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다연은 입을 다물었다.대가족은 집집마다 나름의 규칙이 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녀도 강씨 가문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섣불리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었다.하지만 마음 한편으론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온다연은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편이기에 유강후는 그런 그녀의 마음을 금방 알아챘다.그는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내가 너무 심했던 것 같아?”온다연: “조금요.”유강후는 자리에 앉아 그녀가 자신의 어깨에 기대도록 하고 나직하게 말했다.“다연아, 규칙은 지키라고 있는 거지 동정심을 발휘하라고 있는 게 아니야. 강씨 가문은 엄청나게 커. 이 저택의 도우미, 관리인, 운전기사만 해도 이삼백 명은 된다고. 그러니 그 모든 걸 관리하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야. 만약 매일 각자 작은 실수를 하나씩만 해도, 하루에 얼마나 많은 문제가 생길지 상상도 못 할걸? 그리고 내가 그녀를 해고한 건 오늘 일 때문만은 아니야.”“저 사람, 우리 집에서 몇 년이나 일했어. 그런데 작년에 내가 돌아왔을 때, 그 여자 아들이 학교에서 자기가 강씨 가문 방계 도련님이라고 으스대면서 애들을 괴롭힌다는 제보가 들어왔었어. 그때 집사가 경고를 줘서 겨우 조용해졌지만. 작년엔 내가 신경 쓸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에 돌아오자마자 또 같은 문제로 고발이 들어왔어. 그러니 이런 사람은 더 두고 볼 필요 없이 일찍 내보내는 게 맞아.”그는 온다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이제도 내가 냉정하다고 생각해?”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아까처럼 무섭게 하면 누구든 오해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작은 얼굴을 꼬집으며 그녀를 안아 올려 자신의 무릎에 앉히고 나직하게 말했다.“이제 말해봐. 방금 뭘 생각했는데 그렇게 아파서 아예 기절한 거야?”온다연은 미간을 찌푸렸다.어렴풋한 기억의 조각들이 떠오르자 그녀는 다시 머리가 아파왔다.“옛날에 누가 나를 괴롭혔었어요?”온다연은 이마를 누르면서 말했다.“누군가가 나를 골목으로
그는 꿈에도 몰랐다. 그토록 존경하던 큰형님이 자기 자식들이 온다연을 괴롭히도록 내버려 두었다니. 온다연이 신고도 하고 저항도 해봤지만 결국 돌아오는 것은 다음번 더 잔인한 괴롭힘뿐이었다.그의 어린 온다연은 그렇게 10년을 고스란히 혼자 견뎌야 했다.‘유자성, 그 인간은 죽어 마땅해!’이런 생각들이 떠오르자 후회가 숨통을 조여왔다. 그는 온다연을 꽉 껴안았다. 그렇게 해야만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 같았다.그의 속마음을 알 리 없었던 온다연은 붉어진 얼굴로 물었다.“왜 내 사진을 그렇게 많이 찍었어요? 몰래 찍은 것 같던데.”유강후는 나지막이 말했다.“네가 어렸을 때 사람만 보면 도망가는데 나인들 무슨 수가 있겠어?”온다연은 입술을 깨물며 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그래도 그땐 내가 그렇게 어렸는데 어떻게...”유강후는 그녀를 더 꽉 껴안고 나지막이 말했다.“네 생각처럼 그렇게 일찍부터는 아니야. 네가 열세 살 때, 그때부터 널 진심으로 눈여겨보기 시작했어.”그의 말에 그녀의 얼굴은 더욱 붉어졌다.“그래도 나랑 여덟 살 차이인데, 내가 열세 살이면 아저씨는 스물한 살이나 먹은 노인네잖아요. 근데 어떻게 그럴 수 있죠?”유강후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내가 늙었다고?”온다연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하죠. 지금 서른하나잖아요. 서른 살이면 엄청 나이 든 거예요...”유강후는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그럼 지금 한번 확인해 볼래? 도대체 내가 늙었는지 아닌지...”온다연은 깜짝 놀라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나 몸이 끈적거려서 씻고 올게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하지만 두 걸음도 채 못 가 유강후에게 붙잡혔다.그는 그녀를 번쩍 안아 올렸다.“바보야, 욕실이 어딘지 알아?”온다연은 불만스럽게 말했다.“나 혼자 찾아갈 수 있어요!”말을 마친 그녀는 내려와서 스스로 걸어가려고 했지만 유강후는 그녀의 허리를 잡고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가만히 있어!”온다연은 그제야 그에게 다시
말을 마치고 그는 방을 나섰다. 문 앞에 이르자 그는 온다연을 따라온 두 명의 여자 집사를 불러 욕실 밖에서 기다리게 했다.이 모든 것을 마친 후, 유강후는 홀을 향해 걸어갔다.안에는 이미 빽빽하게 사람들이 서 있었다.강씨 가문 어르신도 그곳에 있었다. 유강후가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는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무슨 일이기에 돌아오자마자 이렇게 요란스럽게 구는 거냐?”유강후는 사람을 시켜 의자를 가져오게 한 뒤, 강씨 가문 어르신을 위쪽 자리에 앉히고 말했다.“저에게 강씨 가문을 맡기셨으면 제가 집안일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신경 쓰지 마세요.”그는 돌아서서 집사장에게 말했다.“모두 모였나?”집사장은 공손하게 대답했다.“심부름 나간 사람들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큰 사모님은 이미 주무시고 계셔서 깨우지 않았습니다.”유강후가 물었다.“어머니의 처소 담당은 누구지?”집사장이 대답했다.“임청하입니다.”유강후의 얼굴이 어두워지며 차갑게 말했다.“1년 전에 그녀를 해고하라고 지시했는데, 왜 아직 강씨 가문에 있는 거지?”집사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씨 가문 어르신에게 도움을 구하는 듯한 눈길을 보냈다.강씨 가문 어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내가 남겨두라고 했다. 너는 일을 너무 경솔하게 처리하는구나. 청하는 젊긴 하지만 일 처리도 깔끔하고 또 네 누이와 닮아서 네 어머니도 간신히 마음에 들어 하는데 왜 내쫓으려는 게냐? 네 어머니도 편히 지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유강후는 집사장을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오늘 밤, 그녀가 어머니를 모시고 내 처소로 갔었어?”집사장은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밖에만 있었습니다...”“더 말할 필요 없어.”유강후는 그의 말을 끊었다.“집사장과 내 방의 오 집사, 두 사람 같이 어머니께 가자.”집사장은 그의 얼굴에 드리운 냉기를 보고 무언가를 눈치챈 듯 서둘러 그를 따라갔다.문 앞에 이르렀을 때, 강씨 가문 어
임청하는 충격에 그대로 무릎을 꿇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대표님...”예전에도 유강후는 그녀에게 살갑게 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예의는 지켰었다. 그런데 이번에는...날카로운 한기가 서려 있는 눈빛으로 유강후는 위에서 아래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마치 보잘것없는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누가 내 방에 들어가라고 허락했죠?”임청하는 고통을 꾹 참고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강 대표님께서 예전에 쓰시던 물건들을 넣어두라고 하셔서 전 그저...”“그저 뭔데요?”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그쪽이 어머니의 비서가 되었다고 해서 강씨 가문에 남을 수 있고 안주인 자리라도 넘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임청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아니에요. 저는 오로지 강 대표님 곁에서 일을 돕고 싶었을 뿐, 다른 생각은 해본 적도 없어요!”유강후가 쌀쌀하게 말했다.“청하 씨, 내가 그쪽을 도와줬다고 기회가 있다고 착각하지 말아요. 주제 파악해야죠. 난 청하 씨를 성공시킬 수도 있고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도 있어요.”얼음장처럼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임청하는 등골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이 저지른 일의 심각성을 깨달았다.“대표님,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단지 강 대표님의 지시대로 했을 뿐이에요.”유강후는 마치 죽은 사람을 보듯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냉혹하게 말했다. “그쪽이 다연이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아니면 내 죽은 누나를 닮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착각하지 말아요. 청하 씨는 그들과 하나도 안 닮았어요. 그 얼굴에 맞은 필러가 티가 안 나는 것 같아요?”임청하는 모욕감에 눈물을 쏟았다.“대표님, 전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모욕을 주시는 거예요?”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내 앞에서 불쌍한 척 그만둬요.”그는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섬뜩하게 말했다.“난 여자를 때리진 않아요. 하지만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안 했어요.”임청하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
“이렇게 하시면 저는 막다른 길에 놓이게 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란 말씀이세요! 전 아무도 유혹하지 않았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유강후는 그녀를 무시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잠자리에 들었던 강현미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왔다.“무슨 일이냐?”유강후는 그녀를 거실 소파에 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머니. 저녁에 너무 소란스러워서 인사도 못 드렸네요. 잠시 뵈러 왔습니다.”강현미는 문 쪽을 흘끗 보았다. 임청하의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저 아이를 해고했어?”유강후는 도우미가 따라 준 찻물을 받아 강현미의 앞에 가져갔다.“어머니, 차 드세요.”강현미는 차를 받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넌 나이가 들더니 성질도 커지는구나. 이젠 내 안뜰 사람도 가만 안 두겠다는 거야?”유강후: “어머니는 몸만 잘 추스르세요. 이런 사소한 일은 신경 쓰지 마시고요. 내일 더 좋은 사람을 구해 드릴게요.”강현미는 아무 말 없이 탁자 위의 담배를 집어 들고 불을 붙이려 했다. 유강후는 그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으며 차갑게 말했다.“어머니 곁에 있는 사람들은 어머니가 담배 피우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어요?”강현미가 막 입을 열려는 순간, 임청하가 울면서 뛰어 들어왔다.“강 대표님, 제발 유 대표님 좀 타일러 주세요. 제발 절 업계에서 매장시키지 않게 해달라고요!”강현미의 손이 멈칫하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너 청하를 매장시키려고?”유강후는 차갑게 말했다.“작년에 이미 나가라고 했는데, 무슨 수를 썼는지 할아버지께 가서 말씀드렸더군요. 그것만으로도 강씨 가문에 더 이상 둘 수 없어요.”그때, 임청하는 이미 강현미 앞까지 달려왔다.그녀는 털썩 무릎을 꿇고 애처롭게 울며 말했다.“강 대표님, 제발 저를 내쫓지 마세요. 저는 이곳에 아무런 연고도 없으니 여기밖에 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 유 대표님께서 절 매장시키시면 전 죽을 수밖에 없어요.”유강후는 단호하게 말했다.“내 말 안 들려
강현미가 말했다.“가. 지금은 내 아들이 강씨 가문을 관리하고 있으니 아들이 어떤 집사를 보내든 난 그대로 따를 거야. 널 위해 빌어줄 생각 없어.”이 말에 임청하의 마지막 희망이 산산이 부서졌다. 그녀의 눈에 한 줄기 증오가 스치더니 울면서 땅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곧 집사장은 사람들을 시켜 임청하의 짐을 챙겨 쫓아냈다.저택 대문에 이르렀을 때, 집사장이 그녀를 따라왔다.그는 수표를 내밀며 조용히 말했다.“강 대표님이 주는 거야. 백만 달러야. 아껴 쓰면 평생 걱정 없이 살 수 있을 거다.”임청하는 수표를 받았지만 아무 말 없이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집사장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하고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 후 돌아섰다.임청하는 그가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표를 천천히 주머니에 넣었다.겨우 백만 달러? 거지 취급하는 건가?3년 동안 강씨 가문에서 천국을 경험했는데 어떻게 다시 진흙탕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저택을 보며 그녀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확실히 그녀는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되기를 꿈꿨다.그 자리를 원하지 않을 여자가 어디 있겠는가?아마 이 저택에 있는 모든 여자들의 바람일 것이다.북미 최고의 재벌로 한 나라의 경제를 좌우하는 막강한 권력을 가진 대기업인데 어떤 여자가 그 자리에 오르고 싶지 않겠는가?하지만 왜 모두가 바라는 걸, 오직 그녀만 꿈꾸면 안 된단 말인가?꿈꾸기는커녕, 일자리까지 잃고 앞으로 살아갈 길조차 막막해졌다.‘강현미, 유강후. 너희가 이토록 잔인하게 굴었으니 나도 독하게 나갈 수밖에!’저택 안 강현미의 처소에서.유강후는 곽혜진이 준 두 병의 약을 가져오게 했다“곽 박사가 처방한 약입니다. 어머니의 병에 큰 도움이 될 거라고 했어요.”강현미는 약병을 집어 들고 살펴본 후 다시 내려놓았다.“그 아이도 아까 그 얘길 하더구나. 네가 직접 부탁한 거야?”유강후가 말했다.“구하기 힘든 약이니 싫더라도 드셔야 해
유강후가 말했다.“이 약의 약재는 매우 특별해요. H 국에서 새롭게 발견된 신종 생물의 피가 포함되어 있거든요. 그 생물은 치유와 재생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H 국에서 30년 넘게 연구한 끝에 단 한 번만 발견되었다고 해요.”강현미가 물었다.“물고기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다는 그 생물 말이니?”유강후: “어머니도 아세요?”강현미: “북아메리카 정부에서 해룡의 피를 얻으려고 혈안이 됐었지. 하지만 H 국 정부가 한 방울도 내주지 않았잖아. 그래서 결국 곽 박사에게 눈독 들이게 된 거야. 지금 암시장에서 그녀의 피는 1밀리리터당 100만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고 해. 곽 박사의 피가 해룡의 피와 유사한 성분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구나.”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염동식이 그녀를 그렇게 철통 보안하는 거였군요.”강현미는 약병을 꼼꼼히 살펴보며 나지막이 말했다.“이거면 몇 년은 더 살 수 있겠네.”말을 마친 그녀는 피곤하다며 유강후를 돌려보냈다.자신의 본채로 돌아온 유강후가 미처 집에 들어가기도 전에 오진숙이 마중 나왔다.“도련님, 진유나 씨가 다락방을 발견하고는 꼭 올라가야겠다고 하네요.”유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말리지 않았어?”오진숙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어찌 감히 말리겠어요? 도련님께서 이 집에서는 누구도 그분을 제약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잖아요.”그 다락방에는 유연서가 생전에 사용했던 물건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유강후는 그것들을 매우 소중히 여겨 매주 한 번 청소하는 것 외에는 누구도 올라가지 못하게 했다.그런데 지금 진유나가 올라갔으니 유강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오진숙은 유강후의 표정을 살폈다. 그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짓자 그녀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유강후는 침실로 걸어가면서 말했다.“내가 가져온 요리책을 이쪽 작은 주방에 전달하고 매일 그 책에 적힌 대로 요리를 만들도록 해. 앞으로는 식사하러 홀로 오라고 따로 부를 필요 없어.”오진숙은 황급히 대답했다.“알겠습니
그녀의 반쯤 마른 머리카락이 나른하게 등 뒤로 흐르며 목덜미에 달라붙어 하얀 피부가 더욱 돋보였다.유강후는 가슴이 간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온다연을 뒤에서 껴안았다.“머리 왜 안 말렸어?”온다연은 손을 멈추고 차갑게 말했다.“아저씨랑 무슨 상관인데요?”유강후는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고 일부러 말했다.“왜 상관이 없어? 내 아내인데. 당신 몸에 붙어 있는 건 다 내 거야. 머리카락도 포함해서.”온다연은 조금 전에 본 사진들과 일기장 속 글귀들이 떠올라 마음이 시큰해졌다. 그래서 스스로를 다독였다.‘연서라는 아이는 그의 어린 시절의 친구일 뿐 이제는 다 커서 다른 사람과 결혼했을지도 몰라. 그러니 과거의 일로 괜히 질투할 것 없어.’하지만 그렇게 차가운 그가 어린 시절 연서라는 여자아이를 업고 개울을 건너고 손을 잡고 함께 학교에 가고 함께 웃는 모습을 떠올리자 온다연의 마음은 온갖 질투로 가득 차 견딜 수 없이 쓰라렸다.생각이 거듭될수록 눈시울이 붉어진 온다연은 억지로 슬픔을 참으며 나지막이 말했다.“아저씨는 좀 이상한 것 같아요. 어릴 때는 여자아이 손을 잡고 다니더니 커서는 제 어릴 적 사진을 몰래 찍고...”유강후는 온다연이 질투하는 것을 알아챘지만 일부러 놀려주고 싶었다.“이상해? 난 사진 속 여자아이를 계속 좋아했어. 나랑 동갑인데 어릴 땐 매일 붙어 다녔거든. 그러니 손잡고 다니는 게 그렇게 이상하진 않잖아?”“계... 계속 좋아했다고요?”온다연의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추락하는 것 같았다“그 사람, 아저씨 소꿉친구예요?”유강후는 일부러 대답했다.“그렇다고 할 수 있지.”온다연은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나쁜 자식,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서 왜 나를 흔들었던 거야! 진작 알았으면 이런 끔찍한 곳에 오지도 않았을 텐데. 정말 나쁜 놈이야. 소꿉친구가 있으면서 나한테 양다리 걸치다니.’“좋아하는 사람 있으면서 왜 저한테 접근한 거예요?”말하면서 그녀는 그를 밀어내려고 버둥거렸지만 유강후는 그녀
잠시 후 봉현수가 나왔다.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그는 비록 야위어 보였지만 적어도 사람같이 보였다.유강후는 테이블 위에 음식을 가리키며 말했다.“먼저 밥부터 먹어.”봉현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먹고 싶지 않아. 지금 바로 예솔이 엄마의 산소에 가봐야 해.”유강후가 말했다.“내가 이미 사람을 보냈어. 조금 있으면 소식이 올 거야, 먼저 밥 먹고 있어. 네 모습 좀 봐봐. 찾았다고 해도 정연석이 그 자리에 있으면 주먹 하나로 너를 이길 수 있어.”봉현수는 대충 몇 입만 먹고 가려고 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제대로 식사하지 않은 탓에 몇 걸음을 가지 못하고 체력이 달려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유강후는 어쩔 수 없이 그를 데리고 병원으로 가서 전면 검사를 받았다.검사를 받고 보니 장기 음주한 탓에 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었다.게다가 몸에 있는 상처들을 제때 치료하지 않아 일부는 염증이 생기고 헐어서 입원 치료가 필요했다.이런 말을 들을 기분이 아니었던 봉현수는 주삿바늘을 뽑자마자 가려고 했다.유강후는 그에게 경고했다.“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예솔 씨를 찾는다고 해도 소용없어.”그는 사람을 시켜 거울을 가져오라 하고 봉현수를 거울 앞으로 끌어당기며 말했다.“지금, 이 거짓꼴을 봐봐, 어딜 봐서 사람 같아 보여?”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본 봉현수는 멍해졌다.거울 속의 남자는 말라서 모양이 빠졌고 이전에 건장했던 몸매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몇 달 전 산 셔츠는 마치 빌려서 입은 옷처럼 헐렁하게 몸에 걸쳐있었다.얼굴은 여전히 그대로였으나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눈언저리가 푹푹 꺼져 들어가 있었다.머리는 너무 오래 정리하지 않은 탓에 스타일이 하나도 없었다.“내가 왜 이렇게 된 거야?”봉현수의 비서인 안시현이 말했다.“대표님, 최소 30근은 빠지셨어요. 사람이 달라 보여요.”“제가 지금 바로 가서 몸에 꼭 맞는 옷을 사 올게요.”봉현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오직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고 넋이 나가 있다가 한참 후에야
봉현수의 얼굴은 점점 더 창백해졌다.‘그 당시 나는 솔이를 다치지 않았지만, 온몸이 항상 상처투성이였어. 그 사람들이 한 짓인가? 그러나 솔이는 왜 나한테 말하지 않았을까?’“하지만 나와 헤어졌다고 하여도 바로 정연석이랑 함께 있으면 안 되는 거야.”유강후는 실망스러운 듯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아직도 이런 고민을 하고 있다니, 넌 정말 구제 불능이야. 예솔 씨는 너에게 괴롭힘을 당해 죽을 지경에 이르렀고 또 아픈 동생까지 데리고 있었어. 오직 정연석만이 그녀에게 잘해줬고 도움을 줄 수 있었어. 예솔 씨가 정연석의 호감을 받아들이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아니면 동생이 죽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어야 해?” “나는 아직도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그해는 너의 생일이었어. 우리가 호텔에서 너의 생일을 축하해줬는데 중간에 주연아가 왔어. 넌 일부러 사람들 앞에서 예솔 씨를 난처하게 하면서 화나게 하려고 했어. 너는 그때 예솔 씨에게 기어 와서 술을 마시라면서 너무 지나치게 괴롭혔었지, 누가 너처럼 그렇게 사람을 괴롭혀?”봉현수는 중얼중얼 말했다.“솔이는 돈을 위해서 그랬어. 나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달라고 했어...”유강후가 말했다.“그래서 빌려줬어?”봉현수는 머리를 잡고 고개를 저었다.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그러면 네가 지금 이렇게 돼도 싼 거야. 그때 그렇게 싸운 상황에서 예솔 씨가 너에게 돈을 빌려 달라고 했던 건 너에게 희망을 품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돈이 간절히 필요했다는 거야. 네가 예솔 씨에게 돈을 주지 않았다면 분명 정연석이 돈을 빌려줬을 거야.”“네 손으로 직접 예솔 씨를 밀어낸 거지.”“현수야, 네가 지금 여기서 죽든지 말든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 예솔 씨는 볼 수 없으니까.”“그 정력이면 예솔 씨를 찾으면서 그때 일을 다시 한번 조사해 봐. 오직 그때 일을 낱낱이 파헤쳐서 밝혀야 모든 오해가 풀릴 수 있고 화해할 기회도 있어. 그렇지 않으면 전혀 기회가 없어.”“아니면 찾아서 뭘 할 건데? 계속 죽을 때
봉현수는 무기력해서 말했다.“차라리 거지였으면 좋겠어. 제정신이 아니라면 마음이 지금처럼 힘들지는 않을 거니까. 나는 솔이가 지금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 다른 남자와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세상이 끝난 것만 같아.”“함께 지옥에나 가라!”자포자기하는 봉현수의 모습을 본 유강후는 퉁명스럽게 웃으면서 샤워기를 들고 그를 향해 마구 물을 뿌렸다.“얼른 죽어버려. 예솔 씨가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으면 곧 돌아올 거야. 네가 남겨준 재산으로 너의 별장에서 기생오라비들과 함께 매일 같이 술을 먹고 애도 낳아서 행복한 삶을 살 거야.”봉현수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중얼중얼 말했다.“네 말이 맞아. 이미 반년이란 시간이 흘렀어. 아마 솔이 옆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 수도 있어.”유강후는 투지가 전혀 없는 봉현수의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한번 발로 찼다.“일어나!”“예솔 씨가 진짜 결혼했다면 넌 포기 할 수 있어? 만약 포기할 수 있다면 이 죽을상은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그러는 거야?”“예솔 씨 옆에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너도 가서 다른 사람을 만나. 서로 각자 자신의 갈 길을 가면서 서로에게 미련 버려.”“안, 안돼!”봉현수는 일어나 앉으며 말했다.“솔이가 결혼하고 애를 낳았다고 하여도, 나는 솔이를 내 곁으로 돌아오게 할 거야.”유강후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이미 반년도 지났어. 만약 예솔 씨가 결혼했다면 너는 가정 파괴범이라도 될 생각인 거야?”봉현수의 몸은 굳어져 버렸고 눈빛은 마치 넋 나간 듯 어두웠다.“아닐 거야. 솔이는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유강후는 일부러 그를 자극했다.“너한테 그렇게 학대받았는데 아직도 너를 사랑한다고? 사랑한다면 애초에 도망을 왜 갔겠어?”유강후의 말에 어리둥절해진 봉현수는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아니야, 솔이는 나를 속이지 않을 거야. 절대 속이지 않겠다고 나랑 약속했어.”유강후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그럼,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현관 앞에 서 있던 몇몇 사람들이 유강후를 보자마자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반색하며 달려들었다.“유 대표님, 드디어 오셨네요. 봉 대표님이랑 봉씨 가문이 지금 엉망진창이에요. 대표님은 안에서 안 나오고 우리한텐 들어오지도 말라고 하니 정말 죽을 지경입니다.”유강후는 굳게 닫힌 대문을 바라보며 얼굴을 찌푸렸다.“문 열어.”그러자 집사가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열쇠가 저한테 없어요. 대표님이 직접 챙겨가셨어요. 누구든 들어오려고 하면 때려죽이겠다고 하셨어요.”유강후는 차가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이딴 식으로 손 놓고 있다가 진짜로 저 안에서 죽기라도 하면 책임질 거야? 당장 열쇠 따는 사람 불러와.”“네. 지금 바로 부르겠습니다!”곧이어 자물쇠를 따는 기술자가 도착했고 특수 잠금장치가 되어 있던 그 문을 여는 데 엄청난 시간이 걸렸다.잠금장치가 풀리는 순간 유강후는 힘껏 문을 발로 차서 열어젖혔다.문을 여는 동시에 코를 찌르는 역한 냄새가 밀려왔다.술 냄새, 곰팡냄새, 그리고 피비린내까지... 도저히 숨쉬기 힘들 지경이었다.유강후는 얼굴이 굳은 채 거실을 훑어보았다.거실 안은 술병과 깨진 도자기 조각으로 아수라장이었고 소파 옆 바닥엔 사람이 하나 쓰러져 있었다.죽은 건지 산 건지도 알 수 없었다.유강후는 바닥의 술병을 발로 밀어내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 사람을 발끝으로 툭 찼다.“죽었어?”바닥에 누운 사람이 조금 움찔하더니 갑작스러운 빛에 눈이 부신 듯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거칠게 욕설을 내뱉었다.“씨X... 누가 들어오래? 다 꺼져!”그가 얼마나 엉망이 되었는지 확인한 유강후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발로 툭 찼다.“죽긴 뭐가 죽어. 안 죽었으면 일어나. 이 자식아.”비로소 얼굴을 들어 유강후를 확인한 봉현수는 욕을 내뱉으며 다시 바닥에 쓰러졌다.“차라리 죽는 게 나아요. 일어날 기운도 없어요.”유강후는 싸늘하게 받아쳤다.“정말 죽고 싶으면 한강 다리 밑으로 데려다줄까? 여기서 죽으면 집만 더럽혀.”몇 달 만에
유강후는 온다연의 창백한 얼굴을 보며 안타깝게 말했다.“이런 여자랑 그렇게 길게 말할 필요 없어. 온준휘 엄마에 대한 걸 알고 싶으면 그냥 바로 로운한테 넘기면 돼.”온다연은 고개를 저었다.“솔직히 사람 마음이 이렇게까지 썩을 줄은 몰랐어요. 우리 엄마 돌아가시기 전까진 겉으로는 저한테 잘해주는 척했거든요. 근데... 설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있었고 내가 온준용이 동남아에서 데려온 아이란 것도 알고 있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어요...” 그녀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개를 떨궜고 유강후에게 안기며 얼굴을 그의 코트에 묻으면서 깊은 한숨이 내쉬었다.유강후는 그녀를 부드럽게 감싸안고 외투를 열어 온다연을 안쪽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옆에 서 있던 비서에게 말했다.“다희랑 단오 데리고 들어가서 아버지 뵙게 해. 나는 좀 이따 들어갈게.” “네, 대표님.”아이들이 병실로 들어간 뒤 유강후는 온다연을 품에 안은 채 차 안으로 데려갔다.온다연이 겪었던 모든 고통은 이제 유강후의 가슴속 깊이 새겨진 상처이자 죄책감이 되었다.그는 수도 없이 바랐다.‘시간이 되돌려질 수 있다면 어린 시절의 다연 곁으로 돌아가 직접 품어주고 상처 입은 다연을 안아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하지만 시간은 누구도 기다려주지 않았고 그는 앞으로의 시간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보상해 줄 수밖에 없었다.병원을 나서자마자 유강후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봉현수의 비서였다. “유 대표님, 이쪽으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 저희 대표님 상태가 심각합니다. 저희로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돼서요.”그제야 유강후는 자신이 몇 달째 봉현수를 보지 못했다는 걸 떠올렸다.“무슨 일인데요?”상대방 목소리는 다급하기 짝이 없었다.“대표님께서 자택에 자신을 가둔 지 벌써 2주째예요. 몸에 상처도 심각한데 치료도 거부하고 약도 안 드세요. 지금은 아예 일주일째 방문도 안 열어줘요. 계속 두드려도 아무 반응이 없고요...”“주소 보내.” “그... 영운산에 있는 별장입니다
그러자 심미진의 눈빛이 흔들렸다.“아... 아냐. 난 그런 거 몰라. 그냥 네가 언니 친딸이 아니라는 것만 알고 있어. 집에 데려왔을 때 벌써 한두 살쯤 됐었지. 근데... 그때 네가 입고 있던 옷이 최고급 명품 아동복이었어. 몸에 착용한 액세서리들도 다 외국 브랜드였고. 온준용이 그거 팔아서 꽤 많은 돈을 챙겼어. 그걸로 그 시절 경원시에 작은 집 한 채는 살 수 있었을 거야. 난 그 정도만 알아. 진짜로. 나랑은 아무 상관 없어. 전부 다 온준용이 한 짓이야.”온다연은 냉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심미진, 넌 정말 끝까지 구제 불능이야. 내 진짜 신분... 넌 분명히 알고 있었지? 그런데 왜 신고하지 않았어? 왜 온준용과 함께 짜고 다 숨겼냐고? 설마 너랑 온준용이 같이 잤다는 걸 아무도 모를 거라 생각했어?”심미진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다연아,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온준용은 내 형부야. 내가 어떻게 형부랑 그런 일을 해!”온다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응수했다.“너희 둘 사이가 어떤 사인지는 관심 없어. 하지만 유씨 집안 사람들이 바보라고 생각하지 마. 널 왜 갑자기 내쫓았을 것 같아?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너 자신이 제일 잘 알잖아.”심미진은 얼굴이 새하얘져 거의 몸을 못 가눴다.“아니야... 난 그런 일 없었어. 온준용은 그냥 양아치잖아.”온다연은 서늘한 눈으로 말을 이었다.“온준용은 예전에 동남아에서 마약 유통으로 큰돈 벌었어. 넌 우리 엄마가 그런 사람 따라다니며 돈 쓰는 거 보면서 질투가 났고 결국 네 형부를 꼬셨어. 언니를 두 번 죽이는 짓을 해놓고 온준용이랑 같이 엄마를 협박했지. 경찰에 신고하거나 내 출생 관련한 말을 꺼내기만 하면 둘 다 죽이겠다고 말이야.”“우리 엄마는 약한 사람이었어. 내가 친딸이 아닌 걸 알면서도 날 진심으로 아끼고 지켜줬어. 하지만 너... 심미진, 넌 인간도 아니야. 네 형부를 꼬시고 또 네 선생님 남편까지 건드려? 겉으론 착한 척하면서 날 친딸처럼 키워주겠다고? 네가
유재성의 상태는 며칠간 고비를 반복하다가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유민준은 유자성의 장례를 정리한 뒤 줄곧 병실을 지키고 있었다.두 사람 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없었다.유자성의 죽음은 둘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다.특히 유재성에게는 타격이 더 컸다. 비록 유자성은 친아들이 아니었고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도 많았지만 그래도 40년 가까이 곁에서 함께해온 사람이었다.그를 일으켜 세운 것도 하나하나 가르치고 이끌어온 것도 유재성이었다.심지어 유강후에게 쏟은 시간보다 더 많은 정성과 노력을 들인 존재였다.그나마 위안이 됐던 건 유강후와의 관계가 조금씩 회복되고 있다는 점이었다.요 며칠은 쌍둥이들도 종종 병문안을 왔다.막 말을 배우고 걷기 시작한 시기인지라 유재성을 보면 할아버지하고 앵앵거리며 다가와 안기곤 했다.그 모습에 유재성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졌다.두 아이는 너무나 사랑스럽게 생겼기에 마치 광고 속 아기 모델처럼 예뻤고 병원 안에서도 늘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아이들이 병실에 나타날 때마다 간호사들이 몰려들어 구경하는 게 일이었다.그럴 때마다 유강후는 은근히 신경 쓰였다.속으로는 우리 애 좀 그만 봐요라고 생각하면서도 겉으로는 아이들을 꼭 끌어안고 놓지 않으려 했다.일주일이 지나 유재성의 건강이 더 안정되자 유강후는 병문안을 조금씩 줄였다. 그리고 유민준에게 지분 문서를 돌려주며 단 한마디만 남겼다.“경원시에서 떠나.”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는 유민준을 만나지 않았다.유민준은 그 말을 곱씹으며 유재성이 퇴원하자 네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경원시를 떠났다.그리고 유재성 퇴원 당일에 온다연은 두 아이를 데리고 병원을 찾았다.그런데 병원 복도 끝에서 낯익은 얼굴을 마주쳤다.바로 심미진이었다.몇 년 전만 해도 화려한 명품으로 치장하며 번쩍거리던 여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낡은 옷차림에 머리는 하얗게 변했고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초췌해졌다.병원 입구에서 경비원들에게 붙잡혀 있는 그녀는 꼴이 말이 아니었다.온다
유강후는 이마를 문지르며 고개를 숙여 온다연에게 입을 맞췄다.“이제 큰 문제는 없어. 네가 준 약 덕분에 상태가 꽤 안정됐어. 지금 병실 안에 있는 전문가들이 모여서 그 약을 분석하느라 정신없어. 하나만 실험용으로 가져가겠다고 하던데 내가 거절했어.”온다연은 웃으며 말했다.“그건 곽 박사님이 주신 약이니까 당연히 귀하겠죠. 그러니 그 사람들은 아마 분석해도 별 소득 없을걸요.”“맞아.”유강후가 고개를 끄덕였다.“하지만 꼭 필요하다니까 며칠 정도는 맡겨둘까 해.”온다연은 그의 옷깃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고 발끝을 살짝 들어 그의 턱에 입을 맞췄다. “점심 준비가 다 됐어요. 일단 밥부터 먹어요. 그리고... 수염 좀 정리해요. 이따가 다희랑 놀다가 얼굴 찔리면 어쩌려고 그래요.”마침 그때 복도 끝에서 다희가 기어 나오더니 유강후를 보자마자 벌떡 앉아 흔들흔들 달려오기 시작했다.하지만 몇 걸음 채 가지 못하고 쿵 하고 넘어졌다.“다희야!”유강후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바로 달려가 딸을 안아 올렸다.“아빠 보고 싶었어?”다희는 입을 삐죽이며 눈가가 벌겋게 달아올랐고 조그만 손바닥을 펴 보였다. 손바닥엔 희미한 붉은 자국이 두 줄 남아 있었다.유강후는 금세 눈치를 챘다.“엄마가 자로 손바닥 때렸어?”다희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더니 입만 우는 소리를 내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리만 컸고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딸이 아빠에게 고자질하듯 안겨 있는 모습에 온다연은 웃음이 터질 뻔했다.“장난이 너무 심했어요. 큰 우유 잔을 통째로 내 노트북에 다 쏟아버렸어요. 지난 이틀 동안 만든 데이터가 다 날아갔으니 다시 해야 해요.”유강후는 아이 손을 잡고 후후 불며 말했다.“때리지는 말지. 아직 어려서 잘 모르잖아. 천천히 말해주고 가르쳐야지.”그의 딸바보스러운 모습에 온다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러다가 얘 완전 버릇 나빠지겠어요. 지금도 거의 날뛰는 수준이죠. 서재 한 번 가보지 그래요?
겉보기로만 보면 유민준은 유강후의 저렴한 복사본 같았다.하지만 지금 그의 눈에는 감추지 못한 간절함이 담겨 있었고 온다연을 바라보는 시선은 깊고 무거웠다.그는 더 이상 다가서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다연아... 미안해. 내가 예전에 정말 많은 잘못을 했어. 하령이랑 같이 널 괴롭히기도 했고... 근데 난 그냥 장난인 줄로만 알았지. 그렇게 더럽고 비열한 짓까지 할 줄은 몰랐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좀 더 일찍 알아차렸더라면... 너 그런 고통 안 겪었을 텐데...”온다연은 한치의 감정도 없이 단칼에 잘랐다.“이제 와서 그런 말 해서 뭐해요? 원래는 오빠를 죽일 생각이었어요. 근데 오빠가 날 한 번 살려줬으니 그걸로 끝내고 싶어요. 이제부터 우린 아무 사이도 아니니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마세요.”그 차디찬 말 한마디가 유민준 마음속 마지막 환상마저 산산이 부숴버렸다. 그는 손에 쥔 서류를 꼭 움켜쥐며 고개를 떨군 채 중얼거렸다.“처음... 네가 본가에 들어온 그날... 내가 널 지켜줬다면... 지금 이 결말은 달라졌을까? 네 곁에 있는 사람이 나였을 수도 있었을까?”온다연은 냉정하게 쏘아붙였다.“오빠는 유강후의 발톱 하나만큼도 못 해요. 그러니 오빠 손에 쥔 그 주식 들고 지금 당장 꺼지세요. 그게 오빠가 살길이에요.”유민준은 말없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자신이 완전히 끝났다는 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손에 든 서류를 이권에게 건넸다.“이권 씨, 이 서류를... 작은아버지께 전해주세요. 본가의 재산은 이젠 아무것도 갖고 싶지 않아요. 다만... 아버지 유골만이라도 묘지에 모시게 해주세요. 명절마다 인사드릴 수 있게만 해주시면 돼요.”그러자 이권은 냉정하게 답했다.“서류는 전달하겠습니다. 다만 대표님께서 받아들이실지는 모르겠고 부탁을 들어주실지도 장담 못 드립니다.”유민준은 고개를 숙였다.“알아요. 부탁드릴게요.”그와 말하는 동안 온다연은 이미 차에 올라탔다.“이권 씨, 출발해요.”차는 곧 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