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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일하러 가자

Author: 실현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8-03 20:33:21

8화. 일하러 가자

연의 양손에는 쇼핑백이 주렁주렁 들려 있었다.

직원이 차에 실어주겠다고 정중히 제안했지만, 연은 극구 사양했다.

손끝에 전해지는 묵직한 무게감, 걸을 때마다 들리는 종이 가방의 경쾌한 바스락거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플렉스의 맛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 순간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싶었다.

사실 아버지의 사업이 기울기 전, 연의 집안도 나름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하지만 워낙 천성이 검소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이런 호사는 누려본 적이 없었다.

돈이 있을 땐 하나도 아쉽지 않았는데, 막상 궁핍하게 살아보니 조금은 부러워지기도 했었다.

더구나 남의 돈으로 쇼핑을 하려니, 억눌려왔던 소비 욕구가 비로소 봉인 해제된 기분이었다.

그렇게 콧노래를 부르며 다른 매장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단의 휴대폰이 짧고 묵직하게 진동했다. 김 실장이었다.

"주인님, 두 분의 시간을 방해해서 송구합니다만 의뢰인이 찾아왔습니다."

단의 미간이 미세하게 찌푸려졌다. 꿀 같은 휴식, 아니 연의 체온을 즐기며 통증 없이 보내는 이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쫓아내. 오늘 휴무야. 난 지금 이 세상 무엇보다 중요한 쇼핑 중이라고 해."

"그게... 물건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주인님께서 직접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것 때문에 집안의 기운이 급격히 탁해지고 있습니다."

김 실장의 긴장된 목소리에 단의 걸음이 딱 멈췄다. 물건 하나 때문에 성북동 저택의 기운이 탁해진다고?

그건 단순히 가품이나 사연 있는 물건 정도가 아니라는 소리다. 아주 악질적인, 살을 품은 물건이다.

도공이자 예술가인 단은, 현세에서 탁월한 안목을 지닌 재벌 고미술 감정가로 통했다.

그는 불길한 고미술품을 매입하거나 정화하곤 했는데, 이는 그에게 일종의 '영적 디톡스'였기 때문이다.

악귀나 탁기를 정화하고 나면, 꽉 막혀 있던 혈이 뚫리듯 몸이 가벼워지곤 했다. 알음알음 소문을 들은 정·재계 큰손들이 줄을 서서 그에게 의뢰를 맡기는 이유기도 했다.

"알았다. 지금 들어가지."

전화를 끊은 단이 연을 보았다. 그의 눈빛에서 방금 전까지의 나른한 장난기가 사라지고, 천 년을 살아온 차가운 도공의 눈빛이 돌아왔다.

"놀이는 끝났다. 일하러 가자."

"무슨 일인데요? 갑자기 분위기 왜 이래요?"

단의 고택 응접실.

고택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다.

아침까지만만해도 맑은 묵향이 감돌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눅눅하고 끈적한 한기가 바닥에 깔려 있었다.

응접실 소파에는 대한민국 재계 순위 10위 안에 드는 건설사 회장이 사시나무 떨듯 떨며 앉아 있었다. 뉴스에서 보던 거만한 모습이 아닌 초췌한 모습이다.

눈 밑이 퀭하게 꺼진 채 식은땀을 흘리는 모습이 영락없는 폐인이었다. 그리고 탁자 위에는 붉은 천으로 덮인 둥근 물체가 놓여 있었다.

"단 선생님! 제발, 제발 좀 살려주십시오. 이 물건을 가져온 뒤로 밤마다 가위에 눌리고, 멀쩡하던 집사람은 원인 모를 병으로 쓰러지고...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회장이 단을 보자마자 바짓가랑이라도 잡을 기세로 애원했다.

연은 미간을 확 찌푸리며 코를 틀어막았다.

"우욱."

구역질이 올라왔다. 이번엔 냄새가 지독했다. 시궁창 썩은 내와 비릿한 핏물 냄새가 섞인 듯한 악취. 

그 냄새의 근원은 명백했다. 탁자 위, 천으로 덮인 저 불길한 물건.

"괜찮나?"

단이 연의 손을 꽉 쥐었다. 신기하게도 단의 차가운 손길이 닿자, 연의 몸을 휘감으려던 악취가 튕겨 나가듯 사라지고 울렁거림이 조금 진정되었다.

'뭐야... 인간 공기청정기가 따로 없는데? 단씨도 이런 느낌인 건가?'

"네, 근데 저거, 냄새가 장난 아닌데요?"

"아주 질 나쁜 놈이야."

단의 말에 동조하듯 연이 코를 막고 의뢰인을 바라봤다. 

"아니, 저런 걸 갖다 버리지. 왜 집안에 모셔두고 있었대요? 취향이 참 독특하시네."

단이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으며 턱짓으로 물건을 가리켰다.

"벗겨 봐."

김 실장이 장갑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냈다. 

지름 30cm 정도의 고려시대 청동거울.

뒷면에는 정교한 용 문양과 구름이 조각되어 있었고, 거울 면은 세월의 때가 묻어 흐릿했지만 묘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었다.

"호오?"

연의 눈에 거울 주변으로 뿌연 가스 같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보였다. 붉은색 연기 같기도 하고, 곰팡이 포자 같기도 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그녀는 유물의 기운을 보는 능력이 있었다. 어릴 때는 그저 무섭기만 했던 이 기이한 능력이, 고미술 감정을 시작한 뒤로는 많이 경험했기에 이젠 제법 익숙했다.

"이거 어디서 구하셨어요?"

연이 날카롭게 물었다. 의뢰인은 흠칫 놀라며 연을 쳐다봤다.

"홍콩 경매장에서 비밀리에...... 고려 왕실 여인이 쓰던 귀한 물건이라 하여 20억을 주고 산 것입니다."

"20억이요? 아! 그럼 함부로 못 버리죠. 네, 완벽하게 이해했습니다."

연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신은 무섭지만, 20억은 더 무서운 법이다.

'20억짜리라면 냄새가 좀 나도 일단 참아야지 암.'

"그나저나 거하게 사기당하셨네요. 이건 왕실 물건이 아니라, 무덤 부장품이에요. 문양이 화려하고 특이해서 오해할 수도 있었겠지만, 20억은 너무했네..."

연의 단호한 말에 의뢰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무, 무슨 말이오? 무덤이라니! 보증서도 있는 물건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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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goodnovel comment avatar
박경애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않네요 첫회보다 회가 거듭될수록 더 흥미진진하고 재밌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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