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그 순간, 약기운에 온기를 찾던 유라가 몸을 뒤척이며 도진의 품 안으로 깊숙이 파고들었다. 차가운 도진의 가슴팍에 그녀의 뜨겁고 가녀린 숨결이 닿았다. 도진은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자신의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빠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폭풍이 쓸고 간 방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도진은 침대 위에 무력하게 쓰러져 있는 유라를 한참 동안이나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붉게 달아오른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그녀가 못내 신경 쓰여, 옷가지를 정리해 주려 침대 머리맡에 묵직하게 얹어 앉았다.
그 작은 기척에도 유라는 본능적으로 몸을 밀어내며 웅크렸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보호하려는 방어 기제였다. 하지만 그녀가 몸을 비틀수록, 김건의 거친 악력에 짓눌려 가느다란 손목에 새겨진 피멍은 어둠 속에서 더욱 선명하게 도진의 시야를 찔러왔다.
자신의 영역 안에서 다른 흔적을 남기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못마땅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 한구석이 찌릿하게 저려왔다. 뜨거운 입김을 뱉어내며 신음하는 유라를 보던 도진이, 이윽고 홀린 듯 조심스럽게 그녀의 멍든 손목을 커다란 손으로 감싸 쥐었다.
얼음장 같던 도진의 손에서 전해지는 서늘한 온기에 유라가 힘겹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었다. 그리고는 이성을 잃은 몽롱한 의식 속에서 신음하듯 가녀린 음성을 내뱉었다.
“도와…… 주세요…….”
지금 제 곁에서 손목을 쥐고 있는 사람이 자신을 계약서로 옭아맨 잔인한 포식자 김도진인 줄도 모른 채, 유라는 그저 당장 눈앞에 닥친 어둠에서 자신을 건져줄 유일한 구원자라 믿는 듯했다.
유라는 떨리는 손가락을 움직여 도진의 커다란 손을 꽉 맞잡았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마치 생명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애원하듯 매달리는 손귀에 간절함이 가득했다. 제 손을 다 덮고도 남는 도진의 단단하고 넓은 손가락을 쥐자마자 거짓말처럼 안도감이 찾아왔는지, 유라는 이내 긴장을 풀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도진은 제 손을 악착같이 놓지 않는 그 작은 손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뭐야, 도대체 너…….”
낮게 읊조리는 도진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가슴 안쪽에서부터 정체 모를 감정의 거대한 파동이 일렁였다. 지금까지 여자들을 보며 느꼈던 단순한 흥미나 짜증, 혹은 이도현을 향한 승부욕 따위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기묘하고 위험한 동요였다.
제 손을 쥔 채 놔주지 않는 그녀 때문에, 도진은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천천히 침대 위 그녀의 옆자리에 몸을 눕혔다.
그 순간, 잠결에 본능적으로 따뜻한 온기를 찾던 유라가 몸을 뒤척이더니 도진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왔다. 작은 몸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깊숙이 안겼고, 이내 그녀의 뜨겁고 가녀린 숨결이 도진의 살결에 고스란히 닿았다.
평소 같았으면 결벽증처럼 밀어내고도 남았을 터였다. 하지만 도진은 밀어내는 대신, 가만히 눈을 감으며 유라를 제 팔 안으로 받아들였다.
암흑이 내려앉은 침실, 정적을 깨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유라의 숨소리 사이로 또 다른 소리가 겹쳐 들렸다. 도진은 자신의 왼쪽 가슴팍에서 울리는 심장 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빠르고 거칠게 뛰고 있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유라를 안고 있던 김도진은 순간 뺨에 닿는 그녀의 뜨거운 체온에 깜짝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그녀의 작은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온기가 예사롭지 않았다. 손등에 스치는 살결이 마치 불덩이 같았다.
“왜 이렇게 뜨거워…….”
낮게 읊조리는 도진의 목소리에 당혹감이 섞여들었다. 혹독한 감기 기운에 김건이 먹인 기묘한 약기운까지 겹쳐 올라온 모양이었다. 도진은 서둘러 두꺼운 이불을 가져와 덮어주려 했으나, 이내 침대 위에 무방비하게 누워있는 유라의 모습을 보고 잠시 짓눌린 듯 멈칫했다.
어둠 속에서도 유라의 새하얀 피부는 붉은 열꽃이 피어올라 터질 듯이 달아올라 있었다. 늘어진 도진의 검은 셔츠 사이로 위태롭게 드러난 가냘픈 어깨선과 가슴팍의 굴곡은, 처연하면서도 가학적인 본능을 자극하는 묘하게 매혹적인 아우라를 풍겼다.
김도진의 주위에는 언제나 화려하고 내로라하는 여자들이 차고 넘쳤지만, 이토록 심장을 거칠게 쥐고 흔들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처연한 자극은 처음이었다.
넋을 잃고 유라의 입술을 바라보던 도진은 이내 머리를 털며 정신을 차렸다. 거칠게 숨을 내쉬며 거실 비상약 상자에서 해열제를 찾아 침대로 돌아왔다.
“이유라, 정신 좀 차려봐. 이거 먹어야 해.”
그가 조심스럽게 유라의 가느다란 목덜미를 받쳐 들고 고개를 들어 올린 뒤, 알약을 입안에 밀어 넣어주었다. 하지만 이미 의식이 몽롱해진 유라는 혀끝에 닿는 쓴맛에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리며 약을 삼키지 못하고 뱉어버렸다. 몇 번을 달래고 밀어 넣어봐도 막무가내였다. 인사불성이 된 여자의 입을 억지로 벌려 삼키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유라의 거친 숨소리가 방 안의 정적을 채울수록,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진의 눈빛이 무겁고 깊게 가라앉았다. 질척한 소유욕이 이성을 마비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도진은 망설임 없이 알약을 자신의 입안에 집어넣고는, 테이블 위의 물을 한 모금 묵직하게 머금었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유라의 자그만 턱을 단단히 쥐어 고정하고, 그대로 그녀의 붉은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거칠게 겹쳐 내렸다.
“웁……! 읍……!”
순간적으로 입안을 꽉 막아선 낯선 남자의 감촉과 육중한 무게감에, 유라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끼며 두 손을 뻗어 그의 단단한 가슴팍을 밀어냈다. 하지만 도진의 몸은 거대한 바위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한 유라는 제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쓴 액체가 김건이 먹인 독한 술이라도 되는 양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으며 저항했다. 유라가 바르작거릴수록 도진은 그녀의 가느다란 손목을 침대 시트에 찍어 누르며, 설면을 얽어매듯 깊숙이 파고들어 끝내 약을 삼키게 만들었다.
꿀꺽-.
뜨거운 약물이 유라의 여린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고 나서야, 도진은 끈적하게 얽혔던 입술을 천천히 떼어냈다.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유라의 입술이 가련하게 떨렸다.
“하아, 하…… 윽…….”
유라는 갑작스럽게 밀려든 공기에 가슴을 들먹이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뜨거운 열기로 붉어진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도진은 붉게 달아오른 유라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자신의 입술 끝에 묻어난 유라의 타액과 약 기운을 엄지손가락으로 느릿하게 문질러 닦아냈다. 그리고는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숨긴 채, 그녀의 귓가에 잔인할 정도로 낮고 자극적인 음성을 흘려보냈다.
“그러게, 좋게 받아먹었으면 좋았잖아.”
그의 목소리는 밤안개처럼 낮았고, 잠든 유라의 온몸을 구속할 만큼 위험하게 일렁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유라는 마치 깊은 수렁에서 겨우 빠져나오듯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짙은 어둠이 무겁게 깔린 방 안, 코끝을 은밀하게 스치는 낯선 향기와 살결에 닿는 서늘한 시트의 감촉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몸을 일으키자 머리가 깨질 듯이 울려왔다. 하지만 이곳이 다름 아닌 김도진의 침실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순간, 거대한 당혹감이 전신을 지배했다.
‘어떻게 된 거지?…… 음료를 마신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부서진 기억의 실타래를 붙잡고 있을 겨를이 없었다. 이 위험한 공간에서, 특히 그의 침대 위에서 당장 벗어나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가 척추를 타고 흘렀다. 유라는 허벅지를 아슬아슬하게 가리는 헐렁한 티셔츠 자락을 다급하게 움켜쥔 채, 도망치듯 방을 뛰쳐나왔다.
전면 유리창 너머로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텅 빈 거실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유라는 거친 숨을 죽인 채, 발걸음 소리를 지워가며 현관을 향해 직진했다. 다급하게 구두에 발을 밀어 넣으며 도어록으로 손을 뻗던 바로 그때, 등 뒤의 짙은 어둠 속에서 얼음장처럼 차갑고 낮은 목소리가 날아와 박혔다.
“어딜 가게.”
“앗……!”
심장이 바닥으로 덜컥 내려앉았다. 유라가 제어되지 않는 몸을 뻣뻣하게 돌리자, 거실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댄 채 와인 잔을 느릿하게 돌리고 있는 도진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형형하게 번뜩이는 그의 매서운 눈빛이 유라의 무방비한 전신을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
“아, 안녕하세요…… 그게, 제가 지금 정신이 좀 없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
수치심에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숙이는 유라를 보며, 도진이 어이없다는 듯 픽, 메마른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와인 잔을 테이블 위에 탁, 소리가 나게 내려놓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라를 향해 걸어왔다. 거리가 한 걸음씩 좁혀질수록 그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위압감에 유라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내 집에 들어와서 청소하라고 했지, 내 침대에서 소란 피우라고 한 적은 없는데.”
“죄송합니다…… 정말 드릴 말씀이 없어요.”
“그리고, 그 꼴을 하고 지금 집에 가겠다는 거야?”
도진의 시선이 차갑게 멈춘 곳을 따라 유라 역시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순간, 유라의 얼굴이 다시 한번 홍당무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허벅지 중간까지 헐렁하게 내려오는 그의 검은 셔츠 아래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매끄러운 맨다리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아, 옷은…… 제가 화장실 청소를 하다가 물이 사방으로 튀어서 젖었는데…… 도대체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건지 저도 잘…….”
수치심에 말끝을 흐리며 차가운 대리석 바닥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유라를 보며, 도진의 입가에 비스듬한 미소가 띠어졌다. 약을 먹이기 위해 그녀의 입술을 거칠게 탐했던 직전의 뜨겁고 자극적이었던 순간을 유라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는 내심 안도하면서도 묘하게 뒤틀린 독점욕을 느끼고 있었다.
“됐어. 구구절절 변명 따위 듣고 싶지 않으니까.”
도진이 어느새 유라의 코앞까지 다가와 우뚝 멈춰 섰다. 그가 가진 서늘하고 지독한 체향이 유라의 호흡을 마비시킬 듯 파고들었다.
“난 누군가 허락 없이 내 구역에 들어오는 거 질색이야. 특히 내 물건 건드리는 건 더 싫어하고.”
도진이 유라의 어깨 위로 흘러내린 어설프게 젖은 머리카락 한 가닥을 손가락 끝으로 가볍게 튕겨내며, 잔인할 정도로 차갑게 덧붙였다.
“가기 전에 네가 어지럽힌 내 침대 시트 싹 갈아치워. 그리고 내가 시킨 청소, 하나도 빠짐없이 다 끝내고 가.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말고.”
심장을 얼려버릴 듯한 냉혹한 명령이었다. 조금 전까지 약 기운에 취한 그녀를 품에 안고 입술을 맞대며 해열제를 먹이던 남자의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유라는 치밀어 오르는 수치심과 당혹감에 아랫입술을 짓깨물었지만, 그의 서슬 퍼런 기세에 눌려 그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다시 어두운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시 늪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유라의 가냘픈 뒷모습을 바라보며, 도진은 굵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아랫입술을 가만히 매만졌다. 아직도 그곳에는 그녀의 입술을 가르고 들어갔을 때 묻어난 달큰한 숨결과, 쓴 약의 잔향이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남아 있었다.
유라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도진이 서늘한 음성으로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너를 이렇게 망가뜨린 그 자식을 지금 용서하겠다는 거야? 이유라, 너 자칫하면 정말 죽을 수도 있었어. 그런데 용서라니?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도진의 목소리가 참을 수 없는 분노에 젖어 거칠게 튀어나왔다. 그의 핏발 선 눈동자에는 유라를 향한 걱정과 억눌린 감정이 아슬아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유라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하지만…… 도현 오빠 아버님도 그렇고, 도현 오빠도 제 학창 시절엔 분명 고마운 분들이었던 건 사실이에요. 그분들이 완전히 망가지는 건 저도 원치 않고…… 무엇보다 다시는 제 눈앞에 나타나지 않겠다는 확실한 약속도 받았어요.”유라는 굳어진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도진의 손등 위에 조용히 제 손을 포갰다.“그리고 제가 경찰 조사를 받기 시작하면, 어쨌든 오빠 에게까지 수사가 미치게 될 거예요.”유라는 도진의 손을 꼭 쥐며 나지막하지만 단단한 어조로 이어 말했다.“가뜩이나 연이어 터진 안 좋은 기사들 때문에 힘든데 저 때문에 또다시 곤욕을 치르고 힘들어하는 모습…… 저, 더 이상은 정말 보기 싫고 힘들어요.....”“난 내가 가진 거 다 잃어도 상관없어. 그러니까 그런 거 신경 쓰지 마.”도진의 눈빛에 짙은 분노가 아른거렸다,“너를 이 지경으로 만든 이도현 그 자식은 물론이고, 옆에서 도운 놈들까지…… 난 절대로 그냥 안 둬. 전부 다 빠짐없이 대가 치르게 만들 거야.”도진의 단호한 태도와 눈빛을 확인한 유라는 결국 한 걸음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설득하고 달래 보아도, 한 번 뜻을 굳힌 도진이 절대 물러서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그 뒤로도 유라가 몇 번이고 그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도진의 뜻은 굳건했다.그렇게 도진은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기획사 대표와의 약속대로 남아 있던 모든 스케줄을 차질 없이 완벽하게 소화하고 마무리 지었다.그 끝을 향해 달리는 동안, 도진의 마음
“유라 학생……?”보육원 시절, 아이들과 자신에게 가식 없는 미소로 따뜻한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인자한 목소리. 국내 최고 대형 병원의 병원장이이자, 이도현의 아버지인 그의 목소리였다.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연락에 유라는 당황스러움으로 굳어버려 선뜻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수화기를 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려왔다.그 묵직한 정적을 깨고 다시 한번 도현 아버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유라 학생, 나 도현이 아빠예요. 듣고 있나요?”유라는 떨리는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나지막하게 대답을 건넸다.“네…… 안녕하세요.”수화기 넘어 유라의 떨리는 목소리를 들은 도현의 아버지는 깊은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정중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오랜만에 목소리를 들으니 반갑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기도 하구나…… 다름 아니라, 우리 도현이가 유라 학생에게 큰 실수를 했다고 들었어요...”여전히 기억 속 모습 그대로 자상하고 신사적인 말투였다.“아비 된 마음으로 우리 도현이의 잘못된 행동은 내가 엄하게 꾸짖고, 다시는 유라 학생 앞에 나타나지 못하도록 확실히 조치 할테니. 그러니 부디 이번 한 번만 우리 도현이를 용서해 줄 수 없겠어요?”유라는 순간 가슴이 먹먹해졌다. 도현의 아버지에게는 사실 감사한 마음이 컸던 탓이다. 과거 보육원 봉사활동을 오며 시설에 아낌없는 금전적 지원을
게다가 사건은 끝난 게 아닌,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저 유라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조사가 잠시 지연되고 있었을 뿐. 만약 조사 과정에서 유라의 입을 통해 이상한 말이라도 터져 나오는 날엔, 제 아들이 쌓아 올린 커리어와 가문의 명예는 그야말로 나락으로 처박힐 게 뻔했다.도현의 부모는 식은땀이 흐르는 손을 쥐어짜며 깊은 초조함에 휩싸였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서 아들이 망가지는 걸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도현의 아버지가 도현의 집 문을 열고 들어섰다.두꺼운 암막 커튼마저 치지 않아 어둠이 짙게 깔린 집안, 거실 한복판에는 도현이 술에 취해 쓰러지듯 잠들어 있었다. 며칠 새 살이 쏙 빠진 그의 차가운 인상은 더욱 날카로워 보였다.‘철컥-’아버지가 거칠게 커튼을 젖히자, 창문 너머로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햇살에 도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천천히 눈을 떴다. 붉게 충혈된 눈에 차가운 표정의 아버지가 담기자, 도현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켜 소파에 기대앉았다.“……왜 오셨어요.”“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니? 너 도대체 밖에서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아버지는 참아왔던 분통을 터뜨리며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도현은 초점 없는 눈으로 초라한 술병들을 바라볼 뿐이었다.“아버지가 신경 쓰실 일 아니에요.”“뭐? 신경 쓸 일이 아니라고?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너 지금 이 얘기가 조금이라도 밖으로 새어 나가서 잘못된 기사라도 터지면, 우리 병원 이미지 나락 가는 건 한순간이야! 네 인생도 끝이고!”병원과 가문의 명예를 먼저 들먹이는 아버지의 호통에 도현의 눈매가 차갑게 일그러졌다. 그는 비틀거리는 몸을 추스르며 낮게 읊조렸다.“……제 뒤 캐셨어요?”“지금 그게 중요해?! 이도현, 너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망가진 거야! 대체 뭣 때문에…… 그깟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이 미친 짓을 벌인 거냐고!”“....”“내가 너를 보육원 봉사활동에 데려가는 게 아니었는데…….”도현의 아버지 입에서 짙은 후회가 섞인 한숨이 털썩 새어 나왔다.“처음부터 그
“……알겠어요.”피해를 최소한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대표의 지극히 현실적인 설득에 도진도 마침내 나지막이 응했다.어쨌든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을 위해 일하고 있는 직원들의 생계와 노력을 한순간에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전화를 끊은 도진은 낮게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그리고는 소파 한쪽 구석에 안절부절못하고 불안해하는 유라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신과 진심으로 사랑해서 품게 된 소중한 생명이었건만, 유라는 마치 커다란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온통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위축된 모습이 도진의 가슴을 또 한 번 시리게 만들었다.도진은 유라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시선을 맞추었다.“이유라.”유라를 담아내는 그의 눈동자에는 오직 깊고 다정한 온기만이 남아 있었다.“네가 죄인처럼 굴 이유 단 하나도 없어. 이건 우리가 사랑해서 생긴 가장 축복받아야 할 일이야. 내가 다 해결할 테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하지만…… 이 시기에……”유라가 여전히 근심 어린 얼굴로 입을 열려 하자, 도진은 그녀의 말을 부드럽게 잘라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그건 네가 걱정할 일 아니야. 온전히 내 몫이지.”도진의 커다란 손이 유라의 뺨을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뱃속에 있는 아이, 내 아이기도 해. 내가 전부 감내해야 할 일이야.”단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도진의 눈빛에는 유라를 향한 깊은 미안함과 단단한 책임감이 서려 있었다.“밥 먹자.”도진은 무거워진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자연스럽게 말을 바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오늘 계속 토하느라 빈속이잖아. 먹고 싶은 거 없어?”유라가 여전히 입맛도, 마음의 여유도 없어 가만히 고개를 저어 보이자, 도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지며 말을 이어갔다.“생각 없어도 먹어야지. 아까 병원에서 선생님 이야기 못 들었어? 영양 불균형이 심하다고 했잖아.“너를 위해서, 그리고 뱃속의 아이를 위해서라도 조금은 먹어야 해.”말을 마친 도진은 주방으로 향하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김이
주치의의 긴 설명이 끝나고 진료실을 나서는 순간까지도 도진은 단 한마디 입을 열지 않았다.슬픔과 미안함에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고 당장이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았지만, 유라는 꾹 눌러 참았다. 차마 도진의 얼굴을 마주할 용기조차 나지 않아, 유라는 병원을 나서는 내내 숙인 고개를 끝내 들지 못했다.차에 올라탄 도진의 반응은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집으로 향하는 내내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정적만이 감돌았다.도진은 깊은 생각에 잠긴 듯 단 한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그의 차가운 옆모습은 낯설다 못해 무섭기까지 했다.도진의 차가운 옆모습에 유라는 가녀린 몸을 더욱 말아 웅크렸다.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어두운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유라의 손가락 끝이 불안하게 마구 짓눌렸다.차 안을 짓눌러 오는 이 무거운 침묵이 마치 마지막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펜트하우스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은 유라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는 거친 숨을 내쉬며 냉수를 컵 가득 따라 한 번에 들이켰다.차갑게 굳어 있는 그의 등 뒤에서,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쥔 채 참아왔던 목소리를 내어놓았다.“…… 이 아이로 발목 잡을 생각 전혀 없어요.”차가운 정적 속에서 유라의 떨리는 음성이 서글프게 울려 퍼졌다.“제가…… 제가 떠날게요.”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물컵을 내려놓는 도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식탁 위에 '탁' 소리를 내며 놓인 유리컵 주변으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이유라.”낮게 가라앉은 도진의 목소리가 펜트하우스의 차가운 공기를 갈랐다. 천천히 몸을 돌려 유라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참아왔던 감정이 일렁이고 있었다.“넌 정말…… 나한테 비밀 같은 건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이야기하기로 했잖아!”억눌렸던 도진의 소리가 결국 거칠게 터져 나왔다. 화가 잔뜩 난 그의 목소리에는 서운함과 울분, 그리고 속을 태우던 애타는 심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도대체 이렇게 큰 일을 나한테
얼마 지나지 않아 적막을 깨고 벨 소리가 울렸다. 문을 열자 숨을 헐떡이는 매니저가 서 있었다. 도진의 성화에 못 이겨 겨우 외투를 걸친 유라는 차마 떼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차는 도로를 내달려 순식간에 병원 앞에 도착했다. 도진의 전담 주치의가 기다리고 있는 프라이빗 진료실로 안내받은 유라는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짓씹으며 검사실로 들어섰다.하지만 첫 검사부터 커다란 난관이 찾아왔다.기본 검사를 마친 뒤 흉부 엑스레이 촬영을 준비하던 방사선사가 유라를 향해 무심하게 물었다.“이유라 씨, 혹시 임신 가능성 있으신가요?”갑작스러운 질문에 유라는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 굳어버렸다. 입술만 벙긋거릴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는 유라를 보며, 옆에 서 있던 간호사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혹시라도 임신 가능성이 있으시면 배를 가리고 촬영해야 해서요.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으실까요?”“네……”유라의 입술 사이로 들릴 듯 말 듯한 대답이 새어 나왔다. 자신 때문에 혹시라도 아이에게 나쁜 영향이 갈까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다. 간호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준비하는 동안,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꼭 쥐며 나지막이 물었다.“저기…… 혹시 제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보호자에게 비밀로 해주실 수 있나요?”갑작스러운 부탁에 간호사는 의아한 눈빛으로 유라를 바라보았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유명 연예인 도진과 어떤 관계인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는 듯했지만,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나지막하게 답했다.“음, 그건 저희 쪽에서 임의로 숨겨드리기는 어려워요. 검사가 다 끝나고 담당 의사 선생님과 상담하실 때 직접 말씀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자, 찍습니다. 숨 크게 들이마시고 참으세요.”찰칵하는 소리와 함께 흉부 엑스레이 촬영은 금세 끝이 났다. 이어 피검사를 비롯해 각종 검사를 차례로 마친 유라는 옷을 갈아입고 검사실 밖으로 나왔다.아침부터 빈속이었던 데다 긴장 속에 여러 검사를 치르
“신세 많았어요, 오빠. 연락드릴게요.”유라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고,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적막한 집안에 무겁게 울렸다. 혼자 남은 도현은 유라가 누워 있던 온기가 남은 침대를 바라보며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금방 다시 오게 될 거야, 유라야. 내 품 말고는 네가 숨 쉴 곳 따윈 없을 테니까.”택시 안에서 유라는 떨리는 손으로 김도진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가기도 전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툭, 하고 전화가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로 소름 끼치도록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도진 씨? 죄송합니다! 제가 첫날부터 술을
[다시 현재 도현의 방]자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유라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밤 김도진이 제게 뱉었던 소유욕 어린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라를 그 지옥 같은 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도현은 침대 옆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앉으며 낮게 읊조렸다.“거기 그만두고 우리 병원으로 와. 너 일할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순간 유라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급 두 배의 꿈의 직장이라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이 되었으니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도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올렸다. 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이도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이는 김도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지독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품에 무력하게 안겨 있는 유라에게로 향했다.“내 신입 매니저가 왜 거기 안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도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
평소의 도현은 냉정해 보여도 유라에게만큼은 눈빛에 다정한 온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현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랬구나…… 죄송해요, 오빠.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근데, 제 가방이랑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회사에 연락도 못했는데....유라가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묻자, 도현이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유라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현은 양복 주머니에서 익숙한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