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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Author: 라라
진수혁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잘생긴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어째서인지 그는 강시연이 예전과 조금 다른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심하은은 그의 표정을 살피며 입술을 깨물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수혁아, 강시연 씨가 방금 화가 나서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건 아닐까? 정말로 기자들 오해하라고 그런 건 아니야.”

진수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긴 눈매를 가늘게 떴다.

‘강시연이 일부러 화가 나서 그런 건가?’

“네 잘못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진수혁의 목소리는 차가웠고 표정은 무심했다.

그녀는 진씨 가문의 사모님으로서 아들의 공연에도 참석하지 않으려 하고 홧김에 심하은을 불러들였으니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심하은의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며 두 눈이 교활하게 번뜩였다.

진수혁과 심하은의 일로 세간이 떠들썩하며 인터넷엔 온통 그들의 기사뿐이었다.

진수혁이 연관 검색어를 삭제해도 후폭풍은 절대 작지 않았다.

서아름도 당연히 그걸 봤다.

“생각 해봤어? 정말 용성으로 떠날 거야?”

서아름은 인기 검색어에서 시선을 떼며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럼 여기 남은 네 자료는 내가 다 지우고 이후 행적도 숨겨줄까?”

강시연의 시선이 인기 검색어로 향하며 찍힌 사진을 포착했다.

진수혁과 심하은은 관객석에 앉아 무대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진도현을 보며 서로 웃고 있었다.

한 가족이 아주 단란해 보인다.

아무도 모른다. 처음 아들이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아들이 흥미를 잃지 않고 꾸준히 배우도록 그녀가 열과 성을 다했다는 걸.

지금은 다들 그녀의 아이가 심하은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다고 말한다.

마침 심하은이 ‘좋아요’를 누른 뒤 SNS에 의미심장한 글을 올렸다.

[누군가가 나에게 물었다. 깊이 사랑했던 사람과 재결합하면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는지. 내 대답은, 두 사람이 서로 깊이 사랑한다면 처음부터 재결합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거다.]

“그래.”

강시연은 시선을 거두며 조용히 말했다.

“다 지워버려.”

이 도시에는 그녀의 25년간의 추억이 담겨 있지만 대부분은 불행한 기억이었다.

부모님의 죽음, 강씨 가문의 몰락, 그리고 그녀가 열정적으로 사랑했지만 결국 참담하게 실패한 과거의 사랑까지.

서아름과 저택을 제외하면 이곳에 그녀가 그리워할 건 전혀 없었다.

...

인기 검색어로 한창 들끓는 탓에 저녁에 강시연은 음식을 주문했고 직접 요리하지 않았다.

과거 그녀는 항상 아들과 진수혁의 건강을 걱정하며 모든 걸 직접 했지만 이제 떠나기로 마음먹었고 진수혁과 아들이 그녀의 음식에 대해 여러 번 불만을 제기했으니 아예 그들이 좋아하는 식당을 선택했다.

사람이 원래 그렇다.

때로는 마음을 다해 노력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뜻에 따르는 것이 낫다.

그녀가 정성스럽게 끓인 국물도 심하은이 선택한 레스토랑만큼은 못 했다.

마침 진상준이 검색어에 올라온 일을 알고 특별히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를 끊은 진수혁이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보며 멈칫하자 강시연은 차분히 설명했다.

“수혁 씨랑 도현이가 이 레스토랑 음식 좋아하잖아요. 오늘 바쁜데 마침 먹어봐요.”

진수혁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졌다.

귓가에 갑자기 진상준의 말이 들려왔다.

“수혁아, 사람은 때로는 시작을 보는 것이 아니라 결과와 과정을 더 중요하게 봐야 해. 시연이가 널 어떻게 대하는지 네가 제일 잘 알잖아. 결혼한 후에 네가 위가 안 좋다는 말을 듣고 몇 시간씩 국을 끓였어. 어려서부터 귀하게 자란 애가 국을 끓이느라 손까지 다 데었다.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후회보다 놓치는 거야. 수혁아, 다른 여자와의 일은 전부 과거야. 그건 옆에서 보는 사람이 제일 잘 알아. 사랑을 깨닫지 못하면 그 결과는 참담할 뿐이야...”

사랑?

그와 강시연은 늘 멀찌감치 서로 선을 긋고 그녀가 단지 진씨 가문 사모님 신분을 위해 그런다는 걸 잘 아는데 사랑은 무슨.

하지만 눈앞에 놓인 정교한 음식들을 보자 진수혁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그를 사랑하는 데 음식조차 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심하은의 일 때문에 여전히 화를 내는 걸까.

진도현도 작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레스토랑을 무척 좋아하긴 해도 엄마는 한 번도 이런 적 없이 늘 직접 요리했다.

‘엄마가 아직 화가 나서 요리를 안 한 건가? 왜 계속 이러는 거지? 작은 일 때문에 아빠랑 이모를 저격이나 하고. 이모처럼 마음 넓게 행동할 수는 없는 건가?’

진도현은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순순히 억지로 식사했다.

잠시 후, 식탁에서 진수혁이 갑자기 덤덤하게 말을 꺼냈다.

“내일... 하은이랑 재검사하러 가.”

심하은은 최근 공연을 하다가 발목을 다쳤다.

상태가 심각하지 않았지만 여전히 재검사가 필요했다.

남편이 자신의 앞에서 다른 여자와 동행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강시연은 지난 몇 년간 그 감정을 뼈저리게 체험했다.

딱히 놀랍지 않았다.

“그래요.”

강시연은 가볍게 대답하며 아무런 감정의 동요도 없이 손에 든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난 다 먹었으니까 더 할 말 없으면 먼저 방에 가볼게요.”

옆에 있던 진도현은 잠시 놀라며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엄마, 나랑 바이올린 연습 안 해요?”

과거에는 엄마가 항상 그의 곁에 앉아 바이올린 연습을 지켜보곤 했다.

오늘은 직접 요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바이올린 연습도 상관하지 않았다.

강시연은 인터넷 기사에 올라온 댓글을 생각하며 미소를 지었다.

“너 혼자서도 할 수 있잖아. 나는 바이올린을 모르니까 옆에 있으면 방해만 될 뿐이야.”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수혁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으며 어두운 눈동자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는 얇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차갑고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또 왜 그러는 거야? 오늘 기사에 올라온 일은 단지 오해였다는 걸 알잖아. 강시연, 처음부터 진씨 가문에 들어오려고 수작 부렸으면 사모님 역할을 제대로 해야지. 아들이랑 바이올린 연습하는 게 힘들어?”

강시연은 그의 차갑고도 깊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갑자기 웃음이 나려고 했다.

7년간 그녀를 차갑게 대하면서 마음속으로 다른 여자를 사랑하던 남자가 진씨 가문 사모님 역할을 제대로 하란다.

사랑받는 쪽은 언제나 이렇게 두려울 게 없나 보다.

강시연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을 빼냈다.

“난 내가 진씨 가문 사모님 역할에 걸맞게 행동했다고 생각하는데요.”

강시연은 진수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난동 부린 적도 없고 검색어 때문에 화난 것도 아니에요. 난 음악적 재능이 없는 데다 도현이도 내가 옆에서 간섭할 필요가 없죠.”

아들이 이모를 좋아하고 그런 반짝이는 인생을 원한다면 기꺼이 양보하련다.

그녀가 만든 음식이 싫고 심하은이 정한 레스토랑이 좋다면 그렇게 해줄 거다.

예전엔 그녀가 놓지 못해 소란을 피웠지만 이젠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인가.

강시연은 말을 마치고 뒤돌아 떠났지만 진수혁은 그 자리에 멈춰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그의 검은 눈동자가 어두운 그림자로 가득 차 있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정말로 심하은 일로 화를 내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갈수록 마음은 더욱 답답해졌다.

강시연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이틀 동안 정리해야 할 물건들을 모두 정리해 두었다.

떠나기 전 그녀는 진 교수를 한 번 더 만날 생각이었다.

저녁에 진수혁은 평소와 달리 객실에서 자지 않았다.

강시연은 가운만 입은 채 욕실에서 나왔다.

부드러운 불빛 아래 그녀의 피부는 눈처럼 하얗고 도자기처럼 아름다웠다. 눈동자와 미간에는 불만이나 투정은 보이지 않은 채 부드러움과 온화함만 자리하고 있어 화려한 오관을 다소 감추고 얌전하며 순종적인 모습을 돋보이게 했다.

평소와는 확실히 달랐다.

진수혁은 자리에 멈춰선 채 강시연에게 시선을 고정하며 목젖이 꿈틀거렸다.

머릿속에 갑자기 할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제일 무서운 게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거야...”

그가 강시연을 사랑한다니, 말도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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