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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임청연
“저는 배준모 대표님의 비서, 주민건이라고 합니다.”

앞에 서 있던 민건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건넸다.

그리고는 뒤쪽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이 사람은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앞으로 나선 경호원들이 남자를 붙잡고 밖으로 끌어냈다.

잠시 후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그제야 채이는 눈앞의 상황이 현실이라는 걸 실감했다.

‘배준모 쪽 사람이... 나를 구한 거야.’

끝까지 팽팽하게 버티고 있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채이는 입을 열고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눈앞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민건이 사람들에게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지시하는 목소리만이 희미하게 들렸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채이는 병실이었다.

침대 옆에는 익숙한 얼굴이 앉아 있었다.

임설희였다.

“상무님, 드디어 깨어나셨어요.”

설희는 채이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부터 후원해 오던 학생이었다.

졸업 후 능력을 인정받아 채이 곁에 남았고, 설희에게 채이는 이미 가족 같은 존재였다.

채이가 사고를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설희는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오다가 사고를 낼 뻔하기도 했다.

설희와 눈을 마주치자, 채이의 눈빛이 조금 누그러졌다.

“나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었다.

설희의 머릿속에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 의사에게 들었던 말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갈비뼈 골절, 심폐 손상.

조금만 늦었어도 생명이 위험했을 거라는 말까지.

설희는 채이를 바라보며 애써 감정을 눌렀다.

채이는 가볍게 기침을 한 뒤 물을 몇 모금 마시고 말을 이었다.

“전에 말한 이사회 건, 지금 상황은 어때?”

“상무님, 이번엔 정말 부 대표님을 말려야 해요.”

설희는 채이를 대신해 억울함을 삼키듯 말했다.

“부 대표님이 회사 지분의 30퍼센트를 강시은 씨한테 넘기겠다고 했어요.”

“이 회사는 상무님이랑 부 대표님이 같이 세운 건데, 상무님 지분도 그만큼은 아니잖아요.”

채이는 잠시 말을 잃었다. 이내 입가에 옅은 비웃음이 스쳤다.

회사를 막 세웠을 때, 태빈은 위험 부담이 크다며 채이의 지분을 최소한으로 낮췄다.

그 선택을 채이는 받아들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태빈은 아무렇지 않게 30퍼센트를 다른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이 정도였구나.’

보이지 않는 손이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답답해졌다.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고, 입안에는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이사회 쪽에 연락해.”

채이는 천천히 말했다.

“내가 반대한다고 분명히 전해.”

채이는 손을 꼭 쥐며 스스로를 진정시켰다.

그리고 준비해 둔 대응을 하나씩 설희에게 설명했다.

설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두 받아 적었다.

병실을 나서기 전, 설희는 떠올린 듯 말을 덧붙였다.

“상무님, 아까 주민건 비서님이 전해 달라고 했어요. 당분간 이 근처에 머물 예정이라고요. 필요하면 언제든지 전화 주셔도 된다고 했어요.”

채이는 잠시 멈칫했다.

그제야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 배준모였다는 사실이 또렷이 떠올랐다.

채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희가 나간 뒤, 채이는 핸드폰을 꺼내 배준모 쪽으로 감사 메시지를 보냈다.

...

채이는 한 달 동안 입원했다.

그 사이 회사 일은 설희가 맡아 처리했다.

태빈이 이사회에서 시은 명의로 지분을 넘기려던 안건은 결국 통과되지 못했다.

게다가 기존 프로젝트 협력사 몇 곳이 계약을 해지하면서, 태빈은 연일 난처한 상황에 몰렸다.

퇴원하는 날, 채이는 병원 입구에 서 있던 태빈을 보았지만 시선도 주지 않았다.

태빈의 표정은 먹구름이 내려앉은 듯 무거웠다.

채이는 설희와 함께 곧장 주차된 차 쪽으로 걸어갔다.

“진채이!”

뒤에서 채이의 팔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막 아물기 시작한 갈비뼈 쪽이 욱신거리며 찢어질 듯 아팠다.

“악...”

채이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냈다.

태빈은 채이의 반응에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묻기 위해 입을 열려던 찰나, 설희가 앞으로 나섰다.

채이 앞을 막아선 설희가 채이를 감쌌지만, 눈빛은 날카롭게 태빈을 향해 있었다.

“왜 상무님한테 손을 대세요!”

설희는 태빈의 지위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상무님 다치셨어요. 만약 당신 때문에 상무님 상처가 다시 벌어지기라도 하면, 대표님은...”

“진채이, 아직도 날 속이는 거야?”

설희의 말을 중간에 끊은 태빈이 채이를 바라봤다.

시선에는 실망과 혐오가 그대로 담겨 있었다.

“이제 그런 동정심 유발하는 짓 좀 그만해. 요즘 병원에 누워서 아픈 척한 것도, 결국 내가 시은이한테 지분 넘기는 거 막으려고 그런 거잖아.”

태빈의 목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그렇게 시은이 싫어? 너는 내 여자친구고, 시은이 아버지는 내 목숨을 구해준 분이야. 그런 사정을 봐서라도 좀 참을 수 있는 거 아니야?”

태빈은 숨을 고르고 말을 이었다.

“게다가 예전에 네가 직접 말했잖아. 시은이는 가족도 없고, 어릴 때 아버지를 잃은 뒤에 우리 부모님에게 입양됐으니까... 그래서 나보고 좀 더 신경 써주라고 하지 않았어?”

채이는 그 말을 듣고 헛웃음이 나왔다.

시은이 혼자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 어릴 적 아버지를 잃은 뒤 태빈의 부모에게 입양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채이는 분명 동정심을 느꼈고 태빈에게 잘 챙겨주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그 둘이 저지른 일들 중에 동정을 받을 만한 건 하나도 없었다.

태빈을 바라보는 채이의 눈빛은 이전보다 훨씬 차가워져 있었다.

“난 네가 강시은을 챙기라고 했지, 침대까지 들이라고 한 적은 없어.”

“나랑 시은이는 그런 사이가 아니야!”

태빈은 목소리를 높였다.

“왜 이렇게 의심이 심해졌어? 도대체 언제부터 이렇게...”

짝!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태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검은 눈동자 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감정이 가득했다.

‘이 여자가... 나를 때렸어?’

채이는 손을 거둬들였다. 표정은 차분했지만, 그 안에 남아 있는 온기는 전혀 없었다.

“부태빈.”

채이는 또렷하게 말했다.

“네가 그렇게 강시은 챙기고 싶으면, 그냥 강시은이랑 살아. 앞으로 너희 일은 전부 나랑 상관없어.”

“무슨 말이야?”

눈살을 찌푸린 태빈은 왠지 마음이 불편해졌다.

“지금 나랑 헤어지자는 거야?”

“그래.”

채이는 귀 옆의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말했다. 말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내 물건은 최대한 빨리 집에서 정리할게. 그리고 앞으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너 보는 것 자체가 역겨워.”

말을 마친 채이는 설희의 손목을 잡고 그대로 자리를 떴다.

태빈은 몇 초가 지나서야 상황을 이해했다.

굳은 표정으로 뒤따라가려고 했지만, 채이의 차는 이미 그의 앞을 지나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태빈의 기분은 더 가라앉았다.

‘말도 안 돼.’

태빈은 확신했다.

채이는 분명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러는 거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함께했고, 채이는 누구보다 자신을 사랑했다.

이렇게 쉽게 헤어지자고 할 리가 없었다.

그때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태빈의 생각이 끊어졌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는 순간, 눈빛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시은아, 무슨 일이야?”

전화기 너머로 시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태빈 오빠, 채이 언니... 연회 가는 거 허락했어요?]

[만약 채이 언니가 대신 사과하러 안 가면, 하씨 집안 사람들이 저 가만두지 않을 거예요.]

보름 전, 시은은 연회장에서 다른 사람과 말다툼을 벌이다가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상대를 밀쳐 물에 빠뜨렸다.

시은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 사람이 하씨 집안의 외동딸이자, 어려서부터 몸이 약해 외부 노출조차 거의 없었던 하다윤이라는 사실을.

다행히도 하다윤을 물에 빠뜨린 사람이 시은이라는 건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채이를 대신 내세울 수 있었다.

태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뺨에 남아 있는 얼얼한 통증이 조금 전 일을 상기시켰다.

태빈은 아직 채이에게 연회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빈은 강시은을 안심시켰다.

“걱정하지 마. 이건 내가 해결할게. 너한테 무슨 일 생기게 안 할 거야.”

[역시 오빠가 제일이에요.]

강시은의 목소리가 금세 밝아졌다.

[그럼 연회에 오빠랑 같이 가요. 저 예쁜 드레스 골라야 돼요.]

태빈은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다.

전화를 끊은 뒤, 태빈의 표정은 다시 차갑게 굳어졌다.

곧바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보육원 지원 전부 중단하라고 지시 내려.”

비서는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표님, 그 보육원은 원래 진채이 상무님이랑 함께 정한 곳이고... 대표님께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지원은 끊지 않겠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왜...]

“내 말대로 해.”

맞았던 쪽 뺨을 혀로 누르면서 태빈의 눈길은 더욱 차가워졌다.

채이가 보육원 출신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은 채이 뜻에 맞춰서 매년 지원을 이어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내가 진채이를 너무 버릇없이 놔뒀어.’

태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채이는 자신에게 손을 대는 선까지 넘었다.

이제는 분명히 알려줘야 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가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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