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태는 그대로 쓰러져 버렸고 머리에선 피가 흘러나왔다.하지만 연다인은 그가 죽는 걸 원치 않았다. 여하간에 여기서 죽게 된다면 분명 그녀가 한 짓임을 알게 될 테니까.머리를 굴리니 금방 좋은 생각이 떠오른 그녀는 임슬기가 돌아오면 임슬기에게 이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기로 했다.조금 걱정되는 것은 오정태가 무언가를 알고 있을지 모르니 일단 지켜보자고 생각했다.그녀는 서둘러 문을 닫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다가 방금 힘을 너무 세게 준 탓에 상처가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면서 옷을 붉게 물들였다는 것을 발견했다.결국 하는 수 없이 그
임슬기는 여전히 머릿속이 조금 흐릿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연다인을 위한 배정우의 억지로 차가운 돌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원래는 자신이 날이 밝을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갑자기 세차게 내리는 비에 그녀는 점차 정신이 아득해지기 시작했고 폐에 경련이 일어나면서 피가 울컥울컥 입안으로 역류해 나왔다.그러다가 시간이 조금 더 지나니 더는 버틸 수 없었던 그녀는 눈을 감게 되었고 그대로 쓰러진 것이다.그녀는 자신이 죽은 줄 알았고 그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몇 숟가락 먹고 나니 임슬기는 드디어 목이 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그러나 기침을 하자 목이 찢어질 듯 아파 그녀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고 말았다.“고마워요, 변호사님. 이젠 제가 알아서 떠먹을게요.”진승윤은 고개를 끄덕인 후 침대를 정리해 주었다.“뭐라도 조금 먹어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일단 죽을 데워 왔어요. 살코기 죽인데 괜찮아요?”그는 지난번 살코기 죽을 먹고 싶다고 하던 게 떠올랐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살코기 죽으로 사 오라고 했고 두 시간 동안 보온 팩에 있긴 했지만 이미 식어버려 다시 데워 왔다.임
“난 바람을 피운 적 없어.”임슬기는 다시 한번 분명하게 말했다.그녀는 정말로 바람을 피운 적 없었지만 배정우가 왜 자신의 말을 믿지 않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그러자 배정우는 차갑게 피식 웃으며 말했다.“그럼 그때 남자랑 호텔은 왜 간 건데? 설마 연기라도 했다는 거냐?”임슬기는 고개를 저었다.“난 남자와 호텔에 간 적도 없어.”“없다고? 임슬기, 넌 내가 바보로 보이나 봐? 내가 두 눈 뜨고 네가 남자와 호텔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없다고!”“날 믿어줘.”그날 그녀는 확실히 호텔을 간 적 있었지만 그런 목적으로 간
“대표님, 연다인 씨가 또 출혈 과다로 쓰러졌습니다. 지금 혈액 창고에도 연다인 씨 혈액형과 맞는 혈액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배정우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임슬기 손등에서 새어 나오는 피를 보고는 차갑게 말했다.“다인이를 병원으로 데리고 와. 나한테 방법이 있으니까.”“네, 알겠습니다.”그는 임슬기의 곁을 지키느라 하루 동안 연다인의 상태를 살펴보지 못했다. 여하간에 연다인의 몸 상태는 연약해도 너무 연약했기 때문이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철인이었으니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방금도 살아남지 않았는가. 이렇듯 팔팔
임슬기는 온몸이 아팠다. 폐는 물론이고 복부, 손, 무릎 전부 아팠고 아무리 힘을 넣어보려고 해도 넣어지지 않았기에 배정우에게 끌려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리에 힘이 풀리며 주저앉고 말았다.두 무릎은 원래부터 돌에 부딪혀 상처가 난 상태였고 빨갛게 부어오르기도 했다. 그런데 차가운 타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버리니 그 고통은 말 못 할 정도였다.그 순간 임슬기는 눈물이 흘러나왔지만 울지 않으려고 이를 빠득 갈며 애를 쓰면서 배정우에게 멈추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결국 이상함을 감지한 배정우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잔뜩 고
배정우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심드렁한 눈빛으로 보았다.“임슬기, 연기하지 마. 어차피 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다 아니까.”죽지 않을 거라니...그녀는 방금 죽음의 문턱에서 겨우 살아난 지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 사실을 잊은 것일까?그런데도 그는 그녀가 죽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어 임슬기는 헛웃음만 나왔다.“정우야, 우리 내기할래? 내가 죽는지 안 죽는지 말이야.”순간 배정우의 살짝 흔들리며 아팠다. 그러더니 이내 내기를 받아들였다.“그래. 내기하자.”그 말을 들들은
배정우는 침대 끝에 앉아 한없이 다정한 목소리로 연다인을 달랬다.“괜찮아.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연다인은 눈물 그렁그렁 단 채 입술을 틀어 물고 배정우를 보았다.“나 안아줘. 응?”배정우는 멈칫하더니 두 팔을 벌려 그녀를 안아주었다. 곧이어 그녀의 억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네가 몇 시간이 지나도 안 돌아오고 슬기도 안 보이고 하니까 너무 두려웠어. 두 사람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봐. 그래서 문을 열고 베란다로 나가봤는데 박쥐 한 마리가 날 향해 날아오는 거야. 너무 깜짝 놀라서 손에 잡히는 대로 들고 쫓으려다가 상처가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