기 얼굴을 숨기려 했다.이에 은정은 그녀의 어깨를 쓸어내리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낮게 웃었다.“왜 예전 같지 않아? 예전엔 몰래라도 키스하려고 했으면서, 이젠 실컷 하라고 해도 도망치기 바쁘네.”유진은 은정을 꼭 안으며 눈가가 붉게 물들었지만 속은 터질 듯 행복했다. 이제는 몰래 키스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을 때 언제든지 할 수 있었다.은정은 유진의 발그레한 귀에 입을 맞추며 낮게 속삭였다.“전에 난 늘 걱정했어. 네가 그냥 어린 마음에 나한테 끌리는 거라고. 그저 신기하고 새로워서, 가질 수 없으니까 더 마음이 가는 거라고.”“우리가 진짜로 사귀게 되면 금세 질릴 거라고. 나는 사실 정말 재미없는 사람이야. 총 쏘고 싸우는 것 빼곤 할 줄 아는 게 없어.”“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도 몰라. 마음도 더 이상 젊지 않아.”“그래서 넌 언젠가 내가 생각보다 별거 아니라는 걸 깨닫고, 그 마음이 식을까 봐 두려웠어.”유진은 목이 메어,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그럼 내가 기억 잃었을 때, 왜 다시 나한테 다가왔어요?”은정은 예전엔 그렇게 차갑게 거절했던 사람인데, 교통사고 한 번 났다고 갑자기 사랑하게 된 걸까? 혹시 죄책감 때문은 아니었을까?그런 생각이 유진을 계속 불안하게 했다. 잠시 침묵하던 은정이 조용히 말했다.“아마 너 없는 세상이, 정말로 견딜 수 없을 만큼 어둡고 차가웠기 때문일 거야.”그 말에 유진의 가슴은 요동쳤다. 그녀는 조용히 몸을 일으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마음 깊은 곳까지 꿰뚫어 보려는 듯, 어둠을 걷어내고 자신의 빛으로 은정의 세상을 덮어주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유진은 다시 한번, 은정에게 입을 맞췄는데, 이번엔 더욱 깊고 부드러운 입맞춤이었다.은정은 곧 유진을 세게 안았고, 불같이 뜨거운 열기가 유진을 감쌌다. 죽음 같은 어둠 속에서 되살아난 사람처럼, 은정의 키스는
“그 사람들이 설마...”유진은 커다란 눈을 뜨고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이에 구은정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네가 생각한 그대로야.”유진은 믿기지 않는 듯 놀람과 동시에 깊은 자책의 기색을 띄웠다.“결국 내가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자꾸 그런 식으로 네 탓 하지 마.”은정은 그녀의 뺨을 다정하게 쓸어내리며 말했다.“너는 둘 사이의 더러운 사정도 몰랐잖아.”유진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서선영은 그래도 이해가 가. 근데 구은서는 왜 그렇게까지 자기 엄마한테 협조한 거예요?”“자기 명예가 달린 문제인데, 게다가 지금은 연예인이잖아요. 설령 피해자라 해도, 그런 얘기 퍼지는 게 좋을 리 없잖아요.”은정은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대답했다.“십몇 년 전 그 일 땐, 은서는 진짜로 몰랐던 것 같아. 내가 샤워 끝내고 나왔을 땐 자고 있었고, 서선영이 소리 지르고 난리 쳐도 안 일어났거든.”“그땐 그냥 서선영한테 이용당한 거지. 근데 이번엔 서선영이 어떻게 설득했는지는 나도 몰라.”유진은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서선영은 정말 너무 악랄했다. 자기 딸까지도 그런 식으로 이용한다면, 못 할 짓이 뭐가 있을까?더구나 서선영은 알고 있었다. 이런 식의 루머가 은정에게 가장 치명적이라는 것을. 그리고 이게 바로 구은태에게도 가장 아픈 약점이라는 것을. 그래서 서선영은 또다시 그 수를 썼다.유진은 곰곰이 생각하다가 중얼거렸다.“그때 전화받은 아주머니, 그 사람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찾을 수는 있어. 하지만 서선영한테서 돈을 받았고, 아마 협박도 받았을 거야.솔직히 말해줄 가능성은 작아.”은정은 냉정하게 말하자, 유진은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그래도 찾아봐야죠. 당장 데리고 가서 집에 가서 진실을 말하게 해야 해요!”은정은 유진의 손목을 붙잡았는데, 목소리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러웠다.“서두르지 마.”“어떻게 안 서둘러요! 지금 이미 밖에선 온갖 소문이 돌고 있다고요!”유진이 답답해하며 소리치자,
“그날 밤 전화했을 때 말이야.”유진은 깜짝 놀라며 말했다.“그게 바로 그날이었어요?”“그래.”은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그는 서선영이 무슨 짓을 꾸미는지 몰랐다. 혹시 다시는 유진을 볼 수 없게 될까 두려워, 마지막으로 목소리라도 듣고 싶어서 전화를 걸었다.사실은 유진에게 자기 집으로 와달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유진은 자책하듯 말했다.“나도 그때 뭔가 이상하단 걸 느꼈어. 근데 안 찾아갔어요.”은정은 유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말했다.“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그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고, 유진은 단지 모호한 한 통의 전화로 구씨 저택까지 달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유진의 마음속은 여전히 무겁고 미안했다.“내가 갔더라면, 그 여자의 계략이 통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는데요.”“유진아, 우리 이제 과거에 대해 그만 후회하자. 응?”은정은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하자, 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중요한 건, 서선영 모녀의 거짓말을 어떻게 밝혀낼지였다.“그 여자가 떠나라고 하니까, 진짜 떠나려던 거예요? 도대체 언제부터 그렇게 만만한 사람이 됐어?”유진이 화가 난 듯 말하자, 은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차가운 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대답했다.“내 명예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았어. 네가 그 일 알고 나서 날 더 미워할까 봐, 그게 무서웠지.”호텔에서 유진이 여씨 집안 가족 모임에 참석한 걸 봤을 때, 그는 마음이 무너졌다.자신은 온몸이 상처투성이고, 앞으로도 더러운 과거 때문에 손가락질받을 인생인데, 그런 자신의 곁에 유진을 두는 게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유진은 따뜻하면서도 가슴 아픈 눈빛으로 은정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유진은 두 손으로 은정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안개 낀 듯한 눈동자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은정의 어두운 그림자를 밀어내고 그 마음속까지 빛으로 채우려는 듯한 눈빛이었다.이번에는 유진이 먼저 입을 맞췄는데, 그 키스는 애틋하고 따스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