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
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
“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
“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
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
◑
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
“손부터 볼게요.”
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
“손끝은 어떠세요?”
“저리지 않는다.”
“잠은요?”
“잤다.”
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
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
“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
“너도.”
“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
“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
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
『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
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
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
“마차까지 내가 들겠다.”
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
◑
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
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
“할머니.”
서 할매가 고개를 들었다.
“왔냐.”
“염소도 데려오셨어요?”
“집에 두면 누가 보냐.”
석영은 염소가 화단에 입을 대기 전에 줄을 당겼다.
“따로 맡길 곳을 찾자고 했는데, 의원님을 모셔 오려면 이것들도 모셔 오라고 하셔서요.”
“풀만 있으면 얌전하다.”
서 할매가 말하자 염소가 다시 울었다. 석영은 대전 문을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지금은 풀이 없습니다.”
연화는 할머니의 어깨에 걸친 보자기를 고쳐 드렸다. 먼 길을 온 옷자락에 마른 흙이 묻어 있었다. 할머니는 연화의 손을 잡아 손등부터 훑어봤다.
“너는 좀 먹고 다녀라.”
“먹어요.”
“손에 종이만 들고 다니지 말고.”
해원이 들고 있던 맥안을 연화에게 건넸다. 서 할매는 천으로 감싼 묶음을 한 번 보고 대전 쪽으로 몸을 돌렸다.
석영이 염소 줄을 궁의 하인에게 넘기며 당부했다.
“돌계단으로 못 올라가게만 봐 주세요. 사람은 안 뭅니다.”
말을 마치자 한 마리가 석영의 옷자락을 물었다. 석영은 천을 살살 빼냈다. 연화는 웃다가 맥안의 매듭을 다시 살폈다. 해원이 연화가 올라설 계단 앞에서 잠깐 걸음을 늦췄다.
◑
대전 안에는 이미 사람들이 서 있었다.
황후 뒤에 선 소 가문 사람들은 연화가 들어오자 말을 멈췄다. 황후는 입가에 웃음을 두고 있었다. 손톱이 긴 손이 의자 팔걸이 위에 얹혀 있었다.
연화는 정해진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였다. 해원은 옆에 섰고, 공석주는 기록을 든 채 조금 뒤에 있었다. 어의의 손에서 종이 끝이 작게 움직였다.
황제가 먼저 해원을 불렀다.
“아우. 남문 밖에 솥과 창고를 마련하고 백성들을 모았느냐.”
“사람을 모은 것이 아니라 환자를 갈랐습니다.”
“그 일을 네 이름으로 알렸다는 말이 있다.”
해원은 노상이 챙겨 준 기록을 앞으로 내놓았다.
“쓴 돈과 물건을 받은 곳입니다. 왕부로 들어온 쌀을 어디로 보냈는지도 적었습니다. 확인하시면 됩니다.”
종이가 황제 앞에 놓였다. 황후 뒤의 한 사람이 가죽골 사람들이 왕부 앞에 모였다고 말했다.
연화는 그 말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병이 끝난 뒤 떡과 쌀을 놓고 가셨어요. 쌀은 가죽골로 다시 보냈습니다. 아직 돌아갈 집을 손보지 못한 분들이 있었어요.”
황후가 고개를 조금 기울였다.
“아이야. 백성들이 네 남편을 받드는 것까지 네가 정할 수 있느냐.”
“제가 정할 수 없어요. 그래서 받은 물건과 보낸 물건을 따로 적었습니다.”
연화는 쌀을 보낸 날이 적힌 종이를 펼쳤다. 황제 곁의 관리가 받아 옮겼다. 황제는 날짜를 읽은 뒤 다음 장도 넘겼다.
황후가 팔걸이에 얹은 손을 거뒀다.
“역병의 공을 들추려 부른 자리가 아닙니다. 월강왕비가 어의와 함께 황후를 모함한 일을 물으셔야 합니다.”
황제의 시선이 연화에게 왔다.
“네가 가져온 기록을 보겠다.”
연화는 천의 매듭을 풀었다. 오래된 종이가 드러나자 황후의 눈이 잠깐 아래로 향했다.
“약방 아이의 어미가 적은 종이가 증거냐.”
연화는 황자 해원의 맥이 적힌 장을 폈다. 종이를 오래 눌렀던 접힌 선이 남아 있었다.
“이 종이만으로 죄를 정해 달라고 청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청하느냐.”
“자란궁 돌뜰의 이끼를 가져오시죠.”
황후의 웃음이 멎었다.
연화는 맥안 옆에 따로 가져온 요청을 놓았다.
“물 없는 마른 돌 사이에 흰 이끼가 있습니다. 제가 왕비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도 봤어요. 제가 가져온 것은 아닙니다. 지금 황제께서 보내신 분이 확인하고 가져오게 해 주세요.”
“황후의 뒤뜰을 뒤지겠다는 말이구나.”
“어머니가 적은 장소와 같은지 확인하려는 거예요. 기름통도 그릇도 누가 거두고 보관했는지 기록했습니다. 돌뜰 역시 그렇게 해 주세요.”
황제가 황후를 보았다.
“기록에 적힌 곳을 확인하는 일이다.”
황후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뒤에 선 소 가문 사람이 입을 열려 하자 황제가 손을 들었다.
“짐이 보낸 사람이 가져온다. 그동안 다른 기록을 듣겠다.”
문 가까이 있던 이들이 명을 받고 나갔다. 황후는 의자 깊숙이 몸을 기대지 않았다. 곧게 세운 허리가 그대로였다.
연화는 다음 종이를 집었다.
◑
범씨가 가져왔던 기름통이 대전 한쪽에 놓였다.
노상이 묶인 끈을 가리키며 자신이 거두었다고 말했다. 석영은 곁에서 보았고, 그 뒤 왕야의 허락 없이 열지 않았다고 확인했다.
연화는 두 사람이 말하는 동안 기록의 해당 줄을 짚었다. 누가 본 일이 어디까지인지 나누어 적은 종이였다.
“이 통에서 난 불꽃을 본 사람들과 보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만 범씨는 풀려난 뒤 사라졌어요. 누구에게서 독을 받았는지는 그 사람 입으로 듣지 못했습니다.”
황후가 말했다.
“그러니 네가 모르는 것을 내게 돌리고 있지 않으냐.”
“모르는 것은 비워 두었습니다.”
연화는 보약 그릇의 기록도 펼쳤다.
“유 소의께 보낸 그릇에서는 푸른 불꽃이 났습니다. 그렇지만 같은 빛이 났다는 이유만으로 흰이끼라고 적지 않았어요. 먹는 독과 숨으로 드는 독을 하나로 볼 수 없으니까요.”
공석주가 앞으로 나왔다.
“내약원에서 살핀 기록도 같습니다. 보약은 해로운 것이 섞였으나, 왕야께서 들이마신 독과 같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어의가 왕비의 말에 맞추어 기록을 고쳤구나.”
황후의 말에 공석주가 들고 있던 종이를 내려다봤다.
“고친 것은 따로 표시했습니다. 제가 틀리게 적었던 기록도 가져왔습니다.”
공석주는 맨 아래의 낡은 종이를 꺼냈다. 연화는 거기에 적힌 어머니의 이름을 알아봤다.
“서임의 병사 기록입니다. 제 이름이 있습니다.”
대전 안에서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났다.
“저는 서 의녀의 제자였습니다. 어린 황자의 손이 차고 손톱 밑이 푸르게 된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서 의녀가 치료한 뒤 나아지는 것도 보았습니다.”
“누가 독을 썼다는 말이냐.”
황제가 물었다.
공석주는 황후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태자비 소씨가 흰이끼를 쓴다는 말을 서 의녀에게 들었습니다. 저는 그 말대로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황자가 나았고, 서 의녀가 그 겨울 죽은 뒤에도 입을 닫았습니다.”
“직접 보지 않은 일을 이제 와서 말하는군요.”
황후의 말이 느려졌다.
공석주가 고개를 숙였다.
“직접 본 일과 들은 말을 나누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서 의녀가 병으로 죽었다는 기록에 제 이름을 올린 것은 제가 한 일입니다.”
“그 값으로 무엇을 받았느냐.”
황제가 다시 물었다.
공석주의 종이를 잡은 손이 내려갔다.
“어의 자리입니다.”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받친 천을 펴 주었다. 공석주가 무릎을 꿇는 소리가 가까이 났다. 연화는 아래를 보지 않고 열린 기록 위에 손을 얹었다.
문밖에서 염소가 길게 울었다.
아무도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서 할매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침은 귀로 놓는 거다. 황제도 귀로 들어라.”
연화는 할머니의 소매를 잡으려다 손을 멈췄다. 황제 앞의 관리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말씀을 삼가셔야 합니다.”
서 할매는 물러나지 않았다.
“의원이 잘못 본 것과 보고도 입을 닫은 것은 다르다. 저 사람은 지금 둘 다 말하고 있다.”
황제가 관리에게 손을 내렸다.
“듣겠다.”
대전이 조용해졌다. 서 할매는 그제야 연화 곁으로 와 맥안을 내려다봤다. 어머니가 적은 줄에 손가락을 가까이 댔다가, 종이에는 닿지 않고 거뒀다.
◑
자란궁에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
돌에서 거두었다는 흰 이끼가 뚜껑 있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황후의 궁인도 함께 왔다. 어디에서 가져왔느냐는 물음에 뒤뜰의 마른 돌 사이라고 대답했다.
황제의 명을 받은 사람이 덧붙였다.
“물이 들지 않는 쪽에 모여 있었습니다. 뜰을 돌보는 도구도 그 곁에 있었습니다.”
연화는 서 할매가 확인할 수 있도록 물러섰다. 그릇은 관리의 손에서 상 위로 옮겨졌다. 서 할매가 허리를 굽혀 색과 붙어 있던 돌 조각을 살폈다.
“이건 다래골 바위 것이다.”
“율하의 뜰에서도 자랄 수 있습니까?”
연화가 물었다.
“마른 산바위에 붙는 놈이다. 이런 뜰에는 저절로 안 난다. 옮겨 와 돌보고 있었다.”
황후가 상 위의 그릇을 보았다.
“산의 이끼를 뜰에 두었다고 죄가 되느냐.”
연화는 어머니의 기록을 펼친 채 앞으로 밀었다.
“이끼를 두었다는 것만 묻는 게 아닙니다. 어머니는 황자의 몸에서 흰이끼를 의심했고, 태자비의 돌뜰을 기록했습니다. 어의께서는 그때의 손과 치료를 보셨어요. 지금도 그 돌뜰에서 흰이끼가 나왔습니다.”
서 할매가 해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야의 지금 손도 내가 봤다. 기름을 바꾸고 나아지고 있지.”
해원이 소매를 걷었다. 연화는 아침에 짚었던 손목을 보았다. 황제의 눈도 드러난 손끝에 머물렀다.
황후가 말했다.
“어의와 왕비의 외조모가 입을 맞춘 것을 짐작할 수 없을 줄 아느냐.”
그때 뒤쪽에서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저도 말씀드릴 게 있어요.”
연화가 돌아봤다. 태자가 문 안에 서 있었다. 곁의 궁인이 옷자락을 정리하려 했지만 태자는 직접 쥐고 앞으로 걸어왔다.
황후의 손이 팔걸이를 짚었다.
“예성아. 너는 돌아가 있어라.”
태자는 멈췄지만 돌아서지는 않았다.
“어머니 돌뜰 근처만 가면 머리가 아팠어요.”
“네가.”
황후가 말을 잇지 못했다. 태자는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그쪽에는 오래 있지 않았어요. 어머니께도 말씀드렸어요.”
“그때 무엇이라 들었느냐.”
황제가 물었다.
“햇볕 때문에 그렇다고 하셨어요.”
황후의 시선이 태자의 얼굴에 붙어 있었다. 태자는 어머니를 한 번 보고 다시 황제를 보았다.
“이끼가 무엇인지는 몰랐어요. 아팠던 것만 말씀드리는 거예요.”
연화는 맥안의 모서리를 눌렀다. 어린 황자의 맥을 적은 어머니의 글 옆에, 지금 어린 태자가 서 있었다.
황제가 의자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일어서는 동안 짧은 기침이 났다. 곁의 관리가 다가가려 했지만 황제는 손을 들어 막았다.
“짐이 보았다. 열한 해 전 아우의 손톱을.”
해원의 걷힌 소매 아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서 의녀가 치료한 뒤 그 색이 옅어지는 것도 보았다. 그런데 다시 손을 가리기 시작했을 때 묻지 않았다.”
황제는 단 위에서 해원을 보았다.
“눈을 돌린 것이 짐의 죄다.”
연화는 황궁에 처음 불려 왔던 날을 떠올렸다. 황제는 그때도 아우의 손을 보고 눈을 돌렸다. 지금은 그 손끝에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사람들이 서로를 봤다. 앞에 나서 있던 사람도 입을 닫았다.
황제가 관리에게 말했다.
“돌뜰에서 가져온 것과 기록은 모두 따로 봉해라. 누가 가져왔는지도 적고, 누구도 치우지 못하게 해라.”
연화는 상 위에 어머니의 맥안을 내려놓았다. 종이를 놓고 손을 떼자 해원이 천 끝을 받쳐 주었다. 접힌 장이 다시 덮이지 않도록 손끝으로 눌러 두었다.
황후가 연화를 불렀다.
“아이야… 네 어미도 그 자리에 섰었다.”
연화는 황후를 똑바로 보았다.
“그래서 제가 섰어요.”
황제가 명을 내리기 위해 입을 열었다.
(37화 끝)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