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 안 지울 거야! 이거 놔!”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하지만 배정우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대로 그의 손목을 꽉 깨물었다.배정우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결국 그녀의 손을 놓쳤고 그 기회에 임슬기는 곧장 밖으로 뛰어갔다.‘아이를 지켜야 해!’임슬기가 배 속의 아이와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함께 버텨왔는데 살아 있는 한 절대 스스로 이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다.하지만 배정우는 순식간에 그녀를 따라잡아 단숨에 품 안에 가뒀다.“어디로 도망치려고?”임슬기는 필사적으로 발버둥 치며 소리쳤다.“살려
“임슬기...”배정우는 갑자기 손을 뻗어 연다인의 손을 움켜쥐더니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그러나 배정우의 입에서 나온 이름을 듣자 연다인의 눈빛이 순간 차가워졌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깼어?”눈을 뜬 배정우는 연다인의 얼굴을 확인하곤 약간 실망한 기색을 보이며 그녀의 손을 놓았다.“네가 왜 여기 있어?”“너 다섯 시간이나 기절해 있었어. 나 정말 너무 놀랐어. 어때, 좀 괜찮아?”하지만 배정우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고 머리를 감싸 쥐며 소리쳤다.“권
배정우는 여자가 우는 걸 싫어했다. 특히 연다인이 매번 우는 것을 볼 때면 더욱 짜증이 났다.하지만 임슬기는 달랐다. 배정우는 그녀가 울면 이상하게도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고 그녀에게 수없이 속아 넘어가면서도 결국엔 마음이 약해졌다.연다인은 배정우가 점점 짜증을 내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 이상 매달리지 않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알았어. 그럼 난 집에서 기다릴게.”“그래.”문을 나서는 순간 연다인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빌어먹을 임슬기. 죽을 날이 코앞인데도 정우의 마음을 붙잡고 있다니, 진짜 끈질기네!’원래
버스에서 내리자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감쌌고 임슬기는 몸을 웅크리며 옷깃을 여몄다. 비에 젖은 옷이 축축하게 달라붙어 바람이 스칠 때마다 몸이 떨렸다.이곳은 오정태의 고향이었다. 임슬기는 이곳에 한 번 와본 적이 있었지만 밤이 되니 길이 낯설었다.홀로 빗속을 헤매던 끝에 겨우 오정태의 집을 찾아냈다.창문 너머로 불빛이 희미하게 새어 나오는 걸 본 임슬기는 한참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그 순간 안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누구세요?”“아주머니, 저 슬기예요.”잠시 정적이 흐르고 십여 초가 지
임슬기는 순간 얼어붙었다.“집사님이 뭔가 남기셨다고요? 아주머니, 그거 혹시 아빠가 남긴 거예요?”“그래. 가시기 전에 불안하다고 일부러 따로 보관해 두셨어.”주인화는 한숨을 내쉬었다.“슬기야, 넌 자책할 필요 없어. 그이가 떠나기 전에 직접 점을 쳐 봤는데 이번에 가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하더니, 결국 그대로 됐잖아.”“집사님... 집사님은 살해당했어요. 저를 찾으러 명인시에 오지만 않았어도...”“이건 다 운명이야. 연다인 같은 배은망덕한 애는 반드시 천벌을 받을 거야. 그이도 예전에 그 애는 믿을 게 못 된다
가장 먼저 임슬기를 발견한 사람은 연다인이었다. 그녀는 순간 당황했지만 곧바로 배정우의 팔을 잡아당기며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정우야, 사람들이 다 오기 전에 우리 정원에서 잠깐 산책할래? 같이 별 보고 싶어.”어젯밤 크게 다툰 탓인지 배정우는 마뜩잖은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고개를 끄덕였다.“그래.”임슬기는 문 앞에 서서 두 사람이 정원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슴 한쪽이 저릿했지만 이내 감정을 다잡고 송재현 쪽으로 향했다.“재현아.”송재현은 그녀를 본 순간 귀신이라도 본 듯 뒷
“그래요?”배정우가 코웃음을 쳤다.“하지만 앞으로는 제 아내와 거리를 두셨으면 좋겠네요. 안 그러면 제가 무슨 일을 벌일지 장담 못 합니다.”“배정우, 재현이는 그저 내가 일자리 찾는 걸 도와줬을 뿐이야. 이게 그렇게 심각하게 나올 일이야?”“임슬기, 네 신분을 잊지 마.”그러자 임슬기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내 신분이 뭔데? 넌 애인까지 대동하고 연회에 참석했잖아. 넌 내 입장을 생각해 줬어?”그때 연다인이 다급히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슬기야, 이러지 마. 네가 사라졌으니까 정우가 날 찾은 거잖아
“배 대표님, 한마디만 해주시죠. 현재 사모님과 이혼할 계획입니까?”기자들이 끈질기게 따라붙으며 두 사람을 다시 포위했다.임슬기는 배정우에게 팔이 잡힌 채 휘청거렸고 결국 그의 품속으로 그대로 넘어졌다.그 순간 배정우는 큰 손으로 임슬기의 허리를 감쌌고 그의 목소리가 임슬기의 머리 위로 들려왔다.“제 아내는 저를 17년 동안이나 사랑했어요. 그런데 갑자기 바람을 필 리가 없죠.”“하지만 방금 송재현 씨께서 직접 인정하셨잖아요. 게다가 2년 전에도 사모님이 외도를 했다는 소문이 돌지 않았습니까?”2년 전의 그 기사들은 배정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