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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자란궁 문이 닫히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6:21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

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

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

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

“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

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

“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

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

“아이의 죄가 아니다.”

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라.”

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

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

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

해원이 옆에서 물었다.

“더 놓고 갈 것이 있나.”

“없어요.”

“그럼 가자.”

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

◑

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앵두가 약곳간 문을 열다가 멈췄다. 문밖을 돌아보고는 다시 연화를 봤다.

“왕비님, 그게요— 사람이 자꾸 오는데요. 이번에는 아픈 분들이 아니라…….”

연화는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마루에 나오자 왕부 담 너머로 큰 목소리가 들렸다. 황후를 폐위한다는 명이 율하 곳곳에 붙었다고 했다. 소 가문 사람들이 벼슬을 내놓았다는 말도 뒤따랐다.

“채란은요?”

“유배를 간대요. 황후는 냉궁으로 옮긴다고 했고요.”

앵두가 앞치마 끝을 당겨 폈다. 손가락이 천을 놓은 뒤에도 한동안 같은 자리에 머물렀다.

연화는 앵두가 챙겨 온 물그릇을 받아 마루에 두었다.

“어머니께 소식 전했어요?”

“사람을 보냈어요. 왕야께서 길에 호위도 붙여 주셨고요.”

“답 오면 먼저 보여 주세요.”

앵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바깥에서 함씨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뚫고 들어왔다.

“떡은 안 받는다더니, 사람 얼굴도 안 보려는 거야?”

석영이 대문 쪽에서 대답했다.

“얼굴은 보십니다. 다만 길을 막으시면 다른 분들이 못 지나갑니다.”

“그럼 문을 열어야지.”

“열었더니 더 모이셨잖아요.”

연화는 마루 아래 놓인 신을 신었다. 해원이 안채에서 나오다가 연화의 손에 든 침통을 보았다.

“어디가 아프다는 사람이 있나.”

“아직은 아니에요. 그래도 가져갈래요.”

해원은 연화가 신 뒤축을 바로 신을 때까지 기다렸다. 바깥채로 가는 길에서는 먼저 걷지 않고 보폭을 맞췄다.

대문 앞에 모인 사람들이 두 사람을 알아보고 손을 들었다. 가죽골에서 보았던 얼굴들이었다. 창고 바닥에 자리를 깔던 일꾼도, 끓인 물을 나르던 아주머니도 있었다.

“왕비님!”

누군가 먼저 부르자 다른 목소리가 뒤를 이었다. 왕야를 부르는 소리도 났다. 연화는 문턱 안에서 고개를 숙였다.

함씨가 접시를 석영에게 맡기고 연화의 손을 잡았다.

“오늘은 받아. 집에 가져가 먹으라고 하는 거야.”

“이렇게 많이는 못 먹어요.”

“왕부 사람이 너희 둘뿐이냐.”

함씨는 해원을 보고도 같은 말을 하려다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왕야도 좀 드세요. 늘 이렇게 서 있기만 하지 마시고요.”

해원이 접시를 받아 노상에게 건넸다.

“잘 먹겠다.”

함씨는 그제야 연화의 손을 놓았다.

사람들이 웃었다. 석영이 떡집 앞길까지 이어진 줄을 보고 길 한쪽을 비워 달라고 부탁했다. 연화는 그 틈으로 아이를 안은 여자가 지나가는 것을 확인했다.

대문 가까이 서 있던 일꾼이 모자를 벗었다.

“창고에 있던 저를 기억하세요?”

“기침이 오래 남으셨죠. 지금은 어때요?”

“일해도 괜찮습니다. 밤에도 잘 자고요.”

“물은 계속 끓여 드세요. 창고에서 나오셨다고 그만두시면 안 돼요.”

“알겠습니다.”

일꾼은 뒤에 선 사람을 돌아보며 들었느냐고 물었다. 연화가 대답하기 전에 옆 사람이 자기는 솥을 아직 치우지 않았다고 했다.

연화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원이 대문 한쪽을 짚고 서서 사람들이 연화에게 너무 가까이 몰리지 않도록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 황후가 다시 나오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노상이 접시를 안으로 들이던 걸음을 멈췄다. 연화가 입을 열기 전에 해원이 대답했다.

“폐위의 명이 내려졌다. 따로 지키게 될 것이다.”

짧은 대답 뒤로 사람들이 서로의 얼굴을 보았다. 함씨가 크게 숨을 내쉬고 접시 위의 천을 다시 덮었다.

“그러면 됐네. 떡 식겠다.”

연화는 문 안으로 돌아가며 해원의 소매를 살짝 당겼다.

“궁에 가기 전에 손 볼게요.”

해원은 대문 밖을 한 번 더 살핀 뒤 소매를 걷었다.

◑

연화는 마루에 앉은 해원의 손끝부터 살폈다. 아침 바람을 맞았지만 손톱 밑의 푸른빛이 더 짙어지지는 않았다. 얼굴에도 피로가 깊게 남아 있지 않았다.

“오늘은 궁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길 수 있어요.”

“앉아 있겠다.”

“저릴 때까지 참지 마시고요.”

“말하겠다.”

오래 서 있느라 손목이 굳었을 수 있었다. 연화는 손가락을 움직여 보게 한 뒤 손목을 받쳤다. 맥의 흐름을 확인하고 손등을 눌러 보자 해원의 손가락이 편히 펴졌다.

연화는 침통을 열었다. 침을 꺼내는 동안 해원은 반대 손으로 마루에 놓인 쪽지 묶음을 눌렀다. 바람에 맨 위 종이가 들리고 있었다.

치료를 마친 연화가 손끝을 다시 만졌다. 따뜻함이 남아 있었다.

“이제 소매 내리셔도 돼요.”

해원은 손을 거두지 않았다.

연화가 시선을 들자 해원이 쪽지 묶음을 가리켰다.

“적어.”

연화는 숯연필을 집었다.

『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

치료 뒤 불편 없음. 오래 서 있지 않도록 함.』

마지막 글자를 적을 때 해원이 눌렀던 종이 끝에서 손을 뗐다. 연화는 쪽지를 묶음에 넣고 끈을 감았다.

그때 앵두가 작은 보자기를 안고 들어왔다.

“유 소의께서 보내셨어요. 궁에 오시기 전에 전해 달라고 하셨대요.”

보자기 안에는 아기 옷 한 벌이 있었다. 작은 소매를 포개 놓고 그 위에 종이를 얹었다. 연화는 손을 씻고 돌아와 옷부터 들어 보았다.

보름의 옷보다도 훨씬 작았다. 팔을 넣을 구멍을 보던 연화가 손끝으로 접힌 자리를 폈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딸이면 연화라 하겠습니다.』

“그건 안 돼요.”

연화가 웃자 앵두가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좋은 이름인데요.”

“아이를 부를 때마다 저도 대답하게 되잖아요.”

해원은 작은 옷을 내려다봤다. 잠깐 뒤, 연화에게 물었다.

“계속 가서 볼 건가.”

“태어나면 봐 드려야죠.”

“그럼 다른 이름을 지어야겠군.”

앵두가 웃다가 입을 가렸다. 연화는 옷을 원래대로 접으려 했으나 소매가 자꾸 밖으로 나왔다. 해원이 천 끝을 들어 주자 그 안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 옷은 아기가 입어야 해요. 궁에 가져가서 돌려드릴게요.”

“빈손으로 보내면 서운해하실 텐데요.”

연화는 잠시 생각하다가 앵두에게 새 종이를 부탁했다.

『옷은 아기에게 잘 입혀 주세요.

이름은 유 소의께서 직접 골라 주세요. 첫 진료는 제가 보겠습니다.』

종이를 접는 연화 옆에서 해원이 보자기 매듭을 묶었다. 작은 옷이 눌리지 않도록 느슨하게 묶은 뒤 연화의 손에 올려 주었다.

◑

황궁에 도착했을 때 자란궁으로 이어지는 길에는 궁인들이 서 있었다.

연화는 마차에서 내려 보자기를 유 소의의 궁인에게 건넸다. 답을 읽고 전해 달라고 부탁하자 궁인이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마당 너머에서 닫을 준비를 하는 문이 보였다.

자란궁 앞에 걸린 장식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궁인들은 문밖으로 물러났고, 물건을 적던 관리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소운교는 황후의 옷을 입고 있지 않았다. 긴 소매 아래로 손톱 끝만 보였다. 냉궁으로 갈 길을 안내받고도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연화와 눈이 마주쳤다.

소운교의 시선이 연화의 머리에서 손으로 내려왔다. 연화는 침통을 든 손을 뒤로 감추지 않았다.

“그 종이를 끝내 찾았구나.”

연화는 대답 대신 고개를 들었다. 소운교 뒤로 열린 자란궁 문이 보였다. 처음 왕비 인사를 하러 왔을 때 앉았던 자리가 안쪽에 있었다.

“그것만 없었으면.”

소운교의 말끝이 멎었다.

연화가 말했다.

“기록을 남긴 사람도, 본 사람도 있었어요.”

소운교가 해원을 보았다. 해원은 연화 옆에서 한 발도 옮기지 않았다.

안내하던 관리가 길을 가리켰다.

“가셔야 합니다.”

소운교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궁인들이 따라붙었으나 가까이 부축하는 사람은 없었다. 연화는 그 일행이 길 끝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었다.

문을 닫는 사람이 손잡이를 당겼다.

나무가 바닥에 낮게 끌리는 소리가 났다. 이어 문짝이 맞닿고 빗장이 제자리에 들어갔다.

연화는 침통의 가죽 덮개를 엄지로 눌렀다.

전생의 옥에서도 마지막에 저런 소리가 났다. 문밖에서 빗장을 밀었고, 연화는 안에 남았다. 독주를 담은 그릇이 발 가까이에 있었다.

지금은 발밑에 햇볕이 닿아 있었다.

궁인이 닫힌 문 앞에서 물러났다. 연화가 서 있는 길은 막히지 않았다. 해원이 연화의 손에 눌린 침통을 내려다봤다.

“갈까.”

연화는 덮개에서 엄지를 뗐다.

“조금만요.”

해원은 기다렸다.

연화는 자란궁 문을 다시 보았다. 안쪽에서 누가 자신을 부를까 봐 기다리는 것은 아니었다. 닫힌 문에 자신의 물건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지, 눈으로 확인하듯 천천히 훑었다.

“이제 가요.”

해원이 몸을 돌렸다. 연화도 함께 걸었다.

◑

“숙모!”

대전으로 가는 길목에서 예성이 연화를 불렀다.

곁의 궁인이 놀라 걸음을 늦췄다. 태자는 목소리를 낮추지 않고 다시 불렀다.

“숙모, 잠깐 기다려 주세요.”

연화는 돌아서서 기다렸다. 예성은 서둘러 다가오다가 숨이 차는지 걸음을 줄였다. 연화가 가까이 온 아이의 얼굴을 살폈다.

눈 아래가 어두웠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

“잠을 잘 못 잤어요?”

“조금요.”

“기침은요?”

“밤에는 안 했어요.”

연화는 해원에게 침통을 맡기고 예성을 길옆의 긴 의자로 데려갔다. 급하게 걸어 숨이 가빠진 것인지 먼저 확인해야 했다.

손을 내밀자 예성이 소매를 걷었다. 연화는 손목의 맥을 짚고 잠시 기다렸다. 숨이 가라앉자 맥의 흐름도 차분해졌다. 손끝이 지나치게 차지도 않았다.

“새로 열이 오른 건 아니에요. 오늘은 뛰지 말고, 식사도 거르지 마세요.”

연화는 아이가 편히 앉도록 옷자락을 정리해 주었다. 궁인이 가져온 물을 받아 예성에게 건네고, 다 마실 때까지 기다렸다.

예성은 빈 그릇을 무릎 위에 놓았다.

“저는 계속 태자라고 하셨어요.”

“들었어요.”

“어머니가 하신 일을 모른 척하지 않아도 된다고요.”

연화는 아이의 손에서 그릇을 받아 궁인에게 건넸다.

“그 말씀도 들었어요.”

예성은 자란궁이 있는 쪽을 보지 않았다. 대신 해원이 들고 있는 침통을 봤다.

“저도 아프면 왕부에 가도 돼요?”

“아프지 않아도 오세요.”

태자가 연화를 올려다봤다.

“정말요?”

“다만 오시기 전에 알려 주세요. 제가 다른 환자를 보러 나갈 수도 있으니까요.”

예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어나려다 손목의 소매를 마저 내렸다.

“숙모.”

“네.”

“다음에는 낮에 갈게요.”

연화는 태자의 옷깃에 접힌 부분을 바로 펴 주었다.

“낮에 오세요. 안 숨고요.”

해원이 침통을 돌려주었다. 연화가 받아 드는 동안 예성이 해원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해원은 아이가 일어설 자리를 비켜 주었다.

“천천히 걸어라.”

예성은 궁인과 함께 대전 쪽으로 갔다. 이번에는 발소리가 급하지 않았다.

연화는 짧게 쪽지를 남겼다.

『태자. 열 없음. 휴식 뒤 숨 고름.

잠과 식사 살필 것. 무리한 걸음 피하도록 함.』

종이를 접어 넣자 해원이 손을 내밀었다. 연화는 그 손을 잡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

대전 곁의 작은 방에는 바깥 소리가 희미하게 들어왔다.

황제는 소 가문 사람들이 내놓은 인장을 확인하고 있었다. 마지막 상자가 닫히자 관리들이 물러났다. 탁자에 남은 것은 어머니의 맥안을 감싼 천이었다.

연화는 황제가 건네는 기록을 두 손으로 받았다.

“내약원에 사본을 남겼다. 병사로 적었던 기록도 바로잡게 했다.”

“어머니 이름으로요?”

“서임의 이름으로.”

연화는 매듭을 살폈다. 천 끝에 어머니가 썼던 글이 잠깐 비쳤다. 손가락으로 안쪽에 넣고 다시 묶었다.

황제가 기침을 하자 해원이 곁의 물그릇을 밀어 주었다. 황제는 받아 마신 뒤 아우의 손을 보았다.

“이제 많이 나았구나.”

“아직 치료 중입니다.”

연화는 해원의 소매를 보았다. 아침에 살폈던 손톱의 색이 떠올랐다.

황제는 그릇을 내려놓았다. 관리가 없는 문 쪽을 확인한 뒤 목소리를 낮췄다.

“네 아내와의 약속, 짐이 들었다. 이혼장과 의원패. 봄 둘째 달 15일. 어찌할 거냐.”

연화의 손이 맥안의 매듭 위에서 멈췄다.

해원은 한 박자 뒤에 답했다.

“약속은 지킵니다.”

(38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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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7화. 황제 앞에 서는 날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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