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re

40화. 약속을 다시 쓰는 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2:06:40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

“언제 청하면 되나.”

“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

“길게 쓰지 않겠다.”

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

“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

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

“다른 것을 가져올까.”

“아니요. 그게 좋아요.”

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

“아침에 기다려.”

“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

“잘 자.”

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

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

◑

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니, 나 준비됐어.”

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

“머리는 누가 해 줬어?”

“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

“아직도?”

“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

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

문은 열려 있었다.

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

“밤새 쓰셨어요?”

“조금 잤다.”

“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

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았다. 먹이 묻은 손가락을 제외하면 손색은 밝았고, 어깨가 조금 굳어 있었다.

오래 붓을 쥔 탓일 듯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고른 흐름이 손끝에 닿았다. 손등에도 냉기는 없었다. 어깨를 가볍게 눌러 보자 해원이 고개를 돌렸다.

“여기가 불편하셨죠?”

“글 쓰는 데 지장은 없었다.”

“그건 대답이 아니에요.”

“조금 굳었다.”

연화는 가져온 침통을 책상에 놓았다. 해원은 알아서 옷깃을 느슨하게 하고 앉았다. 침통 뚜껑이 열리며 작은 금속 소리가 났다.

치료하는 동안 보름이 문밖에서 발을 바꿔 디뎠다. 연화는 해원의 어깨에 힘이 빠지는 것을 확인한 뒤 처치를 마쳤다.

“오늘은 붓 오래 잡지 마세요.”

“손도장은 찍어야 한다.”

“그건 괜찮아요.”

연화는 쪽지를 꺼내 적었다.

『맥 고름. 손끝 따뜻함. 어깨 굳음 완화.

밤샘 뒤 휴식 필요.』

해원이 마지막 줄을 보고 접힌 종이를 집었다.

“이제 청해도 되나.”

연화는 숯연필을 내려놓았다.

해원은 의자에서 일어나 연화 앞에 섰다. 종이를 내미는 손에 아직 옅은 먹 자국이 있었다.

“온연화. 나와 혼인해 줘.”

종이를 받자 해원이 손을 놓았다.

“네가 의원을 열어도, 돌아오는 자리는 여기였으면 한다.”

연화는 접힌 종이를 폈다.

『온연화에게 혼인을 청한다.

의원으로 사는 날도, 쉬는 날도 함께 살기를 바란다.

담해원.』

아래에는 지웠다가 다시 쓴 흔적이 없었다. 연화는 책상 옆의 종이들을 보았다. 접지 못한 종이에는 첫 줄만 적힌 것도 있었다.

“길게 안 쓰신다더니요.”

“길지는 않다.”

연화는 혼서를 다시 읽고 반듯하게 접었다.

“좋아요. 오늘 혼인해요.”

문밖에서 보름이 뛰었다.

“나 이제 들어가도 돼?”

해원이 문 쪽을 보았다.

“들어와.”

보름은 들어오자마자 해원의 손을 잡아당겼다.

“형부, 아버지가 빨리 오라고 했어.”

연화가 동생을 보았다. 보름도 자기가 한 말을 뒤늦게 알아챘는지 입술을 모았다.

그러더니 문밖으로 돌아서며 다시 말했다.

“아저씨, 빨리.”

해원이 연화를 보았다.

“두 번 불렸다.”

“둘 다 대답하시면 돼요.”

해원은 보름에게 잡힌 손을 내주고 걸었다. 연화는 혼서를 품에 넣고, 씻어 둔 붓이 마를 수 있도록 천 끝을 폈다.

◑

살구골 약방 마당에는 길게 펴 놓은 돗자리와 낮은 상이 있었다.

함씨가 떡 접시를 나르다가 연화를 보고 빈손을 앞치마에 닦았다.

“왔다. 우리 의원님.”

“아직 간판도 안 걸었어요.”

“오면 의원님이지. 오늘은 돈 안 받을 거야.”

함씨는 떡 한 조각을 연화의 손에 쥐여 주고 돌아섰다. 따뜻한 떡을 받자 아침에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해원이 옆에서 기다렸다.

“먹고 가.”

연화가 한입 베어 물었다. 해원은 옷자락에 붙은 작은 나뭇잎을 떼어 냈다. 연화가 다 먹을 때까지 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마당 안쪽에서 온주학이 상을 닦고 있었다. 이미 깨끗한 곳을 또 닦다가 두 사람을 보고 천을 내려놓았다.

“왔니.”

“아버지, 손님 오시는데 이제 앉으세요.”

“아직 저쪽을 못 봤다.”

온주학이 돌아서려 하자 해원이 상 끝을 잡았다.

“제가 보겠습니다.”

온주학은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연화가 아버지의 팔을 잡아 돗자리 쪽으로 모셨다.

“오늘은 감초 안 써셔도 돼요.”

“누가 썬다고 했니.”

아버지의 눈가가 벌써 젖어 있었다. 연화는 마른 천을 내밀었다. 온주학은 상 닦던 천 대신 그것을 받아 쥐었다.

대문에서는 석영과 앵두가 옆으로 비켜 서고 있었다.

황제가 수수한 겉옷을 입고 들어왔다. 태자는 작은 보자기를 안고 뒤따랐다. 석영이 마당에 자리를 만들자 황제가 먼저 손을 들었다.

“오늘은 앉을 곳만 알려 다오.”

연화와 해원이 고개를 숙였다.

태자는 보자기를 연화에게 내밀었다.

“숙모, 내약원에 두면 다른 사람이 먹을까 봐 제가 가져왔어요.”

안에는 살구 말린 것이 들어 있었다. 연화가 해원을 보자 태자가 덧붙였다.

“숙부도 드세요.”

“고맙다.”

해원은 보자기를 받아 상 위에 놓았다. 태자는 그 옆에 앉으며 연화의 침통을 살폈다.

“오늘도 가져오셨어요?”

“오늘도 환자가 있으니까요.”

태자가 해원을 보고 작게 웃었다.

곧 유 소의가 아기를 안고 들어왔다. 연화가 다가가자 품 안에서 작은 손이 움직였다. 아기 옷의 소매 끝에 고운 실로 꽃이 수놓여 있었다.

“옷만 보낼 때보다 무거워졌어요.”

유 소의가 말했다. 연화는 아기의 얼굴을 살피고 내민 손가락을 가만히 잡아 주었다.

“이름은 제 이름으로 안 지으셨죠?”

“그건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유 소의가 웃었다. 아기는 연화의 손가락을 잡은 채 놓지 않았다. 해원이 가까이 와 햇빛이 아기 얼굴에 바로 닿지 않도록 서 주었다.

마당 바깥에서 염소 울음이 났다.

서 할매는 줄을 짧게 쥐고 들어오며 석영을 보았다.

“이번에는 마차에 안 태웠다.”

“그게 더 걱정인데요.”

염소 한 마리가 몸을 뻗어 늘어진 살구 가지를 물었다. 보름이 다가가 꽃을 빼내려 하자 할매가 먼저 줄을 당겼다.

“손 넣지 마라. 먹은 건 두고.”

“혼례 꽃인데.”

“저놈이 알겠냐.”

보름은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 염소에게서 먼 상 위에 올렸다. 연화는 할매 곁으로 가 큰 손을 잡았다.

할매가 연화의 머리에 꽂힌 은잠을 한 번 보고, 맞잡은 손을 두드렸다.

“잘 왔다.”

“할머니도요.”

◑

상 위에 종이를 놓으려는데 석영이 돗자리 모서리를 당겼다.

앵두는 그 자리에 물그릇을 내려놓으려다 멈췄다.

“왕야, 제 말이 맞죠. 이쪽으로 조금만 옮기면 모두 보입니다.”

“왕비님, 그게요—”

앵두가 말을 멈추고 상을 가리켰다. 물그릇 밑으로 종이가 들어갈 자리였다.

석영은 얼른 그릇을 받아 옮겼다. 조금 뒤에는 꽃을 옮기겠다고 나섰다가 보름에게 막혔다. 노상이 등잔 이야기를 꺼내자 또 한마디를 보탰고, 앵두는 그때마다 손에 든 것을 내려놓고 석영의 옷자락을 당겼다.

보름은 상 옆에 앉아 접었던 손가락을 모두 폈다.

“열 번이야.”

“뭐가?”

“석영 아저씨가 맞냐고 물은 거. 앵두 언니도 대답하려다가 열 번 멈췄어.”

앵두가 입을 가렸다. 석영은 마당 사람들을 돌아보고 조용히 뒤로 물러섰다.

“이제 제가 듣겠습니다.”

“그게 제일 낫겠네.”

노상이 대답했다.

연화는 웃음을 가라앉히고 상 앞에 앉았다. 해원이 곁에 자리 잡았다. 두 사람 앞에 이혼장과 오래된 진료 약속이 놓였다.

온주학이 종이를 보고 천을 꼭 쥐었다.

연화는 아버지가 볼 수 있도록 의원패도 꺼내 옆에 놓았다. 나무 패 위에 햇빛이 닿았다.

“이건 받았어요. 제 이름으로 열 거예요.”

온주학은 패에 새겨진 글자를 손끝으로 짚었다.

“네 어머니한테도 보여 주고 싶구나.”

연화는 상 위에 둔 혼서의 모서리를 폈다.

“맥안 있는 서랍에 같이 넣어 둘게요.”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거두었다.

해원이 이혼장 한쪽을 잡았다. 연화는 반대쪽을 들었다. 펼친 종이에서 두 사람 이름이 보였다.

“찢을까요?”

“그래.”

종이가 가운데부터 갈라졌다. 연화는 손에 남은 조각을 내려놓았다. 해원도 옆에 포개 놓았다.

다음은 진료 약속이었다.

연화가 접힌 곳을 펴자 옅어진 손도장이 드러났다. 날마다 맥을 짚겠다는 첫 줄 아래로 오래 읽었던 문장들이 이어졌다.

해원은 서두르지 않고 기다렸다.

연화가 종이를 들었다.

“약속은 지키셨어요.”

“너도 지켰다.”

연화는 해원의 손을 보았다. 처음 시장에서 삯을 건네던 손보다 손톱 색이 훨씬 밝았다.

두 사람은 진료 약속도 함께 찢었다.

노상이 빈 접시를 가져왔다. 연화는 종이 조각이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접시에 넣고 새 종이를 당겼다.

해원이 먹을 묻힌 붓을 건넸다. 아침에 씻어 두었던 붓이었다.

연화는 붓을 받아 글을 썼다.

『하나. 평생 맥은 서로 짚는다.

둘. 거짓말은 하지 않는다.

셋. 손도장.』

태자가 자리에서 몸을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황제도 글을 읽고 나서 해원을 보았다.

“이번에는 끝나는 날이 없구나.”

“없습니다.”

해원은 대답하고 연화에게 손을 내밀었다.

연화가 먼저 손도장을 찍었다. 해원의 손이 바로 옆에 놓였다. 종이에서 손을 떼자 두 손바닥의 모양이 나란히 남았다.

연화는 마른 천으로 해원의 손을 닦아 주었다. 손가락 사이에 남은 먹을 닦는 동안 해원은 연화가 든 천 끝을 받아 반대편 손을 닦았다.

혼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조용해졌다.

해원이 연화 쪽으로 몸을 돌렸다.

“청한 대답은 들었다.”

“그럼 이제요?”

해원은 연화의 손을 잡고 가까이 왔다. 연화는 눈을 감기 전에 그 옷깃을 가볍게 쥐었다.

입술이 짧게 닿았다.

떨어진 뒤에도 해원은 손을 놓지 않았다. 온주학이 천으로 얼굴을 덮었고, 함씨가 떡 접시를 들고 먼저 웃었다.

“이제 먹어도 되죠?”

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상으로 손을 뻗었다.

◑

약방 옆 빈방에는 오후 내내 사람들이 드나들었다.

노상이 물그릇과 마른 천을 가져다 놓았다. 앵두는 연화가 말한 대로 진료 쪽지 묶음을 안쪽에 넣었다. 온주학은 약방에서 쓰던 의자를 옮겨 왔다가 다리가 흔들리지 않는지 다시 앉아 보았다.

석영은 간판을 들고 문밖에 섰다.

“높이는 이쯤이면 됩니까?”

연화는 마당으로 나가 위를 보았다.

『살구나무 의원』

검은 글자가 밝은 나무판 위에 또렷했다. 약방 간판과 나란히 보이되 문을 가리지 않는 높이였다.

“거기 좋아요.”

노상이 옆에서 받치고 석영이 간판을 걸었다. 보름은 의원패를 두 손으로 안고 기다렸다.

“이건 내가 걸래.”

해원이 보름을 들어 올렸다. 보름은 간판 아래 마련한 자리에 의원패를 걸고 두 번 눌러 보았다.

“됐어. 안 떨어져.”

해원이 내려 주자 보름은 멀찍이 물러나 간판과 패를 함께 올려다봤다.

연화도 곁에 섰다. 자기 이름을 새긴 패가 밖에서 보였다.

함씨가 문 안을 들여다봤다.

“오늘 들어가 봐도 돼?”

“아직 정리 중이에요.”

“앉기만 할게.”

함씨는 진료 의자에 잠깐 앉았다가 일어났다. 태자는 상 위에 남은 물그릇을 안으로 옮겨 주었고, 황제는 열린 문 앞에서 간판을 오래 보았다.

연화는 손님들이 드나드는 동안 혼서와 새 약속을 말렸다. 먹이 마른 것을 확인하고 두 장을 함께 접었다.

온주학이 안쪽 서랍을 열어 주었다.

어머니의 맥안 옆에 종이를 넣자 아버지가 서랍을 닫았다. 연화는 닫힌 서랍 손잡이를 한 번 쓸고 문밖으로 나왔다.

해원이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가도 되나.”

“내일 아침에 다시 와야 해요.”

“데려다주겠다.”

연화는 빈 침통 자리를 확인하고 문을 닫았다. 해원이 챙겨 둔 침통을 내밀었다.

“이건 놓고 갈까 봐.”

“안 놓고 가요.”

연화는 받아 들고 다른 손을 내밀었다. 해원이 그 손을 잡았다.

◑

왕부 마당의 살구나무에는 어제보다 꽃이 더 벌어져 있었다.

연화는 가지 끝을 보고 밤글방으로 들어갔다. 새 등잔 아래에 따뜻한 물이 놓여 있었다. 해원은 연화의 의자 옆에 자기 의자를 붙였다.

“손 주세요.”

“아침에 봤다.”

“밤에도 볼 거예요.”

해원이 소매를 걷었다.

연화는 손톱을 살피고 손가락이 차지 않은지 만져 보았다. 긴 하루였지만 손끝에 온기가 남아 있었다. 손목을 받쳐 확인한 맥도 고르게 이어졌다.

아침의 치료 뒤 불편한 곳은 없다고 했다.

연화는 해원의 팔 아래 접은 천을 받쳐 주고 잠시 편히 쉬게 했다. 물그릇을 건네자 해원이 받아 마셨다.

“오늘은 더 쓰지 마세요.”

해원이 책상 위 붓을 내려다봤다.

“쓸 것은 다 썼다.”

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낮에 손도장을 찍은 손바닥에 먹 자국이 조금 남아 있었다. 해원이 젖은 천을 가져와 책상 끝에 놓았다.

연화는 마지막 진료 쪽지를 적었다.

『맥 고르다. 환자: 남편. 다음 진료: 내일. 그리고 그다음 날도.』

해원이 그 쪽지를 읽고, 한 박자 뒤에 웃었다.

(40화 끝 · 완결)

Continue to read this book for free
Scan code to download App

Latest chapter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40화. 약속을 다시 쓰는 날

    붓끝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해원은 벼루에 묻힌 먹을 가볍게 덜어 내고 연화를 보았다.“언제 청하면 되나.”“아침에요. 밤새 쓰느라 진료 시간 놓치시면 안 돼요.”“길게 쓰지 않겠다.”연화는 책상 옆에 놓인 종이를 보았다. 죽은 뒤에 남길 일을 적었던 글 묶음은 이제 아래 칸에 들어가 있었다. 같은 붓 앞에 빈 종이가 놓여 있었다.“그 붓으로 쓰실 거예요?”해원이 붓대를 돌려 보였다. 손가락이 오래 닿은 부분은 색이 조금 옅었다.“다른 것을 가져올까.”“아니요. 그게 좋아요.”연화는 의원패를 챙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원이 문까지 따라와 열어 주었다.“아침에 기다려.”“저를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해원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연화가 돌아서기 전에 손을 잡았다. 손바닥에 남아 있던 나무 패의 자국은 이미 사라졌는데도 엄지가 그 자리를 다시 쓸었다.“잘 자.”연화는 손을 놓고 문턱을 넘었다.복도 끝에 이르러 돌아보니 해원이 아직 문 앞에 서 있었다. 연화가 자기 방 문을 열자 그제야 밤글방 문이 닫혔다.◑봄 둘째 달 15일 아침, 창 아래에서 보름의 목소리가 들렸다.“언니, 나 준비됐어.”연화가 창을 열었다. 보름은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들고 마루 아래에 서 있었다. 머리 양쪽에 맨 끈이 조금 비뚤어져 있었다.“머리는 누가 해 줬어?”“내가. 아저씨는 아침부터 글 쓰고 있어.”“아직도?”“먹 묻은 손으로 나한테 기다리라고 했어.”연화는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마루에서 보름의 머리끈을 바로 매 주고 밤글방으로 향했다.문은 열려 있었다.해원은 붓을 씻어 천 위에 놓고 있었다. 책상 한쪽에는 쓴 종이가 몇 장 쌓였고, 맨 위에 놓인 한 장만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연화는 문턱에 서서 눈 밑부터 살폈다.“밤새 쓰셨어요?”“조금 잤다.”“얼마나 조금인지 묻지는 않을게요. 손 주세요.”해원이 의자를 빼 주었다. 연화는 앉지 않고 그 손을 창 쪽으로 데려갔다. 손톱 끝에 남은 푸른빛은 어제와 같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9화. 의원패를 받는 날

    연화는 맥안을 품에 안고 해원을 보았다.황제 앞에 내려놓았던 해원의 손은 그대로였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끝에 아직 푸른빛이 남아 있었다.“의원패는 내약원에 미리 일러 두겠다.”황제가 말했다.“여자가 받을 수 있는 법이 있는데도 쓰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그 법도 함께 알리겠다.”연화는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맥안을 감싼 천이 손목에 닿았다. 어머니 이름을 되찾은 날, 자신의 이름으로 의원을 열 수 있다는 말도 들었다.작은 방을 나와 마차에 오르자 해원이 맥안을 받아 무릎 위에 놓았다.“천이 풀렸다.”연화가 내려다봤다. 바깥으로 나온 천 끝을 해원이 접어 넣었다.“제가 너무 세게 잡았나 봐요.”해원은 매듭을 다시 묶고 돌려주었다. 연화가 두 손으로 받자 손끝이 잠깐 닿았다.“손이 차다.”“집에 가서 따뜻한 물 마실게요.”해원이 마차 창을 닫았다. 연화는 천 위에 손을 펴고, 왕부에 닿을 때까지 그대로 앉아 있었다.◑겨울을 지나 봄 둘째 달 14일이 되었다.왕부 마당에는 살구나무 한 그루가 누워 있었다. 뿌리를 감싼 천에 흙이 젖어 있었고, 가는 가지 끝마다 꽃봉오리가 붙었다.연화는 가지가 바닥에 눌리지 않도록 받쳐 들었다.“여기까지 들어오면서 꺾인 데는 없죠?”“제가 팔을 이렇게 하고 왔습니다.”석영이 양팔을 벌려 보였다. 옆에서 노상이 삽을 내려놓았다.“나무보다 자네가 더 걸리적거렸네.”“담에 닿을까 봐 그런 겁니다.”“담은 그대로 있고 내 어깨만 부딪혔지.”앵두가 뿌리에 두를 천을 걷다가 웃음을 삼켰다. 보름은 두 사람의 말을 듣지도 않고 파 놓은 구덩이 안을 살피고 있었다.“언니, 조금 더 파야 돼.”“왜?”“뿌리가 저만큼 긴데 접히면 안 되잖아.”보름이 손으로 길이를 재 보였다. 연화는 나무 밑동을 내려놓고 구덩이 곁에 앉았다. 노상이 판 곳은 넓었지만 한쪽에 작은 돌이 남아 있었다.“저것만 꺼내면 되겠다.”보름은 기다렸다는 듯 흙을 걷어 냈다. 돌을 들어 옆으로 옮기고 손바닥을 털었다.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8화. 자란궁 문이 닫히는 날

    “황후의 궁인들은 자란궁 밖으로 물러나라. 기록과 물건을 옮기는 일도 금한다.”황제의 말이 대전 끝까지 닿았다.문 곁의 관리가 고개를 숙였다. 황후 뒤에 서 있던 소 가문 사람들은 자리를 지켰지만, 누구도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서 의녀의 죽음을 병사로 적은 기록부터 다시 살피겠다. 어의는 자신이 본 일과 숨긴 일을 빠짐없이 써서 내라.”공석주가 바닥에 손을 짚었다.“제 이름을 빼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유 소의에게 보낸 보약 그릇을 가리켰다. 채란이 가져온 물건과 그릇을 바꿔 둔 경위가 적힌 종이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시녀장도 따로 두어라. 누구의 명을 받았든, 해로운 것을 들고 간 일부터 물을 것이다.”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곁에 선 궁인이 부축하려 했지만 긴 손톱이 그 손을 밀어냈다.“제 아들이 듣고 있습니다.”황제는 태자를 보았다. 예성은 옷자락을 쥔 손을 펴지 못하고 있었다.“알고 있다.”“그 아이 앞에서 어미를 죄인으로 만드시겠다는 겁니까.”“아이의 죄가 아니다.”황제는 태자가 서 있는 쪽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이리 와라.”예성은 어머니를 돌아봤다. 황후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있었지만 부르지는 않았다. 잠깐 뒤, 태자가 단 아래로 걸어갔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에서 손을 뗐다. 해원이 접힌 천을 펴 주었으나 기록을 다시 싸지는 않았다. 이제 그 종이는 황제 앞에 남아 있어야 했다.황후가 대전 문으로 향했다. 궁인들이 따라 움직였고, 소 가문 사람들은 길을 비켰다. 연화 곁을 지날 때도 황후의 걸음은 흐트러지지 않았다.다만 연화를 부르던 목소리는 더 들리지 않았다.연화는 열린 맥안을 마지막으로 살폈다. 어머니가 눌러 쓴 이름과 날짜가 가려진 데 없이 드러나 있었다.해원이 옆에서 물었다.“더 놓고 갈 것이 있나.”“없어요.”“그럼 가자.”연화가 빈 천을 접자 해원이 받아 들었다. 대전 문을 나설 때까지 천을 연화에게 돌려주지 않았다.◑가을 둘째 달 20일 아침, 왕부 앞에서 사람 부르는 소리가 났다.앵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7화. 황제 앞에 서는 날

    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덮은 천 끝을 안으로 접었다. 황궁의 사자가 나간 뒤에도 마루에는 발소리가 잠깐 남았다.해원이 기록 묶음을 들어 책상 안쪽에 놓았다.“그날 네 말을 끝까지 듣게 하겠다.”“듣고 확인하게 해 주세요. 제 말만 믿으실 필요는 없어요.”해원은 맥안 곁에 놓인 돌뜰 확인 요청을 집었다. 다른 종이 사이에 넣지 않고 맨 위에 얹었다.◑가을 둘째 달 15일 아침, 연화는 마차에 오르기 전 해원의 소매를 붙들었다.“손부터 볼게요.”해원은 왕부 마루에 앉았다. 궁에 갈 겉옷을 입었지만 소매는 바로 걷었다. 연화는 손톱 밑의 색을 살피고 얼굴을 올려다봤다. 밤새 글을 읽느라 눈가에 피로가 남았지만 입술은 마르지 않았다.“손끝은 어떠세요?”“저리지 않는다.”“잠은요?”“잤다.”오래 앉아 있으면 손이 다시 차가워질 수 있었다. 연화는 손목을 받쳐 맥을 확인했다. 흐름이 고르고, 손가락을 폈다 접을 때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손등을 가볍게 눌러 살핀 뒤 준비한 침을 꺼냈다.침통을 여는 소리가 조용한 마루에 울렸다. 해원은 바깥에서 기다리는 호위들을 돌아보지 않았다. 연화가 치료를 마치고 손끝이 따뜻한지 다시 확인할 때까지 팔을 편히 두었다.“대전에서 오래 서게 되면 말씀하세요.”“너도.”“저는 기록을 읽을 거예요.”“읽는 동안 옆에 있겠다.”연화는 침통을 닫고 쪽지를 적었다.『월강왕. 손끝 온기 유지. 맥 고름.긴 외출 예정. 피로와 저림 살필 것.』쪽지를 묶음 안에 넣자 해원이 천으로 감싼 맥안을 들었다. 연화가 손을 내밀었지만 바로 건네지 않았다.“마차까지 내가 들겠다.”연화는 빈손으로 마루를 내려갔다. 해원이 한 걸음 뒤에서 따라왔다.◑황궁 마당에서 염소 우는 소리가 났다.연화는 마차에서 내리다가 발을 멈췄다. 대전으로 이어지는 길 한쪽에 석영이 서 있었다. 한 손에는 고삐 대신 염소 줄이 들려 있었다. 다른 한 마리는 서 할매의 치맛자락을 따라 돌계단 쪽으로 가려 했다.“할머니.”서 할매가 고개를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6화. 이름을 부르는 날

    채란은 문이 닫힌 뒤에도 같은 말만 했다.석영이 보약을 어디서 받았느냐고 물었을 때도, 왕야가 봉한 그릇을 가리켰을 때도 대답은 달라지지 않았다. 황후는 시킨 적이 없고, 자신이 했다는 말이었다.연화는 그릇을 감싼 천의 매듭을 살폈다. 채란이 입을 닫았다고 해서 유 소의가 받았던 보약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받은 곳을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건 남아요.”채란의 눈이 천 위에 잠깐 머물렀다.“왕비가 바꾸어 놓은 그릇입니다.”“그래서 바꾸기 전에 본 사람들도 함께 말씀드릴 거예요.”연화는 유 소의의 시녀가 확인한 쟁반을 옆에 놓았다. 왕야가 종이를 내밀었다. 누가 가져왔고, 누가 받았으며, 어디서 보관했는지 적을 종이였다.“네가 본 것만 적어.”“네.”연화는 숯연필을 들었다. 채란의 말보다 먼저, 그릇이 문턱을 넘어온 순간부터 적었다.◑가을 둘째 달 10일 아침, 약곳간 상에는 약재 대신 종이가 놓여 있었다.연화는 어머니의 맥안을 펼치기 전에 손을 닦았다. 오래된 종이의 가장자리가 손끝에 걸렸다. 황자 해원의 맥을 적은 장과 어머니 자신의 몸을 살핀 장 사이에 얇은 천을 끼워 두었다.노상이 작은 상을 더 들여놓았다. 상 위에는 밤글방에서 거두어 둔 기름통이 놓였다. 뚜껑을 묶은 끈은 풀리지 않은 채였다.“범씨가 가져온 것 중 따로 남겨 둔 통입니다.”“누가 거두셨나요?”“제가 거두고 석영이 옆에서 보았습니다. 그 뒤로는 왕야 허락 없이 열지 않았습니다.”연화는 새 종이에 그 말을 옮겼다. 노상이 잠깐 망설이다 기름통 아래에 받침을 밀어 넣었다.“밑바닥에 기름이 묻어 있습니다. 맥안에 닿으면 안 됩니다.”“고맙습니다.”노상은 기름통을 한쪽으로 옮기고 손을 닦았다. 열쇠 꾸러미가 허리에서 낮게 부딪쳤다.공석주는 마루 끝에 앉아 있었다. 연화가 적은 종이를 내밀자 두 손으로 받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려 종이 끝에서 마른 소리가 났다.“이건 제가 들은 말이에요. 어의께서 직접 보신 것과 다르면 고쳐 주세요.”공석주는 서임의

  • 독살당한 의녀, 열여섯 살로 돌아가다   35화. 유 소의를 지키는 날

    왕야는 연화가 내민 쪽지를 받아 상 위에 펼쳤다. 겨울 둘째 달이라는 글씨 아래에 유 소의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나.”“아니요. 이번에는 먼저 살펴볼 거예요.”연화는 쪽지 옆에 빈 종이를 놓았다.“태자님이 나으셨으니까 황후가 다르게 움직일 수도 있어요. 보약을 보낸 날보다, 보내기 전에 무슨 말을 했는지부터 생각해 볼게요.”“궁에 사람을 넣겠다.”“유 소의께도 말씀드려야 해요. 모르는 사이에 지키기만 하면 평소와 다른 걸 놓칠 수 있어요.”왕야가 빈 종이 끝을 눌렀다. 연화는 전생에 들었던 말과 직접 보았던 일을 나눠 적었다. 보약 그릇을 확인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이번에는 그릇이 놓이기 전에 만나야 했다.“이번에도 어의가 막으면요?”왕야가 연화를 보았다.“네가 보게 한다.”연화는 숯연필을 잠시 내려놓았다. 왕야의 손 아래에서 종이가 반듯하게 펴져 있었다.“그럼 저는 살아 있는 맥부터 볼게요.”◑가을 둘째 달 1일, 약곳간에서 돌배잎을 정리하던 연화는 노상의 부름에 손을 털었다.유 소의가 안채 마루에 앉아 있었다. 가벼운 겉옷을 입었는데도 두 손으로 소매 끝을 모아 쥐고 있었다. 곁에 선 시녀가 방석을 바로 놓아 주자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갑자기 와서 미안해요.”“오셔도 돼요. 어디 불편하세요?”연화는 맞은편에 앉으며 얼굴부터 살폈다. 입술이 마르지는 않았고 숨도 고르게 이어졌다. 다만 눈 아래가 어두웠다.“속이 불편한 건 줄었어요. 그런데 밤에 자꾸 깨요.”“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요?”유 소의는 곁의 시녀를 보았다. 시녀가 마루 끝으로 물러난 뒤에야 소매를 놓았다.“황후께서 보약을 보내겠다 하셨어요. 아이를 위해 먹으라고요.”연화는 무릎에 놓았던 손을 상 위로 옮겼다.아직 가을이었다.“언제 보내신대요?”“가을 둘째 달 5일에요. 내약원에서 살핀 것이라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어요.”전생에도 같은 말을 들었다. 그때는 겨울 바람이 궁의 문틈으로 들어왔고, 유 소의는 식은 손을 연화에게 내

More Chapters
Explore and read good novels for free
Free access to a vast number of good novels on GoodNovel app. Download the books you like and read anywhere & anytime.
Read books for free on the app
SCAN CODE TO READ ON APP
DMCA.com Protection Statu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