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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Auteur: 천이설
눈 깜짝할 사이에 밝았던 하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차 안은 매우 고요했고 문채아는 시선을 차창에 고정한 채 바깥 풍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날이 어두워짐에 따라 차창에 비친 강재혁이 얼굴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였다.

강재혁은 그냥 곁에 있는 거만으로도 절로 눈치가 보이는 사람이라 문채아는 차에 타서부터 지금까지 한마디 말도 건네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고맙다는 인사도 안 했네.’

“아까는 고마웠어요.”

강재혁은 조금 전과는 확연히 다른 그녀의 말투에 고개를 돌려 조수석 쪽을 힐끔 바라보았다.

답변은 따로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시선 한 번에 문채아는 차 안의 공기가 한층 더 차가워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고마운 게 아니라 죄송하다고 해야 하나...?’

“저... 갑자기 집으로 불러서 죄송해요. 연락받고 많이 황당하셨죠. 저 같아도 그랬을 거예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일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이상한 문자 안 보낼게요!”

문채아는 욕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에 강재혁에게 이 이상의 도움을 청할 생각이 없었다. 강재혁이 원한다면 지금 당장 번호를 삭제해 줄 수도 있었다.

“연락처는 제가 지금 바로...”

문채아가 진심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려는데 차량이 갑자기 멈췄다.

“발목에 감긴 붕대는 뭐고 얼굴에 난 상처는 또 뭐야? 박도윤이 제대로 신경 안 써줘?”

‘발목? 얼굴?’

문채아는 멍한 얼굴로 있다가 3초 뒤에야 반응했다. 상처를 의식하고 나니 갑자기 다시 통증이 밀려오는 것 같았다.

문채아는 빨갛게 변해버린 붕대를 보고는 쓴 미소를 지었다.

“발목은 미술관에서 후배들 도와주다 실수로 다친 거고 얼굴은 박도윤한테 맞았어요.”

“왜?”

강재혁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늘 도자기처럼 깨끗했던 얼굴이 지금은 완전히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박도윤은 네 남자 친구잖아.”

“네 맞아... 네?!”

문채아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 그걸 어떻게...”

그녀가 박도윤과 사귄다는 사실은 가족들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그러니 문채아는 당연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강재혁이 어떻게 아는 거지? 나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강재혁은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일에 관해 가끔 보고받고 있어. 너한테는 갚아야 할 빚이 있으니까.”

즉 그 보고로 두 사람 사이를 알게 됐다는 뜻이었다.

문채아는 벙찐 얼굴로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강재혁이 도움을 받은 상대에게 이토록 진심일 줄은 몰랐다.

‘잠깐만, 그럼 강재혁은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미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는 뜻이잖아.’

문채아는 지금 창피해 죽을 것 같았다. 다른 여자 때문에 화를 내는 남자 친구에게 얻어맞은 꼴을 그대로 강재혁에게 보여줬으니까.

문채아는 눈을 질끈 감은 채 박도윤과 강지유를 떠올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박도윤은 강지유와 약혼하려는 게 가문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그저 단순히 강지유를 더 좋아하게 돼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 말이다.

문채아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건 강지유가 정원에서 했던 말 때문이다.

1년 전, 박도윤이 정식으로 해정 그룹의 대표 자리에 오르게 됐던 그날, 문채아는 덩달아 기쁜 마음에 비싼 와인과 맛있는 안주를 예쁘게 준비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둘이서 몰래 축하주를 기울이자고 약속했던 남자는 퇴근 시간이 다 됐는데도 돌아오지 않았다.

걱정이 되어 연락해 보니 갑자기 급한 미팅이 생겨 늦는다고 했다.

문채아는 그 말에 속상한 마음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금방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는 혼자 술을 기울이며 안주를 먹어 치웠다.

그런데 술을 어느 정도 마신 후 쓰레기를 던지러 밖으로 나오려는데 정원 쪽에서 웬 여자가 박도윤의 목을 끌어안으며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박도윤은 여자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녀가 키스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두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문채아는 손에 든 쓰레기를 툭 하고 떨어트려 버렸고 그 소리를 들은 박도윤은 티 나게 몸을 움찔했다.

잠시 후, 문채아가 문을 완전히 열고 밖으로 뛰쳐나왔을 때 정원에는 박도윤의 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

문채아는 박도윤의 앞으로 다가가 방금 끌어안고 있던 여자는 누구냐고 추궁했다.

이에 박도윤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꿈이라도 꾼 거야? 나는 그냥 직원한테 집으로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인사만 건넸는데? 술 냄새나는 거 보니까 취해서 헛걸 봤나 보네. 다음부터는 취할 때까지 마시지 마. 알겠지?”

문채아는 당시 확실히 취한 상태이기도 했고 또 박도윤이라는 남자를 무조건적으로 믿었었기에 찝찝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순순히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그녀는 박도윤이 자신에게 상처를 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박도윤은 그때부터 그녀를 기만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이미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다.

문채아는 조금 촉촉해진 눈으로 강재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우리 헤어졌어요.”

“...확실해?”

강재혁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해일이 치듯 일렁거렸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약혼식까지 아직 3개월 남았어. 지금이라면 제지할 수 있어.”

애초에 두 사람은 정략결혼 느낌으로 이어진 관계였기에 약혼도 결혼도 박도윤과 강지유가 원한다고 뚝딱 성사되는 것이 아니었다.

가문에서 입김이 제일 센 강재혁이 엎으려고 들면 얼마든지 엎을 수 있었다.

문채아는 8살에 박씨 가문으로 들어갔다가 박도윤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만약 그녀의 사랑이 깃털처럼 가벼웠다면 3년간 아무도 모르는 비밀 연애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강재혁은 헤어졌다는 문채아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문채아는 강재혁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고 있는 듯 가볍게 웃었다.

“추태를 보여준 뒤라 신빙성이 조금 떨어졌을 수도 있겠지만 저 정말 홧김에 한 말 아니에요. 박도윤을 아주 많이 좋아했던 건 인정해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도윤 때문에 뭔가를 포기하는 것도 즐거웠고 기꺼웠어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감정이 쌍방향일 때 한해서지 일방적으로 사랑을 퍼줄 생각은 없어요. 혼자 노력하는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래서 완전히 끝내기로 했어요. 박도윤한테도 그렇게 말했고요.”

문채아는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남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추하게 매달리는 짓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강재혁도 그녀를 도와 강지유와 박도윤의 약혼을 엎을 필요가 없었다.

“더 이상 저한테 신경 써주지 않으셔도 돼요. 빚은 저를 그 집에서 데리고 나와준 거로 갚았다고 생각할게요. 솔직히 제가 강재혁 씨한테 대단한 걸 해준 것도 아니잖아요.”

문채아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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