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
사방이 적막에 잠긴 어두운 방.
이유라는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을 내뱉으며 깊은 늪 같은 잠 속을 헤매고 있었다.
‘으음…….’
그때, 문밖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인기척에 그녀가 힘겹게 눈을 떴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웠지만, 온몸의 세포가 본능적인 위기감을 맥질하며 그녀를 깨웠다.
낯선 천장, 코끝을 찌르는 서늘한 약품 냄새.
꿈인지 실제인지 분간하려 고개를 돌리던 유라는 당황해 몸을 일으키려다, 왼손등에 차갑게 꽂힌 링거 바늘을 보고 멈칫했다.
“분명 어제…… 드라마 촬영팀 회식 후…….”
필름이 끊긴 듯 그 이후의 기억은 새하얬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술을 입에 대본 적 없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어제는 그녀의 첫 직장 연예계 매니저로서의 첫 출근날이자, 담당 배우인 ‘김도진’과의 첫 회식 자리였다. 실수하지 않으려고, 얕보이지 않으려고 긴장한 채 받아 마신 첫 잔. 기억은 딱 거기까지였다.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의 가방이나 휴대폰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병원인 건가?”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커다란 방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갑자기 환해진 시야에 유라가 눈을 찡그리며 문쪽을 바라보았다. 역광 속에 서 있는 건장한 남자의 실루엣. 유라는 알 수 없는 공포심에 이불을 가슴팍까지 끌어당기며 몸을 움츠렸다.
두벅, 두벅. 한 걸음씩 다가오는 발소리가 심장을 죄어올 때쯤, 익숙하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몸은 좀 괜찮아?”
빛에 적응한 유라의 눈에 들어온 얼굴은 다름 아닌 이도현이었다.
국내 최대 규모인 강해 병원 병원장의 아들이자, 냉철하기로 소문난 천재 의사. 그리고 유라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보육원에서 만난, 유일한 안식처이자 ‘키다리 아저씨’ 같은 존재. 이도현이었다.
당시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봉사활동을 따라왔던 도현은 유라를 처음 본 날 이후, 일 년에 한 번 오던 방문을 한 달에 한 번, 나중에는 매주 찾아오는 지독한 정성을 보였다. 차가운 얼음 같던 그가 유라 앞에서만큼은 미세하게 흔들리던 것을, 유라만 눈치채지 못했을 뿐이었다.
이도현의 얼굴을 확인하자마자 유라는 참았던 숨을 몰아쉬며 안도했다.
“도현 오빠……? 저 어떻게 된 거예요?”
유라가 손등의 주사 바늘을 보며 다급하게 묻자, 도현이 무표정한 얼굴로 다가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엊그제 회식 날, 나도 그 자리에 있었어. 네가 술 마시고 쓰러져서 내 집으로 데려온 거야.”
“엊그제요? 그럼 제가 이틀이나 잠들었다는 거예요?”
“알코올 쇼크 증세가 있어서 영양제랑 진정제를 좀 놨어.
유라 넌 술은 입에도 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도현의 담담하지만 서늘한 대답에 유라는 소스라치게 놀라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불 아래로 드러난 자신의 차림새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그날 입었던 옷은 간데없고, 허벅지를 겨우 가리는 커다란 남성용 반팔 티셔츠 한 장뿐이었기 때문이다.
“어, 옷이………?”
당황과 수치심이 뒤섞인 유라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옷에 토사물이 잔뜩 묻어 있어서 어쩔 수 없었어. 가사도우미 아주머니 불러서 갈아입히고 세탁해 뒀으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
도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건조하게 말을 받아쳤다. 유라는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어딘가 가시지 않는 기묘한 위화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살결이 닿을 때마다 전해지는 온기는 소름 끼치도록 다정했다. 유라 역시 밀려드는 애틋한 열기에 취한 듯 도진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의 단단한 목덜미를 두 팔로 꼭 껴안았다.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약하고 소중한 유리잔을 대하듯 조심스럽고도 밀도 높은 움직임이었다. 도진은 유라의 몸속 깊은 곳을 부드럽게 채우며 그녀를 만족시켰고, 유라는 그의 어깨에 뺨을 묻은 채 아찔한 감각 속에서 달콤한 신음을 흘렸다다음 날 새벽녘, 어스름한 푸른빛이 방 안으로 밀려들 때쯤 도진은 먼저 눈을 떴다. 제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곤히 잠들어 있는 유라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엔 깊은 아쉬움이 교차했다.샤워를 마치고 축축한 물기를 머금은 채 욕실을 나온 도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침대로 향했다. 그사이 잠에서 깬 유라가 이불을 몸에 감은 채 부스스 눈을 깜박이고 있었다. 밤새 치러진 격렬하고도 다정한 정사의 흔적 탓에 유라의 하얀 어깨에는 붉은 자국들이 선명했다.도진은 침대맡으로 다가가 유라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다정하게 쓸어 넘겨주며,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속삭였다.“잘잤어?.”유라는 어젯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불을 꼭 쥐었다.가방을 챙겨 거실로 나오자, 완벽한 정장 차림의 경호실장이 묵직한 가방과 대형 캐리어를 양손에 든 채 도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진이 현관문으로 향하자, 유라가 그의 뒤를 따랐다.도진은 문을 나서다 말고 돌아서서 유라를 제 품에 꽉 안았다.“딴생각하지 말고, 딱 기다려. 내일모레 공항에서 보자.”“네”유라의 배웅을 받으며 마침내 도진과 경호실장이 문을 나섰고, 현관문이 철컥─ 소리를 내며 굳건하게 닫혔다.고요해진 펜트하우스에 홀로 남은 유라는 내일 있을 생애 첫 해외여행을 준비하며 캐리어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옷가지를 접어 넣을 때마다 조금 전까지 자신을 뜨겁게 안아주던 도진의 은은한 체취가 몸에 배어 유라의 입가에 기분 좋은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다음날 늦은 새벽 도진에게서 파리에
어둠의 세계에서 잔뼈가 굵은 도현의 고교 동창에게 유라의 행방과 일정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 일이었다.독이 바짝 오른 도현의 휴대폰에 띠링─ 하고 날카로운 문자음이 울렸다. 도현은 낚아채듯 휴대폰을 확인했다. 동창이 보낸 문자는 생각보다 훨씬 더 구체적이고 정보들을 담고 있었다.[이유라 현재 김도진 펜트하우스 상주 중. 정문 상시 경호 인력 배치로 내부 접근 불가.2주 뒤 프랑스 항공편 예약 내역 확인 완료.]프랑스? 도현이 내용을 곱씹으며 이를 악물던 찰나, 타이밍 좋게 휴대폰 화면이 전환되며 동창의 이름이 떴다. 도현은 지체 없이 전화를 받아 귀에 가져다 댔다.“어, 말해.”[문자 봤냐? 뒷조사 좀 더 해보니까 아주 재미있는 틈이 있더라고.]수화기 너머 동창의 목소리에 삐딱한 흥분조가 섞여 있었다.[김도진이 2주 뒤에 프랑스 촬영 스케줄이 잡혔거든? 근데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못 가고, 그전날 김도진이 먼저 프랑스로 출발해. 그리고 다음 날에 이유라가 혼자 공항으로 출발하는 일정이야.]도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크게 확장되었다.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지금은 경찰 조사 때문에 최대한 몸 좀 사려야 하니까, 2주 뒤에 이유라가 혼자 공항으로 이동할 때 길목에서 바로 작업 칠 거야. 그때 낚아채는 게 가장 깔끔해.]“……공항으로 갈 때.”도현이 나직하게 동창의 말을 읊조렸다. 목소리가 잔인할 정도로 가라앉아 있었다.도현은 터져 나오는 광기 어린 웃음을 짓씹으며 동창에게 명령했다.“좋아. 네 말대로 해. 대신 실수 없이 진행해 .”[돈만 제대로 입금해 주면, 공항 땅 밟기도 전에 네 방 침대에 눕혀줄 테니까 걱정 마라.]도현은 가차 없이 전화를 끊어버렸다. 툭 끊긴 휴대폰 액정 위로 비친 제 얼굴이 지독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허공을 노려보던 도현이 잔인하게 읊조렸다.‘이유라 다신 널 놓치는 일 없어..‘그렇게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도진이 프랑스로 출국하는 날이 바로 내일로 다가왔다
[아…… 네, 우선 좌석 상황이랑 예약 내역 확인해 보고 바로 연락드릴게요.]도진의 난데없는 명령에 실장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한 뒤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도진의 휴대폰이 다시 요란하게 울렸다. 화면에 뜬 총괄실장의 이름을 확인한 도진이 바로 전화를 낚아챘다.“어떻게 됐어.”[도진 씨, 방금 확인해 봤는데요. 상황이 좀 난감하게 됐어요. 우선 이유라씨 현재 여권 자체가 없어서 신규 발급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가장 큰 문제는 그날 도진 씨가 타시는 비행기 좌석이 퍼스트부터 이코노미까지 전석 매진이에요. 정 같이 가시려면 유라 씨는 다음 날 비행기로 따로 보내야 할 것 같아요.]“다음 날 비행기라고……?”도진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 총괄실장이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였다.[네, 도진 씨. 일정이 워낙 촉박해서 이것도 정말 겨우 구한 거예요. 우선 다음 날 비행기표라도 예약을 걸어둘까요?]“하아…….”도진의 붉은 입술 사이로 깊고 무거운 한숨이 거칠게 새어 나왔다.“……우선 알겠어. 그렇게라도 예약 걸고 빨리 진행해.”[네, 알겠어요! 바로 진행하고 다시 보고드릴게요.]전화가 끊기고 도진은 폰을 소파 위로 툭 던져버린 뒤, 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소파 헤드 위로 고개를 툭 젖혀 기댔다.한참을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도진은 마침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오늘 예정된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 완벽하게 핏이 떨어지는 수트를 챙겨입은 도진은 집을 나서기 전, 유라의 침실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방 안에는 여전히 은은한 향기와 함께 유라가 침대 묻혀 부드러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도진은 침대 머리맡으로 다가가 상체를 숙이고는, 유라의 이마 위에 자신의 입술을 지긋이 꾹 눌러 맞췄다. 샤워 후의 시원한 스킨 향과 낮선 감촉에 유라가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서서히 눈을 떴다.“스케줄 있어서 난 지금 나가봐야 하니까, 집에서 쉬고 있어. 연락할게.”“……네, 다녀오세요.”유라가 고개를 끄
“아……! 하아, 하 아……!”자신의 안쪽을 잔인하게 파고드는 강렬한 팽창감에 유라는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미처 받아들이기도 전에 깊숙이 박혀드는 자극은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아찔했다.터질 듯이 감싸오는 유라의 뜨겁고 좁은 통로에, 도진 역시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강한 자극을 참지 못하고 가죽 같은 거친 숨을 내뱉었다.“하…… 젠장, 이유라…….”방 안은 숨 막힐 듯한 밀어와 두 사람의 날것 그대로의 신음, 그리고 살과 살이 거칠게 부딪히는 은밀한 마찰음으로 가득 찼다.“하…… 힘 빼, 이유라.”“흐윽, 앗…… 하아……”도진은 유라가 적응할 틈도 주지 않고 골반을 단단히 붙잡은 채 아래를 거칠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허리를 움직이는 도진의 움직임이 점차 빨라질수록, 유라의 몸 안쪽 가장 민감한 곳을 집요하게 짓밟고 파고드는 자극에 찌릿한 전류가 온몸을 강타했다.유라는 밀려드는 극상의 쾌감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하........하아....못.. 견디겠어요....”“조금만 참아”마침내 거칠었던 도진의 움직임이 멎고, 그가 유라의 몸 안에서 천천히 빠져나와 침대 옆자리에 묵직하게 누웠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유라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는지, 가쁜 숨을 들이쉬고 내쉬며 기진맥진해 있었다. 새하얀 이불 위로 드러난 어깨와 목덜미에는 도진이 새겨놓은 선명한 보랏빛 낙인들이 붉은 꽃처럼 피어 있었다.도진은 땀방울이 맺힌 제 이마를 쓸어 넘기며, 곁에서 조용히 숨을 고르는 유라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도진은 바닥에 흩어져 있던 이불을 끌어당겨 유라의 가녀린 몸을 목 끝까지 덮고는 커다란 팔을 뻗어 유라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자신의 단단한 품 안쪽으로 훅 끌어당겼다.스스륵─.작은 몸집의 유라가 도진의 넓은 가슴팍 안으로 쏙 들어가 안겼다. 도진의 가슴에 뺨을 기댄 유라의 코끝으로 그의 진한 체취와 시원한 스킨 향이 밀려들었다.도진의 탄탄한 가슴팍에 뺨을 묻은 유라의 규칙적이고
도진과의 거리가 가까워 지자 유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도진의 시선과 마주하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은 압도감에 유라는 황급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그게…… 읏,”유라가 고개를 돌린 찰나, 조명을 받아 눈이 부시도록 하얗고 매끄러운 목선이 도진의 시야에 적나라하게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순백 위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는 이도현의 거슬리는 자국들.다시 한번 그 흔적을 마주한 도진의 이성이 완전히 끊겨 나갔다.도진은 유라의 목덜미로 거침없이 고개를 묻었다. 사정없이 맞닿은 도진의 입술은 타버릴 듯 뜨거웠고, 살결을 집어삼키는 숨결은 잔인할 정도로 거칠었다.“하아……! 앗,”예상치 못한 곳에 닿아오는 강렬한 자극에 유라의 입술 사이로 신음이 여과 없이 터져 나왔다. 도진은 유라의 양 손목을 한 손으로 꽉 움켜쥐어 머리 위로 완벽하게 결박한 채, 다른 한 손으로는 유라의 가녀린 허리를 바싹 끌어당겨 제 단단한 하체에 밀착시켰다.“연락하지 말란 내 말이…… 장난 같았나 보지, 이유라?”“그런게.....아니....읏....”유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도진은 이도현이 남긴 붉은 흔적 위를 거칠게 빨아올렸다.목덜미를 파고드는 짜릿하고도 아찔한 통증에 유라의 하얀 발가락 끝이 꼿꼿하게 굳어졌다.가운 사이로 느껴지는 도진의 거칠고 탄탄한 가슴 근육이 유라의 부드러운 가슴을 사정없이 짓눌렀다.도진의 커다란 손이 유라의 얇은 티셔츠 밑단 속으로 거침없이 파고들었다. 잘게 떨리는 허리춤을 지나 그대로 위를 향해 미끄러진 손길이, 유라의 부드러운 가슴을 단숨에 움켜쥐고 제멋대로 헤집었다. 뜨겁고 커다란 도진의 손바닥이 살결을 마찰할 때마다 찌릿한 전류가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도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다른 한 손을 유라의 은밀한 곳으로 깊숙이 밀어 넣었다.노골적인 자극에 유라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하아…… 하…… 읏,”터져 나오는 숨을 집어삼키며 유라가 몸을 뒤틀자, 도진이 유라의 위에서 상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거
바깥에서 나는 미세한 소음에 잠이 깬 것인지 유라가 잠에서 덜 깬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만 이내 어두운 조명 아래 드러난 도진의 모습의 날 것 그대로의 위험한 아우라를 마주하자마자, 유라는 숨을 들이켜며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긴 모습과 가운 자락이 반쯤 흐트러져 드러난 도진의 단단한 가슴팍은 숨이 막힐 정도로 치명적이었고, 동시에 본능적인 경계심이 들 만큼 위험해 보였다.당황한 유라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어…… 깨우려던 건 아니었어요. 죄송해요, 쉬세요”도진은 도망치듯 방으로 숨으려는 유라의 얄팍한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길게 뻗은 손가락으로 캔을 내려놓은 도진이 시선은 고정한 채 나직하게 유라를 불러 세웠다.“이유라.”도진이 까딱 손짓을 하며 그녀를 제 곁으로 불렀다. 매혹적이면서도 거역할 수 없는 서늘한 지배욕을 풍기는 도진에게, 유라는 마치 무언가에 홀린 듯 자석처럼 이끌려 다가갔다.제 앞에 멈춰 선 유라를 올려다보던 도진이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의 상처를 한번 훑고는, 이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휴대폰은 왜 꺼놨어?”“아, 그게…… 배터리가 없어서 저절로 꺼졌나 봐요.”유라가 급하게 말을 지어내는 그 찰나의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을 도진은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포착해 냈다. 도진의 입꼬리가 비틀리듯 기묘한 호선을 그렸다.“그래? 가져와봐.”도진의 툭 던진 한마디에 유라의 가슴이 쿵 하고 바닥으로 내려앉았다.“아니요, 제가…… 제가 충전하면 돼요.”필사적으로 숨기려는 유라의 태도에 도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늑대처럼 돌변했다. 도진이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운 자락을 펄럭이며 유라의 방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그의 등 뒤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오늘 스케줄을 나가기 전, 분명히 이도현과 연락은커녕 만나지도 말라고 잔인하게 경고했던 도진이었다. 전화를 급하게 끄는 바람에 미처 통화 내역을 지우지 못했던 유라는 정작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거대한 죄를 지
[다시 현재 도현의 방]자책하며 안절부절못하는 유라를 내려다보던 도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그날 밤 김도진이 제게 뱉었던 소유욕 어린 경고가 귓가를 맴돌았다. 유라를 그 지옥 같은 놈의 곁에 둘 수는 없었다.도현은 침대 옆 의자에 깊숙이 기댄 채 앉으며 낮게 읊조렸다.“거기 그만두고 우리 병원으로 와. 너 일할 자리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니까.”순간 유라의 마음이 세차게 흔들렸다. 시급 두 배의 꿈의 직장이라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이런 꼴이 되었으니 겁이 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보육원
도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라가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도현은 본능적으로 그녀를 낚아채듯 품에 안아 올렸다. 바로 그때, 룸의 문이 열리며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이도현? 이런 데서 볼 줄은 몰랐네.”오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이는 김도진이었다. 고교 시절부터 지독한 라이벌이자 숙적이었던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날카롭게 부딪혔다. 도진의 시선이 도현의 품에 무력하게 안겨 있는 유라에게로 향했다.“내 신입 매니저가 왜 거기 안겨 있는지 물어봐도 될까?”도진의 입가에 걸린 미소는 여유로웠지만, 눈빛만큼은 사납게 빛나고
평소의 도현은 냉정해 보여도 유라에게만큼은 눈빛에 다정한 온기가 도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를 내려다보는 도현의 눈은, 아무런 감정도 읽을 수 없을 만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그랬구나…… 죄송해요, 오빠. 저 때문에 고생 많으셨죠.”“…….”“근데, 제 가방이랑 핸드폰은 어디 있어요? 회사에 연락도 못했는데....유라가 침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초조하게 묻자, 도현이 천천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거대한 실루엣이 유라의 위로 짙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도현은 양복 주머니에서 익숙한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들었다.
도진이 거칠게 초인종을 눌렀지만,그 어떤 기척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기분 나쁜 적막에 도진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그는 곧바로 경호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낮고 서늘하게 쏘아붙였다.“이유라, 안에 있는 거 확실해?”[네, 확실합니다, 이도현이 나간 이후로 그 어떤 외출 없었습니다.]“…….”전화를 끊은 도진의 안색이 차갑게 굳어졌다. 문을 두드려도, 이름을 불러도 묵묵부답인 상황. 불안감이 도진의 덜미를 거칠게 움켜잡았다.도진은 망설임 없이 벽면에 비치된 묵직한 소화기를 들고 현관 문고리를 향해 사정없이 내리쳤다.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