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태연하게 거짓말하는 연다인은 실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임슬기는 분노로 온몸이 떨려왔다.“네가 어떻게 뻔뻔하게 그런 말을 해!”감정이 격해진 임슬기는 또다시 기침을 내뱉으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목구멍으로 역류하는 피를 삼켰다.임슬기는 붉어진 눈으로 연다인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연다인, 넌 악마야! 구원도 못 받을 배은망덕한 년!”“임슬기, 적당히 해! 오정태의 죽음을 내게 뒤집어씌우고 교묘하게 편집한 영상으로 내가 오정태를 재로 만들었다고?”연다인은 코를 훌쩍이며 입술을 깨물고 말했다
“뭐예요? 저한테 손대지 마세요! 전 사람을 죽인 적이 없다고요!”연다인은 황급히 배정우의 등 뒤로 숨으며 소리쳤다.“정우야, 어서 막아줘! 난 억울해!”“연다인 씨, 조사에 협조해 주시죠.”“못해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러는 거예요? 증거 있어요? 전 억울해요!”연다인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배정우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경찰은 난처한 표정으로 배정우를 바라보며 말했다.“배정우 씨, 서로 곤란한 일은 만들지 마시죠.”얼굴빛이 무섭게 바뀌던 배정우는 이내 등 뒤에 있던 연다인을 잡아 경찰들 앞에 세우며 말했다.“다인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자, 임슬기는 배정우가 다시 돌아온 줄 알고 소리쳤다.“꼴도 보기 싫으니까 꺼져!”“슬기 언니, 저 김현정이에요.”임슬기는 멈칫하더니 눈물을 닦고 감정을 억누른 채 문을 열었다.하지만 문을 열고 김현정을 보자, 참지 못하고 그녀를 붙잡은 채 실성한 듯 울음을 터뜨렸다.임슬기는 무력한 자신이 싫었고 원망스러웠지만,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얼마나 울었을까, 울다가 지친 그녀는 김현정을 놓아주더니 말없이 욕실로 들어갔다.샤워하고 약을 먹은 뒤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욕실에서 나온 임슬기는 걱정스
임슬기가 말을 마치자,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흘렀다.진승윤의 침묵에 불안해진 임슬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진승윤 씨, 지난번 병원에서 우리가 생사를 함께한 동지라고 했잖아요.”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엄숙하게 말을 이었다.“나에게 친구는 무엇보다 소중해요. 승윤 씨가 목숨을 걸어야 한다면, 차라리 복수 같은 건 포기할 거예요. 알겠어요?”연다인을 상대할 사람은 그 누구도 아닌 임슬기 자신이었다. 만약 목숨을 담보로 삼아야 한다면, 그건 진승윤이 아닌 자신의 생명이어야 했다.지금껏 곁을 지켜준 건 진승윤과 김현정뿐이었으니
몇 번째로 오는지도 모를 익숙한 그곳에 발을 들이자, 임슬기는 가슴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하지만 이번엔 가해자 처지가 아닌 자유로운 몸으로 찾아온 것이라 마음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철문 앞에 서자, 단 하루 만에 연다인은 초췌한 몰골로 앉아 있었다.비싼 옷은 어제와 같았지만, 머리는 흐트러지고 화장은 번져 경찰의 추궁에 시달린 흔적이 역력했다.‘연다인, 겨우 이거로 부족하지. 엄마의 죽음, 집사님이 받은 고통 그리고 동생의 인생까지. 지금 네가 받는 이 고통은 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여기까지 생각한 임슬기는 이를 악
그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깔끔한 검은 정장을 차려입고 곧은 자세로 서서, 차갑고도 거리감이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임슬기는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지만, 오정태의 장례식이니만큼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아 조용히 자리를 비켜주었다.배정우는 손에 든 꽃을 묘비 앞에 놓고는 그녀를 힐끔 돌아보며 담담하게 말했다.“끝나면 얘기 좀 해.”그의 말에 임슬기의 마음은 이유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설마 연다인을 변호하러 온 건가?’“시간 없어.”거절당한 배정우는 마치 무심코 던진 말인 양 아무런 대꾸도 없이 발걸음을 돌
“배정우 씨, 여기 있었네요. 그럼, 아내를 좀 잘 다스려요. 2년 전 같은 스캔들이 다시 일어난다면 체면이 말이 아닐 텐데.”물론 차희라도 배정우가 두렵기는 했지만, 딸을 위해 한 발도 물러서지 않았다.“그러세요? 2년 전 제 아내가 누명을 썼던 건 모르셨나 보네요?”배정우는 차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게다가 승윤이는 내 친구인데, 제 아내를 배려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배정우의 말에 임슬기는 깜짝 놀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말이 단순히 체면을 위한 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자신을 믿는 건지 의아해졌다.순간 임
‘은혜를 갚는다고?’비록 임슬기는 한 번도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 없었지만, 김현정이 자신을 위해 목숨까지 바칠 정도로 헌신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마침, 김현정과 눈이 마주친 임슬기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애써 감추며 손을 흔들어 보였다.“진승윤, 그래서 보내야만 하는 거야.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위험해.”명인 시에 머무르면 배정우든, 연다인이든, 김씨 가문이든 김현정을 가만히 내버려 둘 것 같지 않았다.김현정은 임슬기의 일이라면 물불 안 가리고 앞장서는 사람이었고 그러다 결국 임슬기 대신 위험해질까 봐 두려웠다.만약
“현정아.”임슬기는 김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고 있어도 속으론 여전히 많이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뭐라고 위로해야 할지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사랑 문제는 본래 타인이 쉽게 끼어들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이번 일은 그녀로 인해 시작된 일이기에 그냥 모른 척할 순 없었다.김현정은 조용히 다가와 침대 옆에 앉더니, 임슬기의 팔에 감긴 붕대를 보며 마음 아픈 눈빛을 보냈다.“언니, 내가 전화 안 했으면 나한텐 아무 말 없이 계속 숨길 생각이었죠?”“...나는 그냥 네가 걱정할까 봐.”“나도
차로 돌아온 배정우는 주머니에서 단추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는 손에 쥔 그것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권민, 연다인 행적 좀 추적해 봐.”권민은 고개를 끄덕였다가 그가 들고 있는 단추를 보고 물었다.“단추도 조사해 볼까요?”배정우는 단추를 권민 손에 툭 던지며 말했다.“조사해. 그리고 지난달 파티 밤의 CCTV 영상도, 빠짐없이 확인해.”그 말을 들은 권민은 잠깐 눈썹을 찌푸렸다.“대표님, 그날 CCTV는 이미 없어진 상태입니다. 호텔 쪽 말로는 장비 고장이 있었다고 합니다.”‘고장? 참 타이밍 좋게도.
하지만 임슬기는 결국 찌르지 못했다. 칼끝은 배정우에게 닿지 않았다.배정우는 놀라 반사적으로 그녀의 손을 움켜잡았다.“슬기야...”“배정우, 여긴 왜 온 거야?”그 순간 진승윤이 문을 열고 뛰어 들어왔다. 그는 배정우를 거칠게 끌어내고는 병실 문을 쾅 닫아버렸다.그리고 곧장 임슬기 곁으로 달려가 그녀 손에 들린 칼을 빼앗아 침대 옆에 내려놓은 후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진정시켰다.“괜찮아, 슬기야. 이제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아무 일도 안 생겨.”임슬기는 마치 이제야 정신이 든 듯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눈물
“내 입이 독하긴 해도, 배정우 씨는 손에 칼을 숨기고 있잖아요.”임슬기는 고개를 들어 배정우를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 섞인 미소를 띠었다.“그런데 내가 어떻게 당신을 이기겠어요.”그 말은 마치 날이 서 있는 칼처럼 배정우의 가슴을 깊숙이 찔렀다.배정우는 잠시 멍해있더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려고 했다.하지만 손이 닿기도 전에 임슬기가 눈을 감고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잔뜩 겁먹은 표정까지 떠오르자 배정우는 어쩔 수 없이 손을 거두었다.“넌 내가 그렇게 무서워? 응?”임슬기는 눈을
‘진성한?’임슬기는 얼떨떨했다.“그게 어떻게 너희 아버지랑 관련 있어?”진승윤은 미간을 찌푸렸다.“전에 파티장에서 우리 아버지 널 따로 불러냈었지?”“응.”“그 사람, 절대 신사 같은 인물 아니야. 자기 계획에 방해가 되는 사람은 전부 제거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야. 넌 그 사람 눈에 발목 잡는 존재였을 뿐이야.”진승윤의 눈빛 속에 이전과는 다른 차가움이 스쳤다.“방해가 된다 싶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없애버려.”이미 직접 전화로 확인하긴 했지만 그 위선적인 인간을 진승윤은 끝내 믿을 수 없었다.임슬기도 진
육문주의 발걸음이 멈췄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날 밤, 연다인이 김현정이 마시던 술에 약을 탔어요.”말을 끝낸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배정우를 바라봤다. 그리고 또박또박 말했다.“그건 그 여자가 직접 인정한 말이에요.”그렇게 말한 육문주는 곧바로 문을 열고 나갔다.여러 해를 함께한 사이였기에, 그는 이 일에 배정우가 직접 관련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하지만 임슬기가 그렇게까지 의심하고 원망한 데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그래서 그 역시 배정우를 위해 변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배정우의
배정우는 권민에게 임종현을 병원에 데려다주라고 지시한 뒤 자리에 남았다.바닥에 쓰러져 기절해 있는 남자를 바라보던 그는 곁에 놓인 양동이를 들었다.차가운 물 한 통을 그대로 퍼부었다.남자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고개를 들자마자 배정우의 핏기 어린 눈빛과 마주쳤다. 그 순간 겁에 질려 온몸을 떨며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뭔가 말하려 입을 벌렸지만, 끝내 단 한 마디도 내뱉지 못했다.배정우는 이 남자와 쓸데없는 신경전을 벌일 기분이 아니었다. 그는 조용히 칼을 꺼내 남자의 목에 갖다 댔다.“말해. 누가 시킨 거야? 목적이
임종현은 그 남자가 당장이라도 끔찍한 짓을 저지를 것만 같아 목이 터질 듯한 절규가 가슴 깊은 데서부터 쏟아져 나왔다.“누나! 임슬기, 정신 차려. 제발 눈 좀 뜨라고!”도저히 버틸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임슬기는 마지막 남은 기운을 다해 오른손을 겨우 들어 임종현에게 신호를 보냈다.무언의 손짓이었다. 마치 무서워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그리고 임슬기는 힘겹게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입 모양으로 말했다.‘기회 봐서 너라도 도망쳐’임종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연다인이 했던 말. 임슬기는 임씨 가문의 죄인이라는
연다인은 임슬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걸 보곤 그녀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는 걸 단숨에 눈치챘다.“임슬기, 너 이렇게 무너지는 모습 배정우도 꼭 봤어야 하는데.”임슬기는 고개를 돌려 연다인을 외면했지만 눈물은 마치 연다인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 듯 흘러내렸다.다리가 부러졌을 때도 임슬기는 울지 않았다.하지만 배정우가 자신의 죽음을 원했다는 걸 들은 순간 그녀는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애써 괜찮은 척해봤지만 17년을 사랑한 그 남자가 자신의 원수에게 자길 죽여달라고 했다는 걸 들었을 땐 결국 무너져버리고 말았다.임슬기는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