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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Author: 천이설
“이리 와.”

강재혁은 문채아의 말에 조금의 지체도 없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그녀에게 답했다.

그의 답변과 함께 적막으로 가득 찼던 거실 안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곧 불안하게 떨리고 있던 문채아의 마음은 그의 말 한마디에 단번에 안정을 되찾았다.

문채아는 한 걸음 한 걸음 당차게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런데 강재혁의 옆에 도착한 후 이만 이 집에서 나가려는데 박도윤이 갑자기 쏜살같이 달려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다. 아니, 정확히는 강재혁의 앞에 멈춰 섰다.

“잠깐만요. 혹시 채아의 연락을 받고 여기로 온 겁니까?”

강재혁은 발걸음을 멈춘 후 눈썹을 살짝 끌어올린 채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긍정인지 아닌지 가늠할 수 없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박도윤은 문채아가 어릴 때의 일을 들먹이며 강재혁을 끌어들인 게 맞다고 이미 확신했다.

실제로도 그러했다.

아까 문영란이 강지유에게 사과하라며 찾아왔을 때 문채아는 저장해 두기만 하고 이제껏 연락 한번 한 적 없는 그 번호에 구조 문자를 보냈다.

문채아는 주먹을 말아쥔 채 눈도 깜빡이지 않고 박도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박도윤은 문채아 쪽으로는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보나 마나 강 대표님을 여기로 부르려고 되지도 않는 험담을 많이도 늘어놓았겠죠. 하지만 오늘 일은 문채아가 먼저 잘못한 겁니다. 그러니 한쪽 말만 듣고 오해하지 마시고...”

“문채아를 여기 두고 다시 나가라?”

강재혁이 박도윤의 말을 자르며 물었다.

“문채아한테 벌을 주기 위해 안달 난 집에 문채아를 혼자 내버려두고 나가라?”

“네.”

박도윤이 답했다.

“문채아는 박씨 가문의 일원이라 꼭 벌을 받아야 합니다. 지유 구두를 훼손한 것도 모자라 자기 엄마한테 할 말 못 할 말 구분 못 하고 막 해댔으니 교육을 해야죠. 그게 문채아를 도와주는 길입니다.”

박도윤은 잠시 말을 끊었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채아가 어릴 때 강 대표님을 도와준 것 때문에 여기까지 직접 걸음해 준 거 압니다. 하지만 오늘 일은 가문 내 일입니다. 그러니 끼어들지 말아 주세요.”

박씨 가문은 강씨 가문에 비하면 그저 작은 가문에 불과하지만 대외적으로는 똑같은 4대 명문 가문이고 또 해정 그룹의 대표로서 이렇게까지 구구절절 얘기했으니 박도윤의 체면을 봐줄 만도 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봐줘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강재혁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가만히 있다가 3초 정도 흐른 뒤에야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앞으로 천천히 나아가는 모습이 꼭 아무런 감정도 없는 로봇 같았다.

하지만 박도윤의 바로 앞에 멈춰 서서 건넨 말에는 감정이 여실히 담겨 있었다.

“너희 가문이 뭐라고 내가 네 말에 따라야 하지?”

강재혁의 자비 없는 한마디로 상황은 단번에 종료되었다.

...

문채아와 강재혁이 집에서 나간 후 남은 사람들은 저마다 뭐 씹은 얼굴로 가만히 있었다.

박도윤은 채찍을 너무 세게 쥔 나머지 가시에 손바닥이 다 찔리고 말았다. 치료 같은 건 받지 않았다. 그저 채찍을 멀리 던진 채 박진성 쪽으로 걸어갔다.

“채아가 이렇게까지 경위 없는 행동을 할 줄은 몰랐어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지유한테 한 버릇없는 행동도 지유 구두를 부숴버린 일도 절대 이대로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다시 집으로 돌아온 날,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줄 겁니다. 강 대표가 문채아한테 빚진 건 한 번뿐이니 강 대표가 저희 집안일에 간섭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박도윤의 말에 박진성은 강재혁이 떠난 곳을 유심히 바라보다 한참 뒤에야 다시 고개를 돌려 자신의 아들을 바라보았다.

“채아가 이 집에 자기 발로 다시 돌아올 거라고 확신하는 말투네?”

박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을 되찾고 나면 분명히 다시 돌아올 겁니다.”

이 집에는 그녀의 유일한 피붙이인 엄마도 있고 그도 있으니 그녀가 돌아오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문채아는 사람과의 관계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여자니까.

박진성은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채아가 돌아오면 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했던 대로 지유가 속상해한 만큼 꼭 벌을 줘야 할 거야. 지유 쪽은 네가 알아서 달래 줘. 요구하는 거 있으면 뭐든 들어주고.”

말을 마친 박진성은 문영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이 채아가 친딸이라는 이유로 무작정 감싸주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게 생각해. 혹시 하는 마음에 묻는 건데 내가 채아한테 너무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문영란은 강지유 일과 문채아의 말에 줄곧 가슴이 답답한 채로 있었다가 남편의 다정한 말투에 금방 마음이 녹아서는 잡념을 떨쳐버렸다.

그녀는 눈이 빨개진 채 박진성의 팔을 잡으며 애교 부리듯 말했다.

“당연히 아니죠. 오늘 일은 채아가 잘못한 게 맞잖아요. 구두를 부숴버린 것 때문에 혼사에 지장이라도 갔으면 어쩔 뻔했어요. 채아가 돌아오면 내가 제일 먼저 혼내줄 거예요!”

박진성은 진정하라는 듯 그녀의 손을 토닥였다.

“됐어. 화내지 마. 그리고 나중에 채아가 벌을 받게 되면 지유도 화가 풀릴 거야.”

“네, 알겠어요. 이따 방으로 돌아가면 채아한테 전화해서 얼른 집으로 튀어오라고 할게요.”

문영란은 그렇게 말하며 박진성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박도윤은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5분 정도 흐른 뒤에야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아까 문채아와 강재혁이 떠난 후 신발이 없어진 강지유는 새 신발로 갈아신기 위해 도우미와 함께 드레스룸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박도윤이 드레스룸 앞에 도착해 문을 열자마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박도윤의 오른쪽 발 옆에 떨어진 건 다름 아닌 레오나 브랜드의 신상 구두였다.

박도윤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강지유를 바라보며 물었다.

“왜, 새 구두 마음에 안 들어?”

강지유는 평생을 떠받들려진 채로 살아온 여자였기에 박도윤은 기사에서 새로운 구두를 사 오라고 시켰다.

강지유는 박도윤의 얼굴을 보자마자 바로 분노를 쏟아냈다.

“이건 네가 직접 사다 준 게 아니잖아. 이게 다 문채아 때문이야. 문채아가 아니었으면 그 구두를 버리는 일도 없을 텐데! 더 화가 나는 건 문채아가 강재혁 그 인간을 여기로 불렀다는 거야!”

강지유는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하며 시선 한번 주지 않았던 강재혁을 떠올리며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감히 내가 있는 곳에 강재혁을 불러? 문채아 걔, 분명 일부러 부른 걸 거야. 자기도 기댈 수 있는 남자가 있다는 걸 우리한테 보여주려고!”

박도윤은 허리를 숙인 채 바닥에 떨어진 구두를 주우려다가 움직임을 우뚝 멈췄다.

‘문채아한테 기댈 수 있는 남자가 있다고?’

박도윤은 허리를 바로 세운 후 조금 차가워진 눈빛으로 강지유를 바라보았다.

“강재혁은 그저 빚을 갚으러 온 것뿐이야. 문채아한테 남자는 없어.”

“그거야 모를 일이지. 생긴 것부터가 남자들이 잘 꼬일 얼굴이잖아.”

강지유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리고 빚은 무슨. 둘이 사람들 눈을 피해 만나기 위한 구실일지 누가 알아?”

“빚이 있는 건 사실이야. 괜한 억측 하지 마.”

박도윤은 단호하게 말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강지유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

“오늘 채아 때문에 많이 속상했지? 네 기분이 풀릴 수 있게 내일 하루는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진짜? 그럼 내일 하루 내 비서가 돼줘! 너랑 같이 출근하고 또 너랑 같이 퇴근할 거야.”

강지유는 박도윤의 말과 행동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얼른 그의 품으로 안겼다.

박도윤은 흔쾌히 알겠다고 하며 강지유가 멋대로 안을 수 있게 가만히 내버려두었다. 두 손을 허벅지 옆에 둔 채로 말이다.

“하지만 확실히 말해두겠는데 나는 이번 일 이대로 넘어갈 생각 없어. 문채아가 나한테 한 짓을 반드시 갚아주고 말 거야. 오해가 풀렸는데도 나한테 그딴 식으로 나왔잖아.”

“응, 당연하지.”

박도윤은 강지유가 어떤 성격의 여자인지 잘 알고 있기에 확실하게 얘기했다.

“문채아가 돌아오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벌을 줄 거야.”

“하지만 문채아가 만약 영영 집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어떡하지?”

강지유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러자 박도윤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저었다.

“문채아는 절대 날 두고 못 떠나.”

‘문채아는 내가 곁에 있어야만 사는 여자니까.’

“응? 방금 뭐라고 했어?”

“아무것도 아니야.”

박도윤이 다정하게 미소를 지었다.

“나머지 일은 문채아가 돌아오면 다시 얘기해.”

“안 돼. 그래서는 내 기분이 풀릴 것 같지 않아. 오늘 뭐라도 해야겠어!”

강지유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말하다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오른 듯 얼른 고개를 들어 박도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귀엽기도 하고 또 악마 같기도 한 표정으로 물었다.

“도윤이 너는 내가 뭘 해도 날 이해하고 내 편이 되어줄 거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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