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다인, 이건 약속이랑 다르잖아!”“내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약속한 두 가지 중 하나밖에 안 지켰잖아.”연다인은 이혼 서류를 가방에 넣으며 임슬기를 매섭게 노려봤다.“게다가 그동안 넌 계속 날 열받게 했어. 내 인내심도 한계가 있다고.”그 말을 듣자 임슬기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 쪽을 흘끗 쳐다봤다.“뭐 하려는 거야?”연다인은 가방에서 캠코더를 꺼내더니 렌즈를 임슬기를 향해 들이댔다.“지금 당장 여기서 네 죄를 인정해.”“뭐?”“이 영상만 찍으면 네가 그렇게 찾는 그 늙은이 시체가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안 그러면
임슬기는 진통제를 먹은 후 호텔에서 30분 정도 더 쉬고 나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휴대폰을 꺼내보니 김현정의 전화가 열 통도 넘게 걸려 와 있었다.아직 오정태의 시신을 돌려받지 못한 상태라 분노와 슬픔이 뒤섞여 가슴이 미어졌지만 김현정을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임슬기는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전화를 걸었다.“슬기 언니, 어디예요? 왜 전화 안 받았어요?”“집에 냄새가 너무 심해서 좀 나와서 산책했어. 금방 들어갈 거야.”다행히 김현정은 의심하지 않았다.“네, 그럴 만도 해요. 어젯밤 수도관이 터지는 바람에 사람
배정우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날카로운 통증이 가슴을 파고드는 걸 느꼈다. 손등엔 핏줄이 불거져 나왔고 마치 당장이라도 핸들을 부숴버릴 듯한 기세였다.‘이게 무슨 뜻이지? 후회한다고? 무슨 자격으로 후회하는데?’“임슬기, 주제 파악 좀 해!”임슬기는 코웃음을 쳤다.‘주제 파악하라고? 어쩜 쓰레기 같은 인간끼리 하는 말까지 똑같지.’그런데 대체 그녀가 뭘 잘못했단 말인가?처음부터 끝까지 임슬기는 무엇 하나 틀린 게 없었다.“나를 모욕하려고 온 거면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게 낫겠어.”말을 마치자마자 임슬기는 진짜로 문을
장승태는 사지가 꽁꽁 묶인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온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모습이 꼭 벌을 받는 죄인 같았다.임슬기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무표정한 배정우를 바라보았다.권민이 한 말이 사실이었다. 배정우가 정말 사람을 시켜 장승태를 찾게 했다.그 순간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내 말... 믿는 거겠지?’그때 배정우가 입을 열었다.“이 자식이 오 집사를 죽인 게 확실해?”임슬기는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맞아.”“복수하고 싶어
“개자식!”“왜? 죽이고 싶어?”장승태는 음흉하게 웃으며 말했다.“그럼 죽여봐! 어서!”그러고는 임슬기만 들을 수 있도록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배정우 앞에선 죽어도 진실을 말하지 않을 거야.”“뭐?”임슬기는 온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분노했다. 이를 꽉 깨물자 딱딱 소리가 날 정도였다.만약 조금이라도 이성을 잃었다면 당장이라도 장승태를 죽였을 것이다.“연다인이 대체 너한테 뭘 줬길래, 네 목숨까지 걸고 거짓말을 하는 거야!”“연다인? 그게 누군데?”“비열한 놈, 2년 전 분명 연다인이랑 네가 꾸민 일이잖아.
장승태는 더는 버틸 수 없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절대 배정우에게 진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그는 갑자기 어깨에 박혀 있던 칼을 뽑아 들고 그대로 자기 심장을 향해 찔렀다.“안 돼!”임슬기가 재빨리 달려가 막으려 했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그녀의 손끝이 허공에서 떨렸다.칼날이 장승태의 가슴 깊숙이 파고들었고 새빨간 피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장승태, 죽으면 안 돼!”그는 이 사건의 유일한 증인이었다.장승태는 희미하게 웃으며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나지막이 말했다.“미... 미안해. 난... 다인이한테... 목숨을 빚졌
임슬기의 휴대폰이 울리자마자 차량 내부의 기묘한 정적이 깨졌다.“슬기 언니, 지금 어디예요?”김현정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임슬기는 정신을 차렸다.“왜, 무슨 일이야?”“오늘 밤 그냥 호텔에서 묵어요. 집에 가지 마요. 지금 아파트 아래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 있어요.”‘기자들이 몰려있다고?’임슬기는 순간 멍해졌다.“현정아, 정확히 무슨 일인지 말해봐.”김현정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가 자수하는 영상이 실시간 검색어에 올랐어요. 지금 인터넷에서 언니가 불륜을 저지르고 집사까지 죽였다고 난리
계단을 오르기도 전에 경찰이 그들을 막아섰다.“임슬기 씨, 경찰서로 동행해 주시죠.”이 모든 건 예상했던 일이었다. 연다인이 영상을 공개하고 기자들까지 불러 모았는데, 경찰을 빼놓을 리가 없었다.연다인은 단순히 망신만 주려는 게 아니었다. 임슬기가 살인 혐의로 수갑을 차고 체포되는 모습을 세상에 똑똑히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내려줘.”그 말을 듣고도 배정우는 쉽게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녀를 바닥에 내려줬다.임슬기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분하게 수갑을 찼다. 그 모습을 보면서 배정우는 알 수 없는 짜증이 밀려왔다.
반달이 지난 뒤 임슬기는 여전히 제대로 걷지는 못했지만, 의사에게서 이틀 뒤면 퇴원이 가능하다는 허락을 받았다.“너무 잘 됐어요! 드디어 퇴원할 수 있다니! 뭐 드시고 싶어요? 내가 다 준비할게요! 이건 꼭 축하해야죠.”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현정아, 너 먹방 유튜버나 해볼래? 그럼 돈 좀 벌 수도 있겠다.”“진짜요? 근데 난 언니한테 해주는 게 제일 좋아요.”김현정은 그렇게 말하며 임슬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더니 그녀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빙글빙글 말았다.“언니, 우리 그냥 앞으로 같이 살래요? 내가 언니 먹여
“꺅!”연다인은 화끈거리는 뺨을 감싸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김현정을 노려봤다.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갈가리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임종현이 있는 앞이라 억지로 연기해야 했다.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김현정 씨, 왜 이러는 거예요?”그녀는 곧바로 임종현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억울한 척 말을 이었다.“종현아, 누나는 그런 뜻 아니야. 나는 그냥... 다들 알고 있는 줄 알고...”울먹이는 얼굴에 눈가가 금세 빨갛게 물들었다.그 모습에 임종현은 약간 망설이다가 나지막이 말했다.“됐어요. 형이랑
임종현이 부탁하면 임슬기는 늘 거절을 잘 못했다.하지만 배정우와 다시 잘 지내라는 이 부탁만큼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녀가 원한다 한들 배정우가 원하지 않으니까.배정우는 그녀를 죽이려 했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어떻게 다시 처음처럼 돌아갈 수 있을까.그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저릿하게 아팠다.“종현아.”임슬기는 고개를 숙이며 쓴웃음을 지었다.“그 부탁은... 누나가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그녀는 억지로 울음을 삼킨 채 고개를 들었다.“이미 그 사람은 연다인이랑 함께잖아.”임종현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
이제 이 동생도 부끄럼을 탈 줄 안다니.임슬기는 피식 웃으며 종현의 손등을 가볍게 두드렸다.“종현아, 누나 좀 도와줘. 침대 좀 올려줄래?”임종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침대 발치로 가 손잡이를 돌리기 시작했다.“이 정도 높이면 돼요? 더 올려요?”“응, 지금 딱 좋아. 고마워.”임슬기는 그의 손에 감겨 있는 붕대를 보고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종현아, 그 손... 필기하는 데는 지장 없겠어?”그 말을 들은 종현은 고개를 숙여 손을 내려다보더니, 담담하게 말했다.“괜찮아요. 그렇게 심하진 않아요. 그리고 이번에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