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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Author: 라라
강시연은 자기 아들을 바라보며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그해 진도현을 낳으면서 그녀는 대출혈을 겪었고 산후에는 기력이 크게 약해졌다.

한 번도 아이를 세상 밖으로 낳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무척 우습게 느껴졌다.

겨우 여섯살이고 아무리 조숙하다고 해도 눈동자에 좋고 싫음이 그대로 드러났다.

예를 들어 지금 이 순간 아이의 눈동자에 드러난 것은 명백한 거부감과 혐오였다.

과거 아이가 심하은과 가깝게 지내도 슬펐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아이라며 스스로를 달랬다.

어린아이들은 본능적으로 빛나는 사람을 동경하니까.

게다가 뭐가 됐든 엄마이니 다른 사람 때문에 그녀를 멀리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아이의 눈동자에 번쩍이는 혐오감은 혈연관계도 무의미함을 증명한다.

“나는 단지 네 생물학적 엄마일 뿐이야. 넌 아직 어리지만 그래도 엄마를 선택할 권리가 있어.”

강시연은 아이를 응시하며 차갑게 말했다.

어린아이라서 철이 없으니 그냥 넘어가라는 말은 통하지 않는다.

더 이상 상대하기도 싫다.

그녀가 뒤돌아 가버리자 진수혁은 그녀의 표정을 살피다가 미간을 찌푸렸다.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났다.

무슨 뜻일까.

‘도현이한테 다른 여자를 엄마로 삼고 진씨 가문 사모님 자리도 필요 없다는 건가?’

“강시연.”

진수혁은 얇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다가 갑자기 그녀를 불러세우며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도현이는 아직 어려서 철이 없고 하은이랑 가깝게 지내는 것뿐이야. 게다가 이번 일은 네가 잘못했으니까 사과하면 없던 일로 넘어갈게.”

그녀를 믿지 않으면서 심하은과 그녀 사이를 풀려고 하는 게 무척 우스꽝스럽게 느껴져 고개를 든 강시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필요 없어요. 난 내가 하지도 않은 일로 사과 안 해요. 당신이 내 결백을 인정해 줄 필요도 없고요. 심하은 씨가 증거만 가져오면 결과 그대로 받아들일게요.”

아들과 남편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이 없었고 그들과 굳이 언쟁을 벌이고 싶지도 않았다.

고양이 카페로 간 그녀는 입양할 고양이를 데려갈 절차를 마쳤다.

진수혁은 집에서 동물을 키우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강시연은 작은 고양이들을 매우 좋아했다.

그래서 삼색 고양이를 길에서 주웠어도 두 부자를 배려해 집이 아닌 고양이 카페에 맡긴 뒤 가끔 찾아가 보았다.

강시연은 고양이 카페 주인과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는데 그녀가 운송을 부탁하자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남편과 아들이 싫어해서 집에서 키울 수 없다더니, 다른 사람에게 주려고요?”

“아니요.”

강시연은 문득 해방감을 느끼며 입꼬리를 올려 농담으로 말했다.

“남편과 아들이 고양이보다 못한 것 같아서요.”

그들은 다른 사람을 더 좋아하지만 고양이는 충분히 잘해주기만 하면 세상에서 제일 가까운 친구로 될 수 있다.

카페 사장도 웃었다.

“그렇죠. 결혼했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고양이도 못 키우는 건 말이 안 돼요.”

강시연은 웃으며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진수혁과 진도현을 위해 자신의 취향은 모두 뒷전으로 두었다.

그래도 홀로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 넓은 세상에 마음대로 살 기회는 충분히 많으니까.

한참 동안 고양이를 쓰다듬으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침 서아름도 연락이 와서 그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했다.

강시연의 다음 일정은 밝히지 않은 채 단지 모임을 핑계로 대학 시절 친했던 친구 몇 명을 초대했다.

강시연이 도착했을 때 몇몇 친구들은 벌써 모여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중앙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으며 놀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바쁜 분께서 시간 내서 우리랑 만나주네.”

그 남자는 강시연의 대학 시절 선배이자 당시 유명한 바람둥이였던 성규민이었다.

강시연은 대학 시절 친구도 많고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도 많았는데 성규민도 그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자유분방하고 생기 넘치며 밝고 화려해 항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존재였다.

그래서 강씨 가문이 몰락한 후 진수혁과 결혼해 가정에만 전념하며 몇 차례의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아 모두를 놀라게 했다.

다행히 눈치 있는 친구들은 더 묻지 않았고 술이 몇 잔 들어가자 누군가 취기에 문득 대학 시절 일을 언급했다.

“그러고 보니 시연아, 그때 성규민이 너 좋아했잖아. 네가 결혼 후 그렇게 변할 줄 알았더라면 그때 성규민과 너를 이어주는 건데.”

강시연이 멈칫하며 고개를 들자 성규민의 따뜻하고 깊은 눈빛과 마주하게 되었다.

과거 성규민은 그녀에게 마음을 품었다.

시선을 돌린 그녀가 무기력한 어투로 말했다.

“너희들만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저 선배는 모든 여자한테 다 그럴걸.”

성규민이 그 틈에 자연스럽게 눈썹을 치켜올리며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있다가 나를 왜 저격해. 일편단심인 척하려고 했더니.”

그렇게 다들 웃고 떠들며 이야기는 넘어갔다.

성규민도 그녀에 대한 마음을 장난으로 치부하며 넘겼고 강시연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진수혁에 대한 마음이 차갑게 식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대한 다른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룸에서 나오던 송민우가 그 모습을 보고 말을 꺼냈다.

“엇, 저기 형수님 아니야? 왜 여기 있지?”

진수혁의 걸음이 멈칫하며 시선이 성규민과 강시연에게 닿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진수혁은 오늘 친구 환영회가 있었는데 자리가 끝나고 나올 때 강시연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결혼 후 그녀는 가정에 집중하느라 이런 장소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옆에 있던 심하은이 눈을 번뜩이며 불쑥 입을 열었다.

“수혁아, 저 사람 성규민 아니야? 평판이 안 좋은 바람둥이인데 강시연 씨가 왜 저런 사람이랑 같이 있지?”

무심한 진수혁의 얼굴에 서늘함이 풍겼다.

성규민을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대학 시절부터 성규민은 강시연과 가까운 사이였고 성규민이 강시연을 좋아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나중에 강시연이 그와 결혼하고 성규민이 해외로 떠나면서 소문은 일단락되었다.

멀지 않은 곳에 강시연 일행도 진수혁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심하은은 진수혁 따라 강시연 일행을 향해 걸어갔다.

진수혁의 시선이 성규민을 지나쳐 강시연에게 향하며 서늘한 어투로 말했다.

“도현이랑 바이올린 연습은 안 하고 이런 곳에서 다른 남자랑 데이트 할 시간은 있나 보네.”

성규민이 느긋하게 눈썹을 치켜올리다가 그의 뒤에 있는 심하은을 돌아보고는 의미심장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진수혁 씨 말 참 재밌게 하시네요. 본인도 다른 여자를 옆에 두면서.”

심하은이 강시연을 보고는 서둘러 웃으며 해명했다.

“강시연 씨, 오해하지 말아요. 요즘 안티팬 사건으로 떠들썩해서 수혁이가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까 봐 걱정해서 제가 따라온 거예요. 괜찮죠?”

살짝 올라간 입꼬리와 눈가엔 의기양양함이 담겨 있었다.

말 마디마디에 진수혁이 자기를 걱정하고 챙겨준다는 걸 과시하고 있었다.

“괜찮아요.”

강시연은 화를 내지 않고 진수혁을 스쳐 지나가며 차분히 말했다.

“원한다면 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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