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임혜린은 절세미인이라 부르긴 어려웠다. 그저 맑고 단아한 외모라 할 수 있을 뿐이었다.하지만 한씨 가문의 도련님이자 아시아 연예계를 반쯤 쥐고 있는 한이준은 세상 온갖 미인을 다 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임혜린의 얼굴에 마음을 빼앗겼다. 꿈속에서도 그녀를 잊지 못할 만큼 깊이 빠지고 말았다.처음 본 순간부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빠져버린 것이다. 그날은 마치 시간이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군인 가족 관사 단지의 담벼락은 열 살의 한이준 눈엔 마치 날개라도 있어야 넘을 수 있을 만큼 높아 보였다.이곳에 온 지는 열흘이 되었지만 여전히 몸이 허약해 의자에 기대어 쉬는 것조차 벅찼다.그는 병든 몸을 달래기 위해 어머니 손에 이끌려 외가로 요양을 온 것이었다.그는 태어날 때부터 병약했고 자라면서도 자주 아팠기에 또래보다 발육 속도가 느렸다. 열 살이지만 겉모습은 일곱, 여덟 살쯤 되어 보였다.햇볕 아래서 마음껏 뛰놀고 운동장에서 땀을 흘리며 공을 차며 정상적인 아이들처럼 등하교를 하는 것들이 그에겐 그저 먼 꿈이었다.그날도 그는 담장 너머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었다. 그 순간 머리 위로 맑고 쨍한 목소리가 울렸다.“야, 신참!”고개를 든 한이준은 눈부시게 환한 얼굴 하나를 보았다.여덟이나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앞머리를 가지런히 내리고 세일러복을 입은 채 담벼락 너머 큰 나뭇가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미소는 한여름에 피어나는 꽃보다 더 눈부셨다.한낮의 햇살이 그녀의 몸을 감싸며 황금빛 테두리를 만들었다. 그 찰나, 한이준은 천사를 본 것만 같은 느낌을 받았다.햇빛 속에서 그녀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신참, 오늘은 사탕 나눠 먹는 날이야. 이건 네 몫!”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손을 휘저었고 하늘에서 우유 사탕 몇 알이 와르르 떨어졌다.곧 담장 너머에서 야단스러운 항의가 들려왔다.“임혜지! 왜 쟤한테도 줘? 이곳에 온 지 얼마 안 됐잖아. 우리랑 한패도 아닌데 무슨 자격으로
두 사람은 또다시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의사가 단호히 막아섰다.이번엔 꽤 심각했다. 임혜린은 폐렴에 저체온증까지 겹쳐 심폐 기능이 약간 마비되었고 결국엔 꼬박 하루 동안 의식을 잃은 채 깨어나지 못했다.깨어난 후에도 기운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고 계속되는 미열과 함께 하루 종일 잠에 빠져 지냈다. 그런 상태가 무려 일주일이나 이어졌다.한이준과 허도현은 그녀의 모습을 눈으로 지켜보며 타들어 가는 심정을 느꼈다. 대놓고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 일주일 동안 몇 번이나 서로 대립하고 충돌했었다.그러다 이틀 뒤, 허씨 가문의 주식이 갑자기 흔들리면서 허도현은 급히 회사로 돌아오라는 호출을 받았다. 그제야 병원은 고요함을 되찾았다.그날 점심, 한이준은 사람을 시켜 삼계탕을 준비하게 했다. 그는 국을 손수 작은 그릇에 덜어 임혜린 앞에 내밀며 말했다.“이건 아주머니가 몇 시간이나 고아서 만든 거야. 조금이라도 마셔봐.”임혜린은 여전히 무기력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두어 번 뜨더니 곧 내려놓았다.한이준은 애써 인내하며 다정하게 달랬다.“조금만 더 마셔. 여기선 한약재나 좋은 닭을 찾기가 어려워. 이것도 시장을 몇 군데나 뒤져서 겨우 구한 거야. 상태가 좀 나아지면 바로 귀국하자. 집엔 다 있어. 네가 좋아하는 거 마음껏 먹을 수 있어.”누가 봐도 간호에 서툰 사람이었다. 사람을 달래는 것도 서툴렀고 직접 먹여주려다가도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그리고 한이준도 알고 있었다. 그의 이런 다정함을 임혜린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걸 말이다.그녀는 눈에 띄게 야위어 있었다. 앙상해진 몸과 수척한 얼굴을 바라보며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건 거짓이 분명했다.그날, 그녀가 옷을 벗은 채 눈밭에서 의식을 잃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엄청난 충격을 받고 큰 죄책감에 휩싸였다.허도현이 그녀를 데려가려는 모습을 봤을 때 이번에 붙잡지 않는다면 그녀와의 인연은 정말로 끝이 나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그는 끝내고 싶지 않았다. 이렇
그렇게 쉴 새 없이 차가운 몸을 녹이다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그는 낮게 말했다.“원래 고집도 세고 굽힐 줄 모르는 사람이었잖아. 그런데 왜 이번엔 그렇게 멍청하게 옷 벗고 문 앞에 서 있었어? 너 바보야?”“전에 내가 널 섬에 가뒀을 땐 온갖 수를 써서 도망치려 했잖아. 근데 왜 이번엔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거야? 허도현이 널 구하러 오게 하려고 일부러 그 앞에서 불쌍한 척한 거지, 그렇지?”“내가 분명히 말하는데 네가 죽는다 해도 내 곁에서 죽어야 해. 너를 허도현한테 넘기는 일은 절대 없어. 그러니까 그 사람하고 함께할 꿈은 이쯤에서 접어두는 게 좋을 거야.”“임혜린, 네가 날 아무리 싫어하고 지겨워해도 상관없어. 나는 절대로 널 놓지 않을 거야. 어차피 나도 그렇게 착한 사람은 아니니까. 너희 둘이 함께하는 꼴은 죽어도 못 봐. 다음 생엔 몰라도 이번 생엔 절대 안 돼.”“다음 생엔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지도 않아, 너무 힘들거든. 그러니까 아마 그때쯤엔 널 놓아주겠지만 이번 생엔 안 돼. 설령 네가 죽는다 해도 내 곁에서 나랑 함께 묻혀야 한다고.”굵은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임혜린의 손등을 적셨다. 그녀의 손이 살짝 움직였다. 뭔가를 붙잡으려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한이준은 눈물을 닦고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좀 더 빨리 가줘.”“네, 대표님!”얼마 지나지 않아 병원에 도착했다.검사 결과는 주치의가 말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폐렴에 심각한 저체온증이었다. 즉각적인 응급 처치가 필요했다.그 말을 들은 허도현도 참지 못하고 또다시 한이준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의사의 강력한 제지에 막혔고 경찰이 출동할 뻔한 상황에서 가까스로 싸움을 멈췄다.두 남자는 응급실 앞에서 서로를 노려보며 서 있었다.허도현은 다소 초췌한 모습이었고 얼굴에 상처도 있었지만 옷차림은 그래도 단정했다.반면 한이준의 몰골은 가관이었다. 맨발에 피가 묻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그 높은 대문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마치 두 사람 사이의 간극처럼, 결코 넘을 수 없는 심연처럼 느껴졌다.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한 대의 검은색 SUV 차량이 눈밭을 가르며 달려왔다.차에서 내린 사람은 허도현이었다. 그는 눈밭에 쓰러져 있는 임혜린을 보자마자 놀란 기색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혜린아!”바로 그때 대문이 열리고 집사와 의사가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눈 위에 쓰러진 임혜린과 그녀를 안고 있는 허도현을 본 집사는 순간 얼어붙었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외쳤다.“임혜린 씨가 쓰러졌습니다! 어서 도련님께 알리세요!”허도현은 눈밭에 쓰러져 있는 임혜린을 품에 안았다. 가슴이 찢기듯이 아팠다.그는 서둘러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에게 둘러주었다. 그의 뜨거운 눈물이 떨어져 그녀의 몸을 적셨다.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부터 지켜온 사람이 왜 한이준의 손에서 이렇게까지 상처를 받아야 하는지, 그렇게 고통스러워하면서도 왜 매번 불나방처럼 그의 곁을 맴도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그는 그녀에게 함께 떠나자고 수없이 말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늘 이런저런 이유를 대며 그 자리에 머물려 했다.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무수히 짓밟혀지면서도 한이준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대체 한이준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수 없었다.이번엔 기필코 그녀를 데리고 갈 것이다. 모든 걸 걸어서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를 지켜낼 것이다.그는 임혜린을 안고 차로 발길을 돌렸다.그 순간, 대문 안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날아오듯 뛰쳐나왔다.그 그림자는 전속력으로 달려와 허도현의 품에서 그녀를 억지로 빼앗으려 했다.“허도현, 감히 여기까지 쫓아와? 당장 내놔!”한이준은 맨발에 얇은 셔츠 하나만 걸친 모습이었다. 얼마나 급하게 뛰쳐나왔는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그는 허도현 품에 실신해 있는 임혜린을 보자마자 눈빛이 흔들렸고 재빨리 손을 뻗었다.“내게 돌려줘!”허도현은 몸을 돌려 피하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외쳤다.“네가 무슨 자
임혜린은 그를 미워해야 했다. 원망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 머릿속에 맴도는 건 송지원의 말들이었다. 한이준이 겪어야 했던 그 수많은 고통이 떠올랐다.이게 무슨 감정인지 그녀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그녀는 사랑이니 정이니 하는 말을 싫어했다. 혼자 살아가는 데 익숙했고 누구와 평생을 함께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한이준에게 가졌던 건 잠깐의 환상이었을까, 그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모욕했을 땐 그 희미했던 마음조차 산산이 부서졌다.그에게 더는 어떤 감정도 남아선 안 되는 게 맞았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지 알 수가 없었다.그런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힘없이 중얼거렸다.“없어요. 나랑 도현 오빠는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난 그저 동네 오빠로만 생각했어요. 남자로 느껴본 적, 단 한 번도 없어요.”“없다고?”한이준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지금 내가 그 말을 믿을 것 같아?”“아무 사이 아니라면서 왜 둘이 껴안고 있었던 거지? 왜 입을 맞췄는데? 내 눈 멀쩡해. 똑똑히 봤다고. 그런데도 계속 거짓말할 거야?”그의 목소리는 쉰 듯 갈라졌고 눈에는 핏발이 잔뜩 섰다. 그 모습은 마치 이성의 마지막 끈을 놓아버리기 직전 같았다. 임혜린은 그를 바라보며 낮게 중얼거렸다.“어떻게 해야 믿을 거냐고요.”한이준은 그녀를 밀쳐냈다.“난 안 믿어. 난 내가 직접 본 것만 믿어!”임혜린은 중심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그때, 검은색 차 한 대가 다가왔다.차에서 내린 남자는 구급상자를 들고 있었고 한이준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곧바로 집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임혜린은 그 남자의 뒷모습과 손에 든 구급상자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심리 상담을 받고 있군요.”한이준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한 발짝 물러섰다.“네 알 바 아니야!”그는 그녀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돌아섰다.“꺼져.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아. 올해는 아들 얼굴 볼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키스한 거 아니에요. 우리 사이엔 그런 거 없었어요. 그 사람은 그냥 안전벨트 매어주려고 한 것뿐이에요. 당신이 착각한 거라고요.”한이준은 날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내가 그 말을 믿을 거 같아?”임혜린은 머리가 무겁고 어지러워 고개조차 들기 힘들었다. 그녀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그럼 어떻게 해야 믿으실 건가요?”그는 싸늘한 웃음을 지었다.“애 때문에 이제 별의별 거짓말을 다 하는구나. 임혜린, 너 나랑 약속했었지, 허도현이랑 엮이지 않겠다고. 근데 그 약속을 어긴 건 너야. 내가 무정하다고 탓할 자격 없다고.”임혜린은 몸을 일으켜보려 했지만 중심을 잡을 수 없어 휘청거렸다. 뭔가를 더 말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도 이 사람은 더 이상 믿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이토록 긴 세월 동안 아무리 변명을 해도 진심은 닿지 않았다.그들 사이의 믿음이라는 건 이미 오래전에 무너져버린 잔해일 뿐이었다.그리고 오늘 일로 인해 그는 정말로 아이를 1년 내내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그녀는 그를 붙잡고 애절하게 말했다.“동현이는 내 아들이에요. 당신은 우리 사이를 갈라놓을 자격 없어요. 아직 어린애라고요, 나 없인 안 돼요. 당신이 뭔데, 뭔 자격으로 우리를 떼어놓으려 해요?”한이준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나 몰래 낳아놓고 내 아이인데도 나를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잖아. 다른 남자의 아이라고 거짓말까지 했으면서 너야말로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건데?”그는 그녀의 턱을 움켜쥐고 말했다.“네가 한 짓, 똑같이 돌려받는 거야. 넌 내가 3년 동안 찾아다니게 만들었어. 그동안 나한테 아들이 생겼는지도 몰랐다고. 넌 나보다 훨씬 더 냉정하고 독해.”차가운 슬픔이 밀물처럼 쓸려왔다.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내가 정말 그 아이를 아버지 없이 키우고 싶어서 그랬다고 생각해요? 애가 아빠를 찾아댈 때마다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지 난감했다고요. 혼자 애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당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