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끼이익, 묵직한 쇠 밸브가 완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소리와 함께 배관을 흔들던 날카로운 소음이 멎었다.
"이제 수압 정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싱크대 하부장도 더 이상 물 안 샐 겁니다."
태건이 도구를 챙겨 들고 보일러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벽에 기대어 겨우 숨을 고르던 은수는 붉게 달아오른 뺨을 감추려 연신 마른세수를 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좁은 밀실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주방으로 나온 공기는 여전히 태건의 묵직한 체온과 서늘한 잔향으로 짙게 물들어 있었다.
태건은 싱크대 주변에 떨어진 부품 찌꺼기와 먼지를 챙겨온 마른 천으로 말끔히 닦아냈다. 그의 손길은 거칠고 단단해 보이면서도 놀라울 만큼 섬세하고 정갈했다. 남편 진우가 어지럽히고 폭언으로 짓밟고 간 자리를, 낯선 남자가 묵묵히 원래대로 치유해 놓고 있었다.
"수리비는 관리사무소 지정 하자보수 무상 기간이라 따로 청구되지 않습니다."
태건이 공구 가방의 지퍼를 채우고 허리를 폈다. 단정하게 정돈된 싱크대 위로 그가 주머니에서 꺼낸 검은색 명함 한 장이 놓였다.
"또 물이 새거나, 문이 삐걱거리거나…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연락하십시오."
그의 시선이 은수의 눈에 다시 한번 묵직하게 머물렀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단순한 영업용 멘트가 아니라는 것을 은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 말은 폭력과 고립 속에 방치된 은수를 향해 던진 조용하지만 위험한 닻이었다.
"…감사합니다. 조심히 가세요."
은수가 가까스로 목소리를 쥐어짜 내어 인사했다. 태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뒤 현관으로 향했다.
철컥.
현관문이 열리고 복도의 밝은 햇살이 거실 바닥을 잠시 비추었다가, 문이 닫히며 다시 무거운 정적이 집안을 집어삼켰다. 남자가 떠나간 집. 은수는 멍하니 닫힌 현관문을 바라보며 홀로 서 있었다.
분명 남편이 출근하고 혼자 남아 있던 익숙한 공간이었지만, 공기의 무게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물비린내가 사라진 자리에는 태건이 남기고 간 은은한 비누 향과 희미한 기계 기름 냄새가 흩어지지 않고 맴돌았다.
스르륵.
은수는 싱크대 조리대 앞에 다가가 주저앉듯 기댔다. 상판 위에 얌전히 놓여 있는 검은색 명함. 은수는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명함의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방치하고 억누르면 결국 속부터 썩어서 터집니다.'
'제가 손봐드리겠습니다.'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도는 태건의 목소리에 심장이 제멋대로 뛰기 시작했다. 은수는 자신의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진우가 남긴 시퍼런 멍 자국 위로, 조금 전 태건의 거친 손가락이 스쳤던 화끈한 감각이 여전히 살갗을 파고들고 있었다.
진우의 손길은 숨을 막히게 하는 얼음장 같은 족쇄였지만, 태건의 시선과 손길은 메말라 죽어가던 감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뜨거운 불씨였다. 은수는 천천히 화장실로 걸어가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매일 공포와 무기력에 젖어 초점 없이 흔들리던 주부 대신, 뺨을 붉힌 채 낯선 갈망으로 눈을 빛내고 있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나… 살아있었구나.'
억눌려 있던 심장의 고동이 온몸의 혈관을 타고 거세게 박동했다. 그 순간, 거실 탁자 위에 놓인 은수의 휴대폰 화면이 번쩍이며 신경질적인 진동음이 울렸다. 남편 진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이번 주 본부장님 댁 부부동반 모임 있으니까 단정하게 차려입고 나와. 촌스럽게 굴어서 내 얼굴에 똥칠할 생각 말고 처신 똑바로 해.]
짧은 문자 한 통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현실이 서늘하게 들이닥쳤다. 여전히 은수를 제 소유물이자 장식품으로만 여기는 남편의 잔인한 통제.
그러나 이전처럼 숨이 턱 막히며 무기력하게 떨리던 공포는 찾아오지 않았다. 대신 은수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차갑고 날카로운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은수는 휴대폰을 뒤집어엎어 놓았다. 한동안 식탁 위의 명함과 검은 화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저녁 모임에 맞춰 화장을 고쳐야 했지만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의 명령은 익숙했으나, 오늘만큼은 그 문장보다 태건이 남긴 짧은 질문이 더 선명했다. 손목을 감춘 채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견디기 싫었다.
은수는 주방으로 향해 싱크대 서랍을 열었다.
진우가 공구를 찾을 때 쓰라며 던져두었던 몽키 스패너가 어둠 속에서 은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은수는 손잡이 위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쇳덩이의 감촉이 손바닥에 스며들었다.
'완벽하게 고쳐진 집.'
그렇다면, 다시 고장 나면 어떻게 될까. 손끝은 한동안 스패너 위에 머물렀다. 아직 꺼내 들지는 못했지만, 한 번 떠오른 생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은수는 서랍을 닫은 뒤에도 하부장 안쪽을 오래 바라보았다. 태건을 다시 부를 수 있다는 가능성이, 금지된 출구처럼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났다.
달콤한 장미 꽃향기와 그윽한 와인의 풍미가 은은한 거실 조명 아래 아늑하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은수가 품에 안고 있던 화사한 꽃다발을 테이블 중앙 유리 화병에 정성스레 꽂아 넣자, 태건이 등 뒤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남자의 넓고 단단한 두 팔이 은수의 잘록한 허리를 조심스럽게 감싸 안으며 자신의 품으로 다정히 끌어당겼다.고급 수트 원단 너머로 생생하게 전해지는 태건의 두터운 흉근과 힘찬 심장 박동이 은수의 등줄기를 타고 포근한 온기로 스며들었다. 태건은 은수의 가녀린 목덜미에 턱을 가만히 묻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집이 정말 좋습니다. 은수 씨를 닮아서 포근하고, 단단하고…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습니다.""태건 씨가 조명 하나까지 수평을 맞춰주고, 현관 빗장도 튼튼하게 손봐준 덕분이에요. 제 인생에서 이렇게 온전하고 편안하게 숨 쉬어본 적이 없어요."은수는 몸을 돌려 남자의 단단한 목덜미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짙은 눈썹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은수만을 오롯이 담고 있는 남자의 짙은 눈동자 속에는 숨길 수 없는 격정적인 열정과 무한한 신뢰가 일렁이고 있었다. 태건의 거칠고 다부진 손바닥이 은수의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처음 그 집에 들어섰던 날을 지금도 매일 밤 생생하게 기억합니다."남자의 나직한 목소리가 은수의 귓가를 촉촉하게 적셨다."물비린내 나는 주방에서 시퍼렇게 멍든 손목을 황급히 감추던 당신의 눈빛이… 도저히 잊히지 않았습니다.""태건 씨….""어떻게든 위태롭게 버티던 당신이 그 집에서 나올 때 곁을 지키고 싶었습니다. 당신이 스패너로 일부러 나사를 풀어 나를 다시 불렀다는 걸 알아챘을 때, 내 심장이 얼마나 미친 듯이 요동쳤는지 모릅니다."태건의 묵직한 고백에 은수의 눈가에서 맑고 투명한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지나간 3년의 지옥 같았던 고통에 대한 슬픔이 아니었다. 자신의 처절했던 비명을 놓치지 않고 지옥의 문을 부수며 달려와 준 단 한 사람을 향한 벅찬 사랑과 감사의 눈물이었다.태건은 은수의
붉은 노을이 서울숲 너머로 길게 드리워지며 한강 물결을 황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은수는 발코니 통유리창 앞에 가만히 서서 차분하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취향과 손길로 가꾼 거실에는 은은한 화이트 재스민 디퓨저 향기가 포근하게 감돌고 있었다.진우의 폭언과 숨 막히는 가스라이팅으로 얼룩졌던 3년의 지옥 같았던 시간은 이제 아득한 전생의 악몽처럼 아물어가고 있었다. 스스로 법정에 당당하게 서서 진우의 추악한 불륜과 회사 비리를 낱낱이 파헤치고, 정당하게 쟁취해 낸 위자료와 재산 분할금으로 마련한 은수만의 온전한 성채였다.집안 그 어디를 둘러보아도 더 이상 억지로 나사를 풀어헤친 싱크대도, 래치를 고장 낸 방문도 없었다.물비린내 대신 상쾌한 가을바람이 창문을 스치고, 손끝이 닿는 모든 곳이 완벽하고 견고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은수는 거실 원목 테이블 위에 정갈하게 차려진 저녁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손수 정성껏 구워낸 스테이크와 신선한 샐러드 접시 위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스한 온기, 그리고 투명하게 빛나는 크리스탈 와인 잔 두 개.태건과 약속한 오후 7시까지 5분 남아 있었다.'이제 이 집엔 하자가 하나도 없는데, 무슨 핑계로 찾아오실 건가요?'이사하던 날, 장난기가 섞인 은수의 물음에 남자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짙은 미소를 지으며 나직하게 속삭였었다.'고장 난 곳이 없으면, 은수 씨 보러 온전한 남자로 매일 퇴근하면 됩니다.'남자의 그 뜨겁고 단단한 음성이 지난 며칠 동안 은수의 귓가에 맴돌며 심장을 쉼 없이 두근거리게 만들고 있었다. 쿵, 쿵- 거세게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가라앉히며 은수가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니트 원피스의 옷매무새를 가듬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딩동-! 딩동-! 고요하고 적막하던 거실에 맑고 청아한 초인종 소리가 울려 퍼졌다.과거 도망칠 곳 없이 공포에 질리게 만들던 진우의 난폭한 도어록 소리가 아니었다. 위태로운 일탈을 꿈꾸며 손끝을 덜덜 떨던 초조하고 불안한 긴장감의 소리도
통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오는 찬란한 정오의 햇살이 화사한 밝은 원목 바닥을 황금빛으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서울숲 인근, 은수가 자신의 이름 석 자로 당당하게 계약한 남향 신축 아파트 12층.탁 트인 통유리창 너머로 푸르른 나무들의 물결과 잔잔하게 흐르는 도심의 전경이 한눈에 파노라마처럼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진우의 눈치를 보며 매일 숨죽이던 어둡고 음침했던 그 집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눈부신 온기와 맑은 공기였다."하…… 정말 좋다."은수는 바람에 하늘거리는 얇은 화이트 린넨 커튼을 부드럽게 젖히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오직 자신의 의지와 스스로 쟁취해 낸 위자료와 정당한 몫으로 마련한 온전한 자신만의 첫 보금자리였다. 가슴 한구석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바윗덩이가 말끔히 녹아내리며, 전신으로 차오르는 벅찬 자유와 해방감에 입가에 절로 맑고 투명한 미소가 번졌다."은수 씨. 거실 중앙 조명 수평 완벽하게 맞췄습니다."사다리 위에서 전동 드라이버를 든 태건이 은수를 내려다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삿짐 정리를 모두 마친 뒤 셔츠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붙인 남자의 팔뚝 위로 단단한 힘줄과 구릿빛 근육이 멋스럽게 도드라져 있었다. 남자는 은수가 직접 고른 펜던트 조명을 천장 브래킷에 체결한 뒤, 사다리를 한 칸씩 밟아 바닥으로 내려왔다.경쾌한 착지음과 함께 다가온 태건의 몸에서 건강한 땀 냄새와 은은한 시트러스 비누 향이 기분 좋게 번져왔다. 태건이 벽면의 터치 스위치를 딸깍 올리자, 따뜻한 주백색 조명이 거실을 아늑하고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빛이 은수 씨를 닮아서 참 따뜻합니다."태건의 나직하고 묵직한 찬사에 은수의 뺨이 복숭앗빛으로 붉게 물들었다."태건 씨가 아침부터 무거운 가구 배치에 조명 설치까지 다 도와준 덕분이에요. 혼자였으면 엄두도 못 냈을 텐데.""내가 하자보수 전문 기사 아닙니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고객님의 새 집인데, 볼트 하나도 어긋나지 않게 완벽하게 시공해 드려야죠."태건은
커다란 갈색 이삿짐 상자들이 거실 한가운데에 탑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서랍마다 켜켜이 묵어 있던 3년간의 지옥 같았던 흔적들이 하나둘씩 분리수거 비닐과 종이 상자 속으로 미련 없이 던져졌다. 남편 진우가 매일같이 옷매무새와 주름 하나를 꼬투리 잡으며 폭언을 퍼붓던 안방 붙박이장도, 생활비 10만 원을 초과했다며 손목을 비틀던 대리석 식탁 위도 이제는 하얗게 먼지만이 내려앉아 있었다.화려한 인테리어로 치장되어 있었지만, 햇빛 한 줌 제대로 들지 않아 마치 시체처럼 차갑고 습하게 가라앉아 있던 집. 은수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에 우두커니 서서, 천천히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더 이상 코끝을 찌르며 목을 옥죄던 서늘한 곰팡이 냄새도, 진우의 역겨운 술 냄새와 상간녀의 독한 인공 향수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3년 동안 자신을 옥죄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 마침내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 기분이었다."은수 씨. 무거운 가구랑 큰 짐들은 제가 다 트럭 적재함에 실어뒀습니다."등 뒤에서 낮고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정한 회색 맨투맨 티셔츠에 짙은 카고 바지 차림의 태건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이마를 소매로 훔치며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남자의 탄탄한 가슴과 넓은 어깨에서 뿜어져 나오는 건강하고 뜨거운 열기, 그리고 언제나 은수의 얼어붙은 마음을 차분하게 어루만져 주는 쌉싸름하고 짙은 비누 향이 휑한 거실을 따스하게 채웠다.태건은 은수가 쥐고 있던 무거운 테이프 커터기를 자연스럽게 건네받으며, 그녀의 가녀린 손을 커다란 손바닥으로 다정하게 감싸 쥐었다."이제 주방 쪽에 작은 상자 하나만 정리하면 끝납니다. 서두르지 마시고 천천히 챙기십시오.""고마워요, 태건 씨. 오늘 혼자였으면 이 무거운 짐들을 어쩌지 못하고 하루 종일 쩔쩔맸을 텐데…….""내가 은수 씨 곁에 있는데 왜 혼자 고생을 합니까. 당신 곁을 지키고 돕는 건 당연히 내 몫입니다."남자의 거친 엄지손가락이 은수의 부드러운 손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투박하지만 세상 그 무엇보다 든
그로부터 7주 뒤.서울가정법원 제3가사조정실 앞 복도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복도 끝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양손에 굵은 포승줄과 은빛 수갑을 찬 진우가 교도관 두 명의 삼엄한 호송을 받으며 걸어 나왔다. 7주 사이에 십 년은 늙어버린 듯 퀭하게 파인 볼과 핏발 선 눈동자, 잿빛 수의 차림. 한때 대한민국 굴지의 대기업에서 승승장구하며 오만하게 턱을 치켜들던 남자의 잔재는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진우는 조정실 문 앞에 서 있는 은수를 발견하자마자 핏발 선 눈으로 달려들 듯 발악했다."김은수! 너… 너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뻔뻔하게 얼굴을 들이밀어? 당장 고소 취하하고 합의서 써! 안 그러면 나 진짜 너 가만 안 둬!"교도관들이 진우의 어깨를 거칠게 짓누르며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당사자, 조용히 하세요. 한 번만 더 상대방을 위협하면 즉시 분리 조치합니다."은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차가운 시선으로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다부진 체격의 태건이 그림자처럼 버텨 서서 서늘한 기세로 진우의 시야를 완전히 차단하고 있었다. 태건의 짙은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벌한 위압감에 진우는 더 이상 입을 뻥긋하지 못한 채 이를 갈며 고개를 숙였다.덜컥-.조정실 문이 열리고, 조정위원과 양측 대리인이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 진우 측 대리인이 굳은 얼굴로 서류철을 뒤적였다."조정위원님, 피고 강진우는 현재 구속 상태이고 직위해제됐으며 재산 상당 부분이 가압류돼 있습니다. 혼인 파탄의 책임은 통감하나, 결혼 전 형성된 특유재산과 피고의 경제적 기여도를 감안하여 아파트 소유권과 위자료 액수는 대폭 감액되어야 합니다."비루하고 군색한 변명이었다. 그 순간, 은수 측 대리인이 두툼한 증거 서류철을 조정위원의 테이블 위에 탁 소리 나게 올려놓았다."터무니없는 주장입니다. 피고 강진우는 혼인 기간 내내 원고에게 생활비를 극도로 제한하며 상습적인 폭언과 가정폭력을 일삼았습니다. 더욱이 원고의 명의를 도용해 거액의 대출을 받아 상
체포 이틀 뒤 새벽, 관할 경찰서 유치장의 차가운 쇠창살 너머로 습한 공기가 스며들고 있었다.구속 전 피의자 심문을 몇 시간 앞둔 진우는 헝클어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바닥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대기업 최연소 임원 타이틀을 달고 수억 원대 연봉과 외제차를 굴리며 아내를 발밑에 두고 짓밟던 제왕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땀과 눈물에 찌든 명품 와이셔츠는 단추가 뜯겨 나가 있었고, 손목에는 체포 과정에서 수갑이 눌렀던 붉은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강진우 씨, 변호인 접견입니다."유치장 담당 경찰관의 부름에 진우는 비틀거리며 접견실로 끌려갔다. 유리창 너머에 앉아 있는 선임 변호사의 얼굴은 흙빛으로 굳어 있었다."변호사님! 영장 기각시켜서 나가게 할 수 있는 거죠? 우리 집안이랑 회사 법무팀에 연락은 취했습니까?"진우가 유리창에 매달려 침을 튀기며 애원하자, 변호사는 한숨을 길게 내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상황이 최악입니다, 강 상무님. 아니, 강진우 씨."변호사가 서류 가방에서 꺼내든 온라인 기사 출력물과 회사 공문 사본이 차가운 유리창 앞에 맞닿았다.'대기업 임원, 12억 원대 법인카드 횡령 및 하청업체 리베이트 비자금 조성 혐의 구속영장 청구.''가정폭력 및 특수폭행 현행범 체포… 사측, 즉각 직위해제 및 징계·해임 절차 착수.'사내 인트라넷에는 실명으로 직위해제 공지가 떴고, 경제지에는 대기업 임원이라는 직함과 혐의가 빠르게 퍼지고 있었다."회… 회사에서 날 잘라요? 내가 회사를 위해 일한 게 몇 년인데!""본사 감사팀에 접수된 제보 파일이 너무 완벽합니다. 차명 계좌 흐름도, 페이퍼컴퍼니 계약서, 심지어 상간녀에게 사준 오피스텔 분양 대금 입금 내역까지 단 1원의 오차도 없이 맞물려 있습니다. 회사에서는 횡령금 반환 청구와 관련 자산 가압류 신청을 준비하고 있습니다."진우의 동공이 거칠게 흔들리고 숨이 턱 막혀왔다."그럼 수연이는요? 수연이가 날 위해 증언해 주기로 했잖아요! 그 오피스텔도 지 명