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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이 꺼진 방 안은 숨을 죽인 듯 고요했다.
차가운 바닥 위로 촛불이 뿜어내는 따뜻한 불빛이 일렁이고 있었고,
그 작은 조명들만이 이 공간의 유일한 온기처럼 흔들렸다.
깊은 밤, 시곗바늘은 자정이 훌쩍 넘은 시점을 가리키고 있었고,
바깥의 세상은 모두 잠든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방의 가장 깊숙한 곳, 침대 위에 한 남자가 누워 있었다.
이준. 이레제약의 대표이사. 성공한 청년 CEO, 냉정하고 완벽한 경영인.
그러나 지금 그의 얼굴엔 그러한 수식어들이 어울리지 않았다.
눈꺼풀은 닫혀 있었지만 이마엔 미세한 긴장감이 남아 있었고,
입술은 말없이 단단히 다물려 있었다.
그는 잠들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잠드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의 머리맡에 조용히 다가온 사람은 서윤이었다.
긴 코트를 벗어 의자에 걸쳐두고, 방 안으로 성큼 들어오며 공간을 가볍게 둘러보았다.
그녀의 발걸음은 무척 조심스러웠다. 그가 깨지 않도록.
그러나 동시에, 그가 자신을 인식하길 바라는 것처럼.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그녀의 그림자도 벽에 부드럽게 퍼졌다.
마치 그의 불안한 심장을 감싸는 어떤 형체 없는 감촉처럼.
서윤은 조용히 침대 곁으로 다가가, 천천히 몸을 굽혔다.
“이준 대표님.”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하고 단정했다.
그러나 어딘가 낮고 부드러운 결이 섞여 있었다.
말보다 숨결이 더 가깝게 닿는 거리.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작은 오일병을 꺼냈다. 라벤더, 샌달우드,
베르가못이 섞인 조합이었다. 진정과 안정,
그리고 미세한 각성. 그녀가 직접 만든 조향이었다.
손끝에 오일을 떨어뜨리고, 따뜻한 체온으로 덥힌 손바닥을
이준의 관자놀이 근처로 가져갔다.
처음으로 이준의 숨소리가 조금 길어졌다.
“오늘은 아무 말 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시 한번 방 안을 스치고 흘러갔다.
마치 처방처럼. 그녀는 말을 하되,
그것을 언어로서가 아닌 자장가처럼 풀어냈다.
“단지 여기 있다는 걸 느끼게 해드릴게요.”
그의 손가락이 아주 천천히, 작게 움찔했다. 저항은 없었다.
대신, 그 안에는 어딘가 절박한 의존이 숨어 있는 듯했다.
서윤은 그 손을 감싸쥐지 않았다. 다만 손등 위에 손을 올리고,
체온을 전달할 뿐이었다. 감각 중심의 치유.
그녀는 말보다 온도가 더 많은 것을 해결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녀의 온도에 반응하기 시작했다는 것도.
그 순간, 그녀는 조심스럽게 눈을 감았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그의 불안한 리듬에 자신의 숨을 맞추었다. 이 공간 안엔 오직 둘만 존재했다.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공기마저 두 사람을 가만히 감싸고 있었다.
그렇게 첫 번째 밤이 흘러갔다.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가장 많은 감정이 오간 밤.
침묵 속에서, 그들의 관계는 이미 조용히 시작되고 있었다.
* * * * * * * * * * * * * * * *
방 안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었다.
창밖으로 스며든 희미한 도시의 불빛도 닿지 않는 깊숙한 밀실,
커튼은 빛 한 줄기 새어 나오지 않게 단단히 닫혀 있었고,
어젯밤 그녀가 밝혀놓은 촛불들만이 조용히,
아주 미세하게 흔들리는 불빛으로 존재를 알리고 있었다.
서윤은 침대 끝자락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손등 위에 얹힌 촛불의 노란 그림자가 이준의 윤곽을 어루만졌다.
그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고, 밤새 땀이 약간 맺혔는지
이마 근처엔 작은 습기가 맴돌았다. 그의 표정은 평온했지만,
뺨 끝과 목덜미 주변의 긴장은 아직 풀리지 않은 듯했다.
“잠은 좀 주무셨을까…”
혼잣말이 낮게, 거의 숨결처럼 흘러나왔다.
그는 어젯밤, 서윤의 손끝 아래에서 잠시나마 고요한 안정을 찾은 듯 보였다.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는 다시 의식적으로 거리를 두려 애썼다.
하지만 이미 첫날 밤부터 모든 경계는 예상보다 더 쉽게 침투당했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서윤은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의 팔목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체온, 맥박, 미세한 떨림. 감각은 숫자보다 먼저 반응했다.
그는 아직 깨어 있지 않았다. 하지만 몸은 그녀의 접촉을 기억하고 있었다.
거부하지 않았고, 긴장도 이전보다 덜했다.
“2회차 감각 반응, 안정화 상태로 진입 중.”
마치 실험 노트를 정리하듯 혼잣말을 되뇌며,
그녀는 자신의 감정이 어디까지 허용되어야 하는지를 가늠해보았다.
이 남자는 환자다. 그것이 그녀가 붙잡고 있는 마지막 선이었다.
하지만 그 선 너머에서 자꾸만 속삭이듯 이준의 존재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그의 손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마치 꿈결처럼.
“……윤서윤.”
그가 낮게, 아주 천천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서윤의 동공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이준은 분명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부른 것은 처음이었다.
그 목소리는 감정이 들어 있지도, 의식적인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깊은 곳에서 올라온 속내처럼.
서윤은 침대 옆에 놓인 조그마한 아로마 오일 통을 집었다.
라벤더와 머틀, 로즈우드. 이 조합은 진정과 무의식 유도를 동시에 끌어내는 데 적절했다.
그녀는 손끝에 소량을 덜어, 그의 관자놀이와 목덜미 근처에 아주 조심스럽게 문질렀다.
이건 그저 처방의 일환이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도 이준은 다시금 그녀의 손길을 느낀 듯, 아주 미세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 소리가, 이상하게도 서윤의 심장 쪽에서 먼저 반응했다.
무게중심이 어긋났다. 이 공간, 이 온도, 이 거리.
모든 것이 너무 쉽게 그녀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오늘은…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서윤은 조용히 속삭였다. 눈을 감은 그에게 말하듯,
아니 어쩌면 자신에게 말하듯. 오늘은 의무감도,
과거도 내려놓고 단지 한 사람의 감각을 위해 존재해도 괜찮다고.
그렇게라도 스스로를 설득하지 않으면 그녀는
이 공간 안에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의 눈꺼풀이 천천히 떨렸다. 아마도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그의 무의식은 그녀의 손길을 따라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서윤은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과연 처방인지,
감정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다.
촛불 하나가 바람도 없이 툭 꺼졌다.
그녀는 그 조용한 사라짐마저도 이 공간에서는 이준의 감정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 이준은 깊은 잠을 잤고, 서윤은 단 한숨도 잠들지 못했다.
그녀는 알았다. 그가 내뿜는 불안의 온도에 이미 자신의 체온이 물들고 있다는 걸.
늦은 밤. 창밖에는 빗방울이 조용히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람 한 점 없이 고요한 공기 속, 어두운 사무실은 이미 조명을 끈 채 반쯤 잠든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탁상시계가 밤 열한 시를 알리고 있었고, 이준은 아직 퇴근하지 않은 채, 조용히 서윤의 메모를 들여다보고 있었다.은색 펜으로 눌러 쓴 글씨. 조심스럽게 꾹꾹 눌러 쓴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글귀에는, 하루치 피로를 다독이는 온기가 담겨 있었다.“오늘은 커피 말고, 따뜻한 우유를 드세요. 몸이 먼저 회복돼야 마음도 따라와요.”그 짧은 문장 속에 담긴 배려가, 이준의 마음에 조용한 파장을 남기고 있었다.언제부턴가 그는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돌봄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어색하지 않게 느껴지고 있었다. 경계보다, 익숙함보다, 더 빠르게 스며드는 감정이 있었다.그리고 그런 감정을 누구보다 먼저 느끼고 있는 사람은 서윤 자신이었다.그날따라 서윤은, 평소보다 더 조용히 이준의 공간을 정리하고 나왔다.마치 어떤 분위기나 감정의 파동이 그 안에 잔잔하게 남아 있는 걸, 무너뜨리고 싶지 않다는 듯이.현관을 나서던 순간, 이준이 뒤늦게 불러세운 건 단순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서윤 씨.”서윤은 천천히 돌아섰다. 문고리를 손에 쥔 채, 그의 목소리를 향해 눈길을 줬다.“…오늘은 그냥 보내고 싶지 않네요.”그 말 한마디가 무겁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흔들었다. 그리고 서윤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복도를 따라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둘 사이의 거리에는 어떤 설명도, 조건도 없었다. 단지 마음이 머물고 싶은 곳에 천천히 닿아가고 있을 뿐.사무실 안은 여전히 어둡고 고요했지만, 서로의 존재가 그 공간을 천천히 따뜻하게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조용히 서윤 앞에 멈춰 섰다. 그리고 아무런 전조 없이, 천천히 손을 들어 그녀의 손끝을 감쌌다.서윤의 손은 놀랄 만큼 차가웠고, 이준의 손은 그만큼이나 조심스러웠다.“…요즘, 이상해요. 감정이 자꾸 앞서요
아침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찾아왔다. 하지만 서윤의 몸과 마음엔 어제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부엌 한쪽에 놓인 머그잔, 접힌 담요, 창가에 기대어 있던 남자의 등. 그것들이 모두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쩌면 자신이 조금씩 그와 닮아가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몰랐다.서윤은 조용히 물을 끓이며 천천히 자신의 감정을 정리했다. 이준이라는 사람은, 다가오지 않으면서도 한 걸음씩 들어오고 있었다. 경계를 넘지 않지만, 머뭇거림조차 배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방식으로.현관 쪽에서 부스럭 소리가 났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아침 햇살이 창 너머로 스며들어 이준의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회색 니트와 트레이닝 팬츠 차림의 그는 전날보다 훨씬 편안해 보였고, 그 표정에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가 묻어 있었다."잘 주무셨어요?"이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제의 침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다는 듯한, 조심스러운 인사였다.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를 따랐다. 컵 사이로 퍼지는 향이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조금 부드럽게 만들었다."어제… 불편하진 않으셨어요?"그의 질문엔 진심이 묻어 있었다. 단지 매너나 형식이 아닌, 진짜 걱정이. 서윤은 머리끝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천천히 대답했다."생각보다… 괜찮았어요."이준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그 미세한 변화 하나가 무겁던 아침을 한결 가볍게 만들었다. 그는 창가 쪽으로 걸어가 블라인드를 반쯤 올렸다. 밝아진 실내가 둘 사이를 조금 더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식탁에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을 나누는 시간. 특별한 대화 없이도 두 사람 사이엔 무언가 흐르고 있었다. 작은 눈빛,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커피 향이 닿는 순간들. 그런 것들이 감정을 조금씩 증폭시켰다.식사를 마친 이준이 문득 말했다."오늘 병원 가지 않으셔도 돼요?"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작은 미소를 보였다. "당분간은 오후 일정으로만 잡아놨어요. 오전엔 시간 여유가 있어서요."
소파에 나란히 앉아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어색한 정적이 없었다. 오히려 말이 필요 없는 편안함이 천천히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이준은 천천히 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려, 그녀가 기대고 있는 어깨 너머로 고요한 밤을 바라보았다.서윤은 여전히 그의 어깨에 가볍게 몸을 기댄 채, 잔잔한 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의 체온이 등 너머로 조심스럽게 전해졌고, 그 감각이 마치 오랜만에 돌아온 따뜻한 집처럼 익숙하고 부드러웠다.이준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저… 서윤 씨가 이렇게 가까이 있어 주는 게, 어쩐지 믿기지 않아요."서윤은 눈을 감은 채로 천천히 말했다."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대신… 그냥 느끼기만 해도 돼요."그 짧은 문장이, 이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았다. 늘 분석하고, 이해하려 했던 그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단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고 싶었다.조용한 시간이 흘렀고, 서윤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그 움직임에 조금 놀란 듯 그녀를 바라봤다."벌써 가세요?"그녀는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너무 오래 있으면, 다음이 더 어색해질까 봐요. 오늘은 여기까지."이준은 잠시 머뭇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그럼… 다음도 있는 거죠?"서윤은 그를 바라보며 대답 대신 손을 살짝 흔들었다. 짧은 손짓 하나에 이준은 처음으로 웃음을 터뜨렸다.현관 앞에서 신발을 신으며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고마웠어요. 오늘. 그리고… 맛있었어요. 정말로."그녀의 말에 이준은 다시 한 번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서윤 씨가 있어줘서 가능했어요. 오늘이라는 시간이."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서로를 바라보던 눈빛. 그 속에는 다음을 기다리는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서윤이 돌아간 뒤, 이준은 조용히 거실 정리를 마치고, 부엌에 남은 찻잔을 씻었다. 물소리가 가라앉자, 집 안엔 그녀의 잔향만이 남았다. 라벤더 향초가 꺼진 자리에서도, 그녀가 앉았던 쿠션의 모양에서도.그는 그 향기에 오래도록 머물렀다. 마치 그 따
이준은 서윤과의 대화를 떠올리며 조용히 사무실 창가에 서 있었다. 유리창 너머로 내려다보이는 도시는 밤을 향해 깊어지고 있었고, 불규칙하게 점등된 창들 사이로 사람들의 삶이 조금씩 새어 나왔다. 그는 아직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그저 그녀와 마주했던 진료실의 불빛을 기억하고 있었다.그 시각, 서윤 역시 자신만의 공간에서 조용히 앉아 있었다. 라벤더 향초는 반쯤 타들어가 있었고, 불빛은 어느새 작아져 그녀의 그림자도 흐릿해지고 있었다.이준의 마지막 말, '오늘 서윤 씨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고 싶었어요', 그 말이 이상하게도 밤새 귓가에 남아 있었다. 그 어떤 위로보다도 진심처럼 느껴졌기에.다음 날 아침, 진료실 앞에서 마주친 두 사람은 어제와 다르지 않은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그 짧은 눈맞춤에는 이전과는 다른 작은 울림이 있었다."좋은 아침입니다, 대표님.""좋은 아침이에요. 잘 쉬셨어요?""네, 덕분에요. 대표님도요?"이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천천히 되새겼다. 덕분에 그 말이 그토록 따뜻하게 들릴 줄은 몰랐다.오전 회의 후, 이준은 커피 한 잔을 들고 옥상으로 향했다. 거기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 옆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그가 다가오는 걸 느끼고 고개를 들어 미소 지었다."여기… 생각보다 조용해서 좋아요. 자주 오세요?""네, 예전에는 종종 왔는데… 요즘은 그럴 여유가 없었어요."이준은 그녀 옆에 앉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어제… 그 말. 마음이 먼저 움직였다는 말요. 이상하지 않으셨어요?"서윤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아니요. 오히려… 저도 같은 기분이었어요. 요즘은 마음이 먼저 움직이게 되는 날들이 많거든요."그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햇살에 살짝 반사된 그녀의 머리카락, 바람에 흔들리는 화분의 그림자, 그 모든 것이 조용하고 따뜻하게 그를 감싸 안았다.그날 저녁, 퇴근 무렵의 복도에서 다시 마주친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나란히 걸었다. 병
병원 건물은 평일의 마지막 빛을 받아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었다. 이준은 자신의 진료실에 들어서자 창문을 반쯤 열었다. 가을바람이 천천히 밀려들며 서랍 위에 둔 종이들을 살짝 흔들었다.그는 조용히 그 바람을 마주했다. 이전에는 이처럼 하루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어색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루의 끝자락에서 꼭 한 번은 서윤을 떠올리게 되는 자신을, 조금은 받아들이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서윤은 병원 구내 카페에서 커피 두 잔을 들고 나타났다. 하나는 늘 자신이 마시던 라떼, 다른 하나는 얼마 전 이준이 마셨던 블랙."오늘도 환자 많으세요?"서윤의 물음에 이준은 커피를 건네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네. 주말 전이라 그런지 예약이 많아요."그는 자연스럽게 그녀의 커피잔을 가리키며 물었다."근데… 제 커피까지요?"서윤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그냥… 어제 감사했어요. 혼자서만 좋은 시간을 보낸 건 아닌 것 같아서요."그 말에 이준은 잠시 멈칫했다. ‘혼자가 아닌’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마음에 남았다.그날 오후, 병원 옥상은 조용했다. 이준은 짧은 틈을 내어 옥상으로 올라왔고, 그곳엔 이미 서윤이 라벤더 화분을 옮겨 놓고 있었다."조금 더 빛이 잘 드는 쪽으로요. 향이 더 진해질 것 같아서."그녀의 설명에 이준은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은 난간 가까이에 나란히 앉았다. 바람이 불어 잎이 흔들렸고, 조용한 정적이 둘 사이를 채웠다.하지만 그 정적은 더 이상 어색하거나 불편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로가 있는 공간을 자연스럽게 감싸주는, 조용하고 다정한 시간이었다.서윤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대표님, 가끔 생각해요.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사람과, 그냥 함께 있는 거요."이준은 그 말을 곱씹듯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말없이도 편한 게… 참 귀한 거라는 걸 요즘 많이 느껴요."그들은 그렇게, 말보다 마음이 앞서는 오후를 함께했다.해질 무렵, 병원 복도에서 마주친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병원 복도에는 환자들의 움직임과 간호사들의 분주한 발걸음이 얽혀 들려왔다. 이준은 짧은 점심 식사를 마친 뒤, 서윤이 있는 카운슬링실을 향해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특별한 이유 없이 그저… 그녀가 있는 공간을 향해 걸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서윤의 웃음소리에 그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다. 누군가와 상담 중인 듯, 그녀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게 흘렀다.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평온해졌다.그는 괜히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조심스레 쥐었다 놓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진료실로 돌아갔다. 다가가고 싶지만 방해하고 싶지는 않은 마음. 그것이 그가 이제 막 배우고 있는 감정의 온도였다.오후 내내, 이준은 어딘가 산만했다. 환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서는 계속 그녀의 웃음소리가 맴돌았다. 그저 평범한 한순간이었을 뿐인데, 그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을 흔들었다.진료가 끝난 늦은 오후, 그는 다시 그녀를 향해 걸었다. 이번엔 노크를 했다. 서윤이 문을 열었을 때, 이준은 조용히 작은 플라스틱 화분 하나를 내밀었다."이거… 복도에서 보다가 예뻐서요. 카운슬링실 창가에 놓으면 좋을 것 같아서."서윤은 화분을 받아 들고 천천히 웃었다. 화분 안에는 작은 허브 잎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라벤더였다."감사해요. 이준 씨. 향이 좋네요.""서윤 씨가 알려준 향이에요. 그날 이후로… 자꾸 찾게 되더라고요."두 사람은 창가에 화분을 함께 놓았다. 창문 너머로 햇살이 스며들고, 그 빛에 비친 라벤더 잎은 고요하게 흔들리고 있었다."가끔 생각해요."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공간이 참 이상해요. 마음이 무거운 이야기가 오가는데, 어쩐지 점점 더 따뜻해져요. 사람들의 고백이 이 공간을 다정하게 바꿔주는 것 같기도 하고."이준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듣고 있었다."그리고 이준 씨와 나누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